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 월남가다 - 하 - 조선인의 아시아 문명탐험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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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 5박6일의 일정으로 베트남의 하롬베이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돌아보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학회나 출장이 아닌 순수한 목적의 여행으로는 처음이고,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으로도 처음이었습니다. 아주 갑작스럽게 결정된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 회사일이 꽤 바빴기 때문에 여행사를 고르는 것조차도 수월치 않아서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미리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가이드에 의존하는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도올 김용옥선생의 <앙코르와트 월남 가다>를 읽고 보니 아쉬움이 더 하는 것 같습니다.

 

도올은 2004년 초, 6개월간에 걸쳐 문화방송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사상사 강의를 진행해왔는데,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편집을 끝낸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8일에 걸쳐 앙코르와트와 베트남을 돌아보고, 여행에서 느낀 점을 정리하여 그해 12월 26일 탈고하였다는 것입니다. 돌아본 유적의 세밀한 부분은 물론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부분을 담고 있어 미리 읽었더라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읽을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저 역시 간략한 여행기는 블로그에 소개를 하였지만, 여행 전체를 되짚어 생각할 기회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서양적 가치기준으로 아시아문명을 평가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한 시도라는 저자의 의도가 읽히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때로는 거친 듯, 때로는 현학적인 듯, 그리고 때로는 지나친 듯한 저자 특유의 분위기도 같이 읽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아시아인들은 너무도 자신의 이해를 서구인들이 아시아를 이해한 방식에 의존하는 경향을 과시하여 왔다. (…) 이제는 아시아인들이 아시아인들 스스로의 공통된 문화적 감각을 가지고 서로를 직접 이해하는 교류의 장을 펼쳐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도올이 한국인으로서 캄보디아와 월남을 처음 여행한다는 이 사실은 바로 이러한 아시아적 공감성의 한 고리로서 일차적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확신한다.(27-28쪽)” 하지만 저자의 시각은 때로 지나치게 아시아적 가치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가 비판하는 대상이 되고 있는 쪽의 시각을 대비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프롤로그에 적고 있는 ‘여행은 이탈이다’라고 하는 여행에 대한 정의가 재미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일상을 탈피하여 휴식을 가지는 것을 이탈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이탈은 새로운 체험의 획득이 없다면 무의미하다고 조건을 달고 있는데, 프로이드, 베버를 거쳐서 정신병에까지 화두를 넓혀가는데 결국은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듯하여 조금은 거부감도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 역시 여행기를 정리할 때는 날자 별로 느낀 점을 정리합니다만, 저자 역시 날자 별로 무언가를 독자들에게 전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첫날은 인천을 떠나 호치민시의 탄 손 나트 공항에서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가는 비행기로 환승을 한 것 같습니다. 대한항공 베트남지사장이 게이트까지 출영을 한 모양입니다. 저자의 유명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이날은 지사장과 나눈 베트남 이야기로부터 적고 있습니다. 호치민과 김우중회장이 화제에 올랐던 모양입니다. 이어서 캄보디아의 현대사의 아픔이라할 크메르 루즈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엄청난 자국 국민을 학살한 그에게 나누어줄 일말의 동정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둘째 날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고대사로부터 근대사까지 요약하면서 앙코르문명의 세밀한 부분까지 미리 적고 있습니다. 오전에 프레아 코에서 시작한 여정은 바콩신전을 돌아보고 점심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오후에는 반테이 스레이를 거쳐서 프놈 바켕에서 마치고 민속춤을 즐겼다고 합니다. 셋째 날은 앙코르 톰에서 시작해서 바이욘사원, 피메아나카스, 코끼리 테라스, 타 프롬을 거쳐 닉 펜까지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넷째 날에는 대부분 앙코르와트를 구경하고 프놈 바켕을 다시 들러 저녁에는 평양 랭면관을 찾았던 모양입니다. 저 역시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만, 지나치게 형식적인 공연과 틀에 박힌 음식이 별로라는 생각이었습니다만, 저자는 긍정적으로 느꼈던 모양입니다. 닷새째에는 톤레삽 호수를 보고서 다시 호치민시로 돌아와서 베트남 총영사와 만찬을 즐겼다고 합니다. 엿새째는 통일궁과 구찌터널을 구경하고 하롱베이를 보기 위하여 하노이로 이동했고, 이날은 바딘광장 주변을 구경하고 하롱베이로 이동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레째에는 하롱베이를 보고 다시 하노이로 돌아와서 수상인형극 공연을 감상한 다음 여드레째에 인천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고 합니다.

