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노스탤지어 - 모던의 흔적을 찾아가는 인문 여행 두 번째 티켓 4
하상일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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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연구년을 외국에서 보내기로 했다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잠시 미국에서 살아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외국에 나가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예전에 살아본 적이 있다면 쉽게 자리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젊을 때와는 여러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다른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수 있는 점은 장점이 될 것 같습니다. 중국의 상하이에서 연구년을 보내셨다는 하상일교수님께서는 중국에서의 생활을 기록으로 책으로 묶어내는 쾌거를 이루셨네요. <상하이 노스탤지어>가 바로 그 성과입니다. 일종의 뒤에 오시는 분들을 위한 안내서가 될 수 있고, 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이 될 수도 있어 양수겹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연수기간 동안에 일제 침략시기에 중국, 특히 상해로 이주한 한국 문인들의 활동을 연구주제로 삼았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상해상학원에서 한국학 강의를 진행하는 한편 정한 주제에 따른 연구활동을 병행하는 힘든 일을 하는 와중에 이국의 생활을 기록으로 정리하기까지 하셨다니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상하이에서 정착하는 과정을 담은 일상, 상하이의 음식,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돌아본 상하이의 도시풍경, 문화 그리고 상하이 밖으로 나가 중국의 관광명소를 돌아보는 기회도 가져보신 것 같습니다. 제 경우는 가족들과 함께 갔었고, 먼저 가 계셨던 학교 선후배의 도움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정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먼저 오신 분들이 뒤에 오는 분을 챙겨주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즉, 돌보아주신 분들께 보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오는 사람들을 잘 챙겨주는 것이 먼저 돌보아주신 분들게 보답을 하는 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교수님은 단신 부임하셔서 정착하고 생활하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연구는 물론 자신의 일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일상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은 한국에서 하지 않던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상하이에서는 아마도 출퇴근이나 구경하는 것도 대중교통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에서 차를 가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그래도 대중교통을 잘 이용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편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자들이 5월 15일 한국의 스승의 날을 챙겨주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중국 젊은이들의 마음씀씀이가 참 넓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미국에서 5월 15일에 선생님들께 감사의 선물을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인 스태프가 놀라던 선물을 받고 쑥스러워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진도 참 잘 찍으시는 것 같습니다. 음식은 물론 풍경 등 상하이를 잘 나타낼 수 있는 장면들을 잘 찍어서 곁들이고 있어서 내용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역시 요즈음 출판의 대세는 읽는 책보다도 보는 책으로 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널리 알려진 관광지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를 소개하시는 것도 남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아이링이나 쑹칭링의 고택을 방문한 것이라던가 윤봉길과 루신과 관련된 장소를 찾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즈음 상황 같아서는 제가 상하이를 가 볼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머지 않은 미래에 상하이를 찾게 된다면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모던의 흔적을 찾아가는 인문 여행’이라는 부제는 아마도 일제 식민시절의 문화양식이라던 모던 그룹에 속하던 문인들의 뒤를 살펴보겠다는 생각으로 보입니다만, 그 비중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조금 아쉽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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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바꾼 짐머만의 전보
바바라 터크먼 지음, 김인성 옮김 / 평민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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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경영으로 부를 쌓아가던 유럽제국들의 세력경쟁이 임계점에 도달하면서 예정된 파국이었을 것입니다. 그 발단은 세르비아계 청년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암살한 사건이었는데, 역사적 사건은 우연의 연속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암살의 위기를 피할 수도 있었다고도 합니다. 황태자의 암살로 오스트리아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대영제국,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러시아제국, 오스만제국은 물론 불가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는 물론 아시아의 일본제국까지도 참전하였고, 미국은 전쟁이 후반에 이를 때까지 중립을 지키면서 연합국에 전쟁물자를 제공하는 역할에 머물면서 연합국과 동맹국 사이에 평화협상을 중재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미국이 연합국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독일 외상 짐머만이 멕시코주재 독일공사에게 보낸 한통의 비밀전문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2월 1일부터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시작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계속 중립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멕시코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동맹을 제의한다: 함께 전쟁 수행, 함께 평화 체결, 넉넉한 재정 지원, 멕시코가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에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점 양해. 세부 협상은 공사가 알아서 할 것. 공사는 미국과 전쟁 발발이 확실해지는 순간 [멕시코] 대통령에게 위 사실을 극비로 알라고 대통령 재량으로 일본에게 즉각 지지를 요구하며 동시에 우리와 일본 사이를 중재하도록 제안할 것. 우리의 잠수함 무제한 작전으로 이제 몇 달 안에 영국이 강화를 맺도록 할 거라는 사실을 대통령에게 주지시킬 것. 회신 바람. 짐머만(217쪽)”


