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의 노래 - 마음에 용기와 지혜를 주는 황선미의 민담 10편
황선미 지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 비룡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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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책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만, 어렸을 적에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선친 덕분에 동화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유럽의 동화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살아보는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몇 차례 유럽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꿈꾸었던 유럽생활과는 거리가 먼 여행이 되고 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읽은 동화들은 대부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를 알려주는 것들이었고,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외국여행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여행지에 관한 정보만 정리하다보면 아무래도 딱딱해지는 것 같아 여행지를 무대로 한 소설이나, 그곳에 전해오는 민담도 읽고 인용하기도 합니다. 금년에는 터키와 발칸을 다녀왔습니다. 덕분에 이 지역의 민담을 읽을 기회도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나온 황선미작가님의 <인어의 노래>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매력적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야기에 실린 작가님의 고백(?)은 저와 같은 것이어서 크게 공감을 했습니다. “죽지 않고 전해진 이야기에는 반드시 어떤 집단의 독특한 전통과 삶에 대한 가치관이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판단을 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조상의 가르침이 다양한 이야기 속에 녹아 있지요.”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읽을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책을 가까이 하도록 해야 하겠지요?

<인어의 노래>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유럽 5개국과 터키의 민담이 실려 있습니다. 사실 터키는 소아시아에 있는 나라입니다만, 14세기부터 발칸반도를 거쳐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던 나라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삶에 유럽적 요소가 들어왔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인어의 노래>에 실린 터키 민담 ‘오두막의 검은 고양이’는 그 구성을 보면 유럽에서 내려오는 민담과 분위기가 아주 흡사합니다. 공주가 마법에 걸린 왕자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성격이 까탈스러운 언니들은 손에 쥐어준 기회를 걷어차지만 마음씨가 고운 막내 공주에게 그 기회가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법을 통하여 행운을 차지하지만 사실은 그 행운이라는 것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폴란드민담 ‘고사리꽃’도 그렇고 ‘황금오리’도 그렇습니다. 황금고사리꽃을 찾아내고 행운을 차지한 야첵은 가족들이 가난에 찌들어 죽어가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이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는 행운은 인간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33쪽)”라는 양심의 소리가 마음속에서 아우성을 쳐도 말입니다. 하지만 황금오리의 주인공 루텍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행운을 불쌍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 황선미작가님은 <인어의 노래>에 실은 민담을 고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인어의 노래>에는 이야기마다 폴란드 출신 동화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을 싣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여 동화책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면서 동화도 쓰는 동화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그림에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한편, 그 이야기를 읽는 어린이가 등장합니다. 아마도 그림을 그린 분이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옮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그림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화 속 이야기를 따라서 먼 나라로 떠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인어의 노래>에 실린 민담들은 모두 아름답고 착한 심성을 가지도록 알려주는 내용들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읽고 그 뜻을 이해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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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은 사람이 전부다 - 경영의 신 마쓰시타 고노스케
마쓰시타 고노스케 지음, 이수형 옮김 / 중앙경제평론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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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파나소닉 브랜드로 잘 알려진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씨는 경영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마쓰시타 정경숙’을 세운 분으로 잘 알고 있은 것 같습니다. 1979년 설립된 마쓰시타 정경숙은 제2의 메이지유신을 일으킬 숴 있는 차세대 리더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을 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마쓰시타 회장은 “만일 고객들이 마쓰시타 전지가 무엇을 만드는 회사냐고 물으면, 제품이 아닌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답하게나(5쪽)”라고 할 만큼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찍 깨우쳤다고 합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사업은 사람이 전부다>에 사람경영의 요점을 담았습니다. 사업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사람이 전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경영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조직관리의 묘를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직의 구성원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이 조직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 역시 사람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람을 쓰다’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풀어내고 있습니다. 역시 동양적인 사고 탓인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을 부린다는 건 사실은 괴로운 일이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제대로 쓰려면 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묘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비결인가 봅니다.