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 가는 것들에 대하여 - 인생의 끝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뜻밖의 행운
윌리엄 이안 밀러 지음, 신예용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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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만든 봉사동아리가 내년이면 벌써 창립 40주년을 맞게 됩니다. 창립기념일, 홈커밍데이, 혹은 진료지에서 만나는 후배들이 동아리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분위기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아리의 역사를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인 듯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지난 일을 생각해보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우아하게 늙어가기’는 제가 오랫동안 꿈꾸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에는 우아하게 늙어가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책을 권해드리려 합니다. 윌리엄 이안 밀러교수의 <잃어가는 것들에 대하여>입니다. 밀러교수는 미시간 법과대학의 교수를 역임하고, 2008년에는 성 앤드류스 대의 카네기 100주년 기념 교수에 임명되었으며, 현재는 같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명예 교수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북유럽 영웅담인 사거(Saga) 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사거의 내용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책장을 열면 헌정사에 이어 셰익스피어의 <태풍>에서 인용한 대사가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나이가 들수록 육신은 점점 추해지고, 정신도 부패할 뿐이라네” 우아하게 늙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찍 깨달은 선지자의 직설적인 경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발전한 현대의학의 힘을 빌어 육신이 추해지는 것은 어느 정도 미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정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밀러교수 역시 나이 들어 잃어가는 것을 다루는 이 책에서 주로 기억력, 작업처리속도, 날카로운 감각, 집중능력과 같은 정신적 능력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랜 역사와 광범위한 문화 속에서 노인들은 존경보다는 조롱의 대상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또한 ‘삶이란 웃음거리나 조롱거리가 되지 않고, 멸시를 당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투쟁과도 같다(23쪽)’라고 하였습니다. ‘설마’하신다면 저자가 인용한 다음 글을 읽어보시면 이해되실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노인을 경멸하고, 노인 때문에 짜증을 내며, 지루해한다.(22쪽)” 14세기 영국작가 존 트레비스의 논문에 나온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도 밀러교수는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도 현재의 우리는(당연히 우리는 노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합니다. 노인으로 살기에 좋은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나이가 들면서 겪어야 하는 것들로 공포, 지혜, 불평, 은퇴와 복수와 재산을 하나로 묶었고, 감정 그리고 구원 등 모두 여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1부 ‘공포’에서는 정신기능이 떨어지는 원인을 설명합니다. 즉 두뇌의 손상에 따라 불안정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또한 옛날 노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는데, 그들의 행적으로부터 칭찬하거나 비난할 면모를 발견하는 동시에 깊은 연대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부 ‘지혜’에서는 지혜가 그리 친절하거나 밝지만은 않다는 점과 지혜를 정말 지혜롭게 사용할 경우에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워진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3부 ‘불만’은 불평의 전략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불평이 별무소득으로 끝나면 입만 아픈 셈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의 불평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비법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신 역시 불평의 대상에서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4부 ‘은퇴, 복수 그리고 재산’에서는 현재 종사하고 있는 직업에서의 은퇴는 물론 인생에서의 은퇴, 즉 죽음을 앞두고 생각해볼 일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재산의 처분에 관한 것에서부터 심지어는 아직도 남은 복수까지도 다루었습니다. 5부 ‘감정’에서는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살아온 날들을 총괄해서 되돌아보았습니다. 6부 ‘구원’에서 저자는 “당신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생을 새로 살아 보고 싶은가? 가능하다면 속임수를 써서라도 인생을 새로 산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선택일까?”라는 질문으로 새로운 기회를 원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역사, 종교 심지어는 북유럽의 영웅담 사거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사건 혹은 인물들이 유럽 중심이기 때문에 책읽기가 수월치 않아 인내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첫장 ‘내 눈 속의 내가 현실과 멀어질 때’에서 논의하는 늙었다는 인식이 들었을 때 저자가 취한 전략 같은 경우입니다. 