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빈곤세대입니다 - 평생 가난할 운명에 놓인 청년들
후지타 다카노리 지음, 박성민 옮김 / 시공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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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생긴 사회현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사회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청년들이 겪고 있는 현상이 일본에서도 심각한 문제라고 합니다. 일본사회의 청년문제의 심각성을 분석한 <우리는 빈곤세대입니다>를 읽고서 알게 된 것입니다.


저자인 후지타 다카노리(藤田孝典)는 NPO 법인 ‘핫플러스’의 대표이사이자 세이가쿠인대학에서 객원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반反빈곤 네트워크 사이타마 대표, 블랙기업 대책 프로젝트의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있고, 지역 내에서 생활 빈곤층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로 생활보호와 생활 곤궁자 지원에 대한 활동과 제언을 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회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춘 행동파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빈곤세대입니다>를 읽다보면 먼저 일본청년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의외로 심각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우리나라 청년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닮았다는 것, 그리고 그 문제를 만들어낸 사람은 당사자인 청년들이 아니라 기성세대라는 점까지도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은 지금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일본청년들이 빠르게 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금세 사회현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면서 대책마련을 서둘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1990년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 취직이 어렵던 시절의 청년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그 취업난이 일시적인 것을 넘어서 고착화되면서 평생 빈곤을 안고 살아야 하는 위기상황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강요된 빈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을 ‘빈곤세대’로 정의하고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수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1장에서 저자는 먼저 몇 개의 구체적 사례를 통하여 빈곤의 늪에 빠져든 과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가정이, 사회가 그들의 삶을 조금씩 옥조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서는 이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바로 기성세대라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청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블랙기업, 심지어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허울을 앞세운 아르바이트자리까지도 청년들의 앞날을 가로막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도 미래를 위한 공부가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도 학자금대출이 평생의 짐이 되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4장에서는 독립해 살 곳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 부모의 그늘을 찾는 청년이 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5장에서는 일본의 사회복지정책이 빈곤청년의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앞으로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를 짚었습니다.


<우리는 빈곤세대입니다>는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였거나, 심지어는 알면서도 외면해온 청년세대의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해결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의 말대로 ‘현대사회의 모든 청년들은 같은 비극’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들이 지금까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 아니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외면해온 젊은 세대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들 젊은 세대들에게 의탁해야 할 신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가서 그들이 외면한다고 볼멘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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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스필만 지음, 김훈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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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에 방문한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는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이 겪은 끔찍한 참상을 보고 들으면서 인간이 이렇듯 잔인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면서 들었던 의문은 독일정부는 어떻게 유대인들을 이곳까지 끌고 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해답을 <피아니스트>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이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에서 6년간 살아남은 경험을 기술한 작품으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함께 홀로코스트에 대한 탁월한 수기문학으로 꼽는다고 합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수행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이 책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는 검은 속셈을 감추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폴란드를 전격 점령한 독일군은 초기에만 해도 폴란드 국민 심지어는 유대인들에게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인데, 점차 게토를 설치하여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고, 재산을 몰수하며, 공연히 트집을 잡아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하는 등 광기가 점점 그 도를 더해가는 양상을 