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컴퍼니, 착한 회사가 세상을 바꾼다 - 기업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힘
로리 바시 외 지음, 퓨처디자이너스 옮김 / 틔움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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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대리점과 우유회사가 노예계약을 맺고 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 무렵 사시저널이 주최한 굿컴퍼니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150562).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회사(Healthy and Sustainable Company)”를 주제로 발표해주신 두 분의 연사의 강연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로사 전교수의 ‘평판경영’과 로리 바시박사의 ‘굿 컴퍼니’입니다. 두 분 모두 회사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개발하여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기업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부제가 달린 <굿 컴퍼니, 착한 회사가 세상을 바꾼다>는 로리 바시박사의 평가이론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익의 극대화가 기업활동의 목표가 되어왔지만, 이제는 소비자들이 기업을 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커지고 있다는 것인데, 저자들은 이를 ‘사회적 가치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회적 가치는 다양한 덕목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익을 내는 것이 비즈니스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밀튼 프리드먼의 주장에 더하여, 지속가능성에 대한 비전과 이윤을 사회로 환원하는 구체적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직원과 고객, 지역사회와 환경 등에 대한 모든 책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고용주, 판매자, 그리고 집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의 가치를 유지해야 하는데, 고용주로서의 사회적 가치란 직원을 존중하고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며, 판매자로서의 가치는 고객과 서로 윈-윈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고, 집사로서의 가치는 기업활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환경과 지역사회에 대한 선한 관리자로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에서는 이제 시작되고 있는 사회적 가치의 시대를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2부에서는 조직의 관점에서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그리고 3부에서는 착한 회사가 되기 위한 필수요소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사회적 가치의 미래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공개된 정보를 바탕으로 평가지표를 개발했는데, “포춘이 밝힌 기업 목록을 참고했고, 뉴스위크가 제공한 미국 500대 기업 순위를 바탕으로 녹색기준을 설정했다. 고객 서비스와 경험에 대한 자료는 리서치 기업인 더블유레이팅스의 정보를 활용했으며, 미국 기업들의 지속성을 잘 표현하는 다우존스 지속가능성지수와 글래스도어닷컴의 직원평가를 이용했다. CEO와 임원들에게 지불되는 과도한 보수, 그리고 정부나 기타 규제기관으로부터 부과된 큰 액수의 벌금 등은 나쁜 행위에 대한 증거자료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포춘 100대 기업에게 그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용들을 설명할 기회를 제공했고, 이를 반영했다.(35쪽)”고 설명했습니다.

 

