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캘리그라피 - 모슬렘 아이덴티티와 아름다움
이희숙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번 이베리아 반도와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이슬람 건축물을 포함한 다양한 문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세밀하면서도 정교하고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지만, 이슬람 문화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어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없었습니다. 아랍문자 역시 전혀 해독할 수 없으니 기묘하다는 느낌 정도만 남았을 뿐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아랍문화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면서 이희숙박사님의 <이슬람 캘리그라피>를 만나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위키백과에서 “캘리그래피(영어: calligraphy, 그리스어: κάλλος kallos ‘아름다움’ + 그리스어: γραφή graphẽ ‘쓰기’)는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을 뜻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캘리그래피는 14~16세기 북부 이탈리아의 서풍을 이어받아 처음 시작했고, 영국의 에드워드 존스턴(Edward Johnston)이 이를 부흥시켰고, 기욤 아뽈리네르가 캘리그래피라는 용어을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국에는 왕휘지 필체가 유명하고, 우리에게는 추사체가 유명하듯 문자를 아름답게 꾸며 써는 기술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에는 워드를 사용하려다 보면 다양한 필체를 쉽게 적용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필체를 특별하게 고안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이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여 익혀야 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슬람 캘리그라피>에서 이슬람세계와 아랍문화, 그리고 이슬람 캘리그라피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고, 이어서 현대에서는 이슬람 캘리그라피를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가 쿠웨이트에서 진행한 연구자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함마드에 의하여 창시된 이슬람은 알라를 유일신으로 하는 종교로 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전한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코란과 예언자의 말인 하디스를 사리아, 즉 거룩한 법으로 삼아 모슬렘-이슬람을 믿는 사람들 - 개인과 공공의 실제 생활을 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한 입구에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샤하다, 기도를 의미하는 살라트, 순례를 의미하는 하지, 금식을 의미하는 소움 그리고 자선 헌금을 의미하는 자카트가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합니다. 코란이 이슬람 캘리그라피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코란을 책으로 발간하고, 새로운 문체와 장식으로 발전시켜 모스크의 미나레와 아치 등에 새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기 이슬람 문서에 나타난 캘리그라피는 체계적이며 모뉴멘탈하고 기하학적인 쿠픽문자와 평시 사용되는 흘림 글씨나 속기에 사용되는 곡선적인 나식문자가 있다고 합니다. 9세기 후 20여개 이상의 초서 문체가 있었지만 부침을 거듭하여 다양한 모양의 초서체가 남아 전해내려왔다고 하는데, 저자는 대표적 초서체의 발전과정과 그 모양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씨이면서도 예술적 향기가 넘치는 그래픽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슬람에서 캘리그라피의 중요성은 코란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장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17쪽)’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코란의 68장은 ‘펜으로 그들이 쓴 것...(33쪽)’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며 96장에는 ‘하나님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펜으로 가르치신 분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캘리그라피는 이슬람 건축에서 중요한 장식 요소로 발전하게 되는데,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에도 아름다운 쿠픽과 여러 문체의 캘리그라피가 아라베스크와 기하학적 모티브가 얽힌 밴드렐리프로 모자이크에 새겨졌다고 합니다. 특히 알람브라의 모든 벽에는 ‘하나님이 없이는 승리도 없다’라는 문장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캘리그라피는 기하와 아라베스크와 함께 이슬람 오너먼트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동지중해지역에 자라는 아칸투스와 바인 스코롤에 기원을 두는 아라베스크의 기본 특징은 계속된 한 줄기에서 갈라지는 대신, 한 특수 식물이 어떤 방향으로 서로 성장하는 기하학적 패턴이라고 합니다. 기하는 틀짜기, 채우기 그리고 연결하기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구성되어(125쪽), 미적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노린다고 합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이슬람 예술에 대한 나스르의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 예술은.... 신성한 책, 코란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시키는 캘리그라피의 형태에 결합하고, 기하와 꽃패턴을 이용해서 물질을 고상하게 만드는 한 방법이다.(126쪽)”

 

저자는 역사적 유물에 남아있는 캘리그라피는 물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캘리그라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고 있어 생소한 이슬람 캘리그라피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생소한 이슬람문화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즈음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 퓨전 사극 <비밀의 문>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역사는 불변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새롭게 발굴되는 자료가 기존의 정설을 뒤엎기도 하고,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재해석의 범위가 지나쳐 역사를 왜곡한다는 우려를 낳기도 합니다. 