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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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얼마 전에 북 콘서트에서 만났던 김탁환작가님이 독서에세이 <읽어가겠다; http://blog.joins.com/yang412/13552374>에서 소개한 작품입니다. 마침 쓰고 있는 스페인여행기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다녀온 이야기를 쓰고 있어서 꼭 읽어보려고 마음 먹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미술비평가, 소설가, 사회비평가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영국작가 존 버거의 소설입니다. 존 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하나의 장편 소설이면서도 모두 8개반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독립적이기도 해서 단편소설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의 독자들에게 주는 서문을 보면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 드러납니다. “죽은 이들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나만큼-아니 어쩌면 더-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면 망자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 합니다. (…)그런데 죽은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저 전통적이고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행위였죠. 그러던 것이,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면 전부 ‘퇴물’ 취급을 하는 세계 경제질서에 저항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 너무나 다른 여러 역사 속의 망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문에서 보는 것처럼 작가임을 암시하는 주인공 존은 리스본, 제네바, 마드리드 아일링턴 등 유럽의 여러 장소를 다니면서 누군가를 떠올리고, 만나고,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읽다보면 존이 만나는 사람들은 죽은 이들이고, 그들이 죽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존이 리스본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첫 번째 이야기에 끌리는 것 같습니다. 오월의 끝자락에 포르투갈 사이프러스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어느 광장에서 존이 우연히 조우한 노파가 어머니였습니다. “얼굴이 보이기 한참 전에 걸음걸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착하기 전에 앉을 생각부터 하는 그 걸음걸이. 내 어머니였다(12쪽)” 그렇군요. 작가는 곁을 떠난 사람들 중에서 어머니를 가장 만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망자들은 죽으면 지상에 머물 곳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렇다고 리스본에 와본 적이 있었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장소는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리스본을 머물 곳으로 선택한 이유는 전차가 다니는 몇 안 되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존은 어머니와 이스트 크로이든에서 사우스 크로이든까지 갔다 돌아오는 194번 전차를 즐겨 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와 동행하고 있음에도 위층의 맨 앞자리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 앞자리에 앉고 싶어 했던 것은 운전을 하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모퉁이를 돌 때가 제일 좋았다고 합니다.

 

리스본을 여행할 때 가이드는 리스본이 아홉 개의 구릉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했는데, 리스본 대지진의 기록을 정리한 니콜라스 시라디는 <운명의 날; http://blog.joins.com/yang412/13586205>에서 일곱 개의 구릉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적고 있어 헷갈리고 있는 점이 명쾌해지는 설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도시가 몇 개의 구릉 위에 세워졌는가에 대해서는 좀처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로마처럼 일곱 개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숫자야 어찌됐든 도심은 가파른 절벽 같은 암반에 터를 잡고 있어서 몇 백 미터나 솟아올랐다가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가파른 그 거리들은 현기증을 가져 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왔다.(20쪽)” 바로 그렇습니다. 구릉이라는 것이 높이가 애매하면 합칠 수도 있고 떼어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코메르시우광장은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늘 반쯤 빈 듯한 인상을 준다(24쪽)’라는 표현도 어쩜 그렇게 적절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어머니와의 만남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탓인지 리스본에서의 이야기가 가장 긴 것 같습니다.

 

제네바에서는 딸 카티아를 만났고,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는 기숙학교의 교사였던 켄을 만납니다. 생뚱맞아보이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입니다. 멜론, 복숭아, 자두, 체리, 큐치 등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사상차림에 등장하는 조율시이(棗栗柿梨)라고 해서, 대추, 밤, 감, 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일링턴에서는 학교친구 휴버트, 그리고 오드리를 만납니다. 대체적으로 이야기는 감정을 최대한 자제한 내레이션처럼 건조한 편입니다. 망자와 얽힌 이야기라서 일까요?