저자들의 가설은 기업이 선한 행동을 하면 실적이 좋아진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착한회사지수는 고용주 등급, 판매자 등급 그리고 집사 등급으로 나누어 고안한 세부평가지표에 대하여 2부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이들 지표들을 종합화하는 구체적 방법까지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포춘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하여 종합점수를 내고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표별로 부여한 가중치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근거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또한 상호주의, 연결 지향성, 투명성, 균형, 그리고 용기 등 5가지 항목의 비정량적 특성을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도 구체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명한 경영컨설턴트 브루스 템킨이 <고객 경험의 6가지 법칙>에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다음 구절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고객의 경험은 직원의 경험에 좌우된다”. 흔히 ‘고객감동의 경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직원들이 고객을 감동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이 점은 로사 전교수의 <평판을 경영하라>를 리뷰하면서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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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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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진교수님은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11784>에서 “앙드레 지드와 프루스트를 연결하는 고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두 작가 모두 동성애자로 당시 터부시되고 소송감이 될 만한 행위를 각자의 작품에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출간한 <누벨 르뷔 프랑세즈>라는 문예지의 창간인이자 출판인이 앙드레 지드라는 사실이다.(202쪽)”라고 적었습니다. “지드는 (자신의 처녀작) <기쁨과 나날들>에서 후에 프루스트가 심혈을 기울여 쓰게 될 소설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다는 요지를 펼치고 있다.(216쪽)”고도 적었습니다만,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연배가 비슷한 지드의 작품을 인용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문학자 이성복교수님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지드의 <좁은문>을 분석한 글을 책으로 묶어 낸 것은 두 작품이 사랑이라는 환상의 발생과 진행, 쇠퇴와 소멸에 관한 총체적인 보고라고 할 만하기 때문이라고 서문에서 적고 있습니다. “상극하는 것들의 화해 혹은 상생하는 것들의 불화로 이루어진 그 몸의 자리를 밝히고, 스스로 그 몸으로 남는 것이 좋은 문학의 본성이라면 이 두 작품 속에서 분석되는 사랑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문학의 탁월한 길라잡이로 남을 것(6쪽)”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사랑은 믿음과 꿈, 욕망과 환상, 그리고 종국에슨 믿음의 소멸에 따르는 환멸로 귀결되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지드의 <좁은문>에서의 알리사의 사랑은 해석이 어려울 정도로 모순을 안고 있다고 하는데, 알리사의 숭고한 희생과 비장한 절대추구를 찬양하는 것이라는 해석과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이해 때문에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아가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라는 대조적인 해석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리사를 사랑한다는 제롬은 알리사의 속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끊임없이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좁은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기억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또한 그 떡갈나무들은 나에게 기억 속의 풍경들을 현실에서 찾는 일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를 보다 잘 이해하게 해주었는데, 그 풍경들의 매혹은 언제나 기억 자체로부터 오며, 감각을 통해서는 지각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전에 알았던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37쪽)”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요컨대 기억 속에 간직되거나 상상력에 의해 빚어진 내면의 실재들은 그것들을 매개한 현실의 대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38쪽)”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프루스트가 어느 시점에서 화자의 과거기억을 바탕으로 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처럼 지드 역시 화자의 추억을 되돌리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나는 내 추억들을 조금도 꾸밈없이 적어 보려고 한다. 설사 그 기억들이 곳곳에 조각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깁거나 잇기 위해 사실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대는 그런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추억들을 손질하려는 노력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데에서 찾기 원했던 마지막 즐거움마저 깨뜨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9쪽)” 제롬은 알리사나 알리사의 어머니를 각각 그녀들의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기억하는 편이 더 강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는 지금 그녀의 얼굴모습을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얼굴 윤곽이며 눈망울머저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무렵에 벌써 슬픔이 서린 듯 한 미소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그처럼 유별나게 눈과 떨어져서 올라붙은 눈썹의 선뿐이다.(20쪽)”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작품의 주인공의 사랑은 감각을 통해서 얻은 대상에 대한 믿음으로 사랑을 일구어내지만, 그 믿음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되지 못하고 결국은 신기루와 같은 환상으로 남고 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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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
이희봉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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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도 대단한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이면 어렸을 적 잠시 살던 시골 할머님 댁이 생각납니다. 야트막한 야산의 남쪽 자락 끝에 앉아 있는 집 앞으로 논이 널따랗게 펼쳐지는 곳입니다. 들로 나가는 길에서 슬쩍 빠져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걷다가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 담장너머로는 뒷산 비탈이 올려다 보이고 담장가에는 대봉 홍시가 열리는 감나무가 몇 그루 서있습니다. 대문 오른편으로 돼지우리를 돌아가면 할아버님께서 생전에 쓰셨다는 사랑채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크지 않은 마당을 가로 질러가면 안채가 앉아있는데, 안채를 돌아가면 좁다란 장독을 안은 뒤란이 나옵니다.

 