보이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수용소로 끌어가기 전에 게토로 몰아넣은 것은 심리적으로 교란작전을 폈던 것이라고 합니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게토로 이주하면서 재산을 처분하도록 유도하면서 싼값에 그들이 자산을 매입하고, 이어서 수용소로 이주시키면서 새로운 거주지로 간다고 속임으로서 값비싼 물건들을 휴대토록 하여 수용소에 도착한 즉시 처형시키고 그들이 들고 온 값비싼 물건들을 손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피아니스트>를 보면 게토에 머물던 유대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참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긴장된 와중에서도 돈을 버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렇게 번 돈으로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찾는 우아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직접 통제하기도 했지만, 일부 유대인들을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통제하도록 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지 않도록 하는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 팔자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합니다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도 실감할 수 있는 것이,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불라디슬라브 스필만 스필만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바르샤바에서 숨어 모진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좋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친구층이 두터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대인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바로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등록 유대인을 숨겨주고 도와준 폴란드 사람들의 위대한 정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리고 특히 독일군 장교이면서도 숨어 지내는 스필만과 우연히 조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즉결처분을 하지 않고 숨어살도록 조치를 해준 빌름 호젠펠트와 같은 깨어있는 독일인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호젠펠트는 독일인이 게토에서 자행하고 있는 끔찍하고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절망을 이렇게 일기에 적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 가운데 어찌 그런 인간 쓰레기들이 있을 수 있는지 거듭거듭 되묻지 않을 수 없다.(274쪽)”


<피아니스트>는 전쟁이 끝난 직후에 불라디슬라브 스필만이 자신의 겪은 일을 기록한 수기와 마지막 순간에 그를 지켜준 독일군 장교 빌름 호젠펠트의 일기 초, 그리고 스필만의 부탁을 받은 볼프 비어만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영화로 옮겨 200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 피아니스트와 독일군 장교의 운명적인 만남의 순간을 옮긴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치지 못해 손가락은 뻣뻣하게 굳어 있고 손에는 새까만 때가 켜켜야 앉았고 손톱마저 길게 자란 유태인은 조율도 제대로 되지 않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쇼팽의 야상곡 C#잔도를. 독일군 장교는 팔짱을 끼고 묵묵히 귀 기울인다.(312쪽)” 그리고 ‘아름답다. 그 끔찍한 정황에서 이런 기적 같은 정경이 펼쳐진다는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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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 직장인의 어깨를 다독인 51편의 시 배달
김기택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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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붙들려 꽃 지는 것도 몰랐다’라는 프롤로그의 제목에 그야말로 ‘심쿵’했습니다. 시인의 말대로 ‘일과 밥에 붙들려 꽃 지는 줄 몰랐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시가 있어 다른 세계로 향할 수 있었다는데, 저는 무엇이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다가 뒤늦게 책읽기와 글쓰기에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는 내면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주거나 사물이나 자연에 숨어 있는 나를 만나게 해주거나 지리멸렬한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확 바꿔 보게 하거나 자신이 받은 상처를 즐거움으로 바꾸어주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11쪽)’라고 했습니다. 시를 읽으면서 느낀 감상에다가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나 체험적 시론, 삶에 대한 생각들을 덧붙여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라는 제목으로 산문집을 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산문집은 시와 산문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양수겹장이요 일석이조인 책읽기가 되는 셈입니다.


2010년 시인은 일 년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학 집배원으로 임명받아 동영상그래픽과 음악이 어우러진 멋진 시를 직접 낭독하여 전송하는 역할을 했고, 그때 선정했던 시와 시인의 생각들을 이 책에 담았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계절의 변화가 담긴 시들을 고르게 되었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시는 시인이 「봄, 가벼움의 본능이 깨어나다」라고 제목을 붙인 산문의 주제가 되는 봄의 새로운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황인숙 시인의 「봄」으로 시작합니다. 겨우내 이어진 추위에 움츠러들지 말고 ‘이불 박차고 두꺼운 옷 벗고 새 공기를 마시면서 뛰어보라고 권유하기에 십상인 시를 고른 것입니다. 송재학 시인의 「사물 A와 B」를 읽다보면 시인이 고른 시들이 나름 고심한 흔적을 나타내듯 형식조차도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모내기를 막 끝낸 들의 풍경을 그린 이덕규 시인의 「논두렁」에서는 벌써 추수를 마쳐 얻은 쌀로 밥지을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밥맛은 살맛이다」라는 산문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큰 주발에 소복하게 올라오도록 담은 고봉밥을 떠올렸습니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고봉밥은 힘든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이 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시인은 시골에서 자란 것 같습니다. 