 

때로는 기억 속에 묻힌 옛이야기를 끄집어 내 곱씹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것이 아픈 추억일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저의 속살까지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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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징비록 - 지옥 같은 7년 전쟁, 그 참회의 기록
조정우 지음 / 세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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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을 담은 소설 <이순신 불멸의 신화; http://blog.joins.com/yang412/13475791>로 화제를 모았던 조정우작가가 해전에 이어 육지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장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징비록>을 내놓았습니다. 요즈음 대하드라마로 방영 중인 주제이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징비록>은 조선 중기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책입니다. ‘징비(懲毖)란 <시경> 소비편(小毖)편에 나오는 豫其懲而毖後患(예기징이비후환), 즉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라고 풀이하는 구절에서 제목을 딴 것입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따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보입니다.

 

<소설 징비록>에서는 왜란 기간 동안 왜군을 떨게 만들었던 육지전의 명장군 네 분의 행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60전 60승을 기록한 육전의 신화 충의공 정기룡장군, 역시 수많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홍의장군 곽재우, 한줌도 안 되는 군졸들을 중심으로 민간인들까지도 총동원하여 진주대첩을 이끌어 낸 충무공 김시민장군,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왜군들을 떨게 만들었다는 김덕령장군입니다.

 

임진년 왜병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변변치 않은 관군을 궤멸시키며 단숨에 한양을 거쳐 평양성에 이른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임진년에 왜군이 전라도를 점령했다면, 아마 조선왕조는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유는 전라도의 곡창을 지킬 수 있었기에 군량미를 실어 전선으로 나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병은 부산포에 상륙해서 한양까지 천리길을 싸워가며 갔느냐 하는 점입니다. 출병하기 전에 조선에 첩자를 투입하여 지리며 사회 분위기까지 철저하게 조사해갔다는 왜군이 말입니다. 당연히 한양에서 가까운 제물포에 기습상륙하여 단숨에 한양을 들이쳤더라면 전쟁이 터진 후에 우왕좌왕하던 조선왕실의 모습으로 보아 단숨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기에는 전라도 해안을 지키던 이순신장군에 대한 사전정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규모 함대로 기습공격을 가하거나, 아니면 제주섬과 남해안의 중간 정도를 지나면 감쪽같이 우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두 번째 궁금한 점은 개전 초기에 부산포에서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가는 대신 전라도 곡창지대를 확보하여 전장 가까이에서 군량미를 확보하는 전략을 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을 만나기를 피했다면 정유재란 때처럼 전라도를 침공하여 수군의 근거를 육지를 통하여 무너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점입니다. <소설 징비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쟁 초기에는 의병을 모집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군들은 가는 곳마다 마을을 불태우고 조선백성들을 도륙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후환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미리 몸을 피한 백성들이 산중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되면 발목을 잡히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소설 징비록>에서 밝히고자 했던 것은 특히 의병장으로 전쟁에 참가한 세분의 장수는 물론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역시 백성들의 헌신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승리였다는 점에서 백성들의 적극적 참여에 주목하였다고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유부단하며 도망칠 궁리나 했던, 그리고 충성을 다 바친 장수들을 의심하여 징계를 하거나 심지어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선조와 왕을 둘러싸고 전쟁의 승리보다 당파싸움이 우선이라는 시각을 보였던 형편없는 관료들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에도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분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함은 아닐까 싶습니다.

 

