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의 역사 - 최초의 경작지에서부터 현대의 슈퍼마켓까지
한스외르크 퀴스터 지음, 송소민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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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이건 그 역사를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사’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라면 무조건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의 원천이라 할 곡물의 역사를 다루었다는 <곡물의 역사>는 그런 연유로 읽고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먹방이 대세인 점도 조금은 반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최초의 경작지에서부터 현대의 슈퍼머켓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곡물의 역사>는  하노버의 라이프니츠 대학교 식물지리학연구소에서 식물생태학을 연구하는 한스외르크 쿠스터교수의 저작입니다. 저자는 <엘베 : 풍경과 역사>, <숲의 역사 :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 <중부 유럽 풍경의 역사 : 빙하기부터 현대까지>, <데사우-뵈를리츠의 정원 왕국 : 풍경과 역사>, <풍경의 발견 : 새 학문 입문서> 등, 생태학 분야의 역사를 짚어보는 책들을 써왔다고 합니다. 참고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 http://blog.joins.com/yang412/12850611>에서 식량문제의 해결이 인류역사에서 변곡점이 되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대륙은 물론 신대륙에서의 식물과 동물을 재배하고 가축화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을 기억합니다. 자자 역시 <곡물의 역사>에서 식물은 물론 가축의 일부가 야생에서 재배하거나 가축화되어 인류의 식량이 되어온 과정을 살피고 있는데, 유럽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 <총, 균, 쇠>와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류가 재배하게 된 식물이나 가축화한 동물의 종류가 워낙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다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모든 인류가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석기시대에서 지역별로 각기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은 야생의 동식물을 가축화하거나 작물화함으로써 식량자원과 이동수단 등으로 활용할 수 있었는가에 달려있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야생동물의 가축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제안한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은 기억해둘만 합니다. 톨스토이가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의 불행한 이유는 제각기 다르다’라고 적은 대목을 결혼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 결혼이 불행해진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야생동물을 가축화하는데 식성, 성장속도, 성격, 짝짓기 습성 등의 요소들이 충족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고고학자 패트릭 맥거번은 인류가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하게 된 것은 야생식물을 재배하여 식량으로 삼기위해서가 아니라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습니다.(패트릭 맥거번 지음, 술의 세계사, 글항아리, 2016년)

