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 양심을 밝히는 길 살림지식총서 453
윤홍식 지음 / 살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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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논어; http://blog.joins.com/yang412/3310591>를 읽었습니다. 그때 저자이신 심경호교수님께서 “우리는 왜 『논어』를 읽는가?”라는 질문에 “나를 세우고 남을 열어 주며 세상을 밝힌다”라고 답하신 것을 보고 크게 공감했던 기억이 남습니다. 동양고전은 해석하시는 분의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논어를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윤홍식선생님의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저자는 지금의 시대를 한 마디로 평가해서 ‘양심이 땅에 떨어진 시대’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물질문명을 추구하게 되면서, 양심과 도덕성을 근간으로 하는 정신문명에 대한 관심이 엷어진 탓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 처방으로는 인간이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양심의 계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 시점에서 우리가 <논어>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창평항 추읍에서 태어난 공자의 이름은 구(丘)인데, 공자의 조상은 은나라 황실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나는 본래 은나라 사람이다.”라고 하셨다는데, 은나라는 고조선과 모두 같은 조상을 둔 동이족의 나라라고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구이에 살고자 하셨다는데, 후한시대 학자 허신(30-124)은 『설문해자(說文解字 』 이렇게 적었다고 했습니다.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公子曰導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乘桴  浮于海 有以也[‘동이’는 ‘大(대)’자를 따랐으니 ‘大’는 ‘사람’을 뜻한다. 동이의 풍속은 인자하다. 인자한 사람은 오래 사는 법이니,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인 구이에 가고 싶다.’라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려고 하셨으니 참으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15쪽)] 공자께서 추구하신 인(仁)은 고조선의 핵심 사상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학계는 요하 지역에 위치한 홍산문화(紅山文化)를 중국문화의 원형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하는데, 기원전 4,7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홍산문화의 주체는 동이족이라는 것입니다. 동이족이 꽃피운 홍산문화의 한 갈래가 요순을 거쳐 은나라로 이어지며 중국으로 퍼졌다는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我學不厭 而敎不倦也[나는 다만 진리를 배움에 싫증내지 않고, 진리를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을 뿐이다. 『맹자』「공손추(상)」]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고생해서 얻은 진리를 남과 공유할수록 가치가 커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 얻어낸 정보를 나누는 사회야말로 공자가 꿈꾸는 이상사회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정보화사회의 롤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계발과 관련하여 저자는 사랑(仁), 정의(義), 예절(禮), 지혜(智), 성실(信)을 양심계발의 다섯 가지 덕목으로 꼽고 있으며,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맹자는 양심의 덕목으로 1. 남에 대한 공감능력[측은지심(惻隱之心), 2. 부당한 일을 보면 혐오하며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정의감(수오지심(羞惡之心), 3. 나를 낮추어 남과 조화를 이루는 겸손함(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4. 옳고 그름을 구별할줄 아는 판단능력(시비지심(是非之心)]을 꼽고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세웠고, 30세에 학문이 확립되었으며, 40세이는 학문에 의혹이 없게 되었고, 50세에는 하늘의 명령을 알게 되었으며, 60세에는 하늘에 명령을 잘 듣고 따르게 되었고, 70세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양심발달의 단계를 이르는 것으로 40세까지 양심이 깊어져가는 학문의 발달단계이며, 50세부터는 양심의 근원이라고 할 천명과 통하는 단계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양심의 다섯 가지 덕목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더하고 있어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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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더킨트
니콜라이 그로츠니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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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유행하던 무협소설에 보면 무술에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고난이도의 무술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들 수 있다는 경고를 만나게 됩니다. 주화입마란, “(수련과정에서 운기조식할 때 외부에서 충격을 받거나, 심마 같은 마음의 큰 동요가 있을 때, 혹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과하게 영약을 복용했을 때 몸 안에 도는 기를 통제하지 못하여 내공이 역류하거나 폭주하는 현상을 일컫는다.”라고 엔하위키 미러 백과사전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수의 경지에는 진입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이겠지요.

