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라틴 여행 일기
체 게바라 / 이후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년 초에 남미여행을 다녀오면서 아르헨티나와 쿠바에서는 체 게바라에 대한 열기가 여전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체 게바라 평전; >을 읽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동참하고, 콩고와 볼리비아의 게릴라전에 참여하는 등의 행동주의적 사고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특히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이면서도 진료실을 떠나 밀림으로 가는 결단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체 게라바의 라틴 여행일기>는 그가 고난의 길을 택한 계기에 대한 윤곽을 그려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194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졸업을 1년 앞둔 1951년 10월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찾아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남아메리카를 종단하는 여행을 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보통의 의과대학생들이라면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행동으로, 꽤나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체 게라바의 라틴 여행일기>는 1951년 12월부터 1952년 7월까지 8개월에 걸친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 두 사람의 무전여행기입니다. 알베르토가 나환자를 진료하던 병원과 그 인연들을 따라가는 때로는 신세를 지고, 때로는 무전취식도 시도하는 등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여행입니다. <체 게라바의 라틴 여행일기>으로 월터 살레스 감독이 2004년에 만든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2015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바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1988년에 쓴 <나의 아들 체>에서 인용한 프롤로그를 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여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아이는 알고 있었다(19쪽)’라고 하였지만, 막상 체가 여행을 시작할 때는 그런 거창한 생각을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행을 하면서 조금씩 마음속에 쌓여간 생각들이 그를 변모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남미대륙을 종단하는 긴 여행을 떠난 것은 단순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의대와 병원, 시험 등에 잔뜩 싫증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떻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의과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꼭 같은 생각을 하지만, 하던 공부를 집어치우고 장기간 여행을 결정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의 여행경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서로 방향을 잡아 칠레로 들어가 북상하여 페루를 거쳐, 티티카카호수가의 푸노를 거쳐 쿠스코를 구경하고 리마로 갔습니다. 리마를 떠나서는 콜럼비아를 거쳐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의 여행경로 가운데 큰 도시는 그럭저럭 알 듯도 하지만, 작은 도시는 어디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여로는 다양한 인연으로, 혹은 의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무기로 병원을 방문하여 신세를 지거나, 민병대, 그도 안되면 막무가내로 신세를 지는 식입니다. 그 옛날 이었으니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의사처럼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을 하는 모습도 얼핏 보이는데, 의사면허가 없으면서도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날 때만해도 에르네스토는 사상적인 성향은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만, 추키카마타광산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공산주의자인 칠레인 노동자부부를 만난 것이 기층민의 삶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목적 없는 방랑을 기생적인 삶으로 보며 경멸하고 있었던 것 같다.(87쪽)” 그런 노동자부부에 대하여 그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자연스런 욕망 이상 그 무엇도 아닐 터였다.’라는 정도의 인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돌아본 그의 느낌은 빛나는 잉카문명을 무참하게 파괴한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그가 국경을 초월하여 무장투쟁에 참여하는 정신적 배경의 단초를 잠깐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24세 생일을 맞아 나환자촌에서 차려준 파티에 행한 연설의 마무리부분입니다. “우리는 멕시코에서 저 멀리 마젤란해협에 이르기까지 현저히 많은 민족사적 유사점을 가진 하나의 메스티조 민족입니다. 이제 모든 편협한 지역주의를 타팟하자는 뜻에서 저는 페루와 통합된 하나의 아메리카를 위하여 축배를 청합니다.(17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노체트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가 망명하여,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떠돌면서 겪은 일들을 담은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3609310>의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를 주목받게 만든 첫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었습니다. 무대는 페루에 인접한 아마존 유역에 있는 칠레의 엘 이딜리오이고, 주인공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노인입니다. 노인이 젊었을 적에 아내와 함께 엘 이딜리오에 도착하였을 때는 마을이랄 것도 없는 미개척지로 살아남기 위하여 홍수와 아마존 밀림의 엄청난 생명의 힘과 겨루어야만 했습니다.

