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죽지 않는다 - 인터넷이 생각을 좀먹는다고 염려하는 이들에게
클라이브 톰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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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카가 2011년에 출간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86966>에서 미디어혁명과 인간 사고의 확장,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이 인간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 이래, 디지털 툴의 발전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던 바 있습니다. 혹자는 인터넷 미디어 혁명을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터넷과 인쇄술은 기존의 미디어체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공통점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쉽게 책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책읽기를 통하여 사고의 깊이를 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책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전달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을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폭주하는 정보를 적절하게 다루는 기술이 아직 몸에 익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필요한 정보를 꼼꼼히 읽고 생각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정리해야 나만의 철학이 완성되는 것인데, 넘쳐나는 정보를 욕심껏 챙기기에만 급급하여 정보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물론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새뮤엘 존슨이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책을 통하여 정보를 얻던 시절의 한가한 이야기입니다. 인터넷혁명은 이제 몇 개의 키워드만으로도 필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기억을 아웃소싱하게 된 것입니다.

 

일찍이 기억을 아웃소싱하게 된 것을 우려한 사람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루스(Phaedrus)>에는 이집트에서 문자를 발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집트의 나우크라티스 라는 곳에 살고 있는 발명의 신테우스는 “왕이여, 여기에 내가 심혈을 기울려 완성한 작품이 있소. 이것은 이집트인의 지혜와 기억력을 늘려 줄 것이오. 기억과 지혜의 완벽한 보증수표를 발명해낸 것이지요.”라면서 자신이 발명한 문자를 이집트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타무스왕은 “문자를 습득한 사람들은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이 잊게 될 것입니다. 기억을 위해 내적 자원에 의존하기보다 외적 기호에 의존하게 되는 탓이지요. 당신이 발명해낸 것은 회상의 보증수표이지, 기억의 보증수표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문자를 습득하여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착각하는 자들의 오만을 경계한 타무스왕이 오늘날의 인터넷혁명을 보고받게 되면 어떤 답을 내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디지털기기의 발전으로 기억을 아웃소싱하게 된 결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생각이 없는 디지털 치매에 이르도록 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에 이르렀습니다. 만프레드 슈피처박사는 <디지털 치매; http://blog.joins.com/yang412/13166541>에서 그저 편리하다는 이유로 디지털기기에 의존하고 기억을 늘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조기에는 중독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면 치매라고 하는 불청객을 일찍 만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려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클라이브 톰슨의 <생각은 죽지 않는다>입니다. ‘종말론은 정서적으로 자기방어적이다’라고 잘라 말하는 클라이브 톰슨은 인터넷혁명에 대한 비관적 시각에 대하여 “첨단 기술이 문화의 기반을 흔든다고 투덜대면, 알맹이도 없는 소셜 네트워킹의 유행에 현혹되지 않은 예리한 비평가로 보일 테니까. 그렇게 하면 과거를 더 풍부하고 심오하게 이해하며, 오늘날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시적 현상에 초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모른다.(402-403쪽)”라고 비꼬기도 합니다. 대단한 긍정주의자로 보이는 저자는 기술 과학 분야의 베테랑 저널리스트로서 특히 디지털 기술과 그것의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에 집중하며 이에 대한 연구와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 역시 종말론자처럼 새로운 기술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몸에 익은 행위를 버리고 새로운 유형의 행동을 배우도록 밀어붙인다는 데 동의합니다. 해럴드 이니스는 이를 ‘새로운 툴의 편향성’이라고 불렀는데, 새로운 기술이 일상생활을 어느 쪽으로 치우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오늘날의 디지털 툴이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편향성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디지털 툴은 엄청 규모의 외부 메모리를 활용한다. 둘째, 오늘날의 툴은 아이디어와 사진과 사람과 뉴스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 쉽게 만들어준다. 셋째, 디지털 툴은 커뮤니케이션과 생각 공개의 과잉을 부추긴다. 저자 역시 ‘우리가 두뇌를 자주 활용하지 않거나 부정행위를 하거나 지름길만 찾으려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툴이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치디스처럼 툴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종말론자들이 우려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컴퓨터가 출현한 이후로 체스의 그랜드마스터 지위에 오르는 나이가 점점 더 어려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 분명 IT기술을 인간을 더 똑똑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76657>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89206>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놀라운 기억력이 부러우면서도 모든 것을 기억하는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경험에 따르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하여 망각기능을 발전시키는 진화를 선택하였다는 주장에 공감을 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http://blog.joins.com/yang412/13173328)

