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03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김주일 외 옮김 / 나남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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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셀라스의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에서 추천한 책입니다. 쾌락주의학파라고 분류를 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자세한 문헌자료로 꼽히고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고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은 서양철학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 85명의 철학적 성향과 성과를 정리해놓았습니다. 이 책을 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대략 서기 2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활동했던 인물로 추정된다는 것 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4세기 무렵 활동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소파테르의 저서에서 인용되었다는 점과 이 책에 언급된 85인의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활동한 철학자가 2세기 무렵의 회의주의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라는 점을 근거로 추정한 것입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서는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두 권으로 나누었습니다. 1권은 원저의 1권에서 6권까지, 2권에서는 7권에서 10권까지를 담았습니다. 원저의 1권에서는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무렵에 활동한 현인 11명을 다루었습니다.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에서 다룬 탈레스, 솔론, 킬론, 피타코스, 비아스,클레오블로스, 페리안드로서 등 7현인을 포함하여 아나카르시스, 뮈손, 에피메니데스, 페레퀴데스가 포함됩니다. 그리스 철학사의 초기 철학자들인 만큼 학파를 이루기보다는 단독적으로 활동했던 시기였다고 하겠습니다.


2권에서는 소()소크라테스 학파라고도 하는 이오니아학파의 17명의 철학자들, 3권에서는 플라톤을, 4권에서는 플라톤의 제자들인 아카데미학파의 10명의 철학자들, 5권에서는 소요학파의 6명의 철학자들, 6권에서는 견유학파라고도 하는 퀴니코스학파의 9명의 철학자들, 7권에서는 스토아학파의 7명의 철학자들, 8권에서는 피타고라스학파의 8명의 철학자들, 9권에서는 학파를 형성하지 않고 활동한 12명의 철학자들, 마지막 10권에서는 에피쿠로스를 다루었습니다. 이오니아학파의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스승인 아르켈라오스로부터 플라톤을 제외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포함됩니다. 소요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뤼케이온 학원의 제자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문체로 보아 철학서라기보다는 문학서나 역사서에 가까워서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내용는 철학자의 가문이나 학파의 기원, 교육이력이나 철학 훈련방법, 여행다닌 곳, 학파가 전승되거나 건립된 장소, 철학자들의 성품이나 기질, 생애의 주요 사건, 죽음에 관한 일화, 저작목록, 학설, 유언이나 편지 등의 문서가 소개됩니다. 요즘의 개념으로 보면 고대철학자에 대한 종설을 쓴 셈인데 전산화된 자료를 분석하여 작성하는 요즈음의 방식으로도 쉽지 않을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철학자들이 쓴 책들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태반일 듯합니다. 따라서 여기 언급된 내용들이 중요한 사료가 되는 셈입니다.


존 셀라스의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에서 언급한 것처럼 흔히 쾌락주의로 치부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자료라는 생각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건강과 영혼의 평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모든 행위는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흔히 방종한 삶이 쾌락주의라고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이들은 단순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식사를 즐기는 한편 기회가 있을 때는 사치스러운 성찬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자들이 기상학이나 천체현상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관련된 현상들이 두려움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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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들 - 존 버거의 예술론
존 버거 지음, 톰 오버턴 엮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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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기록물 작가, 사회비평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존 버거를 처음 만난 것소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이어서 <본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초상들>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글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초상들>을 엮었던 톰 오버턴은 또 하나의 존 버거의 글모음 <풍경들>을 엮었습니다. 톰 오버턴은 서머싯 하우스와 화이트채플 갤러리의 학예사를 역임했는데, 이 책을 엮을 무렵에는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기록물 학예사로 근무하면서 대영도서관이 소장한 존 버거의 기록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한 끝에 <초상들><풍경들>을 엮었다고 합니다. <초상들>은 존 버거가 여러 예술가를 논하면서 취한 다양한 접근법들을 모은 것입니다.