실제보다 더 많이 늙었다고 주장하거나 이미 찾아온 노화를 인정함으로써 나는 더 많이 잃어버리는 사태를 방지하고, 어쩌면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어느 정도는 되찾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희생이 마법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자살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저자는 세네카를 인용하여 새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 ‘기본적으로 즐길 수만 있다면 가능한 한 오래 자기 자신과 동행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83쪽)’라고 전제한 저자는 죽음의 기한이 다가오기 전에 자신의 영혼에게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참한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는 괴로움은 이제 곧 죽게 되리라는 괴로움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삶을 마치는 방법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면 그 또한 적절하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스콧 니어링을 생각합니다. 100세를 산 그는 특별한 질환이 없었지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음을 맞는 동물처럼 그는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그 과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가 좋아한 ‘기쁘게 살았고, 기쁘게 죽으리.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버리네.’라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완숙해진다는 ‘지혜’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은 반드시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인식능력과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 정신능력이 줄어드는 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합리적 판단을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지혜라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라고 저자는 잘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에는 다양한 기술이나 입장, 행동이 포함된다고 하였습니다. 금언에 나타나는 지혜는 대체로 영웅적이라기보다는 신중하고, 분별력이 용기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자는 주변에 만연한 사기꾼들과 그들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부단히 경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혜와 교활함을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동년배들과 함께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거를 낭만적으로 치장하여 젊은이들이 지겨울 정도로 반복적으로 되뇌이며 지혜로운 척하는 일이야 말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버릇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기억이 엷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요즘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기 전에 “전에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하면서 분위기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불평입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불평과 불만을 안으로만 삭이면서 사는 부처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평과 불만의 상대가 밖에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노화로 쇠퇴해가는 과정의 미덕은 마음을 영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하고, 더 훌륭한 기독교적 죽음을 준비하는데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즉, 노년기를 속죄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불평을 받아야 할 빚을 받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경우, 예를 들면 왕이나, 군주 심지어는 신이라고 할지라도 불평을 제기하는 기술(?)을 소개합니다. ‘남보다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상대방을 패배시키거나 당신에게 해야 하는 상대방의 의무를 완수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기억하라(201쪽)’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네 번째 주제는 ‘은퇴’인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은퇴는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뿐만 아니라 삶에서 물러나는 것, 즉 죽음까지도 포함합니다. 저자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와 재산이야기가 따라 붙는 것입니다. 흔히 죽음을 맞을 때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게 됩니다. 생을 통하여 이루지 못해 마음에 남는 것, 평생을 통하여 일구어놓은 재산, 심지어는 생전에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한 앙갚음, 즉 복수까지도 정리를 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복수에 한 장을 할애한 것은 아무래도 저자의 전공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본 영화 <리멤버>에서는 아우슈비츠에서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한 유대인 생존자가 가해자인 독일군을 끝까지 뒤쫓아 복수의 꿈을 이루는데 자신이 직접 죽여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중 한 사람이 치매에 걸리자 그를 조종하여 다른 가해자를 죽이도록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죽고 복수는 성공했지만, 살인을 교사한 진실도 따라서 묻혔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복수에 대한 그의 집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사실 복수하기 위하여 기다리다 나이가 들게 되면 복수의 기회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몸이 쇠약해져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 못할 수도 있고, 복수의 상대가 당신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퇴의 의식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복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고 합니다.