 

불가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소설가 니콜라이 그로츠니의 장편소설 <분더킨트(Wunderkind)>를 읽으면서 ‘주화입마’라는 무술계 용어가 생각난 것은 재능을 가진 사람일수록 넘어야 할 험한 산이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렸을 적 일찍 재능을 보여 신동이라고 주목받던 이가 정작 평범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꾸준한 훈련을 통하여 재능을 꽃피우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신동(神童)이라고 옮기는 독일어를 그대로 제목으로 한 <분더킨트> 음악에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선발하여 훈련시키는 불가리아의 소피아 음악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영재들, 특히 피아노에 재능을 보인 콘스탄틴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는 콘스탄틴의 삶에서 특별한 날에 생긴 일을 연대기(年代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곡으로 그 제목을 삼고 있는데 아마도 그날의 사건분위기 혹은 그날 주인공의 기분을 잘 나타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전공을 잘 살려낸 얼개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5개의 에피소드에는 피아노곡의 제목을 달아두었는데, 어쩌면 에피소드의 분위기 혹은 그때 상황에서 콘스탄틴의 느낌을 잘 표현하는 곡으로 고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본문에서도 곡의 느낌을 자세하게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3장의 ‘소팽, 에튀드 C장조, op.10,no.1’에서는 이런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쇼팽을 연주할 때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음악만이, 음악의 환영만이, 음악의 환영이라는 환영만이, 기억된 소리와 주제와 과거를 떠다니다가 다른 주제와 다른 화음으로 모습을 바꾸는 음조의 붓놀림들로 이루어진 흐름만이 있을 뿐이었다. (…) 에튀드의 반복 부분은 항상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그 부분에서 타오르는 과정된 불꽃, 의기양양한 절망, 맨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우레 소리 같은 도 음정, 내 육체를 태운 불꽃을 태워버리고 모든 원자와 기억과 예견된 미래의 모든 순간을 절멸하는 그 도 음정, … (75~76쪽)” 피아노곡을 잘 알면 작가가 전하려는 의미를 제대로 붙들 수 있을텐데 안타깝게도 제가 피아노곡에는 전혀 문외한이라서 아쉬움이 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1987년 11월 3일 시작되어, 89년 1월 23일까지는 한 달에 서너 번도 적었다가 두세 달을 건너뛰기도 하다가 마지막 두 개의 에피소드는 9달 가까이 건너뛰기도 합니다. 꼭 한번 열일곱 번째 에피소드는 7년 전으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음악학교의 저학년 때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의 콩쿠르에서 우승한 경험을 회상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어쩌면 작가 자신의 경험을 적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앞서 주화입마의 사례를 들었습니다만, 소피아 음악학교의 학생들 특히 특정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동들의 경우 튀는 행동을 해서 학교운영진을 곤란에 빠트리곤 하는데, 그 정도가 심하면 결국은 퇴교조치까지도 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여 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회적 제약을 깨트리는 짓을 서슴치 않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신동의 재능을 완성하는데 제약이 되는 주화입마에 든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은 절친 바딤과 이리나에 이어 콘스탄틴까지도 퇴교조치를 당하게 되고, 특히 이리나의 경우 교장의 죽음을 암시하는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아서 읽으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공개되어 있습니다. 퇴교당한 콘스탄틴이 다시 음악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소피아 음악학교의 교육시스템에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서 우리네 아이들은 그런 고민에서 자유로운지도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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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멈추는 시간 - 삶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 때, 나를 위로하는 성서
이나미 지음 / 민음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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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순간순간들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 무게에 따라서는 금새 사그러드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갈수록 무게가 더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을 지혜롭게 풀어내지 못하면 마음의 병이 되거나 나아가서는 몸의 병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특별한 분에게 이런 문제를 두고 의논을 하기도 하고, 혹은 종교에서 해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톨릭계통의 학교를 다녔지만 종교에 마음을 의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저로서는 그만큼 선택지가 좁은 셈입니다만,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마음을 다스리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삶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 때, 나를 위로하는 성서’라는 부제에 끌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에서 얻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이나미박사님의 <슬픔이 멈추는 시간>은 “깊은 슬픔과 절망감으로 주저앉고 싶은 순간 성서에서 다시 힘을 얻습니다.”라는 카피처럼 성경말씀을 이끌어와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의학과를 전공한 전문의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뉴욕의 융 연구원에서 분석심리과정을 공부한 다음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종교심리학 석사를 받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을 종교와 결합하는 공부를 하신 셈입니다. 신학하면 기독교 혹은 가톨릭의 교리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신학에 매어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과 공자님의 말씀은 물론, 마호메트와 힌두의 신들을 두루 믿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면서 ‘위대한 종교의 위대한 가르침은 다 믿는다’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종교에 관한 달관의 경지에 오른 듯합니다.