작은댁에서 집을 새로 지으면서 사라지고 없는 할머님 댁을 그려보는 이유는, 어렸을 적 추억을 되살려보려 하는 것도 있지만, 한여름에도 더위를 별로 느낄 수 없었던 안채에 대한 아련한 향수 때문입니다. 뒤란으로 나있는 작은 문을 열어두면 뒷산에 빼곡하게 들어선 소나무 사이를 지나 흘러드는 바람이 지금의 에어컨보다도 시원했습니다. 여름에도 뒤란은 늘 서늘해서 냉장고가 없는 불편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네 다른 집과 같은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멋은 없었지만 특히 여름에는 좋았다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서민들이 사는 초가집과는 달리 전통기와집에 담긴 멋과 풍류는 이상현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 http://blog.joins.com/yang412/13005057>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물도 세월의 흐름이 녹아져야 제 멋이 우러난다고 합니다. 요즈음에 새로 조성된 한옥마을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오래된 한옥마을에서 느껴지는 멋을 이상헌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옥에는 음악처럼 높낮이가 있어 끊임없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지붕 선이 리듬을 타고 추녀 끝에 걸리면, 벽면을 채운 재료들이 질감의 변화를 이끌며 흥을 돋운다. 한옥에서 시작한 율동감은 자연스럽게 마을로 이어진다. 가을이 봄처럼 화사한 도래마을이라면 율동감이 당연 도드라진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강한 율동감이 몸을 자극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흥겹다.”(이상현 지음,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 245쪽) 나무를 보나 숲을 보지 못하거나, 숲을 보나 나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고 하는데,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양수겹장의 심미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을에 집을 지을 때도 마을 전체와의 조화를 고려했다는 옛날 대목들이 큰 건물을 지을 때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궁금해집니다. 사실 우리의 고건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비슷해 보이는 모습의 집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지어졌을 것이란 생각에 별 관심 없이 스쳐 지나고 말았던 것이 전통 건물에 대하여 더 이상 가벼울 수 없는 저의 인식의 전부였습니다. 이런 인식을 새롭게 할 책을 만났습니다.

 

중앙대학교 건축학부의 이희봉교수님의 <한국 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입니다. 이희봉교수님은 건축역사와 이론을 전공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인류학을 공부하셔서 사물로서의 건축물에서 더 나아가 그 건축물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였는지까지 연구의 대상을 넓히고 있습니다. 이희봉교수님의 이런 철학은 앞서 소개한 이상현님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라 하겠습니다. “겉모습을 중시하는 다른 나라 건물과 달리 한옥은 사는 사람을 중시한다. 때문에 한옥을 제대로 보려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 집에 사는 사람처럼 대청에 올라 먼산바라기도 하고, 방에 앉아 머름(문턱보다 높은 창턱)에 팔을 얹고 마당도 내다봐야 한다.”(이상현 지음,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 211쪽)

 

이희봉교수님은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책은, 누정 건축 삼척 죽서루 책이다. 그러나 한편 죽서루 책은 아니다. 죽서루라는 자그마한 건물 하나를 가지고 온 세상을 보는 책이다.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서 있는 죽서루를 관광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층을 꿰뚫어 깊이 보는 책이다. 기존 보아오던 방식, 즉 문화재 안내판이나 학계의 방식을 뒤집는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건축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적 체험’이라는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죽서루에 관한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추론하여 나온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흔히 ‘관찰’하면 ‘본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힘이었던 ‘관찰’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유보하고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눈의 망막에 비치는 것을 ‘본다’고 한다. 보는 것 자체를 관찰이라 하지는 않는다. 망막의 상을 뇌가 인식하는 것을 지각(知覺)이라 한다. (…) 다음으로 지각한 것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28쪽)”고 적고, ‘보기→특성 파악하기→해석하여 의미찾기’가 되어야 전통건축의 답사가 완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아가 동양문화권에서 말하는 ‘본다’의 차원을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즉 최하등이라고 할 감각의 단계, 눈으로 보는 육안(肉眼), 그 위에 통찰의 아래 단계라 할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을 거쳐 지혜의 눈 혜안(慧眼)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대중들에게 우리 문화 답사를 유행시킨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달변의 문장력으로 대한민국에 남녀노소 유적답사를 유행시킨 공적은 높이 사지만, 베스트셀러 덕에 문화 교주가 될 만큼 영향력이 크지만, 또 대중 상대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겠지만 얄팍잡다한 흥미위주서술들이 대중을 오도하고 전문가들을 불편하게 만든다.(17쪽)”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단순히 죽서루를 답사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한국건축을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시작하는 글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죽서루 보기, 육안에서 심안을 거쳐 혜안으로 올라가고, 깊은 생각과 더불어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는 여행을 떠나보자.(31쪽)” 이런 의도는 목차에서도 드러나 있습니다. 건물을 감상하는 일이 단순하게 건축기술을 살피는 일을 넘어 생활공간으로서의 의미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먼저 죽서루를 가볍게 훑어보고, 동양건축에 심취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필라델피아와 피츠버그 사이의 깡촌마을 베어런(Bear Run)의 계곡에 지은 낙수장(Falling water)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낙수장이 두 개의 폭포 사이에 바위 위에 집을 앉혔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서루가 강원도 삼척시를 흐르는 오십천 절벽 위에 있는 바위 위에 앉힌 누각이라는 점에서 비교대상이 된다고 본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차이를 두었습니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집의 설계개념은 죽서루와 같다. 물이 낙수장은 폭포요, 죽서루는 절벽 밑의 깊은 소라는 점이 조금 다르다. 자연을 집으로 끌어들여 와 안팎공간이 상호 편입한다는 점은 똑같다. 그러나 라이트의 낙수장이 현대 건축가가 창의적 설계를 하여 잠깐 사용한 집이라는 점에 비하면 죽서루는 먼 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절벽 바위의 큰 스케일의 자연에서부터 집터의 미세 자연까지 구석구석 기운이 살아 있는 건축이다.(68쪽)”