저자는 만일 재배식물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아예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냥과 채집만으로 살았다면 문자의 필요성이나 도시와 국가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최초로 집단을 이루어 작물을 재배한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지역’에서 문자를 만들어낸 것과 연관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수렵과 채집만으로 삶을 영위하던 선사시대의 인류가 현대인과 비교해서 불행하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렵채집을 하던 인류는 하루 너댓 시간의 노동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과 여가활동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채집만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작물을 재배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수렵과 채집으로 먹을 것을 얻는 시절에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영아와 노인살해, 금욕기간을 설정하는 등의 방법으로 인구를 억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 식량이 풍족해지고, 노동이 분업화되면서 더 많은 노동인구가 필요해졌기 때문에 인구를 통제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두 열일곱 꼭지로 구분한 <곡물의 역사>에서는 유럽 각 지역에서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야생식물이 재배화에 성공하게 된 과정을 뒤쫓고, 이런 재배식물이 유럽사회에 유입되는 과정 그리고 대량생산되고 세계화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저자는 생물군이 단순한 존재 혹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특성을 가진 서로 다른 개체들이 살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시장에서 달걀, 우유, 혹은 고기를 살 때 이들이 항상 똑 같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 곡물은 균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곡물 역시 재배환경에 따라서 미세한 성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가공과정에서 차이가 더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야생상태이던 곡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재배곡물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의 선택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인간이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에게 유용한 요소를 가진 품종이 선택되어 대를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15만 년 전에 아프리카 동쪽에서 처음 등장한 현생인류는 먹을 것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10만 년 전에는 서남아시아에, 7만 년 전에는 동아시아로, 오스트레일리아에는 5만 년 전에, 유럽은 조금 늦은 4만 년 전에 진출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유럽을 뒤덮었던 빙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알래스카에는 1만5천 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는 1만2천 년 전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빙하기 이후에는 기후의 변화가 뒤따라서 지역별로 동식물의 분포가 달라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입니다. 기후의 변화에 따라 점차 채집과 사냥으로 식량을 얻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채집한 곡물을 저장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알곡으로부터 다음해 작물이 성장하는 것을 우연하게 발견한 사람들이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가수분에 의하여 번식되는 과정에서 재배식물과 야생식물은 점차 뚜렷하게 분리되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찾아낸 선사시대의 주거지에서는 탄화된 곡식의 낟알과 수많은 식물의 씨앗과 열매들이 발견됩니다. 그것들이 단순하게 수집된 야생식물의 것인지 아니면 재배식물의 것인지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연선택이 아닌 사람의 선택에 의하여 지배식물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는 낟알의 크기가 아니라 낟알이 익은 후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낟알을 수확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재배식물의 원산지는 서남아시아의 저지대 건조지역이라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재배식물로는 기초 곡물이라고 하는 몇 가지 밀과 보리 종류, 깍지가 있는 콩과 식물인 완두와 편두, 그리고 아마 등이 있습니다. 야생식물이 재배식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관건이 되는 요소는 앞서도 언급한대로 이삭의 축이 단단해서 낟알이 여물었을 때 즉시 땅에 떨어져 곧바로 싹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수확한 낟알을 저장해두었다가 식량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나, 이런 식물의 낟알을 뿌리면 같은 낟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곡물의 재배가 시작된 것이다. 경작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재배식물로부터 낟알을 수확할 때까지 먹이 경쟁자들로부터 재배식물을 지켜야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정주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는 정주생활자와 채집생활자 그리고 사냥생활자로 나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정주생활을 시작하면서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병행되었을 것입니다. 경작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재배식물의 경작지를 확대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야생식물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재배식물은 서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으며, 동남아시아지역에서는 벼와 코코야자가, 인도에서는 목화와 콩이(콩은 아프리카가 원산이나 인도에서 품종이 다양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와 기장이, 뉴기니에서는 사고야자가, 아프리카의 사바나지역에서는 수수, 밤바라땅콩, 수박, 그리고 얌이, 아메리카에서는 호박, 땅콩, 옥수수, 토마토, 감자 그리고 고구마가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서남아시아에서 시작한 농경은 마지막 빙하기가 지나면서 숲이 형성된 유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당시 서남아시아는 이미 지중해를 통하여 유럽남부와 아프리카 북부를 왕래하고 있었는데, 서남아시아의 농경이 유럽 전체로 확산된 것은 로마제국의 강역이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에 편입된 지역의 군사들 역시 남부지역에 버금가는 생활조건을 마련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지중해 지역과 같은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재배식물이 도입되기도 했고, 재배가 불가능한 품목들은 무역을 통하여 해결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이 최초의 거대국가로서 기후 조건이 서로 다른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은 장원을 중심으로 한 토지제도가 운영이 되었습니다. 장원의 영주는 재배식물의 수확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경작지를 셋으로 구분하여 각각 월동작물과 하곡작물을 재배하는 경작지와 휴경지로 운영하였습니다. 중세 이후 유럽사회는 동아시아와의 교역이 증대되면서 동아시아의 재배작물이 전해졌으며,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에는 그곳의 재배작물이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유럽사회의 재배식물의 품목과 음식의 종류는 엄청나게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채소, 샐러드, 과일 등의 종류가 다양해졌던 것입니다. 