듣기로는 김덕령장군의 활약은 왜란 중에나 왜란이 끝나고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전라도에서 활약한 장수들의 공적을 조사하러 왔던 이덕형이 조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파직을 당하는 바람에 조사된 내용이 조정에 보고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묻혀있는 역사를 발굴해서 국민 모두가 알도록 하는 일은 우리의 몫인 것 같습니다. 조정우 작가께서 앞으로도 숨어 있는 자료들을 발굴하여 재조명하는 작업을 꾸준하게 해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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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보물선
이은상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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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다녀온 이야기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포르투갈로 건너가고 있습니다(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 유럽이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던 진기한 물품에 빠져들 무렵 근동지역에 자리한 이슬람제국이 세력을 키워가면서 무역로는 차단하자 동양에 닿는 해로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인데, 그 첫 번째 주자는 운 좋게 이슬람세력을 밀어낸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이상훈작가의 <한복 입은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561516>는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 등장하는 조선남자가 입은 의복에 착안하여 그 사람이 세종조에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진 장영실일 수 있다는 추론을 세우고 있습니다. 장영실을 이탈리아까지 데려간 사람은 역시 동시대 인도양항로를 주름잡았던 정화일 수도 있다는 정황을 들추어내었습니다. 작가가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에서 착안한 점은, 1)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입던 철릭 위에 팔소매 밑단이 없는 답호를 덧입고 있다는 점, 2) 그림의 하단에 그려진 한 척의 배는 당시의 서양에서 만든 배가 아니라 동양의 선박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1402년에 조선에서 그려진 현존 최고(最古)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에는 조선 주변국은 물론 아랍, 인도,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까지 표시되어 있고, 특히 아프리카의 경우 사하라 사막과 킬리만자로산, 빅토리아호수와 나일강까지 선명하게 그려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1763년에 제작된 천하전여총도는 1418년에 정화가 만든 천하제번식공도를 모사한 것인데, 이 지도가 유럽으로 건너가 콜럼버스는 물론 마젤란, 쿡선장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항해가들이 이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장영실은 세종 24년(1442년) 5월이후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아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여섯 차례에 걸쳐 인도양 항로를 누빈 정화는 영락제가 죽고 난 다음 아들 홍희제의 핍박으로 10여년간 공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그 아들 선덕제가 들어선 1431년 7차 항해를 떠났다가 선덕제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는 함대를 분리하여 분리된 함대는 부하가 이끌고 명나라로 돌아와 정화가 항해 도중에 죽었다고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향했던 정화도 항해를 계속할 수 없어 다시 명나라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며, 세종의 후원으로 장영실을 태우고 8차 항해에 나섰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지난한 항해 끝에 포르투갈을 거쳐 나폴리공국에 도착한 정화와 장영실은 교황의 핍박을 예감하게 되고, 정화는 배를 띄워 먼 세상으로 나서고, 장영실은 피렌체로 피신하게 되며, 결국은 루벤스와도 만나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몇 조각 남을 자료를 바탕으로 꾸며 맞추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노릇이라서, 정화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인은상의 <정화의 보물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영락제가 정화에게 명을 내려 서쪽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라 명한 배경으로부터 일곱 차례에 걸친 정화의 항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영락제는 명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과시하고 주변국가들을 복속시키기 위하여 항해를 명했던 것입니다. 정화의 1차 항해는 2천톤급 함선 62척으루 구성되어 27,870명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 서남부의 캘리컷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 제국에 들러 영락제의 즉위를 알리고, 인도양 무역로를 다시 활성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합니다. 저자는 정화가 7차 항해를 마친 1435년 난징에서 사망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명나라는 아랍상인들을 통하여 유럽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정화의 함대는 유럽에 갈 생각이 없었다고 판단합니다.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교역품이 별볼일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정화의 항해가 있은 다음,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한 이후, 아시아국가들, 특히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역의 변천을 다루고 있습니다. 명조에서 청조로 바뀌면서 비단과 자기, 그리고 차 등으로 주력 교역품목이 바뀌어간 과정과 무역역조에 시달리던 영국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사회에 퍼트려 무역역조를 개선하려는 술수를 썼고, 청나라의 중앙정부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은 중국이 외세에 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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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