 

결국은 지쳐 쓰러진 두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이 지역 원주민 수아르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그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로레스 엔타르나시온 델 산타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라는 긴 이름의 아내가 말라리아로 먼저 죽게 되자, 안토니오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고, 그곳에 남아 사라진 기억을 보듬고 살기로 합니다. 수아르족 틈에서 밀림생활을 하게 된 그는 수아르족이 아닌 수아르족처럼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밀림을 떠나 엘 이딜리오에 정착하게 됩니다. 어느 날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는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면서 연애소설을 탐독하면서 일상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노인의 독서방식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45-46쪽)”

 

밀림의 법칙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탐욕은 화를 부르고 말았습니다. 어린 살쾡이들을 몰살시킨 것입니다. 분노한 암살쾡이는 복수에 나서 새끼를 몰살시킨 양키를 죽였고, 나아가 밀림으로 몰려드는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엘 이딜리오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탈에만 급급하던 뚱보읍장은 날뛰는 짐승을 잡아야만 했습니다. 안토니오를 포함한 수색대가 짐승을 찾아 떠나고 결국에는 안토니오와 암살쾡이의 1대1 대결이 시작됩니다. 살쾡이의 살인행각을 살피던 노인은 짐승이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과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로 자신이 선택된 것입니다.

 

암살쾡이를 뒤쫓다보니 상처 입은 수컷에 이르게 되는데, 암살쾡이는 수컷의 목숨을 끊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수컷의 죽음을 애도한 암살쾡이는 다시 안토니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데, 안토니오는 수컷을 따라 가겠다는 의도로 읽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맹수와의 대결에서 한치라도 허점을 보인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정면으로 맞선 상황에서 노인은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습니다. 노인은 앞으로 나아갔고, 부상당한 짐승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노인은 한쪽 무릎을 꿇었고, ‘마치 거대한 화살처럼 강변을 달려오던 암살쾡이는 불과 네댓 걸음을 남긴 지점에서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차분하게 그 순간을 기다리던 노인은 짐승의 도약이 정점에 이르자 방아쇠를 당겼다. 일순 허공에서 도약을 정지한 듯한 짐승은 이내 몸을 비틀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178-179쪽)’ 저자는 두 생명 사이의 싸움이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극적인 순간을 세밀화처럼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는 노인이 책읽는 방식으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네치아와 시인들 - 사랑의 이야기
클라우스 틸레 도르만 지음, 정서웅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베네치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쓰면서 마침 눈에 띄어 읽게 되었습니다. 겨우 한나절 구경한 것을 가지고 베네치아를 거론하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어느 한 도시를 제대로 알려면 얼마나 머물러야 하는지 정답을 없을 것 같습니다. 베네치아는 온 세상의 문인들이 꿈꾸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응은 다양했던 모양입니다. 찬미한 사람도 있으며 비판적인 글을 남긴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독일의 작가 클라우스 틸레-도르만은 베네치아에 대한 글을 남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29명의 작가를 엄선하여 그들이 남긴 베네치아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냈습니다. 그 시작은 베네치아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되는데 있어 인쇄소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200여개의 인쇄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알도 마누치오는 책의 제왕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알도 마누치오를 첫 번째 인사로 모시게 된 것 같습니다. 알도 마누치오의 집에는 ‘이곳에서부터 그리스의 높은 학식이 대중을 위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29쪽)’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마르셀 프루스트, 존 러스킨,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남긴 글들을 이미 읽은 바 있습니다만 그밖에 인사들의 주옥같은 글을 읽으면서 베네치아를 어떻게 예찬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구절들을 접어두었습니다.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코이에이트의 글입니다. “모두 여섯 시간을 오르내리며 흐르는 이 바다의 팔들은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인체의 혈관처럼 도시를 꿰뚫고 흐르다가 대운하로 흘러들어 거기서 모두 합쳐진다. 운하는 무엇보다 두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도시에서 유입된 온갖 쓰레기와 오물을 운반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직접 손을 봐서 정화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하진 않아도 물굽이를 따라 오르내리는 동안 그것들을 빨리 운하를 벗어나 흘러간다.(74쪽)” 그리고 또 다른 장점은 곤돌라를 타고 수로를 통하면 걸어가는 것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베네치아의 운하를 혈관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것 같습니다.