물론 기후 조건 등이 맞지 않아 재배가 어려운 경우에는 현지에서 재배하여 수입해오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변화는 유럽사회의 토지이용의 개혁과 세계무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농지를 분할하여 운영하던 삼포식 농업을 폐지하고 농지를 통합하여 효율적으로 경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반면 농지의 황폐화와 병해충의 피해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송능력의 확대와 함께 농지의 상업적 경영이 확산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농업분야의 기계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농업인구가 격감하게 되고, 재배품종이 다양성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농업이 효율화됨에 따라 식량생산이 극대화되었음에도 지역에 따라 굶주리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저자는 농업이 고도화되면서 곡물생산은 크게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은 거꾸로 곡물생산이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안보적 차원에서 식량생산을 고민해본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새로운 품종의 도입과 관련하여 유전자재조합 곡물의 안전에 관한 논란도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리고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이후 거론된 농업생태계의 보존과 관련한 움직임 등에 관해서도 짚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인류의 문화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발전은 그 발전에 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큰 과제를 안고 있으며, 생명의 발전을 위한 기초가 미래에도 확실히 마련되어야 한다는 과제도 있다(298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과제는 지금까지 알려진 자연적 상관관계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면 해결할 수 없을 것이며, 자연과 문화가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을 최대한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연과 문화가 공존할 수 있는 경지를 열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이 유럽사회를 중심으로 한 곡물의 역사라는 한계를 지적하였습니다만, 저자 역시 그 점을 간략하게 언급하였습니다. 즉 현재 세계에서 재배되는 식물종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재배식물의 역시 기술에서 모든 것을 고려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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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라틴 여행 일기
체 게바라 / 이후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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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년 초에 남미여행을 다녀오면서 아르헨티나와 쿠바에서는 체 게바라에 대한 열기가 여전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체 게바라 평전; >을 읽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동참하고, 콩고와 볼리비아의 게릴라전에 참여하는 등의 행동주의적 사고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특히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이면서도 진료실을 떠나 밀림으로 가는 결단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체 게라바의 라틴 여행일기>는 그가 고난의 길을 택한 계기에 대한 윤곽을 그려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194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졸업을 1년 앞둔 1951년 10월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찾아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남아메리카를 종단하는 여행을 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보통의 의과대학생들이라면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행동으로, 꽤나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체 게라바의 라틴 여행일기>는 1951년 12월부터 1952년 7월까지 8개월에 걸친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 두 사람의 무전여행기입니다. 알베르토가 나환자를 진료하던 병원과 그 인연들을 따라가는 때로는 신세를 지고, 때로는 무전취식도 시도하는 등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여행입니다. <체 게라바의 라틴 여행일기>으로 월터 살레스 감독이 2004년에 만든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2015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바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1988년에 쓴 <나의 아들 체>에서 인용한 프롤로그를 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여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아이는 알고 있었다(19쪽)’라고 하였지만, 막상 체가 여행을 시작할 때는 그런 거창한 생각을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행을 하면서 조금씩 마음속에 쌓여간 생각들이 그를 변모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남미대륙을 종단하는 긴 여행을 떠난 것은 단순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의대와 병원, 시험 등에 잔뜩 싫증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떻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의과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꼭 같은 생각을 하지만, 하던 공부를 집어치우고 장기간 여행을 결정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의 여행경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서로 방향을 잡아 칠레로 들어가 북상하여 페루를 거쳐, 티티카카호수가의 푸노를 거쳐 쿠스코를 구경하고 리마로 갔습니다. 리마를 떠나서는 콜럼비아를 거쳐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의 여행경로 가운데 큰 도시는 그럭저럭 알 듯도 하지만, 작은 도시는 어디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여로는 다양한 인연으로, 혹은 의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무기로 병원을 방문하여 신세를 지거나, 민병대, 그도 안되면 막무가내로 신세를 지는 식입니다. 그 옛날 이었으니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의사처럼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을 하는 모습도 얼핏 보이는데, 의사면허가 없으면서도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날 때만해도 에르네스토는 사상적인 성향은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만, 추키카마타광산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공산주의자인 칠레인 노동자부부를 만난 것이 기층민의 삶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목적 없는 방랑을 기생적인 삶으로 보며 경멸하고 있었던 것 같다.(87쪽)” 그런 노동자부부에 대하여 그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자연스런 욕망 이상 그 무엇도 아닐 터였다.’라는 정도의 인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돌아본 그의 느낌은 빛나는 잉카문명을 무참하게 파괴한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그가 국경을 초월하여 무장투쟁에 참여하는 정신적 배경의 단초를 잠깐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24세 생일을 맞아 나환자촌에서 차려준 파티에 행한 연설의 마무리부분입니다. “우리는 멕시코에서 저 멀리 마젤란해협에 이르기까지 현저히 많은 민족사적 유사점을 가진 하나의 메스티조 민족입니다. 이제 모든 편협한 지역주의를 타팟하자는 뜻에서 저는 페루와 통합된 하나의 아메리카를 위하여 축배를 청합니다.(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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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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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체트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가 망명하여,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떠돌면서 겪은 일들을 담은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3609310>의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를 주목받게 만든 첫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었습니다. 무대는 페루에 인접한 아마존 유역에 있는 칠레의 엘 이딜리오이고, 주인공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노인입니다. 노인이 젊었을 적에 아내와 함께 엘 이딜리오에 도착하였을 때는 마을이랄 것도 없는 미개척지로 살아남기 위하여 홍수와 아마존 밀림의 엄청난 생명의 힘과 겨루어야만 했습니다.