시골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흥이 곳곳에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인의 어린 시절은 ‘배고픔, 심심함, 매 맞기, 벌서기 따위로 채워져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유년의 기억이 창작의 보물창고라는 작가들과는 달리 시인의 창고는 허름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불분명한 기억을 더듬어 그것을 엉뚱하게 변형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게 화분을 들리고 벌을 세운다’로 시작되는 유홍준 시인의 「가족사진」에서 아동폭력의 심각함을 지적하는 글 「폭력의 기억을 놀이로 만들기」를 읽으면서 두 아들이 어렷을 적에 상처가 되었을 일을 떠올렸습니다. 매를 맞은 사람은 마음에 새긴다지만 매를 든 사람은 일상이기 때문에 마음에 남겨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깨우쳐 사과하고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있다면 풀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시는 몸속에 숨어 있는 기억이나 감정, 감각 본능 등을 흔들어서 깨우고 활동시킬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삶과 더 넓은 세상을 상상하게 만들고 한숨 쉬거나 웃게 만든다고 합니다. 시인처럼 갑자기 새로운 시가 쓰고 싶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시인처럼 세상을 다시 보는 그런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와 산문 읽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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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대륙, 아메리카 - 콜럼버스 이후 정복과 저항의 아메리카 원주민 500년사
로널드 라이트 지음, 안병국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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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렸을 때 인디언과 미국 기병대가 싸우는 영화를 보다가 기병대가 인디언을 물리치면 박수를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저 기병대가 주인공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땅의 주인은 인디언이었던 것입니다. 아메리카대륙의 주인의 역사는 어디로 가고 이주민의 역사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치 살고 있던 땅을 순순히 내준 것처럼 포장된 역사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메리카대륙을 처음 발견한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한데서 나온 말이니 ‘인디언’이라는 말도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저는 ‘인디언’이란 말이 딱 질색이에요. (…) ‘인디언’은 백인들의 상상의 산물일 따름입니다.”라고 한 캐나다 오지브와족 출신 여류작가 리노아 카식-토비어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가 다양해서 여러 문화권을 이루고 있는데 ‘인디언’이라는 단어 하나로 싸잡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어떻게 부르던 간에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고학자들이나 유전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15,000~30,000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왔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원주민들은 자신의 조상은 처음부터 그곳에서 살아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명사적으로도 이들이 태곳적부터 이곳에서 살아왔고, 자신의 언어와 문화, 문명을 꽃피웠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메리카인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의 아메리카문명은 그저 유럽문명의 아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드리는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 시각에서 본 근현대사를 정리합니다. 특히 콜럼버스 이후 유럽 이주민의 침략에 맞선 아메리카 원주민이 어떻게 저항을 해왔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저항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를 쓴 로널드 라이트는 영국 태생의 역사가, 고고학자, 문명비평가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캐나다 캘거리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였고, 평생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과 역사를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재야 사학자인 셈인가요? 그는 특히 서구 문명의 한계를 성찰하여, 서구 문명 중심의 해석을 경계해왔습니다.


저자는 남북 아메리카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원주민들의 문명 가운데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다섯 문명을 골라, 유럽 이주민들의 침략기, 이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기,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힘을 받고 있는 부활의 움직임을 각각 설명합니다. 그 다섯 문명으로는 메소아메리카의 아스테카와 마야, 남아메리카의 잉카,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체로키와 이로쿼이입니다. 사실 이들 이외에도 파라과이의 과라니족, 칠레의 마푸체족, 브라질의 야노마미족, 북아메리카의 나바호족과 블랙풋족, 니카라과의 미스키토족 등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아메리카대륙에 유럽 이주민이 침략해온 시기를 다룬 ‘침략’에만 ‘발견’이라는 제목의 프롤로그가 붙어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의 아메리카를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보입니다. 1492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재앙이 된 사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본디 있던 것을 발견이라고 하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라는 생각도 듭니다만-이 있기 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북극의 툰드라 지역에서부터 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저 높은 안데스 산맥에서부터 남아메리카 남단의 케이프 혼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다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수렵 유목 사회도 있었고, 농경 정착 사회도 있었으며, 커다란 도시를 이룬 도시 문명사회도 있었습니다.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는 자그마치 1억 명으로 전체 세계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였지만, 콜럼버스 출현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몰살을 당하다시피 했습니다. 