 

이어서 죽서루의 모습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집터에 있는 바위를 있는 그대로 주춧돌로 이용하여 기둥의 밑면을 바위의 표면에 부합되도록 깎는 그랭이질을 적용하였다는 것이나 북쪽 진입로의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그대로 살려 마루로 파고든 모습 등을 보면 죽서루가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건축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 고건축에 무식한 저도 처음 다섯 칸 건물로 건축되었다가 후대에 남북으로 각각 한 칸씩 증축했다는 지금까지의 통설보다는 저자의 주장이 더 논리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까래, 대들보나 처마와 같이 몇 개의 친숙한 우리의 고건축용어를 넘어 주심도리, 외목도리, 살미, 첨차, 동귀틀, 장귀틀 등과 같은 전문용어가 생경스럽기는 하지만 죽서루는 물론 다른 고건축물의 답사를 통하여 얻은 사진들과 스케치들을 통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 아직 가보지 못한 죽서루의 상세한 부분까지도 눈으로 직접 보는 듯합니다. 죽서루는 삼척부사 이성조가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써 붙일 정도로 으뜸이 되는 누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생활공간으로서의 죽서루를 체험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만, 객사의 부속 건물로 건축되었던 만큼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죽서루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그리고 수덕사 대웅전 다음으로 4번째 쯤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최근에 고려 명종 때 시인 김극기(1148~1209)가 지은 죽서루에 대한 시가 발굴되어 건축연대를 끌어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庾樓夕月侵床下 滕閣朝雲起棟間(유루석월침상하 등각조운기동간; 누각의 저녁달은 누마루 아래로 스며들고, 물에 솟은 누각 아침 구름 마룻대에서 일어나네)(52쪽)” 이처럼 죽서루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 시를 짓는 장소로 꼽혀왔기 때문에 죽서루에 관한 시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는 정조와 숙종의 시도 있다고 합니다. 임금께서 이곳까지 올 수는 없었겠지만, 궁궐화공이 그려 올린 그림을 감상하고 느낌을 남긴 것이라고 합니다. 휘돌아드는 개울에 드리운 암벽과 그 위에 서 있는 죽서루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김홍도의 그림 ‘죽서루’ 뿐만 아니라 죽서루 아래 오십천에 떠있는 배까지 그린 겸재 정선의 ‘죽서루’와 강세황의 ‘죽서루’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죽서루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망한 고려의 수도 개성을 돌아본 심정을 읊은 야은 길재의 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를 인용하면서, 저자는 ‘건물에 당시 옛 사람을 집어넣어 그들의 삶 속에서 건축을 보아야만 그것이 건축을 보는 바른 역사’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삶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는, 즉 건축을 사물로 보는 경향은 실패한 근대건축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이 통일된 건축을 만들려했던 근대건축의 개념은 노이버그 슐츠가 건축에 현상학 철학을 접목하여 만든 건축현상학에 밀려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니우스 로치(Genius loci, 장소의 혼)’라는 개념에서 땅은 건축 설계 시 건축가 누구나 다 하는 대지분석의 단순한 분석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고 부질없는 인간이 짧은 시간 낙서하며 그 속에서 살다가 사라져가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죽서루가 바로 그런 정신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서루가 자리 잡은 바위 절벽은 오십천 전 구간에서 딱 한군데, 그러니까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바로 그 장소, 천지의 혼이 서린 경건한 생명체라는 해석인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 이전에 ‘이미 거기’에 존재해 있었고, 우리는 세상과 다시 원시적·직접적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세상은 사물로서의 대상이 아니며 ‘객관적 세계’란 없으며, 인간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의미의 세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시각으로 죽서루를 본 저자는 “죽서루는 하나의 물건덩어리가 아니라 나와 또 선현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의 세계에 존재한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또 과거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의 체험 속의 종합적·역사적 생명체(207쪽)”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역사유물을 답사(?)할 때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우리의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려 그 유물이 선조들의 삶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었는지를 종합적으로 감상하는 혜안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물론자의 죽서루’에서는 죽서루를 건축물이라는 사물로서 보아온 건축학자들의 시각에서 나온 통설들을 뒤엎는 저자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설명을 감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전해지는 다양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죽서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건축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의 문화다’는 철학을 가진 저자는 삼척 오십천 절벽 위에 세워진 죽서루를 통해서 한국의 고건축을 제대로 보는 법을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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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 개정판
무라카미 류 지음, 정윤아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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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골프코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368야드 파4 제2타; http://blog.yes24.com/document/7342072>를 읽으면서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붙드는 것이 참 힘들구나 싶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이 런던 히드루 공항에서 느낀 점을 적은 <공항에서 일주일을; http://blog.joins.com/yang412/13173813>과는 다른 무엇을 무라카미 류는 보고 들었을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공항에서>는 모두 일곱 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읽는 내내 작가의 속셈이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아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일곱 편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서 작가 후기를 읽고나서도 머릿속이 맑아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편집에 실린 이야기들은 크게 두 그룹이라고 합니다. 겐토샤(幻冬舍)에서 나오는 유학정보지에 실린, ‘술집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편의점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장소를 배경으로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술하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폐쇄성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출발. (…) 현대사회에서 ‘출발’의 의미는 폐쇄적이고 좀처럼 충실감을 얻을 수 없는 일본 사회로부터의 도피에서 찾아야 한다.(206-7쪽)”고 적었습니다.