 

헨리 제임스는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이 피조물은 아주 섬세한 여자같이 수시로 변한다. 모든 시각으로 그 아름다움을 인지할 때에야 비로서 확실히 알게 되는 여자같이. 그녀는 기분이 좋거나 때론 우울하다. 그녀는 날씨나 시간에 따라 창백하거나 빨갛거나 회색빛이거나 장밋빛이거나, 차갑거나 따듯하거나 신선하거나 무미건조하다. 그녀는 항상 재미있고 거의 항상 슬프다. 그러나 수천 가지 우아한 기교를 부릴 줄 알며, 늘 행복을 가져다주는 놀라운 일들에 탁월하다.(246-247쪽)” 베네치아를 여인에 비유한 것도 참 적절합니다. 해가 조금만 기울어도 베네치아의 색조는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분위기가 바뀌는 베네치아는 정말 변덕스러운 여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비유도 놀랍습니다. “베네치아로의 여행만큼 긴장되는 경우도 없다. 기차가 물의 도시로 들어가노라면 도시가 물로부터 서서히 솟아오른다.(267쪽)” 차가 베네치아 본섬에 가까워지면 수면 아래 숨어 있던 도시가 물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겨울에만 베네치아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이렇게 적었습니다. “경루 저녁에는 바다가 거꾸로 부는 동풍에 휩쓸리면서 모든 운하를 목욕통 모양의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운다. 때로는 물이 넘치기도 한다. 그러나 지하층에서 달려 올라와 ‘수관(水管) 주세요!’하고 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당초 지하층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도시는 발목까지 물에 잠긴다. … 순례자들은 물속에서 구두를 시험해본 후 호텔 방 히터 위에서 말린다. 토박이들은 고무장화를 꺼내러 신발장으로 향한다.(345쪽)” 사리 때는 해수면이 높아져 산마르코광장이 물에 잠긴다. 우리가 갔을 때도 산 마르코성당 앞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물 위로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틀이 놓여 있었다. 베네치아에 관한 문호들의 뒷 이야기, 심지어는 창녀에 이르기까지도 거침없이 담아낸 흥미로운 책읽기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포스트 워 1945~2005>로 널리 알려진 유럽의 근대역사가 토니 주트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장문의 서평의 <재평가; http://blog.joins.com/yang412/13741266>는 지식인과 사상, 국가와 사건들에 대한 20여개의 비평 글을 담고 있습니다. <재평가>에는 미리암 아니시모프의 <프리모 레비: 어느 낙관주의자의 비극>을 비평한 내용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던가 봅니다. 프리모 레비의 데뷔작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게 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의 수용소에 관한 기록으로는 오래 전에 읽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http://blog.joins.com/yang412/5396723>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http://blog.joins.com/yang412/13929327>를 읽으면서 인간이 극한상황에서 과연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면서 인간이 타의에 의하여 극한 상황에 몰린 대표적인 사례이며 관련된 기록이 풍부한 나치의 수용소에 관한 기록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인 인간인가>는 한계 상황에 몰린 인간은 어떤 행동양식을 보이는가에 관한 좋은 기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다른’ 가람들을 거기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그 후까지도 우리들 사이에서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과 경합을 벌일 정도로 즉각적이고 강렬한 충동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씌여졌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내적 해방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수용소에서부터 훗날을 위하여 일상을 꼼꼼하게 기록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았고, 그 기록을 잃어버리지 않은 행운을 얻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후에 이런 증언을 듣게 된 사람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았다 뿐이지 고향에 남았던 사람들도 만만치 않은 고초를 겪었다라거나,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어쩌자는 것이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냐 등등 증언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생각지 못한 문제가 대두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이와는 달리 살아남았다는 것이 수치와 죄책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존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타협을 거부하고 죽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협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등등... 결국 레비는 68세가 되던 해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생존자>에서는 수용소로 끌려가면서, 혹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인간이라면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기록을 읽었습니다만, 수용소마다 양상이 다양했던가 봅니다. 프리모 레비가 그려낸 아우슈비츠의 모노비츠에 있는 제3수용소의 경우는 끔찍할 정도는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갈 수밖에 없었던 수용소의 일상을 감정을 빼고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단테의 <신곡>에 비유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한 점이 돋보였다고 할까요?