특히나 역사학의 범주가 아니라 흥미본위의 드라마 혹은 영화의 경우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KBS에서 PD로 활동하면서 숱한 히트 프로그램을 연출하였고, 영화에서도 히트작을 냈을 뿐 아니라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도 한 이상훈 작가님의 <한복 입은 남자>는 중세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할 가능성을 던지는 계기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물론 충분한 근거가 뒷받침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세종시대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과, 중국 명나라 시절에 대항해시대를 연 정화, 그리고 이탈리아의 천재적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론의 시작은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였고, 다빈치의 비행기와 다연발 로케트의 스케치가 조선의 비차와 신기전과 흡사하다는 내용이나, 세종실록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장영실에 대한 기록, 명나라 정화의 마지막 대항해에 대한 미스터리 등을 기본 조각으로 하고, 그 사이에 빠져 있는 그림들을 채울 퍼즐조각은 혹시 존재할 수도 있는 가상의 기록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현실의 이야기는 미스터리한 면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고 과거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다큐PD를 중심으로 현존하는 퍼즐조각과 가상의 기록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다룬 현재의 이야기와 재구성된 자료를 토대로 한 과거의 주인공들, 즉 장영실, 정화 그리고 다빈치가 연결되는 과정을 다른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책읽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작가는 장장 10여년에 걸쳐 역사적 자료를 빈틈없이 준비하고 충분한 고증을 거쳤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직은 추론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장영실이 세계의 르네상스에 영감을 불어넣었을 위대한 천재 과학자였을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재조명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절대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허구가 아닌 것이다. 500여 년의 시공간을 뛰어 넘어 역사 저 건너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쳤을 뿐이다.(520쪽)”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로마 교황청이 중심이 되어 신을 모시는 일이 우선인 유럽과 신으로부터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아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일이 우선인 동양의 철학적 차이를 장영실을 통해서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는 나에게 배운 지식을 더욱 발전시켜서 과학과 기술이 세계를 지배하도록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신을 위한 세상이 아닌 사람을 위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본주의다. 과학과 기술이 인본, 즉 사람이 중심이 되어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여기까지 보낸 조선의 임금의 뜻이자 또한 나의 뜻이다.(438쪽)” 그리고 보니 세종의 통치철학은 르네상스시대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 역사에 남아 있는 정화의 대항해는 아프리카까지 진출하고서 7차로 중단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정화가 로마에 나타났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정화의 선단이 로마에 가는 길에 장영실이 동행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놓고 있는 것이며, 유럽보다 먼저 제작된 정화의 세계지도가 유럽의 항해가들에게 전해서 지중해를 벗어나 먼 바다로 나서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정화를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포르투갈의 왕이 바스코 다 가마를 내보내 정화의 항로를 거슬러 올라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에 이르렀고, 정화의 세계지도는 컬럼버스와 미젤란으로 하여 대서양을 건너 동양에 닿을 수 있고, 세계일주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부피는 만만치 않습니다만, 방송과 영화를 통하여 이야기를 재미있게 버무려온 작가의 날렵한 솜씨 덕분에 단숨에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저 측우기와 자격루를 발명했다고만 알고 있는 천재 과학자 장영실을 다시 조명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윤복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단체로 관람하는 내내 다른 친구들 몰래 눈물을 감추느라 꺽꺽 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주인공이 그래도 살아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내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상상도 해보면서 그렇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깜찍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대구가 배경이 된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현대의 미국 어느 지방도시가 배경이 되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시대와 문화가 다르고 주인공이 남자 어린이와 여자 어린이로 각각 다르기 때문에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어느 날 아빠가 25센트짜리 동전꾸러미 세 개와 1달러짜리 지폐만 가득한 마요네즈 통만 남기고 사라지는 바람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 고물차에서 잠을 자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열한 살짜리 소녀가 당신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린 아들과 딸을 재울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서 투 잡을 뛰어가며 정신없이 일하는 엄마가 아빠처럼 도망가지 않고 지켜주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조지아는 몇 일째 샤워를 못해서 떡진 머리와 몸에서 나는 냄새를 친구들이 눈치 채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아빠와 엄마를 원망하면서 해결하라고 졸라대는 철부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엄마가 졸지에 직장에서 해고되자 자신이 나서서 집세를 마련할 길을 모색하는 깜찍한 면도 있습니다. 문제는 부잣집 개를 훔쳤다가 돌려주고 사례금을 받는 별로 권장하지 못할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순진한 남동생을 범행에 끌어들이는, 사회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할 언니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짓까지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개를 훔치는 전체 과정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단계별로 처리해야 할 상황을 목록으로 만들어 검토하는 것을 보면 조지아는 꽤나 주도면밀한 성격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남동생까지도 범행에 끌어들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보면 우리의 아이들은 때로 부모가 생각하지 못하는 면모를 보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장기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은 반발심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조지아의 범행모의가 잠시 생각에 그치는 정도였다거나, 아니면 산뜻하게 성공했더라면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여러 가지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우선은 거리 하나를 소유한 부자로 생각했던 개주인이 사례금조차 마련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훔친 개를 숨겨둔 장소에 낯선 이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이 나쁜 길로 빠져드는 것을 원치 않은 작가께서 구원투수를 투입한 셈입니다. 