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조자룡 헌칼 쓰듯 휘두르다가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고 조직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투명경영, 솔선수범, 바른 의사결정, 결점을 감추지 말라는 등의 비결을 귀띔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 내에서 푸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가지라는 권유에는 공감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리더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과연 조직관리에 좋을까 싶습니다. 힘든 것도 리더가 삭여야 할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재육성에 관심이 많은 저자가 사람을 키우는 비결을 뒤로 미룬 것이 조금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을 것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장은 차를 내오는 역할도 마다하지 말라든가 아랫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하는 등 생각보다는 평범해보이는 비결 같아서입니다. 관용과 엄격함을 겸비하라는 권유는 참으로 적절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을 살린다는 대목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 어려운 만큼 충분하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요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키우고, 적재적소에 기용해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비결을 터득하는데 있어 역시 중요한 점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맨 나중에 풀어놓은 이유일 것 같습니다. 마쓰시타 회장은 ‘사람이란 존재는 본질적으로 만물의 왕이라 해도 좋을 만큼 위대하다’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엄격하게 단련하고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명제도 사람이 본질적으로 위대한 존재이자 무한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지를 모은다’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사람을 제대로 쓴다는 요체의 정리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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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사슬
김영진 지음 / 참윤퍼블리싱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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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근무하는 김영진위원님께서 연초에 건네주셨던 <담배와 금연요법>을 통하여 담배의 폐해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을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시는 글솜씨가 대단하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집을 내셨다고 보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김위원님의 문집 <먹이 사슬>을 받아 목차를 살펴보니 수필에다 소설까지 싣고 있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가끔 원고청탁을 받곤 하지만 저의 글은 성격이 모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말에 정리해두신 수필의 정의를 보니 제가 쓰는 글이 크게는 수필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책은 머리말부터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먹이사슬>에는 문단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들을 모아 엮었다고 하시니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먹이사슬>은 열네 편의 단독 혹은 연작 수필을 한 묶음으로 하고, 이어서 한편의 연작 중수필을 한 묶음으로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세편의 소설을 모았습니다. 제 경우는 가벼운 소설을 주로 읽어온 탓에 깊이가 없는 편입니다. 하지만 김작가님의 소설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들더라는 말씀을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방역이라는 개념이 없던 그 옛날 장티푸스가 번진 시골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엮은 소설 ‘수리부엉이’는 아무래도 의학을 전공한 탓에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소설 ‘황금벌판’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는 농군이 잘 살아보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쌀이 남아도는 요즘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논 한마지기에 목을 매달던 옛날 농부들은 아마도 절절한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사회의 구조가 바뀌는 길목이라는 시대적인 안타까움에 절망하는 주인공이 너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소설 ‘남양의 절벽 위에 서다’는 저에게 생소한 바다낚시를 소재로 하고 있어 대물을 건 주인공의 그 짜릿한 느낌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투 끝에 끌어올리는 집념에 박수가 절로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남양의 모습은 물론 낚시가 진행되는 과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읽는 제가 마치 남양 절벽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중수필로 실린 ‘현대의학이 걸어온 길’은 아무래도 현대의학의 역사에서 가려 뽑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일부 독자들에게는 생소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동양의학과 마찬가지로 여건이 비슷했던 전통의학에 뿌리를 둔 서양의학이 현대의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잘 정리된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저 역시 서양의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들을 두로 섭렵한 바 있어 김작가님이 이야기하려는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먹이사슬>에 실린 작품들을 뒤에서 거슬러 살펴보는 것이 편치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맛있는 것을 맨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두는 어린이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도 좋고 중수필도 좋았지만, 앞부분의 경수필들에서 느낀 소감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맨 마지막으로 미룬 것입니다.

 

경수필은 아주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국내외 여행기나 세시에 관한 이야기들도 있고,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만난 인연을 소개하는 글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이 끌린 글은 문집의 표제이기도 한 연작수필 ‘먹이사슬’입니다. 메뚜기, 우렁이 그리고 가물치 잡기, 돼지, 닭, 누렁이 등 시골집 마당에서 흔히 보던 짐승 등, 어린 시절을 보내던 시골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담으신 글입니다.

