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를 선물하는 남자 - 명화와 함께 읽는 나의 섹스 감정 수업 29
김진국 지음 / 스토리3.0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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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서 난감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읽은 책에서 얻는 느낌은 반드시 리뷰로 남긴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어떻게 하나 싶어서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지켜온 원칙을 깨고 싶지는 않아서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 책을 해당출판사의 북카페를 통하여 받았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손을 든 사람에게 제공된 것인데, ‘명화와 함께 읽는’이라는 카피에 마음이 끌려 ‘나의 섹스 감정 수업’이라는 카피를 무시했다고 변명을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본래의 목적이었던 ‘명화와 함께 읽는’은 제 생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편집자의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세상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책은 어쩌면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을 것 같습니다. 일본처럼 춘화가 공공연하게 나도는 나라도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어진을 그렸다는 화가가 그렸다는 춘화가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만 그림들이 은밀하게 나돌았다는 것에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성(性)에 대한 담론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기술(?)인 면은 더욱 은밀하게 전수(?)되곤 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작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1995년에 <유라의 하루>를 써 베스트셀러작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데, 읽어보지는 못했고, 심지어는 이 책에 대한 리뷰도 읽어보지 못해서 언급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서울의 학원가에서는 스타급 국어강사로 소문이 나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합니다. 누구나의 인생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인 듯, 학원가에서 잘 나가던 작가의 삶이 꺾인 것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유라의 하루>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을 내면서 출판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고, 한때 잘 나가던 출판업이 IMF를 만나면서 커다란 짐이 되면서 작가의 삶에 그늘을 드리웠던 것 같습니다. 잘나가던 분들이 좌절을 겪게 되면 새로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고 합니다만, 저자의 경우는 거리로 나서지 않고, 스타강사 시절 보여준 강의능력을 바탕으로 인터넷 방송이라는 영역에서 새로운 삶을 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저런 과정을 거쳐서 19금 성인방송으로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멀티를 선물하는 남자>에서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작가가 진행하는 방송에 참여하는 시청자들은 참 솔직한 분들이었나 봅니다. 그런 분들의 호응 속에서 방송수위가 점차 올라가다 보니 경고를 받게 되고 결국은 방송자격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고, 그 참에 아예 방송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책으로 묶어내자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출판은 방송보다는 훨씬 넓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29개의 강좌를 성스킬에 대한 내용을 모은 1부와 성풍속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모은 2부로 구성되어 있고, 3부는 저자의 인생역정을 담았습니다. 성스킬의 기본은 상대여성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행위로부터 얻는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으려면 남성이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물은 여성이 여러 차례 절정에 이른다는 ‘멀티 올가’를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의 리뷰에서도 지적했던 것입니다만, 성을 통해서 얻는 여성의 느낌을 남성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저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습니다. 다양한 성감대와 지스팟을 공략하면 여성이 멀티 올가에 이를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 이탈리아에서 여성의 지스팟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학연구 결과가 발표된 것을 보면 우리의 성에 대한 상식은 근거없이 막연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일단 공감한다는 제 입장을 밝힙니다.

 