침략자들의 학살과 탄압,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 원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홀홀단신으로 건너온 이주민 남성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취하거나, 급감한 원주민을 대신할 노동력으로 끌어들인 아프리카계 사람들까지 가세하여 원주민의 혈통을 희석시킨 것도 순수 원주민의 인구를 격감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의 혈통은 끈질기게 이어져, 안데스지역에는 잉카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이 1,200만 명이 살고 있고, 메소아메리카에도 마야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이 600만 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테말라 같은 경우는 마야 원주민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마야 공화국이 성립되어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또 1980년 페루에서는 좌익 게릴라가 무장 투쟁을 벌인바 있으며, 1990년 캐나다에서는 모호크족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미국에도 캐나다에도 넘긴 적이 없는 우리의 주권을 내놓으라!’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진 메아리가 되고 있습니다. 무려 500년 동안 미국 정착민들은 물론 세계인들까지도 모른 척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흰 얼굴의 신(神)’이라는 개념 역시 허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주민들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담긴 왜곡이라는 것입니다. 유카탄 원주민들 사이에 내려오는 케찰코아틀 신화입니다. 아즈텍사람들은 풍요와 평화의 신으로 알려진 케찰코아틀신이 전쟁의 신의 음모로 쫓겨나고 말았지만 언젠가는 하얀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즈텍사람들은 코르테스를 처음 만났을 때, 다시 온 케찰코아틀로 착각하였기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래 읽은 원주민 시각에서 쓴 자료들을 읽어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천성적으로 외부에서 온 손님에게 관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손님이 음흉한 속셈을 감추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아즈텍과 마야에 대한 스페인의 침략과정에 관하여 원주민들이 남긴 기록들이 최근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미겔 레온-포르티야가 쓴 <정복당한 자의 시선; http://blog.joins.com/yang412/14018447> 같은 번역서도 있고, 정혜주교수가 쓴 <마야원주민의 전쟁과 평화; http://blog.joins.com/yang412/13747676> 처럼 우리나라의 라틴아메리카 전문가가 쓴 책도 있습니다.


스페인이 아메리카로 몰려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압바스왕조에 무너진 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가 756년에 코르도바를 수도로 후기 우마이야왕조를 세우고 이베리아반도를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베리아반도에 흩어져 있던 스페인 왕국들은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1세 여왕의 가톨릭연합군이 그라나다의 나스르왕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국토회복을 위하여 매진했던 것입니다. 국토통일을 이룬 다음에는 군사들을 토사구팽을 할 수 없었으니 새로운 목표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마침 콜럼버스가 동양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겠다고 나섰던 것이 성공을 거두었고, 전후 할 일이 없어진 병사들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 아메리카로 향했던 것입니다. 침략과정에서 다른 종교, 문화를 포용하는 능력이 없었던 스페인사람들은 아메리카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노예로 부려 부를 축적했으며, 오랜 세월 그들이 쌓아올린 문명을 말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메소아메리카의 지형적 특성으로 침략자의 손길을 피한 일부 유적들이 살아남아 지금 우리를 맞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침입해올 당시에도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원주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원주민들이 침략자를 궤멸시켰을 때 마침 새로운 지원군이 도착하는 등, 행운의 여신은 침략자의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침략자들이 가지고 온 전염병 때문에 전력이 무너진 원주민들은 결국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것입니다. 일설에는 천연두 환자가 사용하던 물건을 생물학무기로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한 스페인은 원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숫자가 급감하자 아프리카 원주민을 끌고 와 노예로 삼았습니다.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기록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의 저항을 상세하게 정리해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침략은 라틴아메리카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 역시 이주민들을 따듯하게 맞아 정착을 지원해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주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이주민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면서 원주민들을 고향에서 몰아냈던 것입니다. 원주민들 모르게 법을 만들고 이주를 강요하는가 하면 협상을 통하여 어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막무가내로 원주민들을 척박한 땅으로 몰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새로운 부가가치가 생기면 다시 그 땅을 차지하는 수법을 썼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주민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원주민들 집단 사이의 이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의견이 통일되지 않도록 하는 이간책이 통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들의 반란이 꾸준하게 이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진압되곤 하였습니다. 19세기 라틴아메리카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이룬 다음에는 백인 정착민의 주도로 근대국가를 수립하였지만, 원주민들의 권리는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많이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멕시코에서는 원주민 출신의 베니토 파블로 후아레스 가르시아 (Benito Pablo Juárez García, 1806년 3월 21일 ~ 1872년 7월 18일)가 1857년부터 1872년까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는 멕시코사회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교회와 토지귀족이 독점하고 있는 독점경제를 자본주의로 대체하는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국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토지개혁을 시도하다가 교회와 지주의 반발로 내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유카탄반도의 마야는 반란에 성공하여 자유국을 이루어 20세기까지 존립하였습니다. 