구원투수는 경찰이나 개주인에게 조지아의 범행사실을 알리기보다는, 조지아가 저지른 일이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우회적으로 교훈을 주기까지 합니다. 사회의 어른으로서 본받을만한 점이 많은 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의 전개와 마무리는 책을 읽으실 분들을 위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번역의 차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옮긴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266쪽)”라는 <안나 까레리나>의 첫구절을 소개했는데, 연진희님이 옮긴 민음사판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이 더 실감이 나는지는 읽는 분들마다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윤복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단체로 관람하는 내내 다른 친구들 몰래 눈물을 감추느라 꺽꺽 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주인공이 그래도 살아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내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상상도 해보면서 그렇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깜찍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대구가 배경이 된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현대의 미국 어느 지방도시가 배경이 되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시대와 문화가 다르고 주인공이 남자 어린이와 여자 어린이로 각각 다르기 때문에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어느 날 아빠가 25센트짜리 동전꾸러미 세 개와 1달러짜리 지폐만 가득한 마요네즈 통만 남기고 사라지는 바람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 고물차에서 잠을 자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열한 살짜리 소녀가 당신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린 아들과 딸을 재울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서 투 잡을 뛰어가며 정신없이 일하는 엄마가 아빠처럼 도망가지 않고 지켜주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조지아는 몇 일째 샤워를 못해서 떡진 머리와 몸에서 나는 냄새를 친구들이 눈치 채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아빠와 엄마를 원망하면서 해결하라고 졸라대는 철부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엄마가 졸지에 직장에서 해고되자 자신이 나서서 집세를 마련할 길을 모색하는 깜찍한 면도 있습니다. 문제는 부잣집 개를 훔쳤다가 돌려주고 사례금을 받는 별로 권장하지 못할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순진한 남동생을 범행에 끌어들이는, 사회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할 언니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짓까지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개를 훔치는 전체 과정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단계별로 처리해야 할 상황을 목록으로 만들어 검토하는 것을 보면 조지아는 꽤나 주도면밀한 성격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남동생까지도 범행에 끌어들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보면 우리의 아이들은 때로 부모가 생각하지 못하는 면모를 보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장기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은 반발심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조지아의 범행모의가 잠시 생각에 그치는 정도였다거나, 아니면 산뜻하게 성공했더라면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여러 가지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우선은 거리 하나를 소유한 부자로 생각했던 개주인이 사례금조차 마련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훔친 개를 숨겨둔 장소에 낯선 이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이 나쁜 길로 빠져드는 것을 원치 않은 작가께서 구원투수를 투입한 셈입니다. 구원투수는 경찰이나 개주인에게 조지아의 범행사실을 알리기보다는, 조지아가 저지른 일이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우회적으로 교훈을 주기까지 합니다. 사회의 어른으로서 본받을만한 점이 많은 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의 전개와 마무리는 책을 읽으실 분들을 위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번역의 차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옮긴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266쪽)”라는 <안나 까레리나>의 첫구절을 소개했는데, 연진희님이 옮긴 민음사판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이 더 실감이 나는지는 읽는 분들마다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말에 부산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일을 마치면 바람처럼 서울로 돌아오던 평소와는 달리, 국제시장 좁은 골목길에 있는 어묵집에서 유부전골을 먹고 광복동으로 가서 씨앗호떡을 먹고 작은 카페에서 꿀자몽을 먹는 등, 여유를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세밑이 가까워진 탓인지 국제시장이나 광복동거리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처음 가보는 국제시장에서는 다양한 생활용품이나 구제품을 정말 싼 가격으로 팔고 있었고, 광복동 거리는 휘황찬란한 전등으로 장식되어 있어 벌써 연말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흔히 걷는다고 하면 복잡한 도시의 거리를 떠나 한적한 시골길을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소요자’라는 별명을 얻은 발터 벤야민은 한가로이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소요(逍遙)는 공원과 같이 자연 속을 걷는 산책(散策)과는 달리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을 말합니다. 