 

결국은 지쳐 쓰러진 두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이 지역 원주민 수아르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그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로레스 엔타르나시온 델 산타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라는 긴 이름의 아내가 말라리아로 먼저 죽게 되자, 안토니오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고, 그곳에 남아 사라진 기억을 보듬고 살기로 합니다. 수아르족 틈에서 밀림생활을 하게 된 그는 수아르족이 아닌 수아르족처럼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밀림을 떠나 엘 이딜리오에 정착하게 됩니다. 어느 날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는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면서 연애소설을 탐독하면서 일상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노인의 독서방식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45-46쪽)”

 

밀림의 법칙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탐욕은 화를 부르고 말았습니다. 어린 살쾡이들을 몰살시킨 것입니다. 분노한 암살쾡이는 복수에 나서 새끼를 몰살시킨 양키를 죽였고, 나아가 밀림으로 몰려드는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엘 이딜리오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탈에만 급급하던 뚱보읍장은 날뛰는 짐승을 잡아야만 했습니다. 안토니오를 포함한 수색대가 짐승을 찾아 떠나고 결국에는 안토니오와 암살쾡이의 1대1 대결이 시작됩니다. 살쾡이의 살인행각을 살피던 노인은 짐승이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과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로 자신이 선택된 것입니다.

 

암살쾡이를 뒤쫓다보니 상처 입은 수컷에 이르게 되는데, 암살쾡이는 수컷의 목숨을 끊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수컷의 죽음을 애도한 암살쾡이는 다시 안토니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데, 안토니오는 수컷을 따라 가겠다는 의도로 읽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맹수와의 대결에서 한치라도 허점을 보인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정면으로 맞선 상황에서 노인은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습니다. 노인은 앞으로 나아갔고, 부상당한 짐승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노인은 한쪽 무릎을 꿇었고, ‘마치 거대한 화살처럼 강변을 달려오던 암살쾡이는 불과 네댓 걸음을 남긴 지점에서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차분하게 그 순간을 기다리던 노인은 짐승의 도약이 정점에 이르자 방아쇠를 당겼다. 일순 허공에서 도약을 정지한 듯한 짐승은 이내 몸을 비틀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178-179쪽)’ 저자는 두 생명 사이의 싸움이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극적인 순간을 세밀화처럼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는 노인이 책읽는 방식으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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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와 시인들 - 사랑의 이야기
클라우스 틸레 도르만 지음, 정서웅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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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쓰면서 마침 눈에 띄어 읽게 되었습니다. 겨우 한나절 구경한 것을 가지고 베네치아를 거론하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어느 한 도시를 제대로 알려면 얼마나 머물러야 하는지 정답을 없을 것 같습니다. 베네치아는 온 세상의 문인들이 꿈꾸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응은 다양했던 모양입니다. 찬미한 사람도 있으며 비판적인 글을 남긴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독일의 작가 클라우스 틸레-도르만은 베네치아에 대한 글을 남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29명의 작가를 엄선하여 그들이 남긴 베네치아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냈습니다. 그 시작은 베네치아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되는데 있어 인쇄소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200여개의 인쇄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알도 마누치오는 책의 제왕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알도 마누치오를 첫 번째 인사로 모시게 된 것 같습니다. 알도 마누치오의 집에는 ‘이곳에서부터 그리스의 높은 학식이 대중을 위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29쪽)’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마르셀 프루스트, 존 러스킨,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남긴 글들을 이미 읽은 바 있습니다만 그밖에 인사들의 주옥같은 글을 읽으면서 베네치아를 어떻게 예찬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구절들을 접어두었습니다.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코이에이트의 글입니다. “모두 여섯 시간을 오르내리며 흐르는 이 바다의 팔들은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인체의 혈관처럼 도시를 꿰뚫고 흐르다가 대운하로 흘러들어 거기서 모두 합쳐진다. 운하는 무엇보다 두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도시에서 유입된 온갖 쓰레기와 오물을 운반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직접 손을 봐서 정화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하진 않아도 물굽이를 따라 오르내리는 동안 그것들을 빨리 운하를 벗어나 흘러간다.(74쪽)” 그리고 또 다른 장점은 곤돌라를 타고 수로를 통하면 걸어가는 것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베네치아의 운하를 혈관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것 같습니다.