 

<슬픔이 멈추는 시간>은 가톨릭계열의 월간 <생활 성서>에 연재하신 글들을 묶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성경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강요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기본 텍스트로 삼고는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불경이나 유교의 말씀도 인용하고 있는데, 종교에 대한 저자의 열린 마음은 융의 심리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가 ‘들어가며’에 적은 이 책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은 이렇습니다. “고민이 생기면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불교 신자들은 불경을 펼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어떤 곳을 읽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성경의 어디를 봐야 할지 알려 주는 가이드북처럼 읽어 부셔도 좋을 듯합니다.(8쪽)” 말씀처럼 저자는 성경말씀 이외에도 다른 종교,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좋은 말씀을 끌어와 사례에 맞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성경말씀의 경우는 원전을 적어주고 있지만 다른 자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심리상담을 통하여 만나온 분들의 심리적 고통의 예를 들면서, 이런 상황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조곤조곤 설명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겪어보았을 것들이기도 합니다만, 자식을 먼저 보내거나, 사랑을 잃은 깊은 슬픔으로 마음이 무너진 분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족들 혹은 가깝다고 생각한 주위 분들로 인하여 생각지도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경우, 배신과 질투로 생긴 분노와 미움으로 마음이 병들어갈 때, 회의와 허무감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마음을 다독이는 방법을 안내하기도 합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고통이 세상에 튀어나왔을 때 ‘희망’이라는 치유를 준비했다고 신화는 이야기하기도합니다만, 제 생각에 만약 신이 있어 인간에게 선물을 주었다면, 그 선물들 가운데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마음을 흔드는 충격의 유효기간은 불과 몇 주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잠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더라도 이내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아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성경에서 자신과 부합하는 상황을 찾아 어떻게 풀어갔는지를 이해하다보면 쉽게 고통을 덜어내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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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 - 최고의 국가건설을 위한 현실주의 살림지식총서 456
신창호 지음 / 살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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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管子)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관중(管仲)을 말합니다. 이름은 이오(夷吳)이며 춘추시대에 지금의 안휘성 북부지역인 영상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주나라 장왕(壯王) 12년부터 제환공의 재상으로 활약하다가 주나라 양왕(襄王) 7년에 죽었다고 하여 기원전 725년에서 기원전 645년경까지 생존한 인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자나 노자보다도 100년을 앞섰으니, 춘추전국시대를 풍미한 제자백가들의 선두주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는 주나라가 중심이 되던 봉건체계가 무너지며 춘추시대, 즉 난세가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제나라환공은 주나라 천자를 대신하여 제후국들을 통제하던 패업을 이루게 되니 춘추5패의 선두주자가 됩니다. 제나라는 지금의 산동반도에 위치하여 중원과의 거리가 멀고 강대국들과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관중은 부국강병을 꾀하면서도 도덕적 교화를 통한 법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덕과 법을 병행하는 덕치를 펼치도록 이끌었다고 합니다. 관중은 늘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국민을 존중하라’라는 존민(尊民), ‘국민을 따르라’라는 순민(順民), ‘국민을 두려워하라’라는 외면(畏民), ‘국민을 활용하라’라는 용민(用民)을 핵심 주장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토지를 경제적 측면에서 명확하게 파악하려 노력하였다고 하는데, 요즈음 말로 하면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이루고 복지를 챙기는 실물경제에 정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관중을 사상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테크노크라트, 즉 기술관료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의 저술은 후대에 정리된 것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만, 정치, 경제, 법률, 군사, 철학, 교육, 자연과학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선현의 고사를 두루 섭렵하여 인문학적 조예가 깊어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는 정책의 도출이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앞서도 관자가 백성에 대하여 잘 파악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자는 『관자』의 「목민」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국민의 네 가지 욕망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편하게 즐기는 삶인 안락(安樂), 둘째는 부유하고 귀하게 사는 부귀(富貴), 셋째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안락하기를 바라는 존안(存案) 그리고 넷째는 삶의 건전한 성숙을 추구하는 생육(生育)입니다.(22쪽)” 그리고 네 가지 증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근심과 피곤을 상징하는 우로(憂勞), 가난과 천대를 의미하는 빈천(貧賤), 위험과 추락을 말하는 위추(危墜), 제거되거나 끊어지는 삶인 멸절(滅絶)”입니다. 늘 백성을 염두에 두었던 관자의 현실정치감각은 오늘날에도 틀림없이 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관자』의 「입정구패해(立政九敗解」편에서 설명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실패하는 원인 아홉 가지는 정치에 꿈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1. 국가의 안보를 소홀히 한다, 2.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3. 보신주의, 그리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는다, 4. 지나치게 개인적 의견을 내세운다, 5. 부당한 거래를 한다, 6. 패거리를 만들어 어울린다, 7. 지나친 음주가무를 즐긴다, 8. 인사청탁과 뇌물을 받는다, 9. 아첨을 묵인한다.(32~39쪽)”