과테말라에서도 정부군과 원주민 세력 사이에 오랜 기간 내전(1963~1996)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체로키족은 일부 오클라호마로 이주하였지만, 일부는 그레이트스모키 산맥에 그대로 잔류하여 ‘동부 체로키 보호구역’을 만들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서부 체로키족 역시 자치정부를 재건하고 대추장을 선출하였다고 합니다. 북동부에 거주하는 이로쿼이 연방의 모호크족은 1972년 전사단을 결성하고 영토를 빼앗으려는 캐나다 정부에 맞서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마야인들의 달력에 따르면 이민족의 지배는 예정된 것이었으며, 운명의 바퀴가 열세 번을 꽉 채우면 끝날 것이라고 전해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페인이 유카탄반도를 지배한 기간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했다고 합니다. 이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원주민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아메리카 대륙은 원주민들의 것이었으며, 지금도 그들의 권리가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서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다섯 부족들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저항하고 부활하는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오히려 부족별로 침략과 저항과 부활을 이어서 설명했더라면 읽기에 조금 편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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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역전의 경제학 - 경제학 하수에서 고수로 유쾌한 뒤집기 한판
오영수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옛날에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상이 경제의 개념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고등학교에서 경제에 대한 기본개념은 배운 것 같습니다만, 경제의 개념 자체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따라가기조차 벅찬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족한 개념으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경제상황을 들여다보려니 헷갈릴 뿐 아니라, 이러다가 뒤처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이 커지게 됩니다. 점점 어렵고 복잡해져가는 경제의 개념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시는 오영수교수님께서 경제학원론을 아주 쉽게 풀어 설명하는 <30일 역전의 경제학>을 읽게 된 것입니다.


저자께서는 경제학 공부를 처음 시작할 무렵 현실과 동떨어진 수업에 실망하셨던 기억을 되살려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물론 고등학생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기초개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오셨다고 합니다. 경제학은 단순한 지식에 머무는 학문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용적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이 책의 얼개는 이렇습니다. “총 3개의 PART로 나누어져 있으며 한 PART당 10개의 주제로, 총 30개의 주제를 하루에 하나씩 독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PART 1에서는 수요, 공급, 비용, 유인, 효율성, 공평성 그리고 국민경제의 순환원리 등 경제학의 주요 기초 개념 및 이론을, PART2에서는 주로 시장에 관한 이야기들, 즉 시장의 본질과 기능은 무엇이고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PART3에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주요 문제와 이슈들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통찰함으로써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하였다. 여기서는 환경오염, 결혼, 범죄, 교육, 외모, 실업, 빚 등 다양한 주제들을 경제학의 창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교수님 말씀대로 정말 쉽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제학의 개념들이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사범대학에서 수업하는 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물론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수님의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제가 경제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보니 이해력이 떨어니는 탓일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딴 생각을 하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탓일 수도 있겠구요.


예를 들면 한계생산성 체감의 법칙을 설명하는 경우입니다.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갑자기 주문량이 두 배로 늘면서 납기를 맞추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기존 직원들의 작업시간을 두 배로 늘리던가 직원을 더 채용해서 공장가동율을 높이는 것과 둘째, 아예 생산시설을 두 배로 늘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장단기 대책을 내놓은 것인데, 제가 보기에는 이는 별도의 대책이라기보다는 같이 검토해야 할 사항 같습니다. 우선 납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납기를 맞추지 못하면 주문은 취소되고 타격을 입겠지요. 새로 직원을 뽑아도 노동의 효율성이 떨어질테니, 기존 직원들의 작업시간을 두배로 늘리는 방식을 우선 적용할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의 주문은 고객이 만족하게 되는 경우 장기계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시설투자와 함께 직원을 추가로 채용하는 대비책을 준비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그리다 보니 두 가지 경우의 생산비용을 더 낮출 수 있는 이유의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사례들은 일상이나, 동화, 영화 등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거나 이미 잘 알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평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동화 <개미와 배짱이>를 예로 들기도 합니다. 하나 더, 주제와 연관된 제목들도 참 재미있습니다. 참고로 저자께서 고등학생을 독자대상으로 염두에 두신 이유를 대입 논술고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책 말미에 밝혀두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에 적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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