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들 - 존 버거의 예술론
존 버거 지음, 톰 오버턴 엮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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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기록물 작가, 사회비평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존 버거를 처음 만난 것소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이어서 <본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초상들>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글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초상들>을 엮었던 톰 오버턴은 또 하나의 존 버거의 글모음 <풍경들>을 엮었습니다. 톰 오버턴은 서머싯 하우스와 화이트채플 갤러리의 학예사를 역임했는데, 이 책을 엮을 무렵에는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기록물 학예사로 근무하면서 대영도서관이 소장한 존 버거의 기록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한 끝에 <초상들><풍경들>을 엮었다고 합니다. <초상들>은 존 버거가 여러 예술가를 논하면서 취한 다양한 접근법들을 모은 것입니다.


<풍경들>다시 상상하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로의 초대장이라고 성격을 규정하였습니다. <풍경들>1부에서는 버거의 사상을 형성한 개인들에 대하여 알려주는 글들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안탈이나 라파엘 등은 예술비평가의 부류에 포함되지만 브레히트나 벤야민 등은 이런 부류라고 볼 수 없습니다. 1부에는 또한 예술에 대한 글쓰기가 갈 수 있는 한계와 버거가 자신의 화가적 시선에 이끌려 이야기꾼의길로 가게 된 경로에 대하여도 설명합니다. 1부가 일종의 개요라고 한다면 2부는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풍경(landscape)이라는 단어는 글쓰기의 지평이 넓어진 데 대한 기록을 의미하였다고 합니다. 1590년 무렵 네덜란드어에서 차용한 란츠합(landschap), 란츠킵(lantskip) 등이 쓰여지다가, 1605년에서야 landscape(풍경)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단어들은 계곡과 구릉과 언덕과 들판을 묘사하는 회화 영역에 특화된 전문용어였습니다. 1630년대에 이르러 존 밀턴은 명랑한 사람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면밀한 내 눈이 새로운 기쁨을 찾았네 / 주변의풍경(lantskip)을 살피는 사이에, / 황갈색 wkselkx, 회색 휴경지 / 새 떼가 모이를 쪼며 돌아다는 곳.(12)”


1부에서 다룬 사람들은 플데릭 안탈, 베르톨트 브레히트, 막스 라파엘, 발터 베냐민, 에른스트 피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롤랑 바르트, 제임스 조이스, 로자 룩셈브르크 등, 예술비평가들, 극작가, 철학자,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내로라 하는 분들입니다.

관찰의 기술에 관해 덴마크 노동자 배우들에게 전함이라는 제목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글을 애냐보스토과 함께 옮긴 글에서 기억할만한 대목을 만났습니다. “낮은 벤치에 앉은 / 관객들이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 일부는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 여러분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고. / 여러분은 세상을 보여 줘야 합니다.(64-65)” 무대에 선 배우들에게 관객들이 요구하는 바는 배우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이라는 점을 설파한 것입니다.


발터 베냐민에 대한 글에서 인용한 프루스트에 대한 베냐민의 생각도 갈무리해두고 싶은 대목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 생애에 최대한의 의식을 부과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다. 프루스트의 방식인 반영이 아니라 현실화다. 그는 우리 누구도 자신에게 예정된 진정한 드라마들을 살아 볼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는 통찰에 충문하다. 이것이 우리를 나이들게 한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우리 얼굴의 굵고 가는 주름들은 우리를 방문한 위대한 열정과 악덕과 통찰의 기록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들은, 집에 있지 않았고(89)”


존 버거의 책들을 읽으면서 난해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는데, 2부의 장소에 관한 열 가지 속보에서 그렇다. 나는 무엇보다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다.(298)”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조금 알 듯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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