5부의 주제는 ‘감정’입니다. 일종의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정리하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저자는 5부의 시작을 “죽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희생하고 베풀었으며,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물려받아 쓰고 있다(275쪽)”라고 시작합니다. 요즈음 노년과 청년세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자기세대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편리함을 누릴 수 없었을 젊은 세대의 반발에 노인들은 섭섭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선대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는가 돌아볼 일입니다. 나이가 들면 이처럼 죽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층이 보수로 회귀하는 현상에 대하여 특히 젊은이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이 지켜낸 국가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인 것입니다. 노인들이 소유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자신의 것이 될 것이므로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이 스스로를 망치는 길이라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주제 ‘구원’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생을 꿈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죽지 않는 사람」에서 영생을 얻었던 주인공이 천년의 삶을 살다가 결국은 다시 죽는 존재로 돌아간다는 설정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한 가치를 지니는데 반하여,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행동은 무한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즉 한계가 있기에 최선을 다하여 불안한 삶을 사게 되는데 반하여 반복되는 일상은 오히려 삶이 느슨하고 지루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돌이킬 수 없음’이 취약한 한편 완전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년기의 특권은 삶을 통하여 모든 일을 겪어냈다는 온순한 쾌락의 즐거움에 가까운 감정을 누린다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장엄하게 물러나 명예로운 죽음을 맞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위대한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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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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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hhttp://blog.joins.com/yang412/14060977 >를 통하여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저지른 만행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민낯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난은 종전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부나-모노비츠의 노동수용소에서 종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를 기록한 것이라고 하면, 그 속편 격인 <휴전>은 부나-모노비츠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러니까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치면, <이것이 인간인가>는 <일리아스>에 해당하며, <휴전>은 오디세이아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전이 되었다면 나치에 의하여 감금된 사람들을 재분류하여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일이 꼬이려니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엉뚱한 곳으로 다시 끌려갔다가 9개월이나 되는 세월을 보낸 다음에 겨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까지 가면 될 것을 열 두배도 더 되어 봄직한 거리를 돌고 돌아서 간 셈입니다. 저자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의 공산화를 위한 밑작업의 일환으로 동유럽국가들과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국경을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치의 수용소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은 진주한 러시아군에 의하여 다시 나치가 만든 수용소에 수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을 보면 전후 수습과정을 통제하는 체계가 있었나 싶습니다. 심지어는 종전이 된 뒤에서 나치의 잔당이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사태도 있었던 듯합니다. 저자의 기록에서도 그런 상황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4년 동인 전쟁을 하고 승리한 러시아의 붉은 군대 (…) 그들은 조금씩, 천천히, 외관상으로는 극도로 무질서하게 귀환하고 있었다.(241쪽)” 그들에게서는 개선군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패잔병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떻든 저자는 동아줄 같은 행운을 타고 났던 모양입니다. 처지가 어려울 때마다 이인을 만나 도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저자가 이탈리아어 외에도 독일어와 라틴어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무언가 남다른 재주가 하나쯤 있어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저자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도 불사했다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거짓말과 도둑질은 기본이고, 불법 상인이나 밀수꾼 노릇까지도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런 짓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는 기록은 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무형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으로 고통받았음을 고백합니다. ‘나만 홀로, 온통 잿빛의, 무감각한 무(無)의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 내가 다시 라거 안에 있고, 라거 밖에 있는 그 무엇도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가족과 꽃이 핀 자연과 집은 짧은 휴가 또는 감각들의 속임수, 곧 꿈이었다.(328쪽)’ 저자는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앓았던 것인데, 당시만에서 의학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고향으로 돌아와 바로 집필하였던 것과는 달리, <휴전>은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1962년에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겪은 일을 담담하게 기술하는 일기형식이었다고 하면, <휴전>은 문학적인 면을 충분히 고려하였다고 합니다. 옮긴이를 힘들게 했던 부분 가운데, 독일어, 불어, 라틴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이디시어까지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여 현장감을 높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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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걱정 따위 - 당신의 걱정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얼마일까?
