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 백 년을 함께한 친구
이순원 지음 / 놀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읽고 감동을 받았던 소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http://blog.joins.com/yang412/9554069>을 쓴 이순원 작가님이 신작을 내놓았다고 해서 반갑게 받아들었습니다. 대관령 서른일곱구비를 아들과 함께 걸어서 내려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읽어가면서 ‘아들과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참 좋아 보인다.’라고 리뷰에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은 정말 몇 안되는 다시 읽은 책이기도 합니다. 이순원 작가님의 <나무>는 ‘백년을 함께 한 친구’라는 부제처럼 오래 된 시골집 마당을 지켜온 나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느낌이 옵니다. 우람한 나무의 널따란 그늘 아래 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을 표지로 삼은 것을 보면 나무와 한 남자 간의 진한 우정을 그려냈을 것으로 작하게 합니다. 하지만 내용은 백년을 넘게 부엌 문밖을 지켜온 밤나무가 여덟살 짜리 손자 밤나무에게 전하는 이 집에 사는 사람들과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적어내려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춘궁기에는 끼니를 어떻게 이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계시겠습니다만,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은 열세 살에 결혼한 새신랑이었다고 합니다. 오직 집 한 채와 민둥벌거숭이 산이 가진 것 전부였던 신랑은 신부를 맞던 해 수확한 밤 일곱말 가운데 다섯 말을 부엌 바닥에 묻고서는 나머지 두 말를 곡식과 바꾸어 근근히 겨울을 버티고, 봄이 되자 밤 다섯 말 가운데 실한 것들로 골로 민둥산에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다 남은 밤 한 톨을 부엌 밖에 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신랑과 새신부는 밤나무들이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면서 버텨냈는데, 결국은 밤 다섯 말을 만든 뒷산의 밤나무 숲은 두 사람에게 풍족한 삶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새신랑이 나중에 손자에게 들려주었다는 말은 새겨둘만 합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밤 한 톨을 화로에 묻는 것과 땅에 묻는 것은 차이가 있다. 화로에 묻으면 당장 어느 한 사람의 입이 즐겁고 말겠지만, 땅에 묻으면 거기에서 나중에 일 년 열두 달 화로에 묻을 밤이 나오는 것이다.(33쪽)” 새신랑은 밤나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곤궁한 가운데에서도 밤 다섯 말을 산에 심은 새신랑의 이야기는 아들에게로 그리고 손자에게로 대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나무는 지금의 자신이 된 밤 한 톨을 먹지 않고 심어준 새신랑에게 특별한 사랑보다 더한 특별한 영광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밤나무가 성장해가면서 새신랑과 이야기를 나눈 무수한 시간들에 대한 기억은 나무와 사람 사이에도 있음직한 우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밤나무도 부부가 집을 넓혀 지을 때 나무를 베어야 집을 제대로 앉힐 수 있겠다는 목수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한마음으로 거절하였습니다. 신랑을 설명을 들으면 이 밤나무가 특별한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 나무는 같은 밤나무여도 산에 있는 나무들과는 또 다르지. 처음 심을 때 내가 당신에게 주기로 한 나무이기도 하고,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서 우리 집을 지켜 줄 나무이기도 하니까. 이다음 우리가 나이가 들면 그 나무도 함께 나이가 들 테지. 그러다가 우리가 저 세상으로 가면 그때는 또 그 나무가 우리 대신 이 집과 우리 아이들을 지켜 줄 거야.(46쪽)”

 

이제 그 나무도 나이가 들어 명을 다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아들 밤나무가 우연히 남긴 손자 밤나무에게 이 집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나무들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줄 뿐 아니라 밤나무로 살아가는 지혜를 전수해줍니다.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 깊은 잠 속에서 먼저 간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나무는 나무로 한평생을 살며 스스로 나무라는 것이, 그리고 나무라는 이름이 한없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식물의 세계도 총성 없는 전쟁터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습니다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 밤나무의 말대로라면 세상이 모두 나무들이 사는 세상이면 참 좋겠습니다. 어쩌면 이순원작가님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유럽의 전통기록물 관리 지중해지역원 인문총서
김정하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달 전에 캄보디아의 씨엠립에 있는 앙코르왕국의 유적을 돌아보았습니다. 앙코르유적이 열대의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앙코르왕국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대 앙코르왕국은 유적에 새긴 부조 이외에 별도 문서 등의 형태로 남은 역사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남문을 통하여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다 보면 큰 길 중간에 서 있는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 건물은 옛날 중국에서 온 사신이 묵으면서 역사를 기록하던 장소라고 합니다. 즉 앙코르왕국의 역사기록은 중국 등 인근 국가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전부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적의 침입을 받아 왕궁이 함락위기에 빠지자 왕은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왕궁을 떠나면서 신이 더 이상 이 성지에 머물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철저하게 잊어버리도록 한 것도 앙코르 유적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라고 합니다.