 

흥미로운 점은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놀라운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아웃소싱하는 방식으로 보고들은 것을 모두 기억할 수 있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기기의 발전으로 이룩해낸 인간의 메모리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토탈 리콜에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디지털 카메라와 녹음기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할 뿐 아니라 열어본 모든 웹 페이지와 주고받은 이메일, 전화통화 내용까지도 기록하는 사람을 라이프로거(lifelogger), 즉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기록한 내용을 불러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두뇌의 회상기능과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기에 수록한 기억은 단서가 없거나 데이터가 올바른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두뇌는 관련된 단서들을 떠올리다 보면 번쩍하고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기억을 아웃소싱할 수는 있지만, 저장된 기억을 불러내는 회상과정은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SNS가 활성화되면서 사람들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글이 아닌 사진 혹은 영상으로 SNS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런 경향은 최근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SNS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대중과 공유하는 일이 의외의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 누군가를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취중에 써 올린 포스팅 이 의도치 않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하여 세상과 교감을 하고 있습니다만, 때로는 SNS에 올린 글이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고 포스팅을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양한 글쓰기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청중효과’ 때문일 것입니다. 청중효과는 공부과정에 있는 학생들의 글쓰기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알려졌습니다. 스탠퍼드대학의 앤드리아 런스퍼드교수가 미국 젊은이들의 글쓰기문화에 대하여 연구한 바에 따르면 요즈음 학생들이 써내는 에세이의 길이는 한 세기전보다 여섯 배 이상 길어졌지만, 문법 실력은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 년 전에는 ‘봄에 피는 꽃’처럼 에세이 주제를 정해주었지만, 1980년대에는 학생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주로 쓰게 하다가, 요즘에는 논증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근거를 찾아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는 에세이가 훨씬 많다고 합니다.

 

디지털 툴이 창의력과 기억력을 후퇴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알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풀어야 할 문제에 매달리는 과정에서 관련 지식을 많이 쌓아놓았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저자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즉 정신적 연료 없이 창의적인 통찰력이 번득이는 순간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흥미를 느끼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에 대하여는 좀처럼 기억의 스위치를 꺼놓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들은 아웃소싱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다만 디지털 툴을 이용함에 있어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문제는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착과 열정이 우리의 집중력과 기억력을 추진시키는 힘이라고 한다면 그런 집착과 열정을 폭넓은 대상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의 업무 특성상 회의가 많은 탓인지 회의를 줄일 수 있다는 부분을 꼼꼼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베이비붐 세대는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통하여 집단의식을 형성하고 집단적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선호하였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전통적 회의는 의견대립만 조장하는 거추장스러운 절차라고 생각하고, 짧고 비공식적 회의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상황을 알리는 연락을 수시로 취하고 온라인으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물리적으로 했던 업무를 