책을 읽는 분에 따라서는 다양한 여성을 상대로 한 저자의 성경험이 은근한 자랑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는 공연한 걱정도 해봅니다만, 카사노바나 돈후앙의 성 이력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왔고, 성에 대한 생각들이 개방된 세상에서는 기우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은밀한 공간을 통해서 확산되던 성기술에 대한 담론이 이 책을 통해서 수면 위로 올라온 만큼 검증절차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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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는 즐거움 - <걷기예찬> 그 후 10년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문신원 옮김 / 북라이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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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년 전 아내와 함께 주말을 이용해서 서울근교에 있는 걷기에 좋은 길을 찾아다닐 무렵, 다비드 르 브르통교수의 <걷기예찬; http://blog.joins.com/yang412/12935107>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걷기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라도 받으면, <걷기예찬>의 모두(冒頭)에 나오는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는 구절을 꼭 인용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양기화, 아내와 함께 하는 주말걷기, 신동아 2012년 12월호, 356-359; http://blog.joins.com/yang412/13036544). 브르통교수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사회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몸’의 문제를 천착하여 <몸과 사회> 등 많은 저서를 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걷기예찬>은 단순한 산문집이 아닙니다. 철학적이고 진지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걷기를 통하여 몸의 세계를 회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계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어느 새 우리 몸의 본래적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걷기는 우리 자신을 인간 본연의 차원으로 되돌려 놓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은 ‘걷기’에 ‘느림의 미학’을 더한 브르통교수의 신작입니다. 걷기에 느림을 업그레이드하게 된 것은 걷기는 단순히 공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도 동원되는 행위라는 점을 깨닫게 된데 있다고 합니다. 걷기는 시간을 버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우아하게 잃는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걷기는 시간을 충분히 차지하되 느릿느릿 차지하는 일이며, 삶의 의욕을 꺾는 현대의 그 절대적인 필요성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62쪽)”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느림은 옛것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새로운 트렌드이기도 합니다. 모 통신사의 ‘빠름빠름빠름’이라는 광고카피가 빠름을 추구하는 요즈음의 추세를 잘 나타낸다고 한다면, ‘느림’은 빠름을 추구하는 트렌드에 대한 반동이라고 하겠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 http://blog.joins.com/yang412/12858261>에서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설파한 피에르 쌍소는 일찍이 “(느림)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과제이다.”라고 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12쪽, 동문선, 2000년) 그리고 ‘길은 느리게 살 수 있는 지혜와 작은 일에도 감탄할 줄 아는 지혜를 준다.’라고 적었습니다. 역시 걷기가 느림을 회복하는 좋은 방법이 되는 이유라는 것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에 쫓기던 제가 걷기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된 동기는 대책 없이 불어나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시작한 산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운동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그저 빠르게 걸었습니다. 체중이 적절한 수준으로 줄어든 다음에도 체중을 유지하기 위하여 산책을 이어갔고, 산책은 주말을 이용한 근교의 하이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 일간지의 주말섹션에 소개되는 걷기에 좋은 길을 따라 걷다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http://blog.joins.com/yang412/12825144>에 소개된 52개의 코스를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걷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고,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걷기예찬> 10년 후에 저자는 “오솔길이나 도로 지나기, 숲이나 산을 활보하기,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가는 기쁨을 만끽하기, 이 모든 걷기는 오로지 자신의 신체 수단 하나에만 몸을 맡긴 채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일이다.(9쪽)”라고 다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 유용성, 수익,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요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걷기는 느림, 유연성, 대화, 침묵, 호기심, 우정, 무용성을 우선시하는 저항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저자는 우리가 걷는 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길은 대학과도 같다. 단순히 지식을 나눠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정신을 다듬고 늘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 길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돌아보기에 알맞은 존재의 철학까지 전파하기 때문이다.(11쪽)” 

 

자, 그럼 느림으로 업그레이드된 브르통의 ‘신(新) 걷기예찬’을 살펴볼까요?  저자는 걷기야 말로 인간의 본질로 회귀하는 길이라고 설파합니다. “천천히 길을 걷노라면 세계 내의 존재가 관능의 극치에 도달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받을 줄 아는 자에게는 은총이 넘쳐나는 세상의 낯익은 구성 속 작은 돌파구, 평행한 세계에서 감춰진 비밀의 천 사이로 보이는 장면들과도 같은 순간들이다.(114쪽)” 제가 주말에 다녀온 곳들 가운데 유독 기억나는 곳은 오산에 있는 마등산 솔숲으로 난 길입니다. 빽빽하지 않은 소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에는 솔가루가 수북하게 떨어져 있고, 솔향이 진하게 넘치고 있었습니다. 걷는 것에 더하여 볼거리와 냄새까지 더해진 것이 기억을 강하게 한 것 같습니다. 아! 산비둘기가 우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역시 카프리의 정원을 걷다가 공간을 찢는 듯한 새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 울음소리가 한순간에 세상을 내면의 공감으로 바꿀 수 있더군. 우리는 새가 제 스스로의 가슴과 세상의 가슴을 구분할 거라고는 여기지 않으니까.(126쪽)” 