 

특히한 것은 주달관의 진랍풍토기를 비롯하여 캄보디아의 모습을 기록한 다양한 전적을 직접 인용하고 있어 캄보디아를 이해하기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의 일정을 고려해보면 저자가 논하고 있는 앙코르와트 유적의 세밀한 부분까지 직접 확인할 시간이 충분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리하면, 앙코르와트를 방문할 생각이 있는 분들이라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옛 유적 역시 아는 만큼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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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렇게 산만해졌을까 - 복잡한 세상, 넘쳐나는 기기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
알렉스 수정 김 방 지음, 이경남 옮김 / 시공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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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이베리아 반도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스마트폰 요금 때문에 데이터사용에 제한을 두었던 것도 있지만 통화를 제외하고는 인터넷접속이 아예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서 처음에는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관심이 여행으로 옮겨가면서 이내 적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저도 상당히 전자기기에 목이 매여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디지털장비에 관심을 빼앗겨 정신 못 차리고 있는 현대인들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알렉스 수정 김 방 박사님의 <나는 왜 이렇게 산만해졌을까>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일본 교토의 이와타야마 원숭이공원에서 살고 있는 짧은꼬리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는 말을 시작하고 있어 당혹감이 들게 합니다. ‘갑자기 왜 원숭이 이야기?’ 그러다가 이 원숭이들이 인간처럼 똑똑하지만 진득하게 집중하지 못하는 점까지 빼닮았다는 부분에 이르러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디지털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관조적 컴퓨팅’을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관조적 컴퓨팅을 실천하려면 네 가지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정보통신기술과 우리의 관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밀접하다. 둘째, 세계가 갈수록 산만해지지만 우리는 확장된 마음을 다시 원래대로 제어할 해결책을 갖고 있다. 셋째, 기술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확장된 마음은 다시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관조적 컴퓨팅의 출발은 호흡을 다시 가다듬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이메일무호흡증’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다시 생각해보니 저 역시 수시로 메일함을 열어보는 습관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메일을 확인할 때 숨을 쉬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테크놀로지 컨설턴트, 린다 스톤이 처음 ‘이메일무호흡증’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기억해야 할 사항-약속일정, 전화번호 등-을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기기에 아웃소싱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려는 노력보다는 어디에 보관했던가를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는 이를 ‘분산기억’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집중력의 저하로 이어지는데, 이는 곧 호흡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1장에서 문제점을 요약한 저자는 이어서 몇 가지 문제해결이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즉 일처리방식을 단순화하고 집중력을 돕는 프로그램 사용하기,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프로그램으로부터 탈피하기, 이메일, SNS 등 전자기기에 얼마나 매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을 거쳐서 디지털공간으로부터 탈출하여 휴식을 취하거나 관심을 재조정하기 등, 다양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관조적 컴퓨팅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멀티태스킹에 대한 개념을 잘 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산용어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멀티태스킹은 ‘두 가지 이상의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만, 저자는 이런 경우를 스위치태스킹이라고 구분하고, 멀티태스킹은 ‘마음속에 여러 과정의 활동을 간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다시 정의하였습니다. 즉 스위치태스킹은 사람을 산만하게 하고 기운을 빼는 비생산적인 것이지만, 멀티태스킹은 인류의 오늘이 있도록 한 좋은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최대 8시간까지 인터넷 접속을 막아주는 ‘프리덤’이라는 프로그램과 집중력을 높여주는 ‘다크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집중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책읽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혹은 저자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위하여 숱하게 나오는 괄호 안에 넣어둔 글들은 정작 책읽는 이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관조적 컴퓨팅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윈의 산책길-샌드워크-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전체적인 글의 흐름은 이해가 쉬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걸으면 해결된다’라는 작은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종교인들은 걸으면서 묵상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서 마음을 맑게 하고 영적 기운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걸을 때 가장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라고 했던 것처럼, 저 역시 중요한 글을 써야 할 때는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가다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관조적 컴퓨팅을 실행에 옮길 때 사용하는 여덟 가지 원칙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들 원칙과 친숙해지면 깨어있는 마음, 자기실험 그리고 회복 등의 힘을 빌어 정보통신기슬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확장된 마음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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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뇌하뇌
스티븐 M. 코슬린 & G. 웨인 밀러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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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뇌과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당연히 뇌에 관한 책이라고 하면 관심이 끌리기 마련입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좌뇌형과 우뇌형으로 나누던 심리유형을 부정하고 새로운 뇌기능과 심리학 이론을 제시한 <상뇌하뇌>를 받아들고 큰 기대 속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이론의 틀은 세웠지만, 아직도 검증해야 할 점이 많이 남아 있는 이론으로 보입니다. 스탠포드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스티븐 M 코슬린교수와 작가 웨인 밀러가 같이 쓴 <상뇌하뇌>는 제목 그대로 인간의 뇌가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좌뇌와 ‘예술적이고 직관적인’ 우뇌의 역할에 따라서 인지유형을 구분하는 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신경해부학적 특징에 근거한 상뇌와 하뇌의 역할에 따라서 사람들을 네 가지 인지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론을 읽으면서 “우리는 아직 중요한 대목에서 아직 이론적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많은 핵심적 예측이 아직 경험적으로 엄격하게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10쪽)‘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띕니다. 학술논문이 아니라 대중서로 이론을 발표하는 것 역시 충분한 과학적 근거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우선 세 가지 핵심개념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첫째, 뇌에서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기능이 다르다는 것이다. 상뇌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반면 하뇌는 바깥 세계와 관련해 유입된 정보를 분류하고 해석한다. 둘째, 인지유형이론에 따르면 선택이 가능한 경우, 즉 당면한 상황이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는 경우에는 상뇌와 하뇌 각각에 의존하는 정도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셋째, 네 가지 가능성에서 네 가지 기본적인 ’인지유형‘, 즉 개개인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형성된다, 등입니다.