디지털방식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고할 점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지털 툴이 가지는 가장 큰 힘은 디지털 툴을 통하여 모두가 연결되는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책임할 것 같은 디지털 세대들은 책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집단적 무지가 문제가 되는데, 이는 주변에 태도와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거나 과소평가할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결국은 정보의 흐름이 원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선하게 되면 잘 보이지 않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게 하면 집단적 무지는 의외로 쉽게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IT강국임을 반영하듯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네이버가 구굴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낸 비결이라든지, 생각이 날듯 말듯한 상황을 표현하는 ‘입안에서 뱅글뱅글 돈다’고 하는 우리의 관용구가 훨씬 재미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2008년 제2차 광우병사태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회원수 100만을 자랑하는 동방신기의 팬카페 카시오페아의 여학생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결정되자, 대통령의 결정이 옳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고 청계천광장에 모여 촛불을 켰는데, 10대 소녀들이 경찰에 구타당하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진압작전이 역효과를 불러일으켰고, 대통령의 유감과 내각은 총사퇴를 표명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과연 사실은 얼마나 될까요?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디지털 세상은 아직까지는 많은 문제를 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해결방안을 마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분명 인쇄술에 이어 인간의 사고체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혁명이 완성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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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 아내들이여, 가슴 뛰는 삶을 포기하지 마라
김미경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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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저자임에도 책은 처음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년초에 원장님의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 몇 종류의 책들 가운데 고르는 것이었는데, 이미 읽은 책들이 많아서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는 않았습니다. 제목 때문에 책 읽는 아내를 위하여 고른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내들이여, 가슴 뛰는 삶을 포기하지 마라’라는 카피를 달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집밖의 세상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을 지키면서 육아와 아이들 교육에 정성을 다하는 여성들의 삶은 적어도 저자에게는 꿈꾸던 삶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자녀나 남편에 대한 배려는 ‘이기적인 아내, 이기적인 엄마가 되라’고 설파하는 저자에게는 씨알도 먹힐 수 없는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 집에서 엄마가 만든 피자를 얻어먹은 일이 부러웠던 딸의 볼멘 투정에, “집에서 (네가)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학원에 가기 전 딱 한 시간이야. 근데 네가 친구 집이나 놀이터에서 놀다 오면 그 한 시간에도 너는 엄마를 못 보겠지. 결국 엄마도 널 괜히 기다린 것이 되고, 그러면 자, 그 한 시간 때문에 왜 엄마가 24시간 집에 있어야 하는지 네가 설명해봐.”라고 자랑스럽게 따졌다는 저자의 설명이 공영한 궤변으로 들리는 것은 아무래도 제가 고루한 옛날 사람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하지만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잠시 조교수로 근무하다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붙드는 대학을 뿌리치고 귀국한 저의 선배는 결국 대학을 그만두었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더욱이 놀란 것은 대학을 그만 둔 이유가 아이가 한창 클 때 제대로 돌보아주지 못한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맺혀 있었는데, 더 늦기 전에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저자와는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습니다.

