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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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누구도 찾아오지 않은 무인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때가 되면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유혹을 느끼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다소 생소한 핀란드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다도해를 무대로 하는 헤닝 만켈의 <이탈리아 구두>입니다. “추우면 외로움도 깊어진다”라고 시작하듯이 북유럽의 차가운 겨울은 견디기가 더 힘들 것 같습니다만, 무슨 사연인지 궁금증을 더합니다. 매일 오후 2시면 찾아오는 우편배달부 얀손이 유일한 방문객이자 환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외과의사 같은데 무슨 외과의사인지도 모호합니다.


“예전에는 그 엄청난 재난으로 인한 절망과 분노가 너무 고통스러워 이제 그만 끝낼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삶에서 커다란 충격이었던 사건이 주인공 스스로를 이 섬에 가두게 된 것 같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와 개 한 마리, 그리고 거실방 테이블에 집을 짓기 시작한 개미들이 주인공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벗입니다.


동지도 지나고 새해가 된지 세 번째 되는 날 아침, 얼음 목욕을 하던 주인공은 멀리 얼음장 위에 서 있는 방문객을 발견합니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하고 서 있는 그녀는 40년 전에 자신이 버리고 떠난 연인 하리에트 크리스티나 회른펠트였습니다. 그녀는 주인공의 이름이 프리드리크 벨린이라고 알려줍니다. 망각속으로 사라졌던 연인의 등장은 벨린의 삶에 극적인 반전을 가져다 주는 서곡입니다. 사실 세상을 여일하게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언가 사건이 생기고 그로 인해서 변화가 있어야 삶이 재미있어지는 것 아니겠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무료한 듯하던 벨린의 삶에 생긴 극적인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말기 위암으로 투병 중인 그녀가 옛 애인을 찾아온 것은 40년도 넘은 옛날에 했던 약속을 지키라는 것인데, 조금은 쌩뚱맞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죽음을 앞에 두면 그런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합니다. 벨린은 하리에트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하여 섬을 나서는 것을 보면 40년 전에 그녀를 떠났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고물자동차를 달래가며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찾아갔던 숲속 작은 호수에 도착하게 되는데, 한겨울의 작은 호수에서 물속에 빠져 죽음의 공포를 맞기도 합니다. 이런 장치는 약간 억지스러운 듯한 느낌도 듭니다. 한겨울에 그것도 작은 호수에서 얼음이 깨지는 사고는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받아낸 하리에트는 이번에는 이자까지 받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보면 벨린이 하리에트를 떠난 이유가 조금씩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리에트가 벨린을 안내한 곳은 둘 사이에 생겼던 딸 루이제가 살고 있는 캠핑카입니다. 두 사람을 닮은 것인지 루이제의 삶도 독특합니다. 아버지는 딸의 존재를, 딸은 아버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는 순간이 너무나도 극적이지 않은 것은 다소 충격이었습니다. 북유럽 사람들의 쿨함 때문인가요?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탓에 갈등의 순간이 오고, 벨린은 혼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하리에트의 방문은 그의 삶을 뒤집은 사건을 12년 만에 마무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 나가는 정형외과의사였던 벨린은 암에 걸렸다고 진단된 젊은 여자수영선수 앙네스 클라르스트룀의 팔을, 그것도 멀쩡한 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한 충격으로 의사를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녀를 찾아 뒤늦은 사과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녀는 문제 소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벨린의 실수를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쿨함이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섬으로 돌아온 벨린의 삶은 한 차례의 흔들림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수순을 밟습니다. 처음에는 개가, 그리고 앙네스의 쉼터에서 만난 시마가, 그리고 늙은 고양이가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는 죽음의 시간이 닥친 하리에트가 딸과 함께 찾아와 함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정말 보기 드문 등장인물들이 엮어가는 보기 드문 이야기가, 한때 잘못 생각으로 저지른 일일지라도 책임질 일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함께 살아갈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절대 함께 살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루이제의 친구인 90세가 넘은 이탈리아 장인이 만들어준 구두는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길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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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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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초에 쿠바에 갔을 때 헤밍웨이의 흔적을 참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쿠바사람들이 미국 정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헤밍웨이는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헤밍웨이가 묵었던 호텔이아, 헤밍웨이가 자주 찾던 식당과 바는 물론 헤밍웨이가 살면서 집필을 하던 핀카비 히아의 저택과 그가 쿠바 친구와 함께 배를 타던 꼬히 마루에 이르기까지 아바나여행의 상당부분은 헤밍웨이의 흔적을 뒤쫓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꼬히 마루가 무대가 되는 소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고등학교 다닐 무렵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때는 참 지루한 이야기다 싶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일종의 모노드라마처럼 노인 혼자서 쏟아내는 말들이 별로 와닿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렸던 탓이거나 아니면 생각이 모자란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는 왜 퓰리처상을 받고 노벨 문학상을 받는데 기여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우선은 나이 듦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한 산티아고의 불굴의 정신을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오래도록 바다에서 살면서 체득한 앎이 크게 한 몫을 하게 됩니다. 자연의 가르침은 한 순간에 모두 깨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티아고가 거대한 청새치와 겨루는 과정에서 무리하거나 모자라지 않는 절묘한 낚시의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오랜 경험에서 터득한 지혜를 총동원하여 이룩한 성과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항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산티아고의 물고기를 얻어먹겠다고 염치없이 덤비는 상어들에게는 단호한 면을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는 뼈만 앙상한 청새치를 항구로 가져오긴 했지만 말입니다.