 

먼저 육안적으로 보았을 때 상뇌와 하뇌의 영역을 구분하였고,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뇌가 각각의 영역에 따라 맡고 있는 기능들을 분류하고, 그에 따른 인지유형을 구분하고 있는데, 특히 뇌졸중으로 손상받은 부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인지유형이 이론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고 보입니다. 그 유형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의 네 가지 질문입니다. 1. 자유 여신상은 어느 손에 횃불을 쥐고 있는가? 2. 시곗바늘이 3시5분을 가르킬 때의 각도가 8시 20분의 각도를 가리킬 때의 각도보다 큰가? 3. 미키 마우스의 귀는 어떤 모양인가? 4. 양상추와 시금치 중 어느 것이 더 짙은 녹색인가? 사실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서 인지유형을 구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쉽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자들은 상뇌와 하뇌의 기능의 차이가 인지유형을 결정한다고 했으면서도 ‘우리가 상뇌 시스템과 하뇌 시스템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었지만, 그 시스템들을 사용한 결과는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다.(83쪽)“라고 한 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2부에서 저자들은 상뇌와 하뇌의 사용 정도에 따라서 각각 운동자 유형, 지각자 유형, 자극자 유형 그리고 적응자 유형의 네 가지 인지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제시하고 있는 논리가 충분한 근거가 있는가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개별 유형의 대표적인 인사들의 사례를 들고, 전형적인 유형을 가상의 사례로 설명하고 있는 것 역시 논리적이지 못한 접근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3부에서 저자들은 상뇌와 하뇌의 사용 정도를 평가하는 자가테스트의 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틀만 제시하기 보다는 이러한 틀을 사용하고 다수의 사람들을 평가한 데이터를 제시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인지 유형이 변할 수 있다는 설명에서 의문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대뇌의 형태나 기능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완성되고 뇌졸중이나 퇴행성뇌질환과 같은 질병상태가 아니면 변화가 없다고 볼 것이므로, 인지 유형이 변화할 수 있다면 저자들이 제시하는 이론이 완전하지 않은 면이 있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저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보완 발전시켜 나가야 할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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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팀장이 쓴 채용노트
이병권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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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공개채용을 비롯하여 스카우트를 포함한 특별채용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취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IMF사태를 기점으로 하여 힘들어진 젊은이들의 취직이 여전히 힘들다고 합니다. 그동안 다양한 직장에서 일을 해왔지만 역시 경쟁을 통한 공채가 제일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경쟁을 뚫고 입사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실패한 경우가 훨씬 많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실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가 투명하지 못한 것도 한 몫을 했던 것 같습니다.

