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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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부산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일을 마치면 바람처럼 서울로 돌아오던 평소와는 달리, 국제시장 좁은 골목길에 있는 어묵집에서 유부전골을 먹고 광복동으로 가서 씨앗호떡을 먹고 작은 카페에서 꿀자몽을 먹는 등, 여유를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세밑이 가까워진 탓인지 국제시장이나 광복동거리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처음 가보는 국제시장에서는 다양한 생활용품이나 구제품을 정말 싼 가격으로 팔고 있었고, 광복동 거리는 휘황찬란한 전등으로 장식되어 있어 벌써 연말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흔히 걷는다고 하면 복잡한 도시의 거리를 떠나 한적한 시골길을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소요자’라는 별명을 얻은 발터 벤야민은 한가로이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소요(逍遙)는 공원과 같이 자연 속을 걷는 산책(散策)과는 달리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을 말합니다. 이날 우리는 빛과 연말분위기로 넘쳐나는 광복동 거리를 ‘소요(逍遙)’했습니다. <걷기예찬; http://blog.joins.com/yang412/12935107>에서 “도시 안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은 혹시 뭔가 유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나 싶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숲속을 지나가듯이 길을 걷는다.(192쪽)”라고 적었던 다비드 르 브르통처럼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나 빛의 장식은 물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두루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거리의 구경거리 앞에 붙들리는 단순한 구경꾼과는 달리 발터 벤야민은 파리의 거리를 걸으면서 도시와 군중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요소들을 서로 중첩시켜가면서 생각하였고, 종국에는 그 가치를 전복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도시의 거리를 즐겨 소요한 벤야민처럼 많은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사유하기를 즐겼기에 ‘걷기’를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 같습니다. 걸으면서 어떤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지, 또 걷기를 즐겨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본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 걷기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소개하려고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파리12대학과 파리정치연구소의 정치철학 담당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셸 푸코를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걷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첫 글부터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저자는 ‘걷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길을 걸어왔는지, 어느 산책길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지, 어떤 곶(岬)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한다.’라고 하면서 ‘느리게 가는 데 걷는 것만큼 좋은 건 일찍이 없었다(10쪽)’라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산책을 마치고는 ‘오늘은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체중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걷기를 시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집근처 산책길을 벗어나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걸을 때에는 주변을 살펴보는 여유를 가지기도 합니다만, 아직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책을 살펴볼까요? 모두 스물일곱 꼭지의 글을 담았습니다. 그 가운데 열하나는 비트 제너레이션,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튀르 랭보, 장 자크 루소 등 걷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도시의 소요자’ 발터 벤야민은 대도시 파리의 아케이드를 소재로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에 대하여 탐구한 미완의 대작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남길 정도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도시를 천착하였습니다. 벤야민이 고독과 속도, 투기욕 그리고 소비 등 자본주의가 도시에 남긴 문제점을 짚어냈다면, 저자는 도시를 소요하면서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군중들은 서로의 무관심 속에서 고독이 깊어지는데, 소요하는 사람은 도시의 군중 속으로 숨어들면서 관찰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익명의 대중으로부터 분리해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오직 빨리 가기만을 원하는 군중들이 정신줄을 놓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소요하는 사람은 자기 몸의 속도를 늦춤으로서 정신이 보다 많을 것을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통해서 저자는 산책의 의미를 정리합니다. “산책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일과 작별하는 것이다. 책과 서류를 그냥 놓아두고 나가는 것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걷는 사람의 몸은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가고, 정신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즉 한가하다고 느낀다.(237쪽)”라고 정의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에서 프루스트는 메제글리즈쪽과 게르망트쪽 두 개의 산책길을 소개합니다. 사실 그 책을 두 번 읽었지만 ‘두 개의 산책길이 마르셀에게는 다른 느낌을 남겼구나’ 정도로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데리크 그로는 두 개의 산책길이 어린 마르셀에게는 두 개의 완벽하게 다른 세계였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산책은 하나의 완전한 정체성이자 얼굴이며 인격이기 때문이다. (…) 오솔길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어린아이는 조약돌의 모양과 나무들의 윤곽, 꽃향기 등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234쪽)”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로는 어린아이들의 몽상적인 성향, 상상력이 풍부한 성향을 어른들의 현실적 객관성과 대립시켜서는 안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마르셀이 홍차에 찍어먹는 마들렌과자의 촉감으로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서, 프루스트 역시 어른의 시각으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그래도 프루스트가 어린 마르셀의 눈에 비치는 메제글리즈쪽과 게르망트쪽의 산책길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다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걷기에 대한 그로의 생각 가운데 ‘느림’의 의미를 새겨보기로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  http://blog.joins.com/yang412/12858261>에서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걷기’야 말로 느림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피에르 쌍소는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41쪽, 동문선, 2000년; http://blog.joins.com/yang412/12264918) 그런데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는 시간을 충분히 차지하되 느릿느릿 차지하는 일이며, 삶의 의욕을 꺾는 현대의 그 절대적인 필요성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라고 해서 쿤데라와 쌍소를 절묘하게 배합한 느낌을 받습니다.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느리게 걷는 즐거움 62쪽, 북라이프,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499319).