 

밖에서 일을 하다 보니 가사 역시 남편과 나누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제 역할을 못해서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신 회사에 다니지? 나도 회사에 다니지? 그런데 왜 나만 집안일하고 애보고 그래야 해? 당신은 애와 관련이 없어? 당신 아빠 아니야? 낳아 녾기만 하면 다야?(157쪽)”라고 몰아붙였다고 자랑하면서도 남편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거나, 남편의 자신감을 완전히 충전시켜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사회생활과 가정을 양립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싶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완벽하게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어미가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물론 돌봄의 범위에 대하여 논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사회에 나갔을 때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서 바른 생각을 가질 수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은 저절로 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과거 식구가 많을 때 서로 도와가면서 살 때의 이야기이고, 같이 사는 가족이 단촐한 요즈음에는 어림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딱히나 ‘사’자가 붙은 직업이 아니더라도 ‘자기다운 삶’을 사는 진정한 인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세 가지를 바란다고도 했습니다. 그 바람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은 회사에서 자기계발을 위하여 외부 강사를 모시는 경우가 그리 반갑지만은 아닌 것이 이순에 이른 나이에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온 방식을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은 노릇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다양할수록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여성들이 집밖을 꿈꾸는 세상이 과연 좋은 지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결국은 저자 자신의 삶이 꿈꾸던 것이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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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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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오류가 의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게 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http://blog.joins.com/yang412/12623266>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죽음을 붙들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절절하게 묘사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http://blog.joins.com/yang412/13423768>로 친숙해진 줄리언 반스의 신작 <용감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2005년 맨부커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가가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셜록 홈스의 창시자인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과 영국 사법 시스템에 상고법원을 만들도록 한 조지 에들지라는 두 실존인물의 삶을 통하여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사회의 정치와 종교, 사법체계, 인종의 문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야기 가운데 이야기의 시작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룬 1권의 초반인 ‘시작들’이라는 작은 제목을 단 1장은 아서와 조지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지만, 이 또한 당시 영국가정의 자녀교육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서는 에든버러의 남루하지만 고상한 가정, 조지는 스태퍼드셔 촌구석의 목사관이라는 판이한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하여 상상력을 키웠던 아서는 의학을 공부하지만 결국은 셜록 홈즈라는 인물을 창조하면서 유명한 소설가가 됩니다. 반면 인도계 혈통을 가진 조지는 엄격한 아버지의 영향 아래 순종적으로 살면서 사무변호사가 됩니다. 1장에서는 조지의 삶을 결정적으로 꼬이게 만들 사건이 태동하게 됩니다. 여전히 결말을 읽지 않은 상태라서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포스터라는 이름의 하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해고되는 장면입니다. 이런 인물을 만나는 것 자체가 재앙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의 만남도 운명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부는 조지의 삶이 꼬여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한편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아서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서와 조지의 이야기가 균형을 이루던 1부와는 달리 조지의 비중이 자연히 커지게 됩니다. 교직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두 사람이 결국은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조금씩 커지게 됩니다. 아서 혹은 조지의 이름으로 전개되던 이야기가 147쪽에 이르러 ‘아서 &조지’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면서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구나 싶었습니다만, 두 사람과 전혀 무관한 인물이 등장하여 말을 훼손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서나 조지가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점은 한참 뒤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만큼 반스는 치밀한 계산 아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1권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서가 조지를 의식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입니다. 아서가 받은 편지에 조지 에들지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2부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핵심은 조지가 사는 목사관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동물훼손 사건과 이를 수사하는 경찰이 조지가 범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하는 양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범인이 조지를 타깃으로 벌인 탓도 있겠지만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 인도계혈통인 조지가 이방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경찰에 의하여 범인으로 기소된 조지가 재판을 통하여 유죄로 판결 받고 감옥에 수감되는 과정을 보면 이러한 선입견이 경찰에만 국한된 것이 아나리 영국사회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결핵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아서가 진이라는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아서의 아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http://blog.joins.com/yang412/13229364>를 즐겨 읽는다는 대목에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서기 1441년에 토마스 아 켐피스 수도사에 의하여 쓰여진 책으로 영어권에서는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 제 2의 복음서라 칭송받고 있다는 이 책이 등장하는 것도 저자의 장치인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1권에서는 동물훼손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조지가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는 상황으로 마무리가 되어 사건이 어디로 전개될지 궁금증이 증폭되는 가운데 끝이 났습니다. 2권을 읽고 리뷰를 적었어야 하겠지만, 2권에서는 또 다른 관점들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일단 리뷰를 정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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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끝,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인카운터 - 알제리-모로코-튀니지의 경제이해
서대성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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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모로코-포르투갈 여행기를 마무리하려다보니 부족해 보이는 모로코에 관하여 공부하기 위하여 읽게 된 책입니다. 해가 지는 지역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마그레브 (المغرب العربي) 지역에 속하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세 나라의 경제상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모로코를 방문하였을 때 상당히 역동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2010년 튀니지에서 일어난 재스민혁명의 여파가 확산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기도 합니다.

 