어떻든 레비에게는 운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통제의 수준이 그렇게 강도 높지 않았던 것은 전쟁이 말기로 치달으면서 노동력 부족이라는 변수를 만난 것이나, 화학을 전공한 덕에 실내에서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체력의 소모가 극심하지 않았던 것, 독일군이 퇴각하기 직전에는 성홍열로 병동에 입원할 수 있었던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존자>에서도 언급되었던 점입니다만, 죽음으로서 영웅이 되던 시대는 갔습니다. 살아남는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하는 것인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화두인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의 기둥 - 고대문명의 수수께끼를 찾아서
곤도 히데오 외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 / 1997년 4월
평점 :
품절


뿌리를 찾는 일은 누구나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뿌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구전해 내려오는 옛 기억들이 얼마나 정확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고, 문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면 해독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명의 기둥>은 인류의 뿌리를 찾아가는 작업입니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대 문명의 흔적들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고대 오리엔트, 미노스 미케네,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중국, 인더스, 시칸, 마야․아스테카․잉카문명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초고대사에 속하는 아틀란티스 대륙, 무 대륙, 레무리아 대륙에 관한 이야기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들 대륙은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뒷받침할만한 자료가 충분하기 않으나, 고대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대표저자 곤도 히데오 도카이대학 문학부 교수를 비롯하여 관련 분야의 전문가 열 분이 참여하였는데, 조지대학의 리앙보만교수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전문가들입니다.


‘고대사는 늘 변한다. 고대사는 우리의 시계를 벗어나 있다.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면 고대사의 판도는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도 있다.’라고 옮긴이가 역자 서문에서 적은 것처럼 고대사는 역동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리암보만교수가 기록한 황허문명에 대한 내용은 옛날 배웠던 것과는 차이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확실한 증거가 나와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력으로 부정하고 나름대로 고대사의 지도를 그려낼 힘(?)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플라톤이 아틀라스제국의 발상과 그 문명을 기록했다는 <크리티아스>의 내용 가운데 ‘(아틀란티스 제국은) 전시에는 6만 지구별로 징집하여 육군은 중전차 1만대, 경전차 6만대, 병사 1백만명, 해군은 군선 1천2백명, 수병은 24만명이라는 대군을 거느렸다.(25-26쪽)’라는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기록할 당시의 그리스 사회의 여건을 고려하여 부풀렸다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녔을 것이라는 영국 기록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야지마 후미오교수는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해독이 불가능할 것 같은 고대 문자를 해독해낸 과정도 정리하였습니다.


대륙별로 흩어져 있는 고대문명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인접한 문명과는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 등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면서도 쉽게 이해되도록 정리하고 있다는 점도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문명의 발상지를 아직 가보지 못한 까닭에 실감이 덜 하지만 중남미의 마야, 아즈텍, 잉카 문명으로 이어지는 고대 남미 문명의 경우는 최근에 다녀왔기 때문인지 관심이 더 가고 나름대로 이해도 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생략하는 바람에 흐름이 끊어지는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페루의 경우에는 잉카제국으로 통합되기 이전에도 흩어져 있던 작은 규모의 집단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 가운데 시칸, 차빈, 나스카 문명 등 일부만을 다루어진 것은 다행이면서도 다소 아쉽기도 합니다. 고리가 분명치 않던 마야, 톨칸, 아즈텍 문명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미문명에 관해서는 관련 연구가 풍부하지 않은 탓인지 소략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리앙보만교수의 중국문명에 관한 기록은 모호하던 황허문명의 실체를 아예 무너뜨리고 새로운 개념을 세우고 있습니다. 황허 유역에 문명이 들어설 수 없었던 지리적 여건을 설명하고 양사오, 룽산에서 나온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은나라의 문화를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