 

관중에 대하여 공자는 엇갈리는 평가를 내렸다고 합니다. 위엄과 힘을 쓰지 않고도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리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여 은택을 베푼 공적은 어진 사람에 버금간다 하겠으나, 춘추시대에 부국강병의 패도를 이루기는 했지만 유가가 추구하는 왕도를 실현하지 못한 까닭에 ‘그릇이 작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관중이 성현이 추구하는 큰 배움의 도를 알지 못하여 왕도와 패도의 개념을 뒤섞어 한 길로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맹자나 사마천은 군주가 스승으로 삼을만한 인품을 지닌 참모로 꼽고 있기도 합니다.

 

<관자, 최고의 국가건설을 위한 현실주의>는 100쪽이 조금 넘는, 일견해서 가벼워 보이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중시하는 관중의 철학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그렇지 않은 분이라고 해도 읽어서 삶의 지혜로 삼을 만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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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지도 - 집단기억은 인류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정치를 어떻게 뒤바꿔놓았나?
제프리 K. 올릭 지음, 강경이 옮김, 김문조 감수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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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 가운데 비교적 짧은 기간에 가장 우월적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보취급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정보취급능력의 출발은 기억입니다. 인간이 오감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고, 필요한 상황에서 기억된 정보를 끄집어내 비교분석하고 종합하여 행동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별로 획득한 기억은 언어를 통하여 집단 내에서 공유가 가능했습니다. 집단 내에서 공유하는 기억은 생존에 필요한 정보뿐 아니라 집단의 정체성에 관한 정보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화나 전설이라고 하는 구전문학을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서양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호머가 살았던 기원전 800년경에는 그리스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구술로 전해지던 공연이 문자가 발명된 후세에 이르러 채록되어 남겨진 것입니다.

 

대체로 뛰어난 기억력을 소유한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정기적으로 집단 구성원들에게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피터 메칼리스터는 <남성퇴화보고서; http://blog.joins.com/yang412/12812543>에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 서사시의 구비전승을 지켜온 구슬라르(Guslar)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구술라르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오스만제국을 상대로 싸웠던 슬라브 족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인들인데, 이 전통이 20세기까지 이어져왔다고 합니다. 최후의 구슬라르 가운데 아비도 메데도빅이라는 문맹의 도축업자는 놀랍게도 58개의 서사시를 외우고 있었는데, 한 개의 서사시는 모두 7만 8,555행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문자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오직 기억에 의존하여 개인별로 축적되던 정보는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의 두뇌 밖의 장소에 정보보관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기억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보의 왜곡 가능성을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정보의 왜곡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겠습니다만, 정보 이용자가 상호 교차확인 등을 통하여 정보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오기도 했습니다.