시마자키 칸 지음, SUBSUB 그림, 전선영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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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것 같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시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울에 살고 있는 저는 지진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둔감한 편인가 봅니다. 이번 지진은 지진감시가 시작된 이후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깊은 곳에서 생기거나, 강도가 낮은 탓인지 주의를 끌지 못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지진을 걱정하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핀잔을 받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 국민들이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온 국민이 금방 인간광우병에 걸려 몰살할 것 같은 분위기였던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시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서서 위험을 부풀리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저는 광우병의 위험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만, 사람들에게 그런 점을 설명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점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쓸데없는 걱정 따위>를 그때 읽었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일본에서 리스크 심리학을 전공한 시마자키 칸이 쓴 이 책은 인간의 심리와 리스크 관리를 연결하여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개념을 이렇게 쉽게 풀어내는 것도 참 재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리스크란 ‘미래에 어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지 모를 가능성(5쪽)’이라고 정의합니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실제 확률’과 우리가 하는 ‘걱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9쪽)‘라고 했습니다. 실제로는 거의 위험하지 않은데도 지나치게 걱정하면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2008년 광우병사태도 지나보니 위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걱정도 팔자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만큼 손해나는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이야기하는대로 ’걱정‘의 정도는 ’실제 확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모두 여섯 개로 구분해놓은 걱정에 관한 진실을 통계학적 기법을 바탕으로 설명하는데, 큰 제목을 보면 1부 어차피 일어날 일을 왜 걱정할까, 2부 옆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우울해지지 않는 방법, 3부 바퀴벌레에게 죽은 사람이 없는데 왜 무서워할까, 4부 비관적일수록 안도하게 된다, 5부 실전! 걱정계산학 강좌, 6부 적당히 걱정하면서 살아가기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걱정의 본질을 꿰고, 적당하게 걱정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기억할만한 구절을 들어보면, 앞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과학자, 즉 전문가라는 사람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학자도 인간인 만큼 돈이라든가, 정치적 야심이라든가 하는 사심(私心)이 개입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문가의 주장이 대립되는 경우에는 한편의 주장에만 몰입하지 말고 양쪽 의견을 중립적으로 판단해보아야 합니다. 리스크관리에 투입되는 비용에 관한 이야기도 주목해야 합니다. 광우병파동 당시 야당국회의원은 광우병의 위험을 0의 수순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떠한 리스크도 0의 수준에서 관리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리스크관리란 위험과 편익을 고려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설명이 모두 타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본 뇌염에 대한 예방접종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설명가운데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을 때 일본뇌염에 걸릴 가능성을 계산하면서 옛날 통계를 이용한 것과 최근에는 일본뇌염바이러스가 증식되는 중간숙주 돼지에 일본뇌염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는 점이 빠트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광우병의 위험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참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정리하고 있는 걱정거리를 피하는 구체적 방법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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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의사들 - 그곳에 히포크라테스는 없었다
미셸 시메스 지음, 최고나 옮김 / 책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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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여곡절 끝에 동유럽을 다녀왔습니다. 그 첫 번째 여정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오시비엥침이었습니다. 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Oświęcim)이라고 하는 지역은 독일어로는 익숙한 아우슈비츠(Auschwitz)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강제수용소를 세워 유대인 등을 학살하고,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자행한 곳입니다. 종전 무렵 소련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 지역을 압박하자, 당황한 독일군이 허겁지겁 퇴각하는 바람에 학살현장이 고스란히 남을 수 있었습니다. 1947년 폴란드 정부는 이곳에 박물관을 설립하여 수용소 건물, 철조망,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 나치가 자행했던 집단 학살의 상황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나쁜 의사들>은 나치가 세운 수용소에 똬리를 틀고서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끔찍한 인체실험을 수행한 의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 책을 쓴 미셸 시메스(Michel Cymes)는 프랑스에서 라디오와 TV 진행자로 활동하는 의사입니다. 