 

크메르 문자가 어려운 것도 이유 중 하나하고 합니다. 캄보디아에서는 공식적으로 크메르어와 크메르 문자를 사용합니다. 지구상에서 자국 언어를 사용하는 몇 안되는 국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5년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문자 해독률은 약 68퍼센트입니다.(1997년에 발표된 캄보디아 경제사회조사) 문맹률이 이토록 높은 이유는 우선 의무교육으로 되어 있는 중학교까지 졸업하는 비율이 낮은데다가, 크메르어가 어려워서 고등학교는 졸업을 해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구전으로 역사를 전했습니다. 서구 문화의 근간이 되고 있는 그리스신화 역시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기원전 8세기 초 무렵에 문자로 채록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호메로스가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김헌 지음,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살림출판사, 2004년)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역사를 전하는 역할을 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요? 드물게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뿐 아니라 기억력이 훈련을 통하여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습니다.(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지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갈라파고스, 2007년; http://blog.joins.com/yang412/13176657) 루리야가 관찰한 기억술사는 기억용량은 물론이고 획득한 기억의 지속성도 무한해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한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루리야의 관찰에 따르면 연구대상이 된 기억술사는 단어와 숫자를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는 이를 회화적 개념과 공감각적 반응을 이용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의 얼굴처럼 기분에 따라서 변화하는 대상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은유나 비유가 많은 시나 문학작품은 쉽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역사를 전하는 역할과 관련이 있는 연구조사도 있습니다. 피터 매캘리스터가 쓴 <남성퇴화보고서; http://blog.joins.com/yang412/12812543>에서는 언어학자 로드와 페리가 세르비아의 몬테네그로의 구슬라르(세르비아의 서사시를 구비전승하는 사람들)의 전통을 조사한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도 메데도빅이라고 하는 문맹의 도축업자는 놀랍게도 58개의 서사시를 암송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그는 35만 476행의 시를 외우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가 모두 2만 7803행인 것과 비교해보면 놀라운 재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드와 페리의 연구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는 그저 암기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 때마다 새롭게 각색한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메데도빅 역시 단지 한 번 들은 2294행의 곡을 자유자재로 바꿔서 부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구술사들은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다양한 청중에 맞게 들려주곤 했다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공연은 기억을 강화하는 효과도 나타냈을 것입니다.

 

