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징비록 - 지옥 같은 7년 전쟁, 그 참회의 기록
조정우 지음 / 세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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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을 담은 소설 <이순신 불멸의 신화; http://blog.joins.com/yang412/13475791>로 화제를 모았던 조정우작가가 해전에 이어 육지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장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징비록>을 내놓았습니다. 요즈음 대하드라마로 방영 중인 주제이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징비록>은 조선 중기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책입니다. ‘징비(懲毖)란 <시경> 소비편(小毖)편에 나오는 豫其懲而毖後患(예기징이비후환), 즉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라고 풀이하는 구절에서 제목을 딴 것입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따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보입니다.

 

<소설 징비록>에서는 왜란 기간 동안 왜군을 떨게 만들었던 육지전의 명장군 네 분의 행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60전 60승을 기록한 육전의 신화 충의공 정기룡장군, 역시 수많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홍의장군 곽재우, 한줌도 안 되는 군졸들을 중심으로 민간인들까지도 총동원하여 진주대첩을 이끌어 낸 충무공 김시민장군,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왜군들을 떨게 만들었다는 김덕령장군입니다.

 

임진년 왜병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변변치 않은 관군을 궤멸시키며 단숨에 한양을 거쳐 평양성에 이른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임진년에 왜군이 전라도를 점령했다면, 아마 조선왕조는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유는 전라도의 곡창을 지킬 수 있었기에 군량미를 실어 전선으로 나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병은 부산포에 상륙해서 한양까지 천리길을 싸워가며 갔느냐 하는 점입니다. 출병하기 전에 조선에 첩자를 투입하여 지리며 사회 분위기까지 철저하게 조사해갔다는 왜군이 말입니다. 당연히 한양에서 가까운 제물포에 기습상륙하여 단숨에 한양을 들이쳤더라면 전쟁이 터진 후에 우왕좌왕하던 조선왕실의 모습으로 보아 단숨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기에는 전라도 해안을 지키던 이순신장군에 대한 사전정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규모 함대로 기습공격을 가하거나, 아니면 제주섬과 남해안의 중간 정도를 지나면 감쪽같이 우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두 번째 궁금한 점은 개전 초기에 부산포에서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가는 대신 전라도 곡창지대를 확보하여 전장 가까이에서 군량미를 확보하는 전략을 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을 만나기를 피했다면 정유재란 때처럼 전라도를 침공하여 수군의 근거를 육지를 통하여 무너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점입니다. <소설 징비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쟁 초기에는 의병을 모집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군들은 가는 곳마다 마을을 불태우고 조선백성들을 도륙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후환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미리 몸을 피한 백성들이 산중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되면 발목을 잡히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소설 징비록>에서 밝히고자 했던 것은 특히 의병장으로 전쟁에 참가한 세분의 장수는 물론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역시 백성들의 헌신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승리였다는 점에서 백성들의 적극적 참여에 주목하였다고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유부단하며 도망칠 궁리나 했던, 그리고 충성을 다 바친 장수들을 의심하여 징계를 하거나 심지어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선조와 왕을 둘러싸고 전쟁의 승리보다 당파싸움이 우선이라는 시각을 보였던 형편없는 관료들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에도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분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함은 아닐까 싶습니다.

 

듣기로는 김덕령장군의 활약은 왜란 중에나 왜란이 끝나고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전라도에서 활약한 장수들의 공적을 조사하러 왔던 이덕형이 조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파직을 당하는 바람에 조사된 내용이 조정에 보고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묻혀있는 역사를 발굴해서 국민 모두가 알도록 하는 일은 우리의 몫인 것 같습니다. 조정우 작가께서 앞으로도 숨어 있는 자료들을 발굴하여 재조명하는 작업을 꾸준하게 해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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