그러니까 독일은 미국이 연합국으로 참전하면 전쟁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참전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연합군에 제공되는 군수물자를 차단하기 위한 양수겹장으로 미국 내 거주하는 독일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하여 전선이 생기도록 하는 성동격서의 전략을 구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짐머만의 비밀전문은 연합국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이 가로채 미국 정부에 전달되고, U보트의 공격을 받고 침몰한 영국의 배에 탔던 많은 미국인들이 죽는 사건을 계기로 전문이 신문에 공개되면서 미국내 여론도 참전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공개된 비밀문서와 관련된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짐머만의 전문이 제1차 세계대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하였습니다. <짐머만의 전문>의 2장부터 8장까지는 전문이 보내지기 전에, 독일이 전문을 발송하고 영국이 전문을 가로채기 직전까지, 1차 대전의 발발을 둘러싸고 세계 열강들의 사정과 관계, 역사적 배경을 소개합니다. 여기에는 신생국가 미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멕시코와 충돌을 빚으면서 쌓인 필연적 갈등과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일본제국의 야욕이 곁들여지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옮긴이는 역자서문에서 저자의 <중국에서의 스틸웰장군과 미국의 경험; Stilwell and the American Experience in China>에서 인용한 ‘역사는 잘못된 계산의 나열이다(History is the unfolding of miscalculations.)’라는 구절을 글 제목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 연합군을 지원하면서도 동맹국과 연합국간의 평화협상을 주선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나, 미국의 참전을 저지하기 위한 독일의 빌헬름황제의 꼼수들이 모두 역지사지하지 못하고 상황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더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짐머만의 전보>를 읽다보면 20세기 초의 정보전도 참 대단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미 유럽 열강들은 아시아, 특히 일본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아시아를 넘어 대륙과 대양을 넘겨보고 있었다는 것도 말입니다. 제국주의적 사고로 헛된 꿈을 꾸고 있었던 셈입니다. 지금도 그런 망상을 꿈꾸고 있는 일본사람은 없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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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로 보는 이탈리아 기행 - 세계 인문 기행 2 세계인문기행 2
다나카 치세코 지음, 정선이 옮김 / 예담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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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돌아보고 싶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조각보처럼 쪼개진 여행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밀라노 근처 스트레사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러 갔다가 한나절 밀라노를 보았다던가, 발칸을 여행하면서 밀라노에서 귀국비행기를 타느라 베네치아를 보게 되었다던가 하는 식입니다.


언젠가는 통으로 이탈리아를 보게 될 것을 기약하면서 기회가 되는대로 조금씩 공부를 해보려고 합니다. <문화와 예술로 보는 이탈리아 기행>은 일본의 영화평론가 다나카 치세코의 여행에세이입니다. 영화평론이라는 전공을 살려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영화를 주제로 삼아 이탈리아의 대표적 도시,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그리고 로마에 대하여 적고 있습니다.


일단은 저도 가보았던 베네치아에 대한 저자의 이런 느낌에 공감합니다. “바다를 향해 한껏 열려 있는 기분 좋은 도시! 빛나는 대리석의 모자이크로 빼곡히 뒤덮인 교회와 나란히 서 있는 건물들의 화려한 장식, 이 모두가 웅대한 무대장치다.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고, 이 순간 베네치아는 나의 것, 나만을 위한 것이라며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여행자의 나르시시즘을 노골적으로 부추긴다.(59-60쪽)” 누구나 베네치아에 오면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든다면서, 저자는 베네치아에 머무는 동안 맛보는 행복감은 파리의 상제리제 거리에 서 있을 때보다도, 빈의 숲속에 발을 들여놓을 때보다도 훨씬 크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네치아를 무대로 한 영화로는 비스콘트감독의 <여름의 폭풍(1954년)>과 데이비드 린 감독의 <여정(1955년)> 두 편을 인용하였는데, 오래 된 영화이고, 명화극장에서도 본 기억이 없어서 영화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실감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베네치아를 다녀왔기 때문인지, 나름대로의 이해는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두 편의 영화는 우연히도 계절이 모두 여름이었네요. 그래서 인지 봄의 베네치아와 가을의 베네치아의 느낌을 특별하게 적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레가타가 끝나면 비를 뿌리며 가을이 온다.(레가타(Regatta)는 원동기 없는 배를 사용한 여러 사람의 보트 경기입니다) 베네치아의 비는 아주 몰인정하다. 바다에는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배는 사정없이 흔들린다. 산마르코 광장까지 물에 잠긴다.(83쪽)” 제가 베네치아에 갔을 때가 가을이 깊었을 때였는데, 산마르코 광장에는 나무로 만든 통로가 놓여있는 것을 보면 밀물에 바닷물이 들어차는 모양이었습니다. 영화이야기를 빼고 나면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아내와 함께 간 발칸여행에서는 밀라노는 말펜사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것 말고는 구경한 것이 없습니다. 학회에 갔을 때, 두오모를 중심으로 구경한 것이 전부인데, 스칼라극장, 아케이드 갈레리아 등을 돌아본 것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미술관 등도 휴관이라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밀라노의 도시의 여왕이다’라고 했다는 옛 시인의 말씀에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두오모의 일부에서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옥상에 올라가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두오모를 가볼 기회가 있다면 꼭 옥상에 올라가 보겠습니다. 알프스까지 보인다고 하니 말입니다. 갈레리아의 황소 불알에서 세바퀴를 돌았으니 언젠가는 밀라노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칠리아는 모르더라고 로마, 피렌체, 나폴리는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유럽의 분위기가 살벌해서 눈치를 보아야 할 것 같아서 아무래도 당장은 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좋은 사진을 넉넉하게 삽입하고 있어 눈이 많이 호강하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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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진수 - 맛의 사계를 요리하다