문자의 발명은 기억에만 의존하던 인간의 정보량을 획기적으로 늘려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기억력을 퇴보시키는 역기능을 불러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Phaedrus)>에는 소크라테스가 친구 파이드로스에게 들려준, 이집트의 타무스왕과 발명의 신 테우스가 주고받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수, 계산, 기하학, 천문학, 문자 등 많은 것들을 고안해 낸 발명의 신 테우스는 자신이 발명한 문자의 용도에 대하여 왕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왕이여, 여기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이 있소.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지혜와 기억력을 늘려 줄 것이오. 기억과 지혜의 완벽한 보증수표를 발견해 낸 것이지요.” 테우스의 설명에 대하여 타무스왕은 이렇게 경계하였습니다. “모든 발명가의 모범이 되시는 테우스여, 기술의 발명자는 그 기술이 장차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 판정할 수 있는 최선의 재판관은 될 수 없습니다. 문자의 아버지인 당신은 자손들을 사랑하여 발명해 낸 그 문자에 본래의 기능에 정 반대되는 성질을 부여한 셈입니다. 문자를 습득한 사람들은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이 잊게 될 것입니다. 기억을 위해 내적 자원에 의존하기보다는 외적 기호에 의존하게 되는 탓이지요. 당신이 발견한 것은 회상의 보증수표이지 기억의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라면, 당신의 제자들은 사실과는 상관없이 지혜에 대한 명성을 계속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적절한 가르침 없이도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실제로는 거의 무지하다 할지라도 지식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지혜대신 지혜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장차 사회에 짐만 될 것입니다.”(제2회 한국철학올림피아드 고등부 논술문제를 인용하였습니다) 인간의 간교함을 제대로 짚어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정보의 바다라고 부르는 인터넷시대를 맞아 사람들은 문서를 읽어 지식을 자신의 자원으로 만들던 노력마저도 포기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을 그렇습니다만 그저 인터넷에서 정보를 모으는 얄팍한 재주만 늘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거리는 사건입니다만, 1985년 8월 18일, 534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싣고 동경 나리타공항을 떠나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 항공소속 보잉 747 123번 여객기가 군마현의 산기슭에 추락했는데 오직 4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비행기가 추락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타나구치라는 승객은 아내에게 남기는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 여보 이렇게 될 줄은 유감이오. 잘 있어요. 아이들 잘 부탁해. 지금 6시 반이다. 비행기는 돌면서 갑자기 내려가고 있다. 정말 지금까지 행복한 인생이었소. 고마워요!” 이 편지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일본인의 기록습관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로 인용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기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식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보니 책을 읽는 것도, 더우기 글을 쓰는 것에도 관심이 엷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왕실은 물론 사가에서도 많은 기록물들이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는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까지 그야말로 놀라운 기록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에 대한 책을 소개합니다. 부산외국어대학교의 김정하교수님께서 남유럽,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수많은 국립 및 시립 기록물보존소와 도서관들에 소장되어 있는 역사기록물의 보관 및 활용방식을 검토하고, 역사기록물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환원될 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저자는 역사 기록물은 양날의 칼처럼 관리의 수많은 변수들에 따라 문화유산의 혜택과 인권탄압의 이중성, 즉 부메랑 효과를 연출할 수 있음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책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에서는 역사기록물의 개념과 용어를 정의하고, 제2장에서는 역사기록물의 관리와 (중세의) 법적 공신력을 논하고, 제3장에서는 역사기록물의 활용사례를 들었습니다. 제4장 민주주의와 역사기록물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시민의 권리와 권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는지를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제5장에서는 공공부문의 역사기록물관리에서 한발 나아가 기업의 역사기록물관리 사례를 인용하고 있는데, 기업이나 단체의 역사기록은 출발할 때부터 제대로 체계를 갖추어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 하다고 보았습니다.

 