 

‘마른 논바닥을 거닐며 자세히 살펴보면 손가락이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다. 그 구멍에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 넣으면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에 와 닿는다.(46쪽)’ 우렁이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본 사람만이 그 느낌을 알 수 있습니다. 연작수필 ‘먹이사슬’에 특히 마음이 가는 것은 저 역시 김작가님처럼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보면 김작가님께서 저와 연배가 비슷할 뿐 아니라 성장배경까지도 비슷한 데가 많아 김작가님의 글이 울림이 큰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옛날의 기억은 점차 가물가물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글로, 혹은 영상으로 기억을 보강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옛일을 말해주는 분들이 많지 않은데다가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 아쉽기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김작가님의 <먹이사슬>은 576세대에게는 옛 추억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옛일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작가님. 앞으로도 더 많은 기록을 남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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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가 하루 종일 인터넷만 해요
한덕현 외 지음 / 시공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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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많은 부모님들이 걱정을 해본 경험이 있거나, 지금 당장도 걱정하고 계실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우리 아이가 인터넷 중독은 아닐까 하는 고민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 아내가 가끔은 제가 인터넷 중독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는 모양이더라구요. 제가 블로그에 빠져 있을 때 말입니다.

 

<우리 아이가 하루 종일 인터넷만 해요>는 바로 이런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한 책입니다. 중앙대학교 게임과몰입상담치료센터에서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청소년들을 진료하고 계신 한덕현, 이영식 교수님과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정책에 관심을 두고 계신 신의진의원님이 참여하여 썼습니다. 저자들은 인터넷 중독이란 ‘과다한 인터넷 사용으로 금단과 내성이 생겨 이용자의 일상생활에 장애가 발생하는 상태’라고 정의하지만, 아직은 공인된 진단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특히 성장기에 있는 소아청소년들에게 인터넷 중독이라는 진단을 내리는데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청소년층에서 과도한 게임 이용과 스마트폰 사용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인터넷 중독의 범주에는 게임뿐 아니라 채팅, 음란물, 인터넷 도박, 정보 검색, 인터넷 쇼핑에 대한 중독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분명 세상을 바꾸어 놓은 문명의 이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의 실체를 요약하였습니다. 부모세대에는 익숙하지 않은 인터넷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인터넷 중독 혹은 인터넷 게임 장애의 본질을 저자들이 직접 경험한 사례를 들어 정의합니다. 그리고 인터넷 중독을 예방하는 방법과 치료하는 방법까지 설명을 하고 있어 이런 문제고 고민하고 있는 부모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제가 인터넷 중독이 아닌가 싶었던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책을 읽고서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 중독은 정보 과다형, 관계 집착형, 게임 중독형, 웹서핑형, 사이버 섹스 중독형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정보과다형이나 웹서핑형의 가까운 인터넷사용 행태를 보인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0년이 넘게 블로그를 운영해오면서 관계집착형의 행태를 보이는 분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좋아하는 게임은 있지만 중독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나치게 게임에 몰입하는 것 아닐까 걱정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이들의 생각과 부모의 생각에는 분명 온도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즉 문제를 인식하는 시각에서 차이를 보일 뿐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도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바람에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경향이 큰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부모의 협조가 인터넷에 빠진 청소년들을 치료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라고 보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인터넷 사용에 관한 문제로 자녀들과 충돌을 빚다보면 가족관계가 악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녀들을 이해하고, 또 부모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시킬 수 있다면 자녀들의 인터넷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중독’이라고 하면 손을 쓸 단계를 넘어선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인터넷중독’에 대한 연구들이 쌓여가면서 다양한 치료방법들도 개발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분야를 진료하고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 필요한 것은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더 좋읗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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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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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발칸을 여행하면서 들고 간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발칸 사람의 생각을 읽어보기 위하여 골랐습니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이라고 표시된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는 출판사의 의도적인 왜곡이 개입된 것 같다는 생각에 불쾌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책의 기획을 맡아 엮은이로 소개된 영국 킹스대학 철학과의 윌리엄 어윈교수를 편집대표로 내세웠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윈교수는 17명의 집필진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 책을 기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는 가장 많은 분량의 원고를 썼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책이 소개되어 잘 알려진 지젝을 내세웠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지젝을 넣어 검색해보면 단독과 공저를 포함하여 무려 55종이나 되는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1949년 유고연방 시절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서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파리 제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철학으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를 반대하고,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1990년에는 개혁세력을 대표하여 슬로베니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젝은 SF 소설, 영화, 오페라 등 다양한 영역의 문화 예술을 철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비평을 내놓고 있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방문하여 두 차례의 강연회를 가져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고른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우선 정치나 철학적 주제는 아무래도 무거워서 여행하면서 읽기에는 부담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반면 말랑해 보이는 문화예술 분야를 철학적 시각으로 분석해본다는 접근방식이 색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영화 <매트릭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어, 그에 대한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한 몫을 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이 장면을 이렇게 처리한 이유가 뭘까 등을 심각하게 생각해가며 영화를 보지는 않습니다. 그저 마음에 와 닿는 대로 느끼는 편이라고 할까요?