김재원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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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한 스페인여행의 초반이 그라나다와 코르도바를 거쳐 모로코까지 이베리아반도를 오랫동안 지배한 이슬람문화의 흔적을 따라가는 길이었다면, 모로코에서 돌아와 세비야, 톨레도 그리고 마드리드에 이르기는 여행 후반은 주로 가톨릭문화의 영향을 살펴보는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당을 중심으로 한 건축과 그 성당이 소장하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그저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훑어볼 수밖에 없는 일정과 안목이 아쉬웠습니다. 특히 그저 두어 시간 머물렀던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이 가장 아쉬웠던 곳입니다. 심리학자 폴 퀸네트는 “우리는 자식들에게 속독(速讀)을 가르친다. 아이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한나절에 다 읽기를 바란다. 대문호의 작품을 그렇게 읽는 것은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조깅하는 것이나 루브르 박물관 안을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폴 퀸네트 지음,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온다. 320쪽, 바다출판사, 2014년)”라면서 속독법의 문제를 지적하였지만, 오히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을 보는 우리의 태도를 나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미술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만난 수많은 교회들에서 스치듯 만난 작품들을 다시 새겨볼 수 있을까 싶어 고른 책이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입니다. 인천 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부설 그리스도미술연구소가 기획한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를 관통하여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책입니다. 유럽의 문화가 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헬레니즘문명과 이어진 그리스도교문명을 따라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유럽의 미술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그리스도교 미술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김재원, 윤인복 교수(전, 현 연구소장)와 김정락교수가 필진으로 참여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는 초기-로마제국-비잔틴-중세-로마네스크-고딕-초기 르네상스-전성기 르네상스(-북유럽 르네상스)-매너리즘-바로크-19세기 전반-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으로 이어지는 연대기적(年代記的) 구조를 기본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은 그저 그리스도교 미술의 흐름만을 뒤쫓은 것이 아니라 미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두루 살피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 교회사적 배경, 철학적 배경 그리고 미술사적 현상을 기본으로 하여 그리스도교미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유일신을 신봉하고 그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Messiah)로 믿는 종교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구약을 통하여 구세주의 재림이 예고되어왔는데, 그리스도교는 신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그 예언을 이룬 존재라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세레자 요한 등과 같이 여전히 예언자의 하나이며 구세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믿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 원년에 당시 로마제국의 총독령이었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하지만 역사적 연구에서는 기원전 3년경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30세가 되던 해에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대중 설교를 시작하였고, 33세가 되던 해에 유대교의 제사장들로부터 고발을 당하여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하지만 3일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현현했다고 하며, 선교의 의무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의 제자 12명과 예수 사후에 그리스도교의 포교에 참여한 바오로는 로마제국와 그 변방에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해나갔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바오로는 로마제국의 수도를 선교의 핵심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중심으로부터 확산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흡수한 다양한 민족들을 포용하기 위하여 그들의 종교를 관용하는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역시 선교초기에는 자유롭게 세력을 확산시킬 수 있었지만, 로마제국이 혼란기에 들어서면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로마 당국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비밀결사조직처럼 종교활동을 유지하고 선교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 선교활동은 신분이 낮은 계층을 중심으로 하다가 점차 상류층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재위 284~308년)가 재위하던 시절 그리스도교의 탄압이 절정에 달했지만, 이어진 콘스탄티누스황제(재위 306~3376년) 시절에는 이미 제국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자가 많아졌습니다. 제국의 안에서 여러 세력들과 권력을 나누어 야 했던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그리스도교 세력을 끌어들일 필요가 생겼고, 결국은 밀라노칙령(313년)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종교가 되었고, 황제가 임명하는 주교가 관할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미술은 2세기에 들어 등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교의 성상금지의 영향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고 밀교(密敎)의 형태를 유지했으며, 무엇보다도 미술을 실천할 경제적인 근거가 그다지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16쪽)”이라고 저자들은 설명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당시 공존했던 고대 종교들이 사실적 혹은 자연주의적 표현에 주력하던 것에 반하여 보다 상징적으로 표현적인 조형성을 선호하고, 장식적 요소가 부각된 형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건축은 가정교회와 카타콤의 형태로 남아있고, 초기 카타콤에는 단순한 형태의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혹은 비둘기나 물고기와 같은 상징물을 그려 넣었다가 점차 프레스코형식의 벽화를 남겼습니다. 