북아프리카와 동유럽 발칸 등 이머징국가에서의 경제, 문화,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는 저자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 이들 마그레브 지역국가들의 경제현황 및 사회적 변화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북아프리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읽다보면 조금은 헷갈리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머리말에 “(북아프리카) 이들 나라는 기원전부터 식민지 중심도시로 존재해오다가, 현시대에 이르러서야 독립국가를 형성하였다”라고 설명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질적인 면이 있습니다. 베르베르족이 원주민이지만 기원전 소아시아에서 이주해온 페니키아 사람들이 카르타고를 건설하였고, 카르타고가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 망한 다음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로마가 망한 다음에는 역시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계승전쟁에서 밀려나 우마이야왕조 사람들이 이주하는 등, 끊임없이 외부사람들이 이주해왔다는 점입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기점으로 유럽의 식민지배가 본격화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을 얻었다고 본다면 기원전부터 식민지였다는 설명이 다소 포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관점은 토착 원주민인 베르베르족의 시각에서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유국이면서 경제 규모를 고려한 탓인지 알제리에 할애한 분량이 모로코와 튀지니를 합한 분량과 비슷할 정도로 상세한 편입니다. 세 나라의 역사적 배경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경제현황은 알제리의 경우 매우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알제리는 면적만 따져도 한반도의 11배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전 세계에서도 11번째로 큰 나라입니다. 그리고 원유매장량 세계 14위, 천연가스 세계 8위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라는 점입니다. 당연히 이 나라의 에너지자원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농업, 수산업, 식품산업, 자동차, 건설 및 장비, 섬유, IT, 의약, 보건, 환경, 유통 등입니다. 뿐만 아니라 해외국가들의 투자현황까지도 분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나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산유국인 알제리가 원전 건설에 관심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발전속도를 감안하면 알제리에서 생산하는 석유를 자체 소비에 충당하기도 버거울 상황이 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 곤경에 빠질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모로코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GDP 기준으로 모로코가 아프리카에서 4위에 랭크되고 있다는 점, 카사블랑카, 라바트, 살레, 페즈 등 모로코에서 주목할만한 도시에 대하여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지브롤터 해저터널 사업에 대하여 처음 알게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입니다. 사실 지중해는 아프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하는 지역이라서 화산활동도 왕성하고 지진도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탕헤르와 타리파를 연결하는 페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만, 과연 해저터널을 유지할 정도로 통행수입이 보장될 것인가도 관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때 로마와 겨루던 카르타고가 위치했던 튀니지는 최근 일어난 재스민혁명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나라의 역사와 경제현황을 정리한 말미에는 이들 나라를 여행하는데 필요한 사항들을 간략하게 덧붙이고 있어 여행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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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 입문 - 심리학 대가의 심리학 해설
알프레드 아들러 지음, 김문성 옮김 / 스타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책을 읽어보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기도 합니다. <아들러 심리학 입문>은 그 질문과 맥이 통하면서도 질문을 하신 분이 생각한 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질문을 하신 분은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 받을 용기>를 비롯하여 아들러 심리에 관한 <아들러 심리학 읽는 밤>, <버텨내는 용기>를 의미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설명을 들으면 아들러 심리학을 쉽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한 차례 걸러진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른 책이 <아들러 심리학 입문>입니다.

 

최근 아들러 심리학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타인과의 경쟁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쟁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고민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들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고민들은 모두 인간관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명제를 세웠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심리문제를 백 년 전에 내다보았으니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는 프로이트, 융과 함께 3대 심층심리학자로 꼽힙니다. 1870년 2월 오스트리아 빈의 유복한 유태인 가정에서 출생한 아들러는 4남 2녀 중 둘째였습니다. 차남인 저는 일반화된 차남의 성격에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첫째와 비교되는 것을 싫어하고 욕심이 많은 둘째 특유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아들러는 구루병과 후두경련과 같은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던 데다가 다른 형제들보다 학교성적이 부진하였던 까닭에 나름대로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성장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심리학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열등감, 보상심리, 인정욕구, 권력욕 등은 그의 성장배경에서 엿볼 수 있는 요소들이라고 합니다.

 

1895년 빈에서 의사자격을 얻어 정신심리학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아들러는 둘러싸고 있는 전체적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인도주의적이고 전체적이며 유기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02년부터 프로이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지만, 1907년에 출간한 <신체적 열등과 그에 대한 정신적 보상에 관한 연구>에서 “사람은 신체적 장애와 이에 수반되는 열등감을 심리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보상은 신경증 및 수많은 감정과 정신의 기능적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라는 가설을 세우면서 프로이트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종국에는 아동기 초기의 성적 갈등이 정신질환을 초래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1911년 결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백과사전, ‘아들러’편 참고)

 