 

탈 것으로 이동할 때보다 걷을 때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예리해집니다. 그리고 느리게 걸을수록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심에서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인하여 오감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자연에 들면 오감을 뒤흔드는 소음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자극을 오롯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세상은 아낌없이 선물을 주고 여행자 또한 탐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모든 여행은 감각을 통한 전진이요, 관능으로의 초대이다. 행복한 감각들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그곳에 있음을 수없이 확인시켜 준다.(67쪽)” 

 

때로는 길이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장소로 안내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쥘리안 그라프가 프랑스 중부 트롱세 지역의 숲길을 걸었을 때의 경험을 인용합니다. 달도 없는 발 깊은 숲을 가로지르다 보니, 숲은 질서와 무질서가, 어둠과 빛이, 생기와 무기력이, 믿음과 두려움이 결합되어 뒤섞인 세계였던 것입니다. 시각은 거의 먼 곳을 보지 못하고 귀를 쫑긋하고 세워 청각을 극도로 긴장시켜도 세상의 분명한 경계를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내장산 숲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상으로 안내할 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길은 때로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곳으로 안내한다는 저자의 설명에 공감하는 이유입니다. 

 

그라프가 한밤중의 숲에서 경험한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느낌에 대하여 저자는 ‘밤은 어떤 이들에게는 감사와 안도감 그리고 내향성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 채 공포와 위협을 구현하기고 한다.(71쪽)’라고 밤의 양면성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전자보다는 후자인 편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삼군사관학교에서 16기로 군의후보생 훈련을 받을 때, 처음으로 100km행군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저녁을 일찍 지어먹고 학교를 떠나 이튿날 해질 무렵에 복귀하는 훈련입니다. 학교를 출발해서 어둠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대오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정 무렵이 되면서 대오가 흩어지면서 앞에 가는 대원도, 뒤에 따라오는 대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동행하는 대원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밤길을 가다보면 곁에 가는 대원이 정말 사람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별이 총총한 밤에 대한 낭만주의는 버려야 할 것이라고 권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존 뮤어가 요세미티 계곡에서 보낸 밤처럼 특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둡고 거대한 두 암벽 사이로 보이는 좁은 하늘 띠에서 맑은 별빛이 반짝였다. 내가 그곳에 누워 그날 하루의 교훈들을 마음속에 되새기는 사이에 갑자기 보름달이 염려의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내밀어 협곡을 굽어보는 듯해서 깜짝 놀랐다. 마치 홀로 있는 내가 걱정스러워 살펴보기 위해 방 안에 들어온 사람처럼 하늘의 제자리를 벗어나왔다고 말하는 듯했다.(75쪽)” 그래서일까요? 밤에 걷는 일은 시간을 기막히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그 세계, 어슴푸레한 달빛은 태초 이래로 거의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밤길이 더 낭만적이었을까요? 

 

<희망의 발견>의 저자 실뱅 테송(Sylvain Tesson)은 “장거리 보행자에게 글이란 가장 강렬한 진정의 순간이다(…). 저녁마다 글을 쓰면서 여행자는 또 다른 표면으로 길을 계속 이어가고 페이지 위에서 전진을 연장한다.(89쪽)”라고 했답니다. 걸으면서 경험하는 찰나의 느낌마저도 잊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놓는 습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정의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 혹은 꼼꼼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언젠가 기억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지만,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망각의 영향으로 여정의 흔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걸을 때 느낀 감동을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뒷날 읽어보면서 그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으며, 이렇게 붙들어온 느낌을 다시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록은 또한 나 아닌 다른 이에게 그와 같은 여정을 뒤따르고자 하는 동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제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을 따라간 것처럼 말입니다.