<풍경들>다시 상상하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로의 초대장이라고 성격을 규정하였습니다. <풍경들>1부에서는 버거의 사상을 형성한 개인들에 대하여 알려주는 글들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안탈이나 라파엘 등은 예술비평가의 부류에 포함되지만 브레히트나 벤야민 등은 이런 부류라고 볼 수 없습니다. 1부에는 또한 예술에 대한 글쓰기가 갈 수 있는 한계와 버거가 자신의 화가적 시선에 이끌려 이야기꾼의길로 가게 된 경로에 대하여도 설명합니다. 1부가 일종의 개요라고 한다면 2부는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풍경(landscape)이라는 단어는 글쓰기의 지평이 넓어진 데 대한 기록을 의미하였다고 합니다. 1590년 무렵 네덜란드어에서 차용한 란츠합(landschap), 란츠킵(lantskip) 등이 쓰여지다가, 1605년에서야 landscape(풍경)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단어들은 계곡과 구릉과 언덕과 들판을 묘사하는 회화 영역에 특화된 전문용어였습니다. 1630년대에 이르러 존 밀턴은 명랑한 사람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면밀한 내 눈이 새로운 기쁨을 찾았네 / 주변의풍경(lantskip)을 살피는 사이에, / 황갈색 wkselkx, 회색 휴경지 / 새 떼가 모이를 쪼며 돌아다는 곳.(12)”


1부에서 다룬 사람들은 플데릭 안탈, 베르톨트 브레히트, 막스 라파엘, 발터 베냐민, 에른스트 피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롤랑 바르트, 제임스 조이스, 로자 룩셈브르크 등, 예술비평가들, 극작가, 철학자,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내로라 하는 분들입니다.

관찰의 기술에 관해 덴마크 노동자 배우들에게 전함이라는 제목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글을 애냐보스토과 함께 옮긴 글에서 기억할만한 대목을 만났습니다. “낮은 벤치에 앉은 / 관객들이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 일부는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 여러분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고. / 여러분은 세상을 보여 줘야 합니다.(64-65)” 무대에 선 배우들에게 관객들이 요구하는 바는 배우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이라는 점을 설파한 것입니다.


발터 베냐민에 대한 글에서 인용한 프루스트에 대한 베냐민의 생각도 갈무리해두고 싶은 대목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 생애에 최대한의 의식을 부과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다. 프루스트의 방식인 반영이 아니라 현실화다. 그는 우리 누구도 자신에게 예정된 진정한 드라마들을 살아 볼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는 통찰에 충문하다. 이것이 우리를 나이들게 한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우리 얼굴의 굵고 가는 주름들은 우리를 방문한 위대한 열정과 악덕과 통찰의 기록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들은, 집에 있지 않았고(89)”


존 버거의 책들을 읽으면서 난해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는데, 2부의 장소에 관한 열 가지 속보에서 그렇다. 나는 무엇보다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다.(298)”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조금 알 듯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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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전염병 - 왕실의 운명과 백성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흔적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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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한에서부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이 2년하고도 반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대륙의 끝에 붙어있는 한반도 역시 세계적인 감염병의 유행을 피해가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한반도에서는 어떤 종류의 전염병들이 유행을 해서 얼마나 피해를 입혔으며, 조정에서는 전염병의 유행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했는지 궁금하던 차에 만난 <우리 역사 속 전염병>입니다.