 

헨리 제임스는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이 피조물은 아주 섬세한 여자같이 수시로 변한다. 모든 시각으로 그 아름다움을 인지할 때에야 비로서 확실히 알게 되는 여자같이. 그녀는 기분이 좋거나 때론 우울하다. 그녀는 날씨나 시간에 따라 창백하거나 빨갛거나 회색빛이거나 장밋빛이거나, 차갑거나 따듯하거나 신선하거나 무미건조하다. 그녀는 항상 재미있고 거의 항상 슬프다. 그러나 수천 가지 우아한 기교를 부릴 줄 알며, 늘 행복을 가져다주는 놀라운 일들에 탁월하다.(246-247쪽)” 베네치아를 여인에 비유한 것도 참 적절합니다. 해가 조금만 기울어도 베네치아의 색조는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분위기가 바뀌는 베네치아는 정말 변덕스러운 여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비유도 놀랍습니다. “베네치아로의 여행만큼 긴장되는 경우도 없다. 기차가 물의 도시로 들어가노라면 도시가 물로부터 서서히 솟아오른다.(267쪽)” 차가 베네치아 본섬에 가까워지면 수면 아래 숨어 있던 도시가 물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겨울에만 베네치아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이렇게 적었습니다. “경루 저녁에는 바다가 거꾸로 부는 동풍에 휩쓸리면서 모든 운하를 목욕통 모양의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운다. 때로는 물이 넘치기도 한다. 그러나 지하층에서 달려 올라와 ‘수관(水管) 주세요!’하고 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당초 지하층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도시는 발목까지 물에 잠긴다. … 순례자들은 물속에서 구두를 시험해본 후 호텔 방 히터 위에서 말린다. 토박이들은 고무장화를 꺼내러 신발장으로 향한다.(345쪽)” 사리 때는 해수면이 높아져 산마르코광장이 물에 잠긴다. 우리가 갔을 때도 산 마르코성당 앞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물 위로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틀이 놓여 있었다. 베네치아에 관한 문호들의 뒷 이야기, 심지어는 창녀에 이르기까지도 거침없이 담아낸 흥미로운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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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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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워 1945~2005>로 널리 알려진 유럽의 근대역사가 토니 주트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장문의 서평의 <재평가; http://blog.joins.com/yang412/13741266>는 지식인과 사상, 국가와 사건들에 대한 20여개의 비평 글을 담고 있습니다. <재평가>에는 미리암 아니시모프의 <프리모 레비: 어느 낙관주의자의 비극>을 비평한 내용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던가 봅니다. 프리모 레비의 데뷔작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게 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의 수용소에 관한 기록으로는 오래 전에 읽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http://blog.joins.com/yang412/5396723>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http://blog.joins.com/yang412/13929327>를 읽으면서 인간이 극한상황에서 과연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면서 인간이 타의에 의하여 극한 상황에 몰린 대표적인 사례이며 관련된 기록이 풍부한 나치의 수용소에 관한 기록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인 인간인가>는 한계 상황에 몰린 인간은 어떤 행동양식을 보이는가에 관한 좋은 기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다른’ 가람들을 거기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그 후까지도 우리들 사이에서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과 경합을 벌일 정도로 즉각적이고 강렬한 충동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씌여졌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내적 해방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수용소에서부터 훗날을 위하여 일상을 꼼꼼하게 기록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았고, 그 기록을 잃어버리지 않은 행운을 얻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후에 이런 증언을 듣게 된 사람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았다 뿐이지 고향에 남았던 사람들도 만만치 않은 고초를 겪었다라거나,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어쩌자는 것이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냐 등등 증언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생각지 못한 문제가 대두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이와는 달리 살아남았다는 것이 수치와 죄책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존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타협을 거부하고 죽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협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등등... 결국 레비는 68세가 되던 해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생존자>에서는 수용소로 끌려가면서, 혹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인간이라면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기록을 읽었습니다만, 수용소마다 양상이 다양했던가 봅니다. 프리모 레비가 그려낸 아우슈비츠의 모노비츠에 있는 제3수용소의 경우는 끔찍할 정도는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갈 수밖에 없었던 수용소의 일상을 감정을 빼고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단테의 <신곡>에 비유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한 점이 돋보였다고 할까요?


어떻든 레비에게는 운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통제의 수준이 그렇게 강도 높지 않았던 것은 전쟁이 말기로 치달으면서 노동력 부족이라는 변수를 만난 것이나, 화학을 전공한 덕에 실내에서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체력의 소모가 극심하지 않았던 것, 독일군이 퇴각하기 직전에는 성홍열로 병동에 입원할 수 있었던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존자>에서도 언급되었던 점입니다만, 죽음으로서 영웅이 되던 시대는 갔습니다. 살아남는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하는 것인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화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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