 

서울성곽을 따라 남산의 북쪽 산책길을 걸은 적이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1603555) 그때 남긴 글에 “도심에 4km 가까운 산책길을 만날 수 있는 대도시가 얼마나 될까 싶다”라고 적었습니다. 서울 도심에는 특색 있는 산책길이 산재해있습니다.(김영록, 박미경 지음,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서울, 수도권) 도시를 걷는 일에 대하여 저자는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도시에서 걷는 일은 군중, 익명성과 마주치는 일이다.’라고 한 저자는 “도시의 보행자는 지나면서 서로의 삶의 사건들을 간파하고, 존재의 단편들을 주워 모으고 도시를 자신이 일등석을 차지한 극장으로 바꾸어놓는다.(179쪽)”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도시를 걸으면서 만나는 타인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 아닐까요? 

 

피에르 쌍소는 시골길을 걸을 때만큼이나 우리의 후각을 설레게 해주는,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은밀한 길들을 도시에서도 일찌감치 발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도시 역시 우리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냄새를 풍기고, 감촉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들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와 도시의 존재 사이에 교감이 일어남을 느낀다는 것이며, 도시에서 특유의 고유한 음색과 분위기를 느끼려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도시에게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 97-112쪽, 동문선; http://blog.joins.com/yang412/12286006) 역사가 오래된 서울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초현대적인 모습이 있는가 하면, 북촌처럼 수백 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곳도 있습니다. 그런 곳들은 천천히 걷지 않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걷기는 용어의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의미에서 땅에 발을 딛는 것, 즉 자신의 존재 속에 똑바로 서는 일이다(220쪽)’라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모든 길은 우선은 자신의 내면에 묻혀 있다가 발길 아래 기울고, 특정한 목적지로 이끌기 전에 자신에게로 이끈다. 그리고 때로는 마침내 자아의 행복한 변화에 도달하는 좁은 문을 열어준다.(230쪽)”라고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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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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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일상을 벗어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행이야말로 일상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싶습니다. <헤세의 여행>을 옮긴 홍성광님은 ‘여행을 통한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정신에 활력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장소가 아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얻게 된다.(9쪽)’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통하여 얻은 다양한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 때문에 글로 남겨놓은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사진을 찍어두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사진만으로는 기억을 되살리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희망의 발견>의 저자 실뱅 테송(Sylvain Tesson)은 “장거리 보행자에게 글이란 가장 강렬한 진정의 순간이다(…). 저녁마다 글을 쓰면서 여행자는 또 다른 표면으로 길을 계속 이어가고 페이지 위에서 전진을 연장한다.(89쪽)”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행의 감동을 글로 남기는 작업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뜻은 있으나 엄두를 내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종류의 글 역시 일반적인 글쓰기와 같은 맥락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행에 관한 글을 많이 읽고 따라하다 보면 점점 좋은 글을 남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데미안> 등으로 우리와 친숙한 헤세는 당시 유럽사회의 유행처럼 많은 여행을 하고 그 느낌을 에세이로 남겼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에세이들을 모아 엮은 <헤세의 여행>은 여행의 느낌을 글로 옮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주로 보는 여행을 하는 저와는 달리 여행에 대한 헤세의 생각은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여행의 시학은 일상적인 단조로움, 일과 분노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우연히 함께 하고, 다른 광경을 관찰하는 데에 있다.(36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헤세는 평소에 만날 수 없는 사람과 사물을 체험함으로써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행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여행자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여행자는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낯선 것에 담긴 본질의 비밀을 끈질기게 알아내려 노력해야 한다.(41쪽)”라고 했습니다.

 