특히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할아버지를 잃은 희생자 가족이기도 합니다. 여러 번 미루던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방문길에 나치의사들의 인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가족이 죽음을 맞은 곳, 그것도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학살을 당한 곳을 방문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죽음의 현장, “수많은 인간 실험동물들이 ‘의사’라고 불리는 자들의 가혹행위를 겪은 곳”에서 저자에게 들었던 의문은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였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직업과 연을 맺어 놓고, 어떻게 사람들을 더 이상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죽이고자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의사들이 이곳에서 한 짓을 증언하라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료를 모으는 동안 ‘그들이 한 일은 나쁘지만, 그래도 의학을 발전시켰잖아’라는 알쏭달쏭한 말도 들었지만, ‘윤리를 자양분으로 삼은 의사로서의 내 작은 뇌 속에서 잔학행위는 의학의 진보로 연결되지 않는다(15쪽)’라고 다짐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실력도 형편없으면서 자기과시욕으로 똘똘 뭉친 죽음의 의사들이 만들어낸 성과 역시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예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추악한 의사들은 모두가 미친 것도 무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과에 대하여도 논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가의 시각이 아니라 그저 의사라는 전문가적인 시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글은 반인류 범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부서지기 쉬운 기념물에 조촐하게 보탠 나의 작은 돌이다(16쪽)”라고 서문을 마무리하였습니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뉘른베르크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이 끝난 직후 나치의 비호아래 인체실험을 자행한 의사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이어졌습니다. 전쟁범죄위원회 산하 전문가 위원회가 강제수용소의 나치 의사들을 조사를 맡아, 수많은 자료와 명백한 증거물, 증인들을 모았고, 그들이 수용된 사람들에게 가스실보다 혹독하고 유례없는 고통을 가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다하우에서 저체온증을 연구했던 지그문트 라셔는 죽임을 당했고, 아우슈비츠에서 쌍둥이실험을 주도한 요제프 멩겔레는 남미로 도주했지만, 스무명의 의사들을 피고인석에 앉힐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공도 각기 달랐고, 재판당시 나이도 서른다섯부터 예순둘까지 다양했습니다. 외과의사 4명(카를 브란트, 프리츠 피셔, 카를 게브하르트, 파울 로스톡), 피부과 의사 3명(쿠르트 블롬, 아돌프 포코르니, 헤르타 오버호이져), 세균학자 4명(지크프리트 한드로저, 요아힘 므루고프스키, 게르하르트 로제, 오스카 슈뢰더), 내과 전문의 1명(빌헬름 바이글뵉), 방사선과 의사 1명(아우구스트 벨츠), 일반의 2명(발데마르 호벤, 카를 겐츠켄), 유전학자 1명(헬무트 포펜딕), 연구원 4명(헤르만 베커 프레이장, 볼프강 롬베르크, 지크프리트 루프, 콘라드 셰퍼) 등입니다. 병리의사가 없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동시에 병리의사의 판독소견이 없는 실험결과사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인체실험을 했던 의사나 과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1947년 과학자의 연구윤리에 관한 10개항의 기준을 만든 것이 뉘른베르크 강령입니다. 뉘른베르크강령은 재판을 위하여 법률가들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의사들 스스로 전문적인 지침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세계의사회는 1953년부터 인체실험에 관한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1947년의 뉘른베르크 강령을 수정 보완하여 만든 규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의학 연구에 대한 윤리적 원칙’을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18회 세계의사협회 총회에서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두 열네개의 항으로 되어 있는 헬싱키선언의 핵심은 ‘피험자의 이익에 대한 고려를 과학 및 사회의 이익에 우선시해야 한다.’라고 명시하는 등 피험자의 안전과 이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쁜 의사들>에서 다룬 죽음의 의사들과 그들의 범죄행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공군에서 복무한 지그문트 라셔는 조종사들이 고공에서 탈출하게 될 때 겪어야 하는 압력과 기온차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동물실험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실험설계 자체가 어려웠던 라셔는 힘러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사형수를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압실과 얼음을 넣은 수조를 동원하여 실험을 수행하였고, 실험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은 부검을 통하여 병변을 확인하기까지 했습니다. 라셔의 연구에 대하여 ‘추위로 인한 쇼크 상태의 치료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53쪽)’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지만,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실험했다는 변명은 적절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힘러의 눈 밖에 났던 라셔는 친위대에 체포되었고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역시 공군에서 복무한 내과 전문의 빌헬름 바이글뵉은 해수음용실험을 수행하였습니다. 바다에 추락한 비행사가 갈증으로 사망하는 상황을 해결하라는 힘러의 요구에 따라 셰퍼는 필터를 이용하여 해수를 거르는 방식을 개발하였고, 베르카는 설탕과 비타민C를 혼합한 물질을 해수에 투입하여 해수의 짠맛을 없애는 방식을 개발하였습니다. 두 가지 방식을 검증하기 위하여 바이글뵉은 40명의 집시들을 네 집단으로 나누어 해수와 베르카방식을 적용한 해수, 셰퍼의 필터로 거른 해수, 그리고 식수를 각각 먹였습니다. 첫 번째 실험은 6일 동안, 두 번째 실험은 12일 동안,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해수를 마시거나 베르카의 방식을 적용한 해수를 마신 피험자들은 갈증과 고통을 호소했고, 경련과 정신착란을 일으켰지만, 그에 합당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실험자들은 장기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하여 간 천자술을 시행하였습니다. 전범재판에서 15년을 선고받은 바이글뵉은 겨우 절반의 형을 마치고 1952년 석방되어 1963년 사망할 때까지 북스테후데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는 것입니다.