단 카즈오 지음, 심정명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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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는데, 소위 쿡방의 위세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것 같습니다. 역시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은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기본 적인 세 가지 요소라고 하는 의식주 가운데 으뜸인 것 같습니다. 쿡방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요리의 세계에 빠져드는 분들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밥하고, 라면 끓이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이 없는 탓인지 음식 만들기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미각이 시원치 않은 탓인지 딱이나 미식을 찾는 성향이 아닌 것도 한 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음식 만들기에 재능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특히 일본 음식을 아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책읽기가 될 <백미진수>를 읽었습니다. 일본 문단 최고의 미식가로 알려진 단 가즈오의 에세이집입니다. 흔히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자신이 만든 음식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가즈오에게 음식만들기란 자신보다는 가까운 사람들과 같이 나누는 것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일본 문단의 내로라하는 분들과 같이 음식을 즐겼다고 적은 것을 보면, 저자로부터 음식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일본 문단에서 명함을 내놓기기 조심스러울 것 같습니다.


<백미진수>에서 저자가 만드는 음식은 물론 퓨전인 것도 있지만, 일본의 전통음식, 특히 지역특산의 식재료로 만들어 옛날의 풍미를 내는 그런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음식도 제대로 아지 못하는 주제에 일본 전통음식은 정말 깜깜한지라 실감은 덜했지만, 그래도 음식과 관련하여 저자가 늘어놓은 사설(?)은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책의 앞부분에 보면 일본 열도의 지도가 나오고 이 책에서 언급되는 주요 지명을 표시할 정도로 일본 구석구석의 특별한 음식을 소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멀리는 미국, 포르투갈, 프랑스, 특히 가까운 중국의 경우는 화제에 많이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음식은 딱 한 가지 ‘신선로’, 그것도 이름만 소개하고 있어서 의외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혐한론자인가? 아니면 한국에는 와본 경험이 없어 한국 전통음식의 깊은 맛을 전혀 몰랐던 모양입니다. 이 분이 중국음식을 많이 아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944년에 보도반의 일원으로 중국 전선을 돌아다녔기 때문인 듯합니다. 보도반원이었다면 일본군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고 들은 것이 있었을 터이나 생전에 그 점을 다룬 글은 별로 없었던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후난에서 광시에 이르기까지 민가에서 담가 먹던 가양주를 징발(?)해서 즐겼다는 일화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분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흥미로운 경험이라는 생각뿐인 듯합니다. 이 책의 기획에 방점을 둔 책읽기를 함이 옳겠지만,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는 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식이나 식재료, 혹은 지인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은 일화 등만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구분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분위기에 딱 맞는 하이쿠를 곁들이고 있어, 역시 문학적 향취를 더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귀한 몸이 되었다는 아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아귀라는 생선이 그로테스크하고 물컹물켱해서 도마 위에서 칼질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가리에 갈고리를 걸어 매달아서 자른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저자가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아귀라는 생선은 생물로는 살이 연하지만 일단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매달아 조금 건조시키면 살이 수축되면서 쫄깃한 식감을 더하기 마련입니다. 살이 적당히 탱탱해지면 잘라서 매운탕을 끓이거나 쪄서 초장에 찍어먹었습니다. 아귀살은 별 맛이 없기 때문에 초장과 어우러져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귀찜이나 아귀매운탕은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만들어주시던 것보다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세계를 누비면서 음식을 만들고 즐긴 저자답다는 생각이 드는 한 대목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여행지에서 다양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요리하는 일은 무척 즐겁다. ‘먹고 마시고 만드는’ 이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면 여행은 생각 외로 따분한 법이다.(130쪽)” 하지만 먹는 일이 여행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따분하기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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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 황제가 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대가들의 인생론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이정미 옮김 / 리더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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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소천한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는 ‘지적인 휴가를 보내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여행 중에 여행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건 매우 흥미가 넘치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움베르토 에코 지음, 연어와 함께 여행하기 45쪽, 열린책들, 1995년)라고 했습니다. 