양팔을 벌려 기도하는 사람들이나 선한 목자와 같은 인간형상을 재현하다가 3세기 말경에는 최후의 만찬이나 제자들 앞에서 설교하는 예수와 같은 역사적 소재를 그렸다고 합니다.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은 뒤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의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2세기경에 등장한 교부-사도들에 이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8세기 무렵까지 그리스도교의 이론을 세우고 이단과의 논쟁을 통하여 교회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인된 그리스도교는 긴 신랑을 가진 장방형의 평면구조를 가진 바실리카형식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교회는 ‘노아의 방주에서 유래된 배’라는 개념으로, 신국 혹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대리적 장소이자 전시장이며, 신앙의 능력이 발생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초기 교회에는 회화보다는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모자이크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리스도의 현현과 사도파견과 같은 주제들을 황제의 의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냈고, 사도나 성인들은 로마의 원로원 복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원 400년경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천도함에 따라 로마제국은 동서로 나뉘었습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이방민족의 침입과 내부의 정치적 갈등으로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제국은 그리스의 고전주의와 인본주의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리스도교 문화를 접목하여 발전시켰고,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천년이 넘도록 이어졌습니다. 헬레니즘 미술을 계승한 비잔틴미술은 동방적 요소인 소아시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미술전통이 융합되어 만들어졌습니다.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대표되는 비잔틴건축은 로마교회의 장방형의 내부와 중앙집중형 건축의 특성을 결합하고, 중앙에 거대한 돔을 얹었습니다. 돔의 아래로는 40여개의 창문을 띠처럼 둘러서 빛의 고리를 만들었고, 둥근 원반으로 보이는 돔의 내부천장이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의 띠에 의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수평적 위계를 드러낸 바실리카교회와는 달리 수직적 위계를 강조한 것이며, 그리스도교 건축이 추구한 상징적이며 초월적 분위기를 드러내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동로마제국이 비잔틴미술을 발전시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유럽은 크고 작은 국가들이 난립하느라 문명이 쇠퇴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를 중세 암흑기라고 합니다. 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그리스도교는 유럽으로 이주해온 이방 민족에게도 전파되었기 때문에 세속의 권력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교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6세기경부터 세속과 분리되어 영성을 쌓는 장소로 세워지기 시작한 수도원은 중세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8세기 경 메로빙거왕조를 폐한 카롤링거왕조의 카를대제에 이르러 유럽이 다시 통합되었고, 800년에는 교황에 의하여 카를대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봉해졌습니다. 카를대제는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피폐해진 유럽의 문화를 재건하였습니다.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하기보다는 민속적이며 사실성과 묘사력이 결여된 당시의 민속미술행태를 지양하고, 고대 미술과의 접목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카를 대제의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고대 예술품을 모사하던 수준을 넘어 본격적인 미술사조라고 할 로마네스크양식이 등장한 것은 936년 오토왕조가 성립되면서입니다. 무거운 반원통형의 아치와 표현주의적이며 고졸한 형태의 조각 그리고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은 회화와 스테인드글라스 혹은 필사본 삽화를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징으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교육도시 살라망카에서 만난 성당은 고딕양식의 신성당과 로마네스크양식의 구성당이 같이 있어, 한 장소에서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양식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건물을 높이 쌓기 위하여 창문이 아주 적고 벽이 두꺼운 것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징이라면, 건축술의 발달로 벽이 얇아지고 창문이 많아지며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장식이 들어가 있으면 고딕양식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습니다. 16세기 조르조 바사리가 쓴 <예술가 열전>에서 중세를 비하하는 의미를 담은 용어로 사용한 것으로 시작된 고딕, 즉 고트족의 미술과 문화는 야만적이고, 무지하고, 고전적인 미감이 결여된 낙후된 미술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풍을 따르려 했던 로마네스크와는 달리 고딕예술은 독창적으로 창조된 자생적 예술이라는데 의의가 있다고 합니다. 고딕예술은 물질을 통해 신의 섭리와 원리를 체감하고 신의 존재를 실감하려 했는데, 특히 빛을 통해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발전된 건축기술은 닫혀있던 벽을 열어 더 많은 자연광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벽이 있던 공간을 채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신비함을 더하여 전성기의 비잔틴 회화에 버금가는 다채로운 색감을 되찾아내었던 것입니다.