작품 해설을 하신 분은 산티아고는 햄릿형이라기보다는 돈키호테형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책도 읽지 않고 깊이 있는 사색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망망대해에 일엽편주를 띄워놓으면 무념무상, 자연이 가르쳐주는 것들이 절로 머릿속에 콕콕 들어박힐 것 같습니다. 즉, 그는 무엇을 읽어서 정보를 얻기보다는 바다에서 몸으로 체득한 앎으로 낚시를 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산티아고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의존하거나 구걸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덕목의 하나로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산티아고가 가진 자비한 마음도 귀한 것입니다. 너무 커서 배안으로 끌어들일 수 없어 배 옆에 붙여둔 청새치의 살첨이 끊임없이 덤비는 상어들에 의하여 뜯겨 나갈 때 청새치에 대하여 진심으로 미안해합니다. 너무 먼 바다에까지 나와서 청새치와 산티아고 둘 모두 망쳐버렸다고 후회합니다. 그리고는 “늙어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있어서는 안돼”라면서 마놀린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물론 그동안 어획이 시원치 않아서 더 이상 마놀린을 데리고 배를 탈 수 없는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어린 마놀린과 산티아고의 관계도 참 이상적인 듯합니다. 노인과 어린이의 조합이 얼핏보기에는 부조화처럼 보이지만, 소년은 노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바다에서 사는 법을 전수받을 수 있고, 노인은 소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상부상조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버리지 말아야 할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자신감이 넘치는 탓인 지 무엇이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책이든 인터넷이든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무엇은 오직 세상을 앞서 살아본 사람들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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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사나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7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흥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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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비엔나에 가면서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을까 해서 들고 갔던 그레엄 그린의 <제3의 사나이>입니다. 오래 전에 명화극장을 통해서 본 <제3의 사나이>는 마지막 장면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어 원작을 읽어보고 싶기도 했던 것입니다. 앙상한 가지가 너무도 추워 보이는 도로 멀리서 다가오는 안나가 길가에서 기다리는 마틴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가는 마지막 장면이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비엔나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달라도 엄청 달랐을 것이라서 원작의 분위기를 느껴본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럽을 대표하여 오스만터키에 맞서던 오스트리아제국이 비참한 지경에 빠진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터키 등과 함께 연합국에 맞섰다고 패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발칸반도를 두고 러시아에게 밀릴 수 없었던 배경이 있다고 합니다. 전후 연합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고 독일과 분리하는 정도로 마무리를 했던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어 연합국과 맞섰다가 패전을 당했던 것이고, 연합국은 양국의 국토를 분할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독일과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어 연합국과 소련이 감시한 것처럼, 오스트리아와 비엔나 역시 소련을 비롯한 미영소 등 4개국이 분할 감시하였던 것입니다.


이 소설의 시기적 배경은 바로 4개국이 분할 감시하던 무렵입니다. 전쟁 후 물자가 부족한 비엔나에서 페니실린을 암거래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더하여 불량 페니실린을 유통시켜 환자가 죽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암거래를 주도하는 해리 라임을 수사당국이 뒤쫓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인공 롤로 마틴스는 해리의 어릴 적 친구로 라임 덕에 비엔나를 여행하곤 했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해리 라임의 초청으로 비엔나를 방문한 마틴스는 라임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라임의 사고현장을 찾은 마틴스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깨닫게 되고 그의 죽음을 뒤쫓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라임의 애인이라는 안나를 만나게 되고...


극적인 장면은 없지만 해리의 죽음을 뒤쫓는 과정은 추리 스릴러물의 전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마틴스가 해리의 죽음을 캐고 나선 것은 해리와의 우정이 그만큼 순수했기 때문인데, 과연 해리 역시 마틴스에 대하여 순수한 우정을 가지고 있을까요? 하지만 사건을 파고들면서 마틴스는 해리가 자신을 대한 태도가 진실했는가를 되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해리가 주도한 페니실린 암거래의 불법성과 비윤리성이 적절한 처벌을 받아야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마틴스는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해리를 만나게 됩니다. 해리로부터 자신을 페니실린 암거래에 가담시킬 생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해리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지하 하수도로 도망한 해리를 경찰과 함께 뒤쫓고 결국 해리에게 총을 쏘아 맞추기까지 합니다. 마틴스가 해리를 찾아냈을 때 해리가 했던 “지독한 바보