 

점토판에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된 새로운 정보보관법은 양피지, 종이 등에 인간의 손으로 기록하던 방식으로부터 목판, 석판을 사용하는 수동식 인쇄법을 거쳐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대량 자동인쇄가 가능해지면서 정보의 폭발적 확산이 가능해졌습니다. 현대에 들어 개발된 전자장비를 이용하면서 문서뿐 아니라 그림 심지어는 동영상까지도 보관과 유통이 손쉬워지면서 정보유통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역시 인간의 몫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오감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기억하고 기억된 정보를 다시 끄집어내는 과정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밝혀내야 할 과제가 많은 분야이기도 합니다.

 

시작부터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제프리 K 올릭의 <기억의 지도>는 제목과는 달리 생물종의 하나로서 인간의 기억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집단의 기억에 관하여 적고 있습니다. ‘집단기억’이라는 용어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에밀 뒤르켕의 문하생 모리스 알브바슈의 1925년도 저작 <기억의 사회적 구성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기억의 지도>를 감수하신 김문조교수님은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식적 가교로써 ‘삶에 보탬이 되는 지혜나 교훈의 교훈’이라는 온축적 가치를 넘어, 역사의 물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려는 집합적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역사학·사회학과 교수로 기억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제프리 K. 올릭교수의 <기억의 지도>를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 우경화의 정도가 심각해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가늠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의 일원으로 주변국가에 엄청난 상처를 안긴 일본은 종국에는 전쟁을 지속할 힘을 잃고 패전이 임박한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이라고 하는 초유의 전쟁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면서 입은 끔찍한 피해로 인하여 유럽의 주축국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전후 처리절차와는 다소 차별화된 과정을 밟았던 것 같습니다. 일본은 전쟁의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피해자라는 허울 뒤에 숨어 전쟁의 책임을 희석시켜온 경향이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회생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국제적 지위에 걸맞게 전쟁의 아픈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나 전쟁배상에 관한 문제 등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질 일은 없다고 딱 잡아떼고 있을 뿐 아니라 전범들의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신사에 정부각료들이 참배하여 주변국가를 자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의 피해를 입은 당사국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각료나 천황이 구체적인 잘못을 인정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수사적인, 아니 말장난에 불과한 인사치레로 가름하곤 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반면 1970년 12월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바르샤바 협상을 위하여 서독수상으로서는 처음으로 폴란드를 공식 방문한 빌리 브란트 수상은 바르샤바 게토에 봉헌된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 신문은 “그리고 그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그가, 무릎을 꿇어야 하지만 꿇지 않았던 사람들, 감히 무릎을 꿇을 용기가 없어서, 무릎을 꿇을 수 없어서, 무릎을 꿇을 용기를 낼 수 없던 사람들을 대신해서.(172쪽)”라고 전했습니다. 브란트 수상은 이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합니다.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빌라노프궁을 출발하면서 게토 기념비의 특별한 의미를 표현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독일역사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살해된 수백만 희생자에 책임감을 느끼며 나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모든 인간이 할 만한 행동을 했다.(172쪽)” 지금까지의 돌아가는 꼴을 보면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 앞에서 무릎을 꿇을 용기를 가진 일본 당국자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올릭교수는 바로 2차 세계 대전에 책임과 관련하여 전후 독일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의 지도>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리뷰를 읽다보면 ‘역사는 집단기억에서 비롯되어 후회의 정치를 통해 진화한다’라는 작은 제목을 만나게 됩니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 제3제국이 인류사에 기록될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 기전으로 작용하게 되는 ‘집단기억’이라는 기전과 종전 후에 독일이 밟아온 전쟁책임의 청산과정을 ‘후회의 정치’라는 개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dis 아스만(1992)이 사회적․개인적 기억과는 별도로 문화적 기억이라 부른 것이 바로 집단표상으로서의 집단기억이다. 뒤르켕을 계승한 알브바슈의 이론에서 기억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집단을 결속하는 활동만도 아니다. 기억은 적극적으로 유지되든 아니든 한 집단이 간직한 문화적 유산이다.(19쪽)”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리처드 도킨스 교수가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com/yang412/12583563>에서 제안한 ‘문화를 전달하고 모방하는 복제단위’ 밈(meme)이라는 개념이 바로 집단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 담긴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85-86년 독일에서 일었던 역사가논쟁(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논쟁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정당방위로 해석한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의 글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를 다룬 역사학자 찰스 마이어의 책을 비평한 글을 읽으면서라고 합니다. 