이날 우리는 빛과 연말분위기로 넘쳐나는 광복동 거리를 ‘소요(逍遙)’했습니다. <걷기예찬; http://blog.joins.com/yang412/12935107>에서 “도시 안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은 혹시 뭔가 유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나 싶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숲속을 지나가듯이 길을 걷는다.(192쪽)”라고 적었던 다비드 르 브르통처럼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나 빛의 장식은 물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두루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거리의 구경거리 앞에 붙들리는 단순한 구경꾼과는 달리 발터 벤야민은 파리의 거리를 걸으면서 도시와 군중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요소들을 서로 중첩시켜가면서 생각하였고, 종국에는 그 가치를 전복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도시의 거리를 즐겨 소요한 벤야민처럼 많은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사유하기를 즐겼기에 ‘걷기’를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 같습니다. 걸으면서 어떤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지, 또 걷기를 즐겨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본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 걷기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소개하려고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파리12대학과 파리정치연구소의 정치철학 담당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셸 푸코를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걷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첫 글부터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저자는 ‘걷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길을 걸어왔는지, 어느 산책길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지, 어떤 곶(岬)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한다.’라고 하면서 ‘느리게 가는 데 걷는 것만큼 좋은 건 일찍이 없었다(10쪽)’라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산책을 마치고는 ‘오늘은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체중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걷기를 시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집근처 산책길을 벗어나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걸을 때에는 주변을 살펴보는 여유를 가지기도 합니다만, 아직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책을 살펴볼까요? 모두 스물일곱 꼭지의 글을 담았습니다. 그 가운데 열하나는 비트 제너레이션,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튀르 랭보, 장 자크 루소 등 걷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도시의 소요자’ 발터 벤야민은 대도시 파리의 아케이드를 소재로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에 대하여 탐구한 미완의 대작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남길 정도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도시를 천착하였습니다. 벤야민이 고독과 속도, 투기욕 그리고 소비 등 자본주의가 도시에 남긴 문제점을 짚어냈다면, 저자는 도시를 소요하면서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군중들은 서로의 무관심 속에서 고독이 깊어지는데, 소요하는 사람은 도시의 군중 속으로 숨어들면서 관찰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익명의 대중으로부터 분리해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오직 빨리 가기만을 원하는 군중들이 정신줄을 놓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소요하는 사람은 자기 몸의 속도를 늦춤으로서 정신이 보다 많을 것을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통해서 저자는 산책의 의미를 정리합니다. “산책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일과 작별하는 것이다. 책과 서류를 그냥 놓아두고 나가는 것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걷는 사람의 몸은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가고, 정신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즉 한가하다고 느낀다.(237쪽)”라고 정의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에서 프루스트는 메제글리즈쪽과 게르망트쪽 두 개의 산책길을 소개합니다. 사실 그 책을 두 번 읽었지만 ‘두 개의 산책길이 마르셀에게는 다른 느낌을 남겼구나’ 정도로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데리크 그로는 두 개의 산책길이 어린 마르셀에게는 두 개의 완벽하게 다른 세계였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산책은 하나의 완전한 정체성이자 얼굴이며 인격이기 때문이다. (…) 오솔길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어린아이는 조약돌의 모양과 나무들의 윤곽, 꽃향기 등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234쪽)”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로는 어린아이들의 몽상적인 성향, 상상력이 풍부한 성향을 어른들의 현실적 객관성과 대립시켜서는 안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마르셀이 홍차에 찍어먹는 마들렌과자의 촉감으로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서, 프루스트 역시 어른의 시각으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그래도 프루스트가 어린 마르셀의 눈에 비치는 메제글리즈쪽과 게르망트쪽의 산책길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다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걷기에 대한 그로의 생각 가운데 ‘느림’의 의미를 새겨보기로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  http://blog.joins.com/yang412/12858261>에서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걷기’야 말로 느림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피에르 쌍소는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41쪽, 동문선, 2000년; http://blog.joins.com/yang412/12264918) 그런데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는 시간을 충분히 차지하되 느릿느릿 차지하는 일이며, 삶의 의욕을 꺾는 현대의 그 절대적인 필요성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라고 해서 쿤데라와 쌍소를 절묘하게 배합한 느낌을 받습니다.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느리게 걷는 즐거움 62쪽, 북라이프,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499319).