그러면 느리게 걷는 비법이 따로 있을까요? ‘한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놓기’라는 단순해 보이는 걷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걷는 사람에게 있어 느림이란 빠름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로는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은 이따금 속도를 내어 빨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곧 걸음을 늦춘다. 그의 움직임은 단속적(斷續的)이며, 두 다리는 파각(破角)을 만들어낸다.(58쪽)” 그리하여 ‘느림은 무엇보다도 조급함의 반대’라고 정의하면서 느리게 걷는 비결은 우선 발걸음이 보여주는 극도의 규칙성이자 일률성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잘 걷는 사람이 이 정도로 걸으면 미끄러져 간다고 말해도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마이클 잭슨이 <스릴러>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문워크처럼 보인다는 것이겠지요? 저자는 천천히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천히 걸어야 할 날들은 무척 길다. 이런 날들은 걷는 사람을 더 오래 살게 만든다. 매 시간을, 매분을, 매초를 억지로 서로 잇고 가득 채우는 대신에 그것들이 숨을 내쉬도록, 더욱 심오해지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59쪽)” 느리게 걷기, 즉 느리게 산다는 것은 장수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걷기는 활동의 조건이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니체의 걷기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자극을 받아 비로소 사상으로 더듬어 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문밖에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걸으면서, 뛰면서, 오르면서, 춤추면서, 우리는 즐겨 적막한 산이나 바닷가의 길을 사색하며 걷는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409쪽, 366. 어떤 한문적인 책을 앞에 놓고, 동서문화사, 2009년; http://blog.joins.com/yang412/13023753)”라는 구절을 인용한 저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그것만을 토대로 하여 자기 책을 썼으며, 너무나 많은 책들이 도서관의 곰팡내를 풍긴다.(33쪽)”라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즉 남의 생각을 베낀 책은 독자들이 외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책을 가지고 써낸 책들을 인용문으로 포식하고 주석을 과식해서 ‘뚱뚱한 거위’처럼 무겁고 뚱뚱해서 느리고 권태롭게 읽힌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북소리]의 독자 여러분께서도 크게 공감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갑자기 키보드 치는 손길을 머뭇거리게 됩니다.

 

1879년 9월에 쓴 편지에서 니체는 “겨우 몇 줄만 빼놓고 전부가 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생각났으며, 여섯 권의 공책에 연필로 휘갈겨 썼다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저자가 니체의 걷기를 인용한 뜻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유럽 남부의 도시들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야외를 걸으며 생각을 가다듬어 책을 구상하였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뚱뚱한 거위 같은 책을 쓰는 저자들과는 달리 ‘걸으면서 구상하는 사람은 얽매인 데가 없어 자유롭고, 다른 책의 노예가 되지도 않고 확인 때문에 둔해지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사유에 의해 무거워지지 않는다.(35쪽)’라고 걷기의 장점을 설파하였습니다. 곧 시작할 스페인 여행기에서 지나친 인용보다는 여행을 통하여 제가 느낀 것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인용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글머리를 열어 자신이 생각하는 길로 읽는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꼭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저 또한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글 꼭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경험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써야 할 글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산책에 나서는 습관이 생긴 것은 딱히 칸트나 니체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스페인 여행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에 눈뜨게 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눈 아래 보이는 것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보면 그것들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 낑낑대며 암벽 위로 기어 올라가 거기 앉아보라. 드넓은 전망이, 광활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때 느껴지는 도취감을 느껴보아야 한다.(87쪽)” 그런데 낑낑대며 암벽 위로 올라가는 수고조차 아끼는 여행자들도 적지 않으며, 암벽 위로 올라간 다음에 바로 인증샷을 찍고 뒤돌아서는 여행자들도 많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볼 때서야 그곳에서의 무엇을 느꼈던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작은 사진에 압축된 광활한 풍경을 재대로 풀어낼 수 있도록 꼼꼼히 뜯어보는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증샷에 자신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행자에게 전망은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증샷으로 찍은 사진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잘 찍은 그곳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자신의 모습을 포토샵으로 집어넣으면 될 일입니다.

 

뚱뚱한 거위 같은 책쓰기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걷기에 관하여 다양한 인용문을 챙기고 있어 걷기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걷기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라면 책읽기를 마치면 바로 걷기에 나설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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