아리베르트 하임은 수용소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수감자를 처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심장에 휘발유나 독을 직접 주사하거나, 마취도 하지 않고 장기를 적출하는 반인륜적 방식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토드(Tod, 독일어로 죽음, 사신을 뜻함)박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마우트하우젠의 도살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1941년 말 하임은 돌연 친위대 북부사단으로 전출되어 핀란드에 갔다가 종전과 함께 체포되었지만 이내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덴바덴에서 산부인과의사로 평화롭게 살다가 1962년 전범으로 기소되면서 도주하였는데, 카이로에 정착한 그는 이름을 바꾸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살다가 1992년 대장암으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아우구스트 히르트는 화학전에 대비하여 전투가스의 해독제를 찾는 인체실험을 주도했습니다. 히르트는 쥐에게 독가스성분인 이페리트를 투여하였을 때 비타민A를 준 쥐들이 오래 생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인체실험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피험자들의 팔에 이페리트 한 방울씩 떨어트리고는 해독 크림과 연고를 바르거나 약을 먹이고, 혹은 혈관주사를 놓고 조제한 약을 실험하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해독조건을 찾아내려 하였습니다. 물론 대조군에게는 아무런 처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페리트를 투여 받은 환자는 대략 6시간이 지나면 욱신거리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전신으로 번지면서, 다음날에는 발열증상까지 나타났다고 합니다. 엿새째가 되어서 첫 번째 사망자가 나타났습니다. 죽은 사람을 부검해서 표본을 추출하고 남은 시신은 화장 가마에서 태웠습니다. 그는 해독제를 찾는 실험 이외에도 소위 스트라스부르 컬렉션이라고 부르는 유대인 골격과 두개골표본을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연합군이 스트라스부르에 진주했을 당시 히르트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튀빙겐에서 멀지 않은 검은 숲에 몸을 감추었다가 1945년 6월 자살로 잔악했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천사’로 불리던 요제프 멩겔레는 수용소에 도착하는 유대인들을 선별하여 가스실로 보내는 작업을 수행하는 한편, 유전학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인간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쌍둥이 연구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먼지가 쌓인 선로에서 멩겔레를 처음 본 유대인들은 황폐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등장한 기품 있는 친위대 장교가 클라크 케이블 같이 생겨 살인자로 보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멩겔레는 독일 우생학의 거장 오트마르 폰 페르슈어 박사의 조교를 지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으로 병들고 가치 없는 사람들의 재생산 제한을 목표로 한 사회적 위생실천’을 주장한 페르슈어박사의 가르침을 받은 멩겔레는 쌍둥이의 비밀을 밝혀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데 기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집시, 쌍둥이, 난쟁이 등등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 분류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멩겔레는 다음 단계로 대상을 해부해서 장기를 분석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죽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검을 통해서도 역시 찾아낸 것이 없었습니다.