그러면 느리게 걷는 비법이 따로 있을까요? ‘한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놓기’라는 단순해 보이는 걷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걷는 사람에게 있어 느림이란 빠름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로는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은 이따금 속도를 내어 빨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곧 걸음을 늦춘다. 그의 움직임은 단속적(斷續的)이며, 두 다리는 파각(破角)을 만들어낸다.(58쪽)” 그리하여 ‘느림은 무엇보다도 조급함의 반대’라고 정의하면서 느리게 걷는 비결은 우선 발걸음이 보여주는 극도의 규칙성이자 일률성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잘 걷는 사람이 이 정도로 걸으면 미끄러져 간다고 말해도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마이클 잭슨이 <스릴러>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문워크처럼 보인다는 것이겠지요? 저자는 천천히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천히 걸어야 할 날들은 무척 길다. 이런 날들은 걷는 사람을 더 오래 살게 만든다. 매 시간을, 매분을, 매초를 억지로 서로 잇고 가득 채우는 대신에 그것들이 숨을 내쉬도록, 더욱 심오해지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59쪽)” 느리게 걷기, 즉 느리게 산다는 것은 장수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걷기는 활동의 조건이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니체의 걷기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자극을 받아 비로소 사상으로 더듬어 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문밖에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걸으면서, 뛰면서, 오르면서, 춤추면서, 우리는 즐겨 적막한 산이나 바닷가의 길을 사색하며 걷는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409쪽, 366. 어떤 한문적인 책을 앞에 놓고, 동서문화사, 2009년; http://blog.joins.com/yang412/13023753)”라는 구절을 인용한 저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그것만을 토대로 하여 자기 책을 썼으며, 너무나 많은 책들이 도서관의 곰팡내를 풍긴다.(33쪽)”라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즉 남의 생각을 베낀 책은 독자들이 외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책을 가지고 써낸 책들을 인용문으로 포식하고 주석을 과식해서 ‘뚱뚱한 거위’처럼 무겁고 뚱뚱해서 느리고 권태롭게 읽힌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북소리]의 독자 여러분께서도 크게 공감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갑자기 키보드 치는 손길을 머뭇거리게 됩니다.

 

1879년 9월에 쓴 편지에서 니체는 “겨우 몇 줄만 빼놓고 전부가 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생각났으며, 여섯 권의 공책에 연필로 휘갈겨 썼다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저자가 니체의 걷기를 인용한 뜻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유럽 남부의 도시들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야외를 걸으며 생각을 가다듬어 책을 구상하였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뚱뚱한 거위 같은 책을 쓰는 저자들과는 달리 ‘걸으면서 구상하는 사람은 얽매인 데가 없어 자유롭고, 다른 책의 노예가 되지도 않고 확인 때문에 둔해지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사유에 의해 무거워지지 않는다.(35쪽)’라고 걷기의 장점을 설파하였습니다. 곧 시작할 스페인 여행기에서 지나친 인용보다는 여행을 통하여 제가 느낀 것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인용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글머리를 열어 자신이 생각하는 길로 읽는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꼭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저 또한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글 꼭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경험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써야 할 글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산책에 나서는 습관이 생긴 것은 딱히 칸트나 니체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스페인 여행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에 눈뜨게 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눈 아래 보이는 것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보면 그것들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 낑낑대며 암벽 위로 기어 올라가 거기 앉아보라. 드넓은 전망이, 광활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때 느껴지는 도취감을 느껴보아야 한다.(87쪽)” 그런데 낑낑대며 암벽 위로 올라가는 수고조차 아끼는 여행자들도 적지 않으며, 암벽 위로 올라간 다음에 바로 인증샷을 찍고 뒤돌아서는 여행자들도 많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볼 때서야 그곳에서의 무엇을 느꼈던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작은 사진에 압축된 광활한 풍경을 재대로 풀어낼 수 있도록 꼼꼼히 뜯어보는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증샷에 자신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행자에게 전망은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증샷으로 찍은 사진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잘 찍은 그곳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자신의 모습을 포토샵으로 집어넣으면 될 일입니다.

 

뚱뚱한 거위 같은 책쓰기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걷기에 관하여 다양한 인용문을 챙기고 있어 걷기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걷기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라면 책읽기를 마치면 바로 걷기에 나설지도 모를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