굳이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여행 중에 책을 읽는 것은 절대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휴가뿐 아니라 출장길에도 책을 몇 권 들고 가는 이유는 비행기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의 지루함을 덜 수 있을 뿐 아니라, 비행기나 버스를 타는 동안 특별하게 할 일이 없어 멍 때리는 시간을 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에코의 말을 조금 비틀어서 ‘휴가를 지적으로 보내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목적은 여행이고, ‘지적(知的)’으로 보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점점 들고 가는 책이 많아지게 되고, 기왕 가지고 갔으니 모두 읽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끓어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행보다도 책읽기에 매몰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수준으로 타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뚱딴지 같이 여행과 책읽기를 서두에 꺼내는 것은 지난 달 남미를 여행하면서 들고 갔던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드디어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은 그가 남긴 <명상록>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자기 자신에게’라고 달았던 원제목의 뜻을 살린 제목으로 생각됩니다. 2천년에 가까운 옛날에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던 황제가 남긴 말들이 오늘날까지도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삶의 본질에 대하여 천착했던 그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나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되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철인황제(哲人皇帝)라고 부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로마의 전성기라고 하는 오현제시대(AD96~AD180년)의 마지막 황제입니다. 로마제국은 황제가 다스렸지만 제국 이전의 정치형태였던 공화정의 정신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통상적으로는 제국의 황제는 적통의 자식이 제위를 이어가는 방식을 취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시절 로마제국은 황제가 자질이 있는 자를 아들로 입양하여 제위를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아니면서도 자식인 셈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21년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3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자 세 차례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은 싹을 보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황제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집안이 플라비아누스 황제(69~96) 재위시절 황제를 중심으로 사회 및 정치권력이 집결되던 새로운 로마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몇몇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고 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황제의 기획에 따라 오랫동안 황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던 것으로 이런 과정은 제위기간동안 통치에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서기 161년 그가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의 제위에 올랐을 때 황위 계승권을 나누고 있던 양제(養弟)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강권하여 공동 황제로 즉위토록 하였습니다. 동등한 법률상 지위와 권력을 공식적으로 나누는 공동 황제가 로마제국 사상 최초로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169년 질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루키우스 베루스가 공동 황제로서 한 역할은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제위기간 로마 사회는 안팎으로 불안했습니다. 재위 첫해부터 본국과 주변에 기근과 홍수가 있었고, 제국의 동방으로 침입한 파르티아를 격퇴하러 출정한 1개 군단이 궤멸하는 바람에 아르메니아 왕국이 점령당했습니다. 하지만 2년 뒤에 반격에 나서 아르메니아 왕국을 탈환하였고 다시 3년 뒤에는 티그리스강을 건너 파르티아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습니다. 168년에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이 발발해서 진퇴를 반복하다가 6년이 지나서야 강화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게르만족과의 전쟁은 제국의 군사나 재정면에서 취약점을 드러냈지만, 이를 해결할 묘수가 없어 임시방편의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드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앞선 황제들과는 달리 친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목하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여, 에픽스테토스, 세네카와 함께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꼽힙니다. 인간의 욕망이 민낯으로 부딪히는 전장을 누비면서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사유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철학자 황제는 사유를 통하여 정리된 것들을 12편의 <명상록>으로 남겼습니다.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이고, 그 대척점으로서 삶은 무엇인가?’, ‘삶에서 필연은 무엇이고, 우연은 무엇인가?’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주로 철학의 영역에서 답을 구하는 질문들입니다. 앞서 적은 것처럼 철학자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구하려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배워온 과정을 적은 제1권은 ‘나는 할아버지 베루스에게서 훌륭한 품행과 노여움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915쪽)’라고 시작하는 것처럼 일인칭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관한 것들을 적을 때는 이인칭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나의 영혼이여, 그대는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자신을 혹사시키는구나. 그러다가는 더 이상 자싱의 명예를 되찾을 은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그 짧은 인생도 거의 끝나가지만, 그대의 영혼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에서 축복을 찾으려고 하다니!(34쪽)’