기원후 3세기 초 로마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아르키비움은 외교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는 공적인 장소이다.”라고 당시 기록물의 보편적 개념을 정의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원후 4~5세기에는 “아르키비움은 공공기록물이 보존되어 있는 장소이다.”라고 개념이 바뀌게 되는데, 공공기록물의 개념이 ‘장소’에서 ‘유기적 관계의 문서들 전체’로 변함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장소는 여전히 공공기록물의 신뢰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와 같은 장소의 개념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통해 중세로 계승되었다고 합니다. 19세기 계몽주의시대를 맞아 기록물의 개념을 보다 폭넓게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대두되면서, 기록물을 국가, 지방, 도시, 공공기관 또는 사기관, 회사나 협회, 개인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원본문서들로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기록물이 공․사영역의 구분 없이 생산되어 영구보존의 가치를 위해 선별되었고 정리된 상태의 문서들 내부에 유기적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어 궁극적으로는 생산주체의 제도와 행정업무의 구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 기록물의 분량이 방대해지면서 기록물의 분류, 수집, 기록의 용어 등을 체계적으로 운용하지 않으면 기록물을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기록물을 사용함에 있어 이관과 수집을, 정리와 분류를, 그리고 기록, 문서 기록물을 학문영역에 따른 고유환 개념의 확립 및 적용에 근거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사기록물은 우선 학문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있고, 학문연구를 제외한 실질적인 목적으로 문서를 열람하는 유형이 있으며, 단순한 호기심으로 비전문가들이 열람하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록의 보관과 활용방안으로 헌팅턴병이 의학분야의 대표적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미국 뉴욕주에서 진료하던 의사 조지 헌팅턴(1850~1916)은 그의 조부와 부친이 기록하여 온, 미국 뉴욕주의 헌팅턴 군에 거주하는 가족에서 발생하였던 심한 정신장애를 동반한 무도병의 사례들을 1872에 정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이처럼 3대에 걸쳐 작성된 의무기록이 최종적으로 손자대에 이르러 빛을 보아 새로운 질환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기록물에 대한 학술적 접근방식은 다양한데, 먼저 법적 사실이 다양한 서식을 통해 기록된 증언을 연구하는 고문서학은 주로 중세와 인문주의 시대의 다양한 문서서식들을 대상으로, 문서에 대한 연구에서는 법적인 상황을 발생시키거나 수정시키거나 소멸시키는 법적행위와 법적효력을 발생시키는 행위에 대한 기억을 유지할 목적으로 작성된 기록문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기록믈관리학은 고문서학의 영역보다 더 방대한 개념으로 이해되는데, 기록물관리전문가는 정부기관의 기록물, 즉 (업무)진행절차의 최종순간을 대변하며, 외적인 형태의 중요성이 고려된 문서들의 업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작성된 모든 중간단계의 문서들을 모두 관리합니다. 그밖에 정보학에서는 기록물이 개별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나, 다른 기록물과 유기적으로 연계될 경우에 방대한 영역의 정보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1975~1979년 사이에 170만 캄보디아인을 학살한 폴포트 정권의 만행은 비밀경찰이 작성한 문서들이 발견됨으로서 학살을 주도한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가능해졌습니다. 폴포트의 사례는 역사기록물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기록물을 보존할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 진실을 밝히는데 주력할 것인가 화해를 유도할 것인가 하는 선택은 사례별로 처한 상황에 맞게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IT의 발전으로 기록에 대한 중요성이 희박해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보고 들은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분야이건 개인적 필요에 의해서 생산된 기록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야 정보로서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도 다다오: 건축의 누드 작가 살림지식총서 131
임채진 지음 / 살림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읽은 <안도 다다오 일을 만들다; http://blog.joins.com/yang412/13384160>가 자전적 요소가 강한 내용이었다고 하면, 임채진교수의 <안도 다다오>는 건축을 전공하신 타인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안도 다다오에 대한 평가라고 하겠습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안도의 어린 시절의 모습 가운데 “무엇이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주물공장에서 직접 목형을 만들기도 하고 쇠를 녹여 붓거나 유리를 불어보기도 하면서 특에 박힌 생각이 아닌 원리적인 데까지 발상할 수 있게 되었다.(5쪽)”는 구절을 읽으면서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습니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구리 세공업을 하는 장인집안에서 태어난 가우디가 아버지를 도와 구리세공작업을 배우게 된 것이 그의 건축에 크게 기여했던 것처럼 안도 역시 현장에서 익힌 예술적인 느낌을 건축으로 승화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던가 봅니다. 가우디와 안도의 차이라고 하면 그래도 가우디는 학교에서 건축을 배웠지만, 안도는 오로지 독학으로 건축을 배웠다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읽어가다 보면 가우디와 안도는 닮은 점도 많지만 분명한 차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두 사람은 경험에 바탕한 건축을 한다는 점이나 자연친화적 건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안도의 건축작품들에서는 물, 바람, 빛, 소리와 같은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빛의 교회>의 본당에 들어서면 콘크리트를 관통하여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만들어내는 십자가의 모습과 그 빛이 단상 위의 성경을 비추도록 설계하였다고 합니다. 가우디와 마찬가지로 안도 역시 언제나 주어진 장소의 입지를 최대한으로 살려 건물을 설계하는데, 대지에 관여하고 있는 힘과의 교감을 생각할 뿐만아니라 나아가 그 지방의 지역성과 인간 존재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까지도 고려한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건축이 자연에서 차용한 선을 적용한 것과는 달리 안도의 경우는 엄격한 기하학 형식에 따라 구성되고 있는 점도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도에게 있어서 자연은 본연의 모습보다는 ‘텅 빔’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안도의 모든 주택 작품에는 아무리 작은 주택이라 할지라도 중정(中庭)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 중정은 자연의 환유물이며, 바람, 비, 눈, 그리고 ‘윤곽 속의 하늘’과 같은 형태 속에서 자극적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건축철학은 가우디와는 다른 무엇인 것 같습니다.

