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보물선
이은상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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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다녀온 이야기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포르투갈로 건너가고 있습니다(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 유럽이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던 진기한 물품에 빠져들 무렵 근동지역에 자리한 이슬람제국이 세력을 키워가면서 무역로는 차단하자 동양에 닿는 해로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인데, 그 첫 번째 주자는 운 좋게 이슬람세력을 밀어낸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이상훈작가의 <한복 입은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561516>는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 등장하는 조선남자가 입은 의복에 착안하여 그 사람이 세종조에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진 장영실일 수 있다는 추론을 세우고 있습니다. 장영실을 이탈리아까지 데려간 사람은 역시 동시대 인도양항로를 주름잡았던 정화일 수도 있다는 정황을 들추어내었습니다. 작가가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에서 착안한 점은, 1)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입던 철릭 위에 팔소매 밑단이 없는 답호를 덧입고 있다는 점, 2) 그림의 하단에 그려진 한 척의 배는 당시의 서양에서 만든 배가 아니라 동양의 선박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1402년에 조선에서 그려진 현존 최고(最古)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에는 조선 주변국은 물론 아랍, 인도,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까지 표시되어 있고, 특히 아프리카의 경우 사하라 사막과 킬리만자로산, 빅토리아호수와 나일강까지 선명하게 그려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1763년에 제작된 천하전여총도는 1418년에 정화가 만든 천하제번식공도를 모사한 것인데, 이 지도가 유럽으로 건너가 콜럼버스는 물론 마젤란, 쿡선장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항해가들이 이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장영실은 세종 24년(1442년) 5월이후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아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여섯 차례에 걸쳐 인도양 항로를 누빈 정화는 영락제가 죽고 난 다음 아들 홍희제의 핍박으로 10여년간 공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그 아들 선덕제가 들어선 1431년 7차 항해를 떠났다가 선덕제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는 함대를 분리하여 분리된 함대는 부하가 이끌고 명나라로 돌아와 정화가 항해 도중에 죽었다고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향했던 정화도 항해를 계속할 수 없어 다시 명나라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며, 세종의 후원으로 장영실을 태우고 8차 항해에 나섰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지난한 항해 끝에 포르투갈을 거쳐 나폴리공국에 도착한 정화와 장영실은 교황의 핍박을 예감하게 되고, 정화는 배를 띄워 먼 세상으로 나서고, 장영실은 피렌체로 피신하게 되며, 결국은 루벤스와도 만나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몇 조각 남을 자료를 바탕으로 꾸며 맞추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노릇이라서, 정화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인은상의 <정화의 보물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영락제가 정화에게 명을 내려 서쪽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라 명한 배경으로부터 일곱 차례에 걸친 정화의 항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영락제는 명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과시하고 주변국가들을 복속시키기 위하여 항해를 명했던 것입니다. 정화의 1차 항해는 2천톤급 함선 62척으루 구성되어 27,870명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 서남부의 캘리컷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 제국에 들러 영락제의 즉위를 알리고, 인도양 무역로를 다시 활성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합니다. 저자는 정화가 7차 항해를 마친 1435년 난징에서 사망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명나라는 아랍상인들을 통하여 유럽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정화의 함대는 유럽에 갈 생각이 없었다고 판단합니다.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교역품이 별볼일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정화의 항해가 있은 다음,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한 이후, 아시아국가들, 특히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역의 변천을 다루고 있습니다. 명조에서 청조로 바뀌면서 비단과 자기, 그리고 차 등으로 주력 교역품목이 바뀌어간 과정과 무역역조에 시달리던 영국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사회에 퍼트려 무역역조를 개선하려는 술수를 썼고, 청나라의 중앙정부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은 중국이 외세에 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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