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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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체트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가 망명하여,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떠돌면서 겪은 일들을 담은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3609310>의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를 주목받게 만든 첫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었습니다. 무대는 페루에 인접한 아마존 유역에 있는 칠레의 엘 이딜리오이고, 주인공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노인입니다. 노인이 젊었을 적에 아내와 함께 엘 이딜리오에 도착하였을 때는 마을이랄 것도 없는 미개척지로 살아남기 위하여 홍수와 아마존 밀림의 엄청난 생명의 힘과 겨루어야만 했습니다.

 

결국은 지쳐 쓰러진 두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이 지역 원주민 수아르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그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로레스 엔타르나시온 델 산타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라는 긴 이름의 아내가 말라리아로 먼저 죽게 되자, 안토니오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고, 그곳에 남아 사라진 기억을 보듬고 살기로 합니다. 수아르족 틈에서 밀림생활을 하게 된 그는 수아르족이 아닌 수아르족처럼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밀림을 떠나 엘 이딜리오에 정착하게 됩니다. 어느 날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는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면서 연애소설을 탐독하면서 일상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노인의 독서방식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45-46쪽)”

 

밀림의 법칙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탐욕은 화를 부르고 말았습니다. 어린 살쾡이들을 몰살시킨 것입니다. 분노한 암살쾡이는 복수에 나서 새끼를 몰살시킨 양키를 죽였고, 나아가 밀림으로 몰려드는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엘 이딜리오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탈에만 급급하던 뚱보읍장은 날뛰는 짐승을 잡아야만 했습니다. 안토니오를 포함한 수색대가 짐승을 찾아 떠나고 결국에는 안토니오와 암살쾡이의 1대1 대결이 시작됩니다. 살쾡이의 살인행각을 살피던 노인은 짐승이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과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로 자신이 선택된 것입니다.

 

암살쾡이를 뒤쫓다보니 상처 입은 수컷에 이르게 되는데, 암살쾡이는 수컷의 목숨을 끊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수컷의 죽음을 애도한 암살쾡이는 다시 안토니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데, 안토니오는 수컷을 따라 가겠다는 의도로 읽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맹수와의 대결에서 한치라도 허점을 보인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정면으로 맞선 상황에서 노인은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습니다. 노인은 앞으로 나아갔고, 부상당한 짐승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노인은 한쪽 무릎을 꿇었고, ‘마치 거대한 화살처럼 강변을 달려오던 암살쾡이는 불과 네댓 걸음을 남긴 지점에서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차분하게 그 순간을 기다리던 노인은 짐승의 도약이 정점에 이르자 방아쇠를 당겼다. 일순 허공에서 도약을 정지한 듯한 짐승은 이내 몸을 비틀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178-179쪽)’ 저자는 두 생명 사이의 싸움이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극적인 순간을 세밀화처럼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는 노인이 책읽는 방식으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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