 

<바람의 교회>라는 이름의 록고 산 정상 근처의 오리엔탈 호텔 내에 있는 안도의 작품을 읽으면서 일본의 결혼문화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대부분의 결혼식은 가족 단위로 신사에서 전통적으로 치른 다음에, 다시 몇몇 절친한 친지 및 친구들이 동석한 가운데 교회에서 치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결혼식은 화려한 만찬으로 이어지는데, 일반적인 친구들은 이 만찬에 초대되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 만찬의 연회비용에 상응하는 축의금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호텔에서 예배당을 만날 수 있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의 종교관이 헷갈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경우는 결혼 당사자들의 종교에 따라서 결혼식을 치르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결혼식을 교회에서 치르기도 하나 봅니다.

 

대체적으로 건축은 대지가 결정된 다음에 설계가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안도의 경우는 나라현에 있는 고조박물관의 경우처럼 건축기획에 따라서 대지를 선정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공사가 까다로운 언덕 위의 대지를 선정한 이유는 독특한 대지 위에 상징적인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주민들에게 훨씬 큰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도는 일본의 전통건축을 국제적인 언어로 만드는 선도적 역할을 한 건축가로 꼽힌다고 합니다. 성인잡지 플레이보이가 21세기에 걸맞는 독신자 집의 설계를 프랭크 게리에게 맞긴 것처럼 플레이보이 일본판에서는 안도 다다오에게 같은 제안을 했을 때 선뜻 수락할 정도로 대중과의 호흡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점입니다. 안도의 건축물에서는 일본의 전통건축이 담겨 있는데, 우리의 전통모습을 담은 건축을 세계인들이 주목하게 만들 그런 건축가는 언제쯤 나오게 될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토니 가우디 살림지식총서 127
손세관 지음 / 살림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 가을에는 스페인에 꼭 가보려고 합니다. 스페인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지금도 짓고 있는 성가족성당과 안토니 가우디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스페인의 미술관들을 소개하는 최경화님의 <스페인 미술관 산책; http://blog.joins.com/yang412/13205419>편에서는 바르셀로나에 흩어져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묶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림지식총서 시리즈로 나온 손세관교수님의 <안토니 가우디>는 안토니 가우디가 건축가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당대의 경향과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건축세계를 구축하게 된 배경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가우디의 특별한 건축세계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요소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습

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빛이 넘쳐나는 카탈루냐에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는 타라고나주의 레우스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에는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등 각각의 양식들로 건축된 성당들의 잔재들이 풍부하게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런 영향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고향의 자연이 가우디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했다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건축 유적들은 사물을 꿰뚫어보는 힘을 주었다.(15쪽)” 스페인 건축을 전공하신 김희곤교수님은 <스페인은 건축이다; http://blog.joins.com/yang412/13381380>에서, 스페인 건축의 특징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온 아랍세력이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유럽 문명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건축양식이 태어나게 되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여유 덕분에 이들 건축물들이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소로는 가우디의 부모는 모두 세습되어 내려 오는 장인집안 출신입니다. 특히 부계는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구리로 솥과 그릇을 만드는 구리 세공업을 해왔는데, 가우디는 아버지를 도와 구리를 세공하는 법을 익혔던 것이 건축에 공예적 요소를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수공업의 몰락을 예견한 아버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의학을 공부하는 형을 따라서 바르셀로나에 보내 건축을 공부하도록 하였는데, 가우디는 학비를 벌기 위하여 건축과 관련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이 또한 그의 건축세계에 일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읽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건축학교 시절 가우디는 책을 통해 섹AP의 여러건축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특히 고딕복고주의 건축가로 대표되는 퓨긴(Pugin)과 러스킨(Ruskin) 그리고 비올레 르 뒥(Viollet-le Duc)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벽돌제조업으로 성공한 에우세비 구엘 바시갈루피와의 만남이야말로 가우디의 자신의 건축철학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였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건축은 자연에 대한 찬가라고 할 정도로 자연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조형감의 원천은 바르셀로나 북서부에 있는 몬세라도 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별명이 톱니꼴의 산이라고 하듯이 1,500개나 되는 봉우리들이 이어진 험난하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자연적 요소들이란 “단순히 식물이나 동물이 가진 사실적인 형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공물과 구별되는 본질적인 형상, 즉 부드러운 유기적 ‘곡선’으포 표현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42쪽)”라고 합니다.