 

오랜 기간 유럽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봉건제도는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함에 따라 도시국가들이 등장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으로 집중되었던 권력이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교회 역시 쇠퇴의 기미를 보였는데, 14세기 전반에 걸쳐 로마에 있던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가면서 교황이 프랑스 국왕의 통제를 받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철학적으로도 고대 그리스시대와는 달리 인간과 자연을 부정하며 신을 중심으로 한 철학이 주류를 이루던 중세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철학이 태동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미술은 자연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인체와 생태에 대한 이성적이고 과학적 탐구를 바탕으로 회화, 건축, 조각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미술에는 원근법이 등장하게 되었고, 중세미술의 주류를 이루던 종교미술 외에도 고대 신화와 역사를 신플라톤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조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예로 들었습니다. “미의 여신 비너스는 신 플라톤적 관점에 따라 세속적인 것을 탈피하고, <천상의 비너스>로서 이 세상에 오기 전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보여주는 존재가 된다.(155쪽)”

 

르네상스시기에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절정을 이룬 그리스도교 미술은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근대에 이르러 등장하는 새로운 예술사조에서는 중심에서 점차 밀려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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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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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것이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가 봅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집에 있던 헤밍웨이 전집을 독파하는 것으로 피서를 삼겠다고 작정하고 읽은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스페인의 내전의 성격은 전혀 아는 바 없이 그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국인 로버트 조던이 좋은 편이고 조던이 상대로 싸우는 파시스트가 나쁜 편이라는 이분법을 적용하여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당시 스페인 내전의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된 것은 스페인여행기를 쓰면서 참고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스페인 내전(스페인어: Guerra Civil Española)은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입니다. 1936년 7월 17일 프랑코 장군이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으며, 1939년 4월 1일에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으로 구성된 국제여단이 집권 공화국의 인민전선을 지원하고,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를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 그리고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지원한 것입니다.

 

내전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은 1936년 2월 총선 결과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한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 전선은 토지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였고, 스페인의 지주·자본가·로마 가톨릭 교회의 불만은 고조되었던 것이 계기였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노동자 농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하여 공화파를 지원하였지만, 공화파는 시민군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껴 방관하는 바람에 반란군의 점령지역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고, 오히려 시민군이 게릴라활동을 하는 양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937년 5월의 마지막 주에 미국 몬태나 출신의 로버트 조던이 게릴라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성공하기까지의 3박4일에 걸친 과정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조던은 라그랑하를 거쳐 세고비야를 점령하려는 작전을 세운 골츠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마드리드와 세고비아 사이에 위치한 과다라마 산맥에 위치한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현지에서 조던을 지원하기로 한 민병대를 지휘하는 파블로는 다리를 폭파한 다음에 자신들의 안위가 더 걱정인 것 같습니다. 조던과 협조하는 척하다가 습격당일 아침 폭약과 뇌관을 가지고 사라졌다가 결국은 다시 돌아와 습격에 참여하는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작가는 3박4일의 긴박한 시간 속에서 다리 폭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죽음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작가는 조던이 죽음을 맞는 결말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파블로의 집시아내인 필라르의 점술을 통하여 조던의 운명을 내비치는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변주해내고 있습니다. 특히 조던의 경우는 현장에 도착해서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깨닫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옮긴이는 조던의 이런 면을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안녕을 포기한 채 오직 공동선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조국과는 무관한 스페인의 내전에서 조던이 이루고 싶었던 공동선은 목숨을 다할 가치가 있었을까요? 조던이 죽음을 앞두고 만난 마리아와 사랑을 탐닉하는 모습은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지면서 허무한 느낌마저 드는 것 같습니다.

 

박정은작가는 <스페인 소도시 여행; http://blog.joins.com/yang412/13552146>에서 헤밍웨이가 안달루시아의 론다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전하면서 론다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인용되어 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바로 민병대가 점령한 절벽 위의 작은 마을에서 파시스트를 처형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는 장면이입니다. 그리고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황소와 겨루는 필라르의 옛남편의 모습을 통하여 투우사의 고민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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