 

취업문제로 고민을 하는 분들이 궁금해 할 우리나라의 취업시장에 대한 비판서가 나왔습니다. 역시 다양한 회사의 인사부서에서 일을 해온 이병권교수님이 쓴 <인사팀장이 쓴 채용 노트>입니다. 취업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에게 부정적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지피지기하면 백전백승한다는 고사를 떠올린다면 이를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발상을 전환할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예를 들면, “경력채용의 경우에도 실제 채용보다는 지원자를 통해 시장분위기, 최신 정보 등을 파악하기 위해 소위 간만 보는 면접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경력직의 주요 채용루트인 헤드헌팅, 서치펌의 채용실적을 보면 이 같은 경향이 많이 드러난다. 공기업, 공기관의 경우 내부에서 낙하산으로 확정된 사람이 있음에도 대외적으로 절차적 공정성을 표시하기 위해 무의미한 채용공고를 내기도 한다.(41쪽)”라는 구절 같은 경우입니다. 경쟁에서 실패한 경우에는 이런 상황을 많이 의심하게 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자는 이런 회사를 가려내는 방법도 안내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기본적으로 이 책은 당장 취업을 눈앞에 둔 청년지원자와 곧 입사할 예비 사회인들을 위해 기획․구성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서점의 취업코너에서 흔히 마주치는 입사지원서 작성요령, 취업정보, 면접요령, 인․적성검사 수험서 등, 피상적 내용을 다룬 책과는 달리 치열한 기업의 채용현장에서 나온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였다.“라고 프롤로그에 적은 것처럼 취업 혹은 채용에 관하여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 될 것 같은 우리나라 채용시장의 현황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학력과 학벌 그리고 배경 등이 채용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불공정게임의 양상이었던 기왕의 채용 트렌드가 변하고 있다는 희망을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취업대란, 그래도 답은 있다.’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답을 얻기 위하여 우리나라 기업의 채용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기업이 지원자를 파악하는 관점이라든가, 지원자들이 대기업을 선호하는 이유, 그리고 틈새를 파고들기 위해서는 전문성으로 승부하라는 조언에 이르기까지 핵심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다음에는 실제상황이 되겠지요? 2부에서는 서류전형과 필기전형 그리고 면접전형에 이르기까지 전형의 단계에 따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실용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사실 인․적성검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답답해하는 지원자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인․적성검사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진솔하고 일관되게 답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이렇게 해서 입사에 성공한 신입사원이 조직 안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꿈꾸며’라는 마지막 세션의 제목처럼 입사한 직장에서 꿈꾸어왔던 희망이 활짝 피는 미래가 되면 좋겠지요?

 

전체적인 내용에는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 가지 제가 근무하는 직장에서 운용하고 있는 인턴제도는 저자의 지적처럼 혈세를 낭비하는 제도가 아니라 임직원들이 급여의 일부를 내어 직장을 구하는 젊은이들에게 직장생활을 익히는 기회로 운용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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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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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에서 특정 분야의 역사를 다룬 책은 몇 차례 소개한 적은 있습니다만, 정통 역사서를 다룬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딱딱한 내용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작하려면 일단 비장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역사서를 읽기 전에 역사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겠다 싶어 고른 책입니다. 조금 딱딱하다 싶은 책은 집중이 잘되는 장거리 여행을 할 때 좋습니다. 얼마 전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리트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습니다.

 

분명하게 밝힌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A. L.로즈박사에 이어서 1961년에 맡았던 여섯 차례의 강연에서 발표하기 위하여 준비한 내용으로 보이며, 역사가와 그가 다루는 사실과의 관계, 사회와 개인과의 차이점, 역사와 과학 그리고 도덕 사이의 관계,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역사적 행위의 측면에서의 진보의 본질적 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측 등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볼테르가 만든 역사철학의 개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역사란 사실들의 집합체로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역사철학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옥스퍼드의 철학자이며 역사가인 콜링우드가 정리한 역사 철학에 대한 견해 - “역사철학은 ‘과거 그 자체’에 관한 것이라거나 ‘과거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의 사유(思惟)’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되는 그 두 가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이다.”-를 발전시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라는 함축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역사가들이 흔히 간과하기 쉬운 역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리를 통찰한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 다는 점이다. 둘째,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셋째,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책을 읽을 때는 항상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음치이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역사가가 말을 못하는 멍청이일 것이다.(40쪽)’라고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는 누가 만들어내는가? 혹자는 개인이 남긴 기록도 개인의 역사가 될 수 있다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개인이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이었을 것입니다. 사회 역시 그 구성원들에 의하여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해석하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역시 한 사람의 개인이고,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사적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전하게 삼자적(三者的) 위치에서 사실을 들여다보는 일이 수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87쪽)”라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여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재 역시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라고 하였고, 역사가는 오늘의 사회와 과거의 사회가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와 과학이라는 분야에는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까요? 다음백과사전에서는 역사과학을 “과거에 있었던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사실과 사상(事象)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빈델반트는 학문 방법상 자연 과학에 대립시켜 “인간에 관한 사물과 현상을 반복이 불가능하고 일회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 보고 연구, 기술하는 과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1)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2)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3)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4)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리고 (5)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라는 이유로 역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견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역사가는 언어사용에서부터 과학자들처럼 일반화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역사적 사실들에 간여하는 요소들을 단위로 분해하여 그들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의 방법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자, 역사가, 그리고 자연과학자의 목표와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다만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의, 사회과학자와 그의 자료 사이의,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이 지속적이며 끊임없이 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역사와 사회과학의 남다른 특징으로 생각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가 역시 과학자들처럼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문제를 제기하고 역사에서의 인과관계를 추구해감으로서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적 사실의 원인들을 서로 연결하는 인과관계가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한 것인가에 관한 논란에 대하여 저자는 ‘역사에서의 결정론; 혹은 헤겔의 간계(奸計)’라는 주제와 ‘역사에서의 우연; 혹은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플라톤으로부터 헤겔,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결정론을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있고 그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 중에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다른 식으로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념”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사실 역사적 사건 역시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인도 없이 행동하며, 그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것을 고찰하는 관점에 따라 자유롭기도 하고 동시에 결정되어 있기도 하다(145쪽)’라는 한발 물러선 모호한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는 반복된다’면서 역사가 보여준 인과를 반복하지 말자는 경고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리한 일반화과정을 적용한 산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연론은 “역사란 전체적으로 우연의 계속이라는, 즉 우연의 일치에 의하여 결정되고 가장 뜻밖의 우연에서만 유래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이론입니다. 기원전 3체기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연론은 특히 영국의 역사가 베리와 피셔 등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연적 원인은 일반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역사에서의 원인은 합리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역사에서의 해석은 가치판단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인과관계는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현재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하여 부단하게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진보하려고’, 즉 어떤 역사적 ‘법칙’이나 진보라는 ‘가설’을 실현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위에 진보라는 가설을 적용하여 해석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라는 것입니다.