1945년 러시아군이 아우슈비츠에 진입했을 때 멩겔레는 탈출에 성공하여 고향 바이에른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혼란이 가라앉고 체포될 우려가 높아지자, 그는 1949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망명합니다. 페론 정권은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지만 나치의 전직 고관들과 자본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헬무트 그레고르라는 이름으로 소아과 의사가 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교계에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1956년에는 본명을 되찾아 결혼도 하고 1958년에는 제약사의 주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대학이 그의 학위를 취소하면서 합법적으로 의술을 시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범죄인 인도 요청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이의를 제기하는 오만함을 보였지만,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야 했습니다. 알프레도 마옌이라는 이름으로 파라과이의 호에나우에 정착한 멩겔레는 1979년 브라질 베르지오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리가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페이퍼클립작전을 통하여 나치의 수많은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독일의 첨단기술을 연구하게 하였는데, 이면에는 공산주의와의 맞서기 위하여 과학기술과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나치 흉악범들이 법의 심판을 피하는 혜택을 얻었다고 합니다. 미국 뿐 아니라 소비에트연방도, 영국도,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거나 저자는 나치에 협력한 의사들에 대하여 ‘의학계의 수치’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나치의 수용소 의사들이 했던 일의 의미를 분명하게 새겨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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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간학 - 약함, 비열함, 선량함과 싸우는 까칠한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 지음, 이지수 옮김, 이진우 감수 / 다산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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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자는 인식이 높아지다 보니 때로는 배려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지나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라면 솔깃해 할 수도 있는 책을 읽었습니다. ‘싸우는 철학자’라고 불리는 일본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가 쓴 <니체의 인간학>입니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을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젊은 시절부터 내게 혐오의 대상이었다(20쪽)”라고 시작하는 철학자가 니체를 들고나온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미워한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미운정이 들었다는 이야기거나, 아니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한 점이 있어서 미워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니체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칸트 전문가라는 저자는 역시 40여년에 걸쳐 니체를 읽어왔고, 최근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철학 학원 칸트’의 학생들과 함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특히 저자는 “니체의 착한 사람 공격이나 동정심 비난은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약함, 비열함, 선량함을 향한 것이 아닐까 싱각하게 되었다(21쪽)”라고 하였습니다.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단호한 비판 분위기를 역시 <니체의 인간학>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역시 저자는 니체와 같은 성향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니체의 ‘착한 사람 비판’을 들고 나온 데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성향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니체의 도덕비판을 바탕으로 ‘착한 사람의 폭력성’을 여섯 개의 명제로 구분하였습니다. 1. 착한 사람은 약자다, 2. 착한 사람은 안전을 추구한다, 3. 착한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4. 학한 사람은 무리를 짓는다, 5. 착한 사람은 동정한다, 6. 착한 사람은 원한을 품는다. 당연히 그와 같은 명제는 니체로부터 얻은 것이므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첫 번째 명제는 ‘강자와 약자’, 착함과 악함‘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을 통하여 도출해낸 것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입니다. 강하면서도 착한 사람도 많을 것이고, 약하면서도 악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자가 현대 일본사회에서 발견한 약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약자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배려의 대상인 ‘공인된 약자’로, 장애인, 범죄자, 성적 소수자, 외국인, 피차별 부락 출신자 들이 여기 속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두 번째 약자는 ‘반동적 약자’로, 이들은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착함으로 정당화하는 무리로 저자가 증오하는 부류라고 했습니다. 니체가 ‘무력감의 간계’라고 비판한 행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약자로 저자가 현대 일본사회에서 발견한 히키코모리 및 사토리 세대와 같은 ‘신형 약자’를 들었습니다. (참고로 ‘히키코모리’는 사회생활을 극도로 멀리하고, 방이나 집 등의 특정 공간에서 나가지 못하거나 나가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이며, ‘깨달음’, ‘득도’라는 의미의 사토리(さとり)에서 따온 사토리 세대는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특징을 가진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태어난 일본 젊은이들을 이릅니다) 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지만 자책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온몸으로 정당화하는 반동적 약자와는 달리 신형 약자는 반동의 힘마저 없는 철저하게 무기력한 약자라고 저자는 정리합니다.


1장에서 6장에 이르기까지 착한 사람에 관한 여섯 가지 명제를 설명하고 마지막 7장에서는 니체라는 착한 남자를 해부합니다.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http://blog.joins.com/yang412/13023753> 등 니체의 저서를 읽었고, 고명석 기자의 <니체극장; http://blog.joins.com/yang412/12970004>, 김선희교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com/yang412/12474996>등 니체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도 저자가 지적한 바를 느끼지 못하였으니 책읽기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감히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고 적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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