의학은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급속하게 발전해왔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은 과거의 질병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병명은 물론이고 증상에 대한 기술이 현대의학의 정의와 차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 속 전염병>에서도 이런 한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의 기획으로 출발한 이 책은 악병, 온역, 홍역, 천연두, 콜레라 등 시기별 전염병의 유행상황과 함께 이에 대한 조정의 대응, 허준, 유상과 같은 의원과 의녀 등 의료진의 활약 및 <동의보감><마과회통> 등 의학서 간행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6)”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기획의도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남아있는 자료들 가운데 전염병의 유행에 관한 자료들을 충분히 섭렵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왕조의 경우는 그나마 실록을 비롯하여 사대부들이 남긴 문헌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고려왕조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왕조의 경우는 남아있는 자료라 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진단법이나 치료법이 전염병은 힘없는 백성은 물론 왕후장상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 속 전염병>에서는 주로 왕실의 전염병 발생과 치료상황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전염병 등의 심각한 상황이라면 팔도에 장계를 내려 현황을 보고토록 하였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1750529일자 <영조실록>을 보면 여러도에서 역질로 사망한 자가 총 19,849명이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습니다(233). 전국 규모의 역질 발생현황자료로는 유일하게 인용된 것이고, 권역별 발생현황에 대하여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염병의 발생현황도 단편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편적으로 인용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의 대응체계에 대한 언급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왕족의 전염병 감염에 대하여는 내의원의 의원을 비롯하여 의녀가 나서서 치료에 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백성들의 전염병 확산데 대한 대응체계에 대한 언급이 분명치가 않습니다. 1730(영조6) 1월에 한양에 홍역이 크게 유행하여 5부의 사망자가 만 명 이상 발생하였을 때 영조는 근시를 보내 여제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고만 전합니다.


2부 전염병에 맞섰던 의료기관에서는 내의원, 혜민서, 활인서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는데, 전염병 치료를 전담했던 기관은 활인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성에서는 108-9가 살아난데 반하여 지방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각도마다 돌림병을 규휼하는 법이 <원육전><속육전>에 규정되어 있었지만 관리들이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분석하였습니다. 저자는 시대별 전염병의 발생현황과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어느 부서가 어떻게 활동을 하는지에 대하여 자료를 찾아서 제대로 설명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의원과 의녀제도에 대한 설명만 장황하고, 의원에 명하여 의서를 정리하도록 했다는 왕명이 전염병 관리에 얼마나 기여했을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전염병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왕조별 전염별 발생현황이나 대응체계, 그리고 그 효과 등을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이 되었어야 이 책의 기획의도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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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오늘의 젊은 문학 5
문지혁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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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라면 강을 쉽게 건너기 위하여 설치하는 구조물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얕은 개울물에 돌덩이를 놓아서 징검다리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깊은 물에도 다리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도로 위에도 다리를 놓아 건널목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다리는 일종의 장해물을 뛰어넘기 위한 구조물인 셈입니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를 골라든 것은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문지혁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모두 8개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다이버’, ‘서재’,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등 처음부터 이어지는 세 작품은 통합세기라고 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다이버는 시제도 미래일 뿐 아니라 무대 역시 지구가 아닌 인공행성입니다. 두 번째 작품 서재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역시 통합세기라고 하는 미래의 어느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통일된 지구는 누리망을 통하여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인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종이책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의 편향, 불균형, 독점을 옹호한 것으로 간주하고 엄벌에 처하는규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리망에 올려진 정보를 공유하고, 필요한 정보를 익히는 교육과정을 통하여 정부가 정한 직장에서 일을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개성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없는 세상입니다. 관련 규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처벌을 받고 그 가족 역시 삶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는 전체주의 체계인 것입니다. 전체주의 체제를 다룬 이야기에서는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가기 마련인 듯합니다.