이후 꾸준하게 발표한 글들을 묶은 <기억의 지도>는 1부; ‘집단기억,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능동적 과거’와 2부; ‘후회의 정치, 과거의 잘못을 대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각각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는 집단기억의 개념을 탐구하고 집단기억과 개인기억의 관계를 정리하였습니다. 2장과 3장에서는 독일의 사례를 경험적으로 분석하였는데, 2장에서는 독일 나치과거 이미지의 지속과 변형이 이미지들의 도덕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즉, 집단적 기억행위는 본질적으로 도덕명령이라는 차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3장에서는 ‘기억의 기억’이라고 부르는 되풀이 되는 기념이라고 하는 현상이 단순히 일회적 관계의 반복이 아니라 발화와 응답의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4장에서는 언어와 행위에 대한 바흐친의 대화주의적 접근방식을 통하여 기억이란 하나의 사물도, 단순한 수단도 아닌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는 매개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2부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글에서 ‘고통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며 어떤 사회든 동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 헤나 아렌트의 성찰을 바탕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5부에서는 정치적 정당화의 새로운 원칙으로서 후회의 정치가 무엇인지 개념을 정의하였습니다. 6장에서는 니체와 베버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책임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데, 트라우마(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와 배상, 치유 보상에 대한 담론을 다루었습니다. 6장에서는 독일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를 들어 승리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어떻게 화해를 이루어갈 것인가를 논하였습니다. 둘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에 대하여 저자는 ‘신념의 문제’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희생자와 가해자가 이미 없는 마당에 그들의 자손들 사이의 이해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베버의 시각으로 보아 책임윤리에 해당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7장에서 저자는 후회라는 주제를 트라우마와 르상티망(미움, 원한, 분노 정도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신정론에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는 집단기억과 만성적 시간분화의 관계를 조망하고 있는데, 바흐친의 ‘장대한 시간’이라는 개념 속에서 사회학의 시학과 역사를 중심에 두고 그와 관련된 보상의 형태를 조명하면서 근대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전후 패전국 독일과 일본에 대한 후속처리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1950년을 전후하여 독일은 나치로 인하여 비롯된 수많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쟁터였던 독일은 물질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을 뿐 아니라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연합국은 독일인들에게 그들이 지지했던 전쟁범죄를 직시하도록, 점령 초기에 집단수용소를 견학하도록 강제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당시 성인이었던 모든 독일인들에게 과거의 행적을 묻고, 그 설문을 토대로 나치협력자를 가려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종국에는 일부 독일인의 반발을 부르기도 했는데, 대표적 사례가 앞서 말씀드린 역사학논쟁이었던 것입니다. 극단적 보수주의자 에른스트 놀테는 1987년 독일의 유력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실린 글에서 ‘홀로코스트의 대명사가 된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가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부터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이르기까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악보다 더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홀로코스트라고 하는 유례없는 짐의 무게를 덜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논쟁의 반대편에 섰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릇된 비교역사서술을 활용해 집단책임을 피하려는 신보수주의의 음모라고 반박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우경화바람과 비슷한 모습 아닌가요? 독일의 경우 이런 우경화움직임에 제동을 건 지식인들이 건재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각에서는 우경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후 독일은 일관되게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 과정을 1949년 서독의 창립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신뢰할만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외부에 보이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1966-69년 사민당이 대연정에 참여할 때부터 74년 브란트 수상의 사민당-자민당 연정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도덕국가’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던 시기, 그리고 1975년 이후 헬무트 슈미트 수상이 집권하면서 내세운 ‘정상국가’의 이미지를 표방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건너오면서 전쟁의 책임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던 독일 국민과 독일정부의 진심은 결국 이스라엘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의 신뢰를 얻기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이웃과 언제까지 등 돌리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오랜 세월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잔꾀만 부려온 이웃에게 우리는 어떤 자세를 보일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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