알프레드 아들러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아들러 심리학 입문>에서 몇 가지 모호한 점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낙오자를 만들지 않은 아들러’라는 제목의 들어가는 말은 저자가 아닌 삼자의 글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필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띕니다. “이 책은 아들러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시하여, 그 치료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라고 요약하고, “1장부터 6장까지는 사례와 치료법을 중심으로 정리해 놓았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보겠습니다. 제1장 사회적 협력의 의미, 제2장 몸과 마음의 관계, 제3장 열등감 보상과 우월감 추구, 제4장 기억이 알려주는 비밀, 제5장 꿈의 이해와 사용법, 제6장 어려움을 해방시키는 용기, 등으로 나뉜 제목을 보면,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정리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에 큰 아이가 임관을 하고, 오늘부터 임지에서 맡은 바 임무를 시작하게 됩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학교 공부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이를 학창시절 제가 창설한 진료동아리의 하계진료현장에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들러가 말하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세상에 나와서 해야 할 그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고 설명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늘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는데, 큰 아이의 삶이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았기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러는 사회적 협력에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세 개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는 이들 관계의 방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관계가 사람들의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 세 가지 관계 가운데 가장 근본은 우리가 지구라는 혹성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어 우리는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뒤를 잇습니다. 그리고 이성 간의 관계가 마지막으로 직면하는 관계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로부터 직업, 친구, 성이라는 세 가지 문제가 대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과거의 경험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최면요법 등을 통하여 과거의 경험에서 지금 제기된 문제의 단초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들러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바로 그 의미에 의해 ‘스스로 결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잘라 말합니다. 즉 우리는 경험의 충격, 이른 바 외상으로 고통스러워할 게 아니라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의 목적에 합치되는 바를 발견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로 고통 받는 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벌써 1주기가 넘어가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 세월호 사고의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들러는 인생의 경험에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흔한 상황으로 응석받이를 인용하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협력의 유익함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도 배운 일이 없다. 따라서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직 타인에게 요구하는 방법 외에는 모른다(34쪽)”라고 진단하고, 해답으로는 그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작고 올바른 방향으로 스스로 훈련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열등감이 개인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정리하는 부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등감이란 개인이 어떤 일에 대해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혹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그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자기의 확신을 언행으로 표현하는 경우에 나타난다(88쪽)’라고 한 저자는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자기의 활동 범위를 한정하려고 함으로써 성공을 향해 전진하기보다는 패배를 피하는 일에 몰두한다.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 망설이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거나 뒷걸음질 치는 모습마저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위험으로부터 몸을 사리는 행동 가운데 가장 철저한 표현이 자살이라고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포기하고, 자시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자살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문제해결의 출발은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거나 부족함으로써 야기되는 열등감을 회피하거나 기만하려 들면 내재된 갈등요소가 축적되어 임계점을 향하고, 종국에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열등감으로 인한 강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점 즉 우월한 부분을 극대화시키는 노력을 병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좁게는 가족, 나아가 주변 인물은 물론 이들을 통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협력의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달성하고자 하는 우월이라는 목표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월이라는 목표는 개개인에게 있어서 매우 개인적이며 독창적인 것이다. 그 목표는 한 사람이 인생에 부여한 의미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의미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독특한 인생 방식 속에서 만들어지며, 스스로 창작한 기묘한 멜로디처럼 인생을 관통하여 울려 퍼진다.(184쪽)”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한 시각만으로 사안을 들여다보게 되면 그만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이 잘못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열등한 상황을 우월한 입장으로 변환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은, 첫째, 우리가 선택하는 어떤 곳에서나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과, 둘째, 우리에게는 막대한 양의 재료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표현은 우리들이 같은 방향으로 돌며 인격이 형성되는 유일한 동기와 유일한 특수성으로 이끌어갈 것이며, 모든 언어, 생각, 행동이 우리 인간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최근에는 아들러 심리학을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용기, 평범해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정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넘쳐나고 있는 자기계발서를 대하는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열등감에 싸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심리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벽한 행복을 완성하기 위하여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위안을 삼기 위하여 회피의 수단으로 해석하는 것 아닌가 싶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나름대로의 완성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그 목표 자체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결국 무한경쟁이 될 수밖에 없고 이는 개인의 능력을 비교하면 금방 답이 나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우월함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이상행동으로 표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열등감을 과도하게 보상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지구별에 태어난 이상 아들러의 세 가지 관계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과 그 개인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결과는 개인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개인의 심리적 문제 역시 사회적 맥락 안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이성, 사회적 관심, 자기초월 등의 특징이 있는 반면,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은 열등감,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힘, 우월감 및 자기 안전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관심 등의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다음 백과사전, ‘아들러’편 참고) 건강한 사람 역시 모두 완전한 존재라서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때 느끼는 하지만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해 생기는 것이 아닌, ‘이상적인 나’와 비교했을 때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를 비교하였을 때 생기는 간격, 즉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되는 셈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우월한 무엇을 만들어 극복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아들러 심리학이 찻잔 속의 태풍처럼 잠시 지나는 신드롬에 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완성된 삶을 위하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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