 

성가족성당에서 볼 수 있는 유기적 형태의 구조체에 대한 가우디의 의도는 이렇다고 합니다. “별은 천체궤도를 따라 공전한다. 그리고 나선형을 이루며 자전한다. (…) 별의 모양을 한 기둥도 좌우 양 방향으로 회전하며 이중나선형으로 운동한다. 모든 양식이 종합된 성가족 성당의 기둥장식은 이 원칙에 따라 적용되었다.(51쪽)” 그냥 찾았더라면 지나치고 말았을 포인트입니다. 성가족성당을 방문했을 때 꼭 확인하고 느껴봐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번째 에피소드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는 ‘기억’을 화두로 콩브레에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데, 사실은 작가의 바탕이 되는 화자의 책읽기에 관한 대목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라신, 상드, 지드, 심지어는 가공의 인물인 베르고트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관하여는 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3111784>에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에서도 라신을 비롯하여 뮈세 등의 작품들을 인용하여 분위기를 띄우거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끌어다가 비유하기도 하는 등, 화자의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의 전반에서 화자의 문학적 스승 베르고트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화자의 첫사랑 질베르트와의 짧은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에서는 화자의 문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해주는 예술적 스승 엘스티르 그리고 화자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친구 생루와의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스티르가 중매쟁이 역할을 하게 되는 화자의 운명의 여인 알베르틴과의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질베르트와 알베르틴은 대조적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부의 차이도 그렇고, 첫만남에서 화자에게 주는 느낌의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질베르트와의 관계는 첫만남에서 불꽃이 당겨져서 화르르 타올랐다고 스러지는 그런 사랑이었다고 하면, 알베르틴은 한 무리의 소녀들 틈에서 조금씩 감정이 깊어지는 그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질베르트와의 이별이 주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하여 떠난 여행이었을 것입니다만, 사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처럼 발베크에서 만난 재기발랄한 소녀들 가운데는 알베르틴 보다 화자와 잘 어울리는 소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베르틴 역시 처음에는 화자에게 거리를 두면서도 사랑을 표시하는 등 애매한 상황을 반복하는데, 운명의 실타래는 어쩔 수 없이 엮어들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알베르틴을 만나기 시작할 무렵의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모임에 오기 전에도 알베르틴은 내게 미지의 인물이자 거의 식별할 수조차 없던, 그저 지나는 길에 스친 여인, 그래서 우리 삶을 오랫동안 사로잡게 될 그런 유일한 환영은 아니었다.(381쪽)” 그러면서도 알베르틴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한 존재의 얼굴 전면에 배열된 장점과 결점은 우리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면, 완전히 다른 구성에 따라 배열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마치 도시에서 단 하나의 선에서 보면 무질서하게 흩어진 듯 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념물들이 세로로 배열되고 그 상대적 크기도 맞바꾸는 것 같다.(382쪽)” 옮긴이는 알베르틴의 성격에 대하여 디오니소스 신이 상징하는 쾌락과, 자전거와 골프가 상징하는 현대성을 동시에 구현하며 동성애적인 성향을 암시하고 있다고 각주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콩브레의 전원풍경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라거나, 발베크의 바닷가 풍경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내는 솜씨를 보면 엘스티르와의 만남은 화자의 글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들어서면 많은 미술작품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직 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화가들>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화가와 그들의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첫 번째 에피소드를 읽고서 화자가 인용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할 수 있는 데까지 구해서 읽어본 것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으면서 이해의 깊이를 더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화자가 할머니와 함께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발베크에 이르는 여정도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열차에서 맞는 아침을 묘사하는 장면도 대단합니다. “나는 진홍빛을 발하는 변덕스럽고도 아름다운 아침의 그 불연속적이고도 대립되는 단편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화폭에 담기 위해…(3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