이 책은 24세부터 50세까지 헤세가 쓴 여행과 소풍에 대한 에세이와 여핼 기록을 엮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1901, 1911, 1913), 보덴호 산책(1904),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등지의 아시아 여행(1911), 테신지역의 소풍(1919~1924). 독일 남쪽 지역의 방랑(1920) 그리고 뉘른베르크 등지의 낭송여행(1927) 등입니다. <싯다르타; http://blog.joins.com/yang412/10451704>에서 헤세가 불교에 매우 심취해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그 배경을 <헤세의 여행>에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의 석굴불교사원을 찾았을 때의 느낌을 헤세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제 노 승려가 가장 안쪽의 문을 열었다. 그곳은 칠흑 같이 캄캄했고, 뒤쪽의 암석 동굴은 닫혀 있었다. 촛불을 들고 다가가자 어떤 거대한 형체가 불빛과 그림자 속에서 흔들리며 나타났다. (…) 전율이 느껴졌다.(238쪽)” 헤세는 생애의 절반 이상을 인도와 중국연구에 바쳤는데, 헤세가 유럽을 증오하고 도망친 이유는 유럽의 현저한 몰취미, 시끄러운 대목장 영업, 성급한 조바심, 거칠고도 조야한 향락욕 등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뇌와 불안과 절망의 세월이 여러 해 지나는 동안 유럽의 구원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도, 유럽을 적대시하려는 생각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왜? 존경하는 동양과 병들고 고통 받는 유럽 사이의 큰 차이는 사실 헤세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부처와 담만파다, <도덕경>이 고향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순수하게 들렸고, 더 이상 수수께끼 같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서 좋은 글을 읽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만, <헤세의 여행>에 나오는 주옥같은 글 가운데 하나만 뽑으라면 다음 구절로 하겠습니다. “저녁녘엔 호수나 그 뒤편 숲 속의 모래밭, 갈대나 풀밭을 찾아갈 시간이 된다. 호수는 따듯한 혓바닥으로 석양에 물든 모래밭을 핥고 있다. 낚시꾼들이 긴 낚싯대를 여윈 장딴지 위에 올려놓고 꿈꾸듯 개울 어귀에 서 있다. 산들은 저녁의 색조를 띄어가고, 저녁의 금빛 마법이 세상을 넘어간다.…(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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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보는 미국 살림지식총서 83
채동배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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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들어 유난히 쟁송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개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도 만나기도 했습니다. 변화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보수적인 사법계가 쉽게 변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문지상에서 거론되는 사건들 가운데 화제가 되는 판결도 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바뀌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이건 아닌 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도 법학전문대학원제도가 정착되고, 배심원제도가 도입되는 등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도는 미국의 사법제도에서 들여온 것입니다. 다양한 미국의 모습을 공부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사법제도를 요약하면서 어떻게 우리나라에 적용할 것인가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는 채동배교수의 <법으로 보는 미국>을 읽었습니다. 벌써 10년도 넘은 옛날에 나온 책이기는 합니다만, 미국의 사법제도가 크게 변한 것이 없는데다가, 저자의 제안 가운데 법학전문대학원제도와 배심원제도가 이미 도입된 것을 보면 책의 내용에 대한 신뢰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미국 사법제도가 형성되고 전개되어온 과정과 연방 및 주정부의 법원조직이 어떻게 구성되며 사법체계에서 활동하는 법조인들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자격을 얻게 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영국인들이 신대륙으로 진출이 확대된 것은 영국국교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신교도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라고 합니다. 청교도들은 법률에 의한 규제를 혐오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공업이 발전하고 인구가 빠르게 늘어가면서 소유권을 분명하게 해줄 필요가 늘었습니다. 법률가 즉 변호사의 수요가 늘게 되었고, 변호사는 영국 유학을 통하여 법률을 공부한 사람이나 현역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법률지식을 배우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법률대학원의 시조는 1870년부터 25년간 하버드 법률대학원장을 지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랭들이라고 합니다. 당시 하버드 법률대학원에서는 계약법, 재산법, 권침법, 헌법, 형사소송법 등을 개설하였고, 교육방법도 암기식이나 주입식이 아닌 문답법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오래 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드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을 통하여 강의실 풍경을 기억합니다.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한국의 사법개혁 시리즈입니다. 그 첫 번째가 변호사 양성제도의 개선입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1만명에 달하는 법과대학생들 가운데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극소수를 제외한 법대졸업생들이 배운 지식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며,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폭주하는 업무가 문제가 되던 시절입니다. 또한 재판전 증거교환제도와 배심재판의 필요성도 제기하였습니다. 세 가지 가운데 법학전문대학원제도와 배심원제도는 이미 도입이 되었습니다. 저자의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중복되는 점도 있습니다만, 1) 재판 전 상로 증거교환제도, 2) 배심재판제도, 3) 형사피의자의 권리를 존중할 것, 4) 제1심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 5) 제한적 관할권을 가진 법원을 더 설립해야 할 것, 6) 법관의 임명제도의 개선, 7) 헌법재판소를 대법원에 흡수해야 할 것 등입니다. 읽어보면 미국의 사법제도를 통하여 충분히 검증된 것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법이나 법조계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점은 미리 밝혀둡니다.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검찰조직의 개혁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선 조직을 뜯어 고쳐 형사피의자의 인권을 우선하는 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등검찰청과 대검찰청을 설치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증인을 출두시키는 방법의 개선도 있는데, 영장보다는 조금 낮은 수준으로 판사가 서명한 소환명령서 혹은 출두명령서를 사용하면 증인이 검찰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만,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저자는 미국의 사법부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만약 정부나 국가기관이 적법절차 없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범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러한 불법과 횡포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주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우리나라의 사법제도 역시 이와 같은 정신을 살리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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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흔적을 찾아서
바바라 해거티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영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신은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목도 그렇습니다만, ‘생명의 DNA에서 죽음 이후까지, 뇌의 회로에서 우주의 과학까지 신의 존재를 찾아 나선 위대한 탐사’라는 카피에 끌려서 읽게 된 <신의 흔적을 찾아서>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현재까지의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입니다.