 

‘역 앞에서’, ‘노래방에서’, ‘공항에서’ 그리고 ‘피로연장에서’ 등, 역시 어디에나 있는 네 가지 장소를 무대로 한 한편은 올 요미모노(讀物)에 연재했던 것들로 무언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합니다. “희망이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근대화가 진행되었던 과거에는 누구나 가난했지만, 희망만은 충만했는데, 모든 것이 다 있고, 무엇이든 넘쳐나는 지금 희망만큼은 없는 것 같다.(209쪽)”는 패러독스를 깨트려보고 싶었다는 것이지만, 역시 그 희망은 연기처럼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리뷰를 적으면서 이야기를 다시 훑어보니 저자의 의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편의점에서’의 예를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음향스튜디오에서 효과음을 채집하는 일을 했다는 주인공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작가는 편의점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마주치는 상황을 손에 잡힐 듯 그려냅니다. “가게 안은 또다시 빛으로 가득 차고, 나는 유리벽 너머로 지나가는 버스를 바라본다. 빛 속에서 승객들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 소리를 들어보니 한 사람은 딱딱한 굽이 달린 샌들을, 또 한사람은 가죽을 댄 낮은 펌프스를 신은 것 같다. 버스의 앞 유리창이 반사시킨 가안 빛이 편의점의 물건과 그녀들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다.(30쪽)” 후기에 적은 것처럼 작가는 편의점이라는 제한된 좁은 공간으로 일본의 폐쇄성을 표현하면서도, 음향기술을 공부하러 샌디에고로 가려는 주인공의 결연한 의지를 담아 일본적일 삶을 살아온 아버지나 형과는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도 누군가처럼 “무의식중에 듣게 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16쪽)”는 구절에 표시를 두었습니다만, 그보다는 “어린아이들은 표정만 보아도 기분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다. (…) 그러나 노인은 정반대다. 어떤 변화에도 쉽게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어쩌면 일본인의 특징이 아닐까요?) 아기보다 노인을 돌보는 게 훨씬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바고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은 치매에 걸리면 어린아이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내면일 뿐, 얼굴만 보고 그들의 심중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치매 노인을 돌보는 사람은 환자의 사소한 행동과 말투도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19쪽)”는 구절에서 더 강한 느낌을 얻었습니다. 치매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편의점에서’의 주인공은 미국 샌디에고로, ‘술집에서’의 여주인공은 프랑스 남부의 아를르로, 그리고 ;공원에서‘에 등장하는 후타엄마는 무작정 이 공원과 나라를 떠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들이 일본을 떠나려는 계획이 전체의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작다 싶습니다. 문제는 스무살짜리 여자애들과 함께 노래방에 들어선 50대 남성이나, 아홉 살이나 어린 남자를 집으로 끌어드린 피로연의 주인공, 생뚱맞게 초면의 남자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 여성, 우울증에 걸린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여성, 묘한 클럽에서 일하면서 가게 밖에서 고객을 만나는 여성 등의 이야기는 솔직하게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너무 일본적이라서일까요? 특히 공항에서 생긴 스토리가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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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줄거리는 모두 잊었지만, “애기야 가자”, “이 안에 너 있다”는 대사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네티즌이 꼽은 황당 결말 드라마 2위에 오르는 영예(?)를 얻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백마탄 왕자 한기주(박신양扮)와 엉뚱한 신데렐라 강태영(김정은扮)의 티격태격 사랑이야기로 시청자를 끌어 모았는데 마지막 회에 가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강태영이 써온 소설의 스토리였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의 연인>을 인용하는 이유는 김영하의 신작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결말이 그에 못지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딸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는 요약이 눈길을 끌어 읽게 된 소설입니다. 