서재에서 10만여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다가 끌려간 아버지가 남겨준 책에는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빈 책은 아버지이기도 하고,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빈 책을 채워가다 보면 내가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책에 부디 우리가 서로에게 서로의 다음 페이지가 되기를(93,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이라고 적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니 책을 써서 누군가 읽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앞 부분의 세 작품이 미래 시점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나머지 다섯 작품은 과거 시점의 이야기들입니다. 시점은 다르지만, 여덟 작품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상실입니다. 작가는 재난이라는 공통점을 짚었습니다만 재난을 통하여 사랑하는 사람 혹은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대응방식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실에 굴복하여 스스로를 내던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기억해두고 싶은 대목이 있기 마련입니다. ‘폭수의 경우는 주인공이 미시간대학에 근무하는 교수를 찾아가는 대목이 나옵니다. “차에서 내리자 줄지어 늘어선 나무 사이로 탁 트인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남한의 절반보다 크다는 미시간 호수였다.() 누군가 호수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바다라고 착각할 법한 푸른 물빛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나뭇잎이 타는 것 같은 가을 특유의 냄새가 났다.() 나는 나무 아래 서서 한동안 호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규칙적인 듯하면서도 불규칙한 물결의 반짝임은 세상의 시끄러운 소문이나 나의 불확실한 미래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반복됐다. 영원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영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 광경은 묘하게 감동적인 데가 있어서, 나는 인터뷰고 뭐고 그냥 여기 어디 벤치에 앉아 해가 다 저물 때까지 호수를 지켜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106)”


아일랜드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드리아 해의 북쪽 끝, 이스트라반도 부근에 있다는 붕어빵을 닮은 섬 가즈(Gaz)도 흥미로웠습니다. 정말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뉴욕의 맨하탄에 있다는 조지 워싱턴 브릿지를 걸어서 건넌다는 이야기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에서는 걸어서 다리를 건너 본 적이 있어?’라고 물어봅니다만, 생각해보니 저도 한강에 걸려있는 다리 몇 개를 걸어서 건너 본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강 양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강변도로를 따라 100km를 걸을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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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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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여러 책에서 소개된 바 있어 에밀 시오랑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폐허의 철학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그는 절망을 겪고 있는 사람을 어설피 위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절망을 절망 자체로 응시함으로써 절망을 넘어서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의 첫 번째 글 서정적인 너무나 서정적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끈질기고 두려운 생각을 의식 속에 두면 인간은 파멸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자신 속의 무언가를 구해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 속의 무언가를 잃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견딜 수 없는 상태와 인간을 괴롭히는 그 같은 집요한 생각들을 고백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 있다.(8)”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살고 있는 것은 끝없는 긴장을 객관화하면서 진정시켜주는 글쓰기 덕분이다. 창작은 죽음의 마수에서 우리를 일시적으로 구원한다.(14)”라는 글쓰기와 관련된 대목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우울, 고독, 슬픔, 죽음 등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천착하고 그 가운데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내려 노력한 것 같습니다.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요인들을 겪을 때는 세상이 답이 없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더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생각으로 고통을 견디다보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 잠 못 이루는 동물은 불면으로 고통 받는 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전체 동물 세계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잠을 자기 원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152)’라는 명제를 생각해보면 모든 동물은 신체의 요구에 따라 잠이 들 시간이 되면 잠을 자는데, 인간만이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잠들지 않는 유일한 동물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수면은 망각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삶의 비극, 그 뒤엉킴과 집요한 생각들은 잠자는 동안에 잊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수면은 기억을 완성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깨어있을 때 경험한 것들은 잠을 자는 동안 기억으로 정리된다고 알려져 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도 놀랍기만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오랑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던 한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의심을 품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망설였던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산 위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였다. 나는 예수가 바로 그 때 이름 없는 인간의 운명을 부러워했을 것이며, 할 수만 있었다면 이 땅에서 가장 외진 구석에 숨어서 아무도 자신에게 희망을 걸지도 속죄를 요구하지도 않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기독교 쪽에서 보면 황당할 수 있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시오랑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인색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에서는 내가 나 자신을 괴롭히든 고통스러워하든 혹은 뭔가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굳게 믿지만, 또한 동시에 나의 존재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느낀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게 하기 위하여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옮긴이는 죽음, 허무, 절망, 고독. 시오랑의 단상에서 늘 마주치는 이 단어들의 의미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 희망, 미래와 같은 기분 좋은 환상 대신에, 고통, 번민, 우수와 같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차가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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