 

저자는 25년 경력의 탐사전문 작가인 바바라 해거티입니다. 과학과 종교의 해묵은 논쟁거리인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주제에 접근하게 된 것은 저자의 영성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라는 기독교 교파의 가풍에서 자란 저자가 몸살에 걸렸을 때 타이레놀을 복용하여 증상이 호전되면서 종교를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19세기 말경 미국의 에디 부인이 창립한 기독교의 분파로 죄, 병, 악은 모두 허망하다고 깨달음으로써 만병을 고칠 수 있다는 정신요법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이듬해 저자는 암에 걸려 있는 복음주의자를 인터뷰하면서 영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 몸보다 정신이 먼저 반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 어쩌면 위험이 닥쳤다는 신호가 느껴졌다. 나는 뒷덜미의 머리카락이 쭈볏해지는 걸 느꼈고 심장박동이 좀 빨라졌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지금처럼 말이다. (…) 나는 만질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어떤 존재에 조금씩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휩싸였다. 꼼짝할 수 없었다.(13쪽)” 이런 존재를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영적 경험을 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 이런 사람들에 대한 뇌과학적 연구결과를 뒤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유전자분석과 뇌화학적 분석 그리고 대뇌의 전기적 활동을 연구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임사체험이 등장하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습니다. 유전학적 연구로 영성이 높은 사람들에서는 VMAT2라는 유전자의 발현빈도가 높더라는 것인데, 이 유전자는 도파민과 세로토닌이라는 뇌활성 전달물질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고 있습니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퍼싱어는 저자가 생각하는 영적 경험의 정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우주의 온전한 존재가 무엇이든 그것을 경험할 때 그건 뇌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179쪽)” 역사적으로 과학이 성취해온 과정을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코페르니쿠스가 바로 잡았고, 우리가 특별한 창조물이라는 환상은 다윈이 깼고, 프로이트는 우리가 논리적인 동물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다’라고 요약하면서, 인간이 동물종으로서 극복해야 할 마지막 환상은 바로 ‘신’이 인간의 뇌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존재라는 환상, 즉 우리가 그 존재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신의 존재나 영적 체험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겠다고 하면서도 과학적 타당성을 충분히 검토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사례들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열두 살 된 소년이 13센티미터의 작은 망원경으로 토성을 보았다는 기억입니다. 아이들을 위하여 천문대를 방문하였을 깨 꽤나 큰 망원경을 통하여 토성의 고리를 관찰했던 저의 기억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시신경이 손상되어 볼 수 없었던 여성이 유체이탈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누워있는 여자가 자신의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영적체험이 일어났다는 증거, 지문을 남긴다는 걸 과학은 증명해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마이클 퍼싱어의 설명으로 충분히 기각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지만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부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저자가 토마스 쿤이 내놓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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