 

오래 전에 동아리선배와 한담을 하다가,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졸업>은 제가 엄청 좋아하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배경에 깔려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졸업 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황하는 모범생 벤자민(더스틴 호프만粉)이 어머니 친구인 로빈슨(앤 밴크로포트粉)의 유혹으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딸 일레인(캐서린 로스粉)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로빈슨부인이 개입하여 반대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헤어지고, 일레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식장을 찾은 벤자민은 교회 2층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며 일레인을 부르고,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일레인과 달아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졸업>에 대한 동아리 선배의 말씀은 일레인의 결혼식이 진행될 때, 벤자민이 두드리던 유리창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가르는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선배는 저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보았던 것입니다.

 

최근에 대중가수가 발표한 신곡을 둘러싸고 해석이 왜곡되었다고 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고 ‘정신 나간 괴짜가 맞다’라는 느낌을 적었더니 ‘겉으로 드러난 형식에 너무 치우친 해석’이라는 댓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저의 해석도 다양한 해석의 하나로 보아주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작품이야말로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최근 대중가수의 해석도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혹시 출판사가 노이즈 마케팅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면 그런 상업적 행위는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 <매트릭스>는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매트릭스>를 보고 그저 화려한 액션장면과 네오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는 컴퓨터 그래픽이 신기하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에 참여한 열다섯 명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철학적 관점에서 영화 <매트릭스>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형제는 이 영화에 많은 철학적 주제를 짜 넣었다고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논의에 동참한 철학자들은 영화를 만든 작가와 예술가들이 의도한 의미들을 그저 전달하는 것에만 그쳤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윌리엄 어윈교수는 영화 <매트릭스>를 철학자들의 로르샤흐 검사(Rorschach test)로 이용해보려 했다고 합니다. 이 검사는 스위스 정신의학자 로르샤흐가 고안한 심리검사로 ‘좌우 대칭의 불규칙한 잉크 무늬가 어떠한 모양으로 보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나 정신 상태, 무의식적 욕망 따위를 판단하는 인격 진단 검사법(네이버 사전)’입니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에 동참한 철학자들은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 불교, 허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각자의 관심 분야의 틀을 가지고 이 영화를 읽어 냈습니다. 철학자들이 <매트릭스>와 같은 대중문화의 산물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놀음을 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철학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중문화를 매개로 하여 철학에 대한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애처롭게(?) 보이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윌리, 너는 왜 은행을 털지?’라는 질문을 받은 전설적인 마피아 윌리 서튼이 ‘그곳에 돈이 있으니까.’라고 답변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앞서 소개해드린 동아리 선배처럼 영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의미를 잡아낼 수 있는 힘이 생길까 하는 기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분석하기 위하여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니체, 사르트르, 셀라스, 노지크, 보드리야르, 콰인 등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해석하는데 있어 얼마나 다양적인 접근이 가능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윌리엄 어윈교수의 경우는 <매티릭스>가 성서적 비유를 하고 있다고 단정합니다. 1999년 부활절에 영화를 개봉한 것도 의도적인 것이지만, 주인공의 이름 네오 역시 유일신을 의미하는 'The One'의 순서를 거꾸로 한 것이며,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구원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만나게 하는 오러클은 예언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를 노예상태로 제어하고 있는 거대한 음모세력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숨어서 거사를 준비하는 장소가 바로 시온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이클 브래리건교수는 불교의 원리로 <매트릭스>를 들여다봅니다.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거울이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울은 그 앞에 있는 사물들을 비춰냅니다. 등장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춰내는 거울이야말로 깨달음의 극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울은 궁극적으로 구속되지 않은 마음, 무심(無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네오가 무심을 터득하는 순간 무한한 능력을 얻는 장면이야말로 불교적 사상이 녹여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네오의 죽음과 소생 역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네오는 모피어스를 구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게 되지만 트리니티의 간곡한 기도가 그를 되살려냅니다. 기독교식으로 해석하면 네오의 소생을 부활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네오가 인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예언자가 “아마 너의 다음 생애겠지.”라고 하는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레고리 바샴교수는 <매트릭스>가 기독교적 주제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티베트 불교, 선불교, 그노시스주의 등 다양한 종교적 요소들이 혼합된 카페테리아, 즉 다원주의적이기까지 하다고 주장합니다. 