치매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치매환자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치매환자가 우발적 사고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치밀한 계획을 세워 누군가는 죽였다는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주인공 김병수를 알츠하이머환자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장애가 있는데, 오래된 기억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반하여 최근 보고 들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이고, 인지검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MRI검사에서 해마가 위축되어 있는 소견을 나타냈다는 것으로 보아 알츠하이머병, 즉 노인성 치매로 진단하기에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알츠하이머 치매환자는 상황을 수집하여 정리하고 계획을 세워 살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지기능이 통합적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김병수가 열여섯부터 마흔 다섯까지 저질렀다는 살인에 관한 기억들, 그리고 마지막 요양보호사 김은희 살해정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김병수가 김은희를 살해했다는 정황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뻐근했다. 아침을 차려 먹고 체조를 했다. 따갑고 쓰라려 살펴보니 손과 팔에 가벼운 상처가 나 있었다. (…) 나는 샤워를 했다. 몸을 꼼꼼하게 씻은 후 입고 있던 옷을 불태웠다.(120~121쪽)” 왜 그랬을까요? 어디에도 김병수의 옷이나 몸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은 없는데, 뿐만 아니라 김은희의 사체가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혈흔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또 엉뚱한 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처음 와보는 동네다.(35쪽)” 김병수는 배회증상까지도 있다. 배회증상이 있는 환자는 특히 밤에 낙상을 당해서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답은 결말 즈음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병수는 오래 전에 시내 문화센터에서 일하던 여자와 그 남편을 죽이고 그 딸을 입양해서 키워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딸은 아버지와 함께 살해된 것으로 들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병수가 자신과 오랫동안 동거해왔다고 믿고 있는 은희는 요양보호사라는 것입니다. 결국 저의 결론은 가벼운 치매를 앓고 있는 김병수는 작화(作話), 즉 이야기를 지어내는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열여섯부터 마흔 다섯까지 저질렀다는 살인의 기억은 아마도 신문 사회면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구성하여 적어온 자신만의 살인기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양보호사 김은희는 김병수가 치매에 걸린 다음에 만났을 것입니다. 당연히 김병수는 김은희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박주태 역시 김병수의 기억에 제대로 등록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메모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점입니다. 김병수가 만난 안형사라는 존재가 사실을 박주태였다는 점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치매환자 김병수가 거처하고 있는 집에서 발견된 김은희를 비롯한 다수의 피해자들은 치매를 앓고 있는 김병수를 가해자로 위장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김병수는 살인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작가는 그런 점을 고려했을까요?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35쪽)”라는 다소 자조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만, 연쇄살인의 망상에 사로잡힌 늙은 치매환자가 인생이 쳐둔 덫에 걸려 곤경에 빠진 상황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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