 

‘지평선의 확대’라는 마지막 강의에서 저자는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내놓고 있습니다. 저자의 강연이 있을 무렵,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난 공산혁명의 충격으로부터 서서히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위험스럽기까지 한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어려움들로부터는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쟁 끝에 도래하리라고 예견되었던 세계경제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다.(9쪽)” 그리하여 저자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를 표명하였던 것인데, 2판의 서문을 보면, 이후 찾아든 동서냉전구도는 저자가 품었던 희망과 만족감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던 모양입니다. 핵멸망의 위협은 배가되었고, 뒤늦게 시작된 경제위기는 서구사회 역에 걸쳐 산업국가들을 황폐화시키고 실업을 확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든 1판의 결론에서 저자는 세계의 파국을 예언하는 목소리들이 퍼지고 있어도 영국이 나아가 세계가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것이며 또한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했고, 현재 세계는 저자의 예언대로 여전히 진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990년 소련의 해체를 저자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축이 서유럽을 떠나 북미대륙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런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에 의문을 달아놓았습니다. 저자는 러시아혁명의 본질을 이성의 확대로 보았습니다. 유럽이 이성의 확대를 외면하는 사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혁명이 확산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즉 인민대중이 사회인식과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고, 각자의 집단들을 과거와 미래가 있는 역사적 실재로 깨닫게 되었다는데 의미를 둔 것입니다. 저자는 1955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친 풀리블랭크교수가 “중국이 인류 역사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223쪽).”라는 확신을 밝혔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점을 우려하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제 중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낙관주의자임을 표명하는 저자가 영국이, 나아가 영어사용권 국가들이 전반적인 역사의 진보에서 뒤처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무기력하게 또한 체념한 채로 어떤 향수 어린 침체상태에 빠져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던 것인데, 그의 불안감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1982년 타계하는 바람에 2판의 서문만 완성되었을 뿐이어서 1판에 더해질 저자의 새로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여전히 역사철학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역사서를 읽을 때 좋은 지침이 될 것입니다. 책의 말미에는 편집자가 저자의 자료철에서 뽑은 ‘제2판을 위한 노트’가 덧붙여있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1판의 내용을 상당부분 보완한 새로운 생각들을 담을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이기에 아쉬움이 큰 것 같습니다. 저자가1판에서 무게를 두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실패한 혁명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힘과 운동이 도처에서 싹트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고, 그러한 움직임을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내용을 정의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 역시 정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볼세비키 혁명이] 그 첫 번째 단계였던 세계혁명, 그리고 자본주의의 몰락을 완성시킬 세계혁명은 제국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식민지 인민들의 저항이 되리라는 가설을 진지하게 고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269쪽)”라고 노트의 말미에 적은 카의 믿음은 개인적으로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움직이고 진보한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놓치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는 빠르게 진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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