전통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격을 부여하여 인간의 죄를 대신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역시 인간이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폭력도 마다하지 않아서 기독교의 교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는 종교적 다원주의자들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자신의 종교적 전통만이 진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오만하고 극단적인 우월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는 제국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에 참여한 철학자들의 관심은 전통적인 관점의 철학에 머물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주제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제이슨 홀트교수의 관심은 기계가 과연 영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발전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인공지능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일 것 같습니다. 그런 가능성마저도 외면하고 논의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 홀트교수의 생각입니다. 제가 요즘 즐겨보는 복면가왕처럼 편견을 깨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매트릭스>에서는 마음과 육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에서 죽으면 여기서도 죽나요?’라는 네오의 질문에 모피어스는 ‘육체는 정신이 없으면 살 수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육체가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심신일원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니얼 버윅교수는 모피어스의 입장을 마음을 설명하는 환원적 유물론, 제거적 유물론, 그리고 이원론의 세 가지 이론 가운데 환원적 유물론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유물론과 이원론을 대비시켰을 때, 유물론자들은 마음을 포함해서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하여 이원론자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는 비물질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환원적 유물론은 감각을 통하여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전자적 신호로 바꾸어 뇌가 해석하고 통합한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거적 유물론에서는 마음의 상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 이원론은 마음이라는 상태는 전형적인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아 물질적인 육체와는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 내세는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상태에 대응하는 실재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데 <매트릭스>를 보는 관객들은 매트릭스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의 개연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트릭스>는 묘한 구석이 많은 영화입니다. 분명 꾸며낸 이야기, 즉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관객들은 그 허구에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매트릭스 철학하기>처럼 말입니다. 사라 워드교수는 이를 허구의 역설이라고 설명합니다. 1) 우리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해서만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2) 우리는 허구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우리는 허구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한다.(120쪽) 결국 실재(實在)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란을 영화 <매트릭스>를 통하여 느껴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사이버공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이유로 현실에 대한 시각이 왜곡되는 것이라고 지젝교수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사이버공간이 인간들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며, 이는 인류가 세계에 지나치게 개입한 데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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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7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처럼 2015-11-17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바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qualia 2015-11-17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녘 출판사는 아이유한테 오히려 감사패 혹은 금일봉을 줘야 할 거예요. 아이유가 논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가 역주행 대박을 치고 있으니까요. 가만 생각하면 서로 짜고 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음모론도 제기될 만한 것 같습니다. 위기에 빠진 출판계를 구하기 위해 아이유가 자기 한 몸 희생하기로 했다... 동녘 측의 아이유 유감 표명은 백보를 양보해 해석하더라도 계산적/의도적이었던 게 확실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나중엔 사과까지 했으니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 것이죠. 아이유한테 소아성애자니 아동성애자니 하면서 마녀사냥으로 몰고간 네티즌/누리꾼/블로거들 또한 오히려 그 자신들이 위선과 이중성으로 찌들어 있다는 사실을 자기폭로한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또 아이유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거나, 누리꾼들의 위선/이중성을 비판하거나, 동녘 측의 순수하지 못한 노이즈 마케팅 활용 꼼수를 비판하는 평론가/음악가/블로거들한테 갖은 험담을 퍼부으며 소아성애/아동성애 조장자로 낙인을 찍는/찍었던 자들한테도 먼저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위선과 이중성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누가 소아성애/아동성애를 조장하고 옹호한단 말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처음처럼 2015-11-18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님께서도 같은 맥락을 짚으셨군요....
사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해석에 관한 부분은 작가의 것이 아닌거죠...
해석의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한 자체가 적절치 못한거죠.
그래서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