몇 쪽씩 할애하여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의 생각들은 짧게 압축되어 있습니다. ‘기억하는 사람이든 기억되는 사람이든 모든 것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사라진다.(71쪽)’라는 경구처럼 한 줄에 불과 한 것도 많고, 심지어는 ‘자연은 모두에게 유익한 것만을 제공한다(62쪽)’라는 말처럼 한줄도 채우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때로는 ‘얼마나 음흉하고 비겁하고 완고한 인간인가! 짐승이나 어린에처럼 우매하고 나태하고 변덕스럽고 야비하고 교활한 폭군.(69쪽)’이라고 적은 대목을 보면 황제에 대한 경구라고 보이기 때문에 <명상록> 자체가 황제를 위한 교과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에 적은 ‘폭군’은 아마도 네로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명상록> 자체가 스스로를 다스려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자기 성찰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스스로가 폭군의 길로 접어들지 않도록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오만하고 불행한 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마라. 그들의 의견이 그대를 지배하지 않도록 삶을 참된 관점에서 바라보라(62쪽)’라는 대목이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은 배움, 인생, 운명, 죽음, 인간 본성, 자연의 이치, 이성, 선과 악, 순응하는 삶, 사회적 존재, 영혼, 도덕적 삶 등을 주제로 하여 모두 12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마도 같은 주제를 두고 사유를 거듭하였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생전에 황제가 남긴 명상록을 후대 사람들이 주제별로 구분하여 엮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처음부터 읽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관심이 가는 주제를 집중해서 읽는 것도 좋은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죽음에 관한 내용 가운데, ‘제단 위로 많은 유향 방울이 떨어진다. 어느 것은 먼저, 어느 것은 나중에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떨어지는 것 가체로는 별 다른 차이가 없다.(63쪽)’라고 적어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개념을 완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육체는 물론 영혼마저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영혼불멸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어 종교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영혼불멸을 믿을 수 없었던 이유를 황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만일 사후에도 영혼이 살아있다면 우리를 감싸는 대기는 태고 이래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수용할 공간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65쪽)’ 그리고 질문에 대한 황제의 생각이 이어집니다. 책을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히포크라테스를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의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한 대목이 딱 하나 있습니다. ‘만일 선원들이 선장의 말을 따르지 않거나, 환자가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선장이 배에 탄 선원들의 안전을 어떻게 도모하고, 의사는 환자의 병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123쪽)’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의료현장의 분위기를 개탄하는 의료인들에게는 달콤하게 들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관계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를 따지는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 환자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설득을 통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라. 그대가 정의의 원칙을 준수하겠다면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라도 감행하라(122쪽)’라는 대목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보니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장면들이 생각나게 됩니다.


독립된 주제로 구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상록>에는 유독 죽음과 운명에 관한 기록이 많습니다. 옮긴이는 그 이유를 ‘(죽음은) 스토아 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죽음이란 고통이나 종말이 아니라 해체와 소멸이라는 자연의 작용에 불과하다(270쪽)’라고 설명합니다. 생노병사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에서 죽음은 한 순간이지만 죽음은 어느 순간이라도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극복하는 순간 삶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요?

<명상록>에 실려 있는 황제의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도 물론 좋습니다. 하지만 말미에 붙인 옮긴이의 작품해설 속에 있는 한 구절이 바로 보석이라는 생각이 들어 옮겨봅니다. “우리를 행복이나 불행으로 인도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다. 우주의 사건들은 일어나야 할 방식대로 일어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요, 운명이다. 인간이 여기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하지만 어떤 운명이 닥치든 초연하고 담담하게 대처할 수는 있다. 그것은 철학하기를 통해서다. 철학은 자기구원을 위한 수행인 셈이다.(271-272쪽)”


황제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이 보낸 하루를 돌아보고 스스로 정한 원칙대로 행하였는지를 점검했을 것입니다. 전장을 누벼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힘들고, 언제까지 번영을 누릴 것만 같던 로마제국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손에 잡히지 않는 위기감이 옥죄어 오는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명상록>을 꾸준하게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라. 절대로 격노하지 말고, 절대로 냉담하지 말고, 절대로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도덕적인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다.(148쪽)”라고 적은 것처럼 말입니다. 황제를 따라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라면 황제가 남긴 <명상록>을 하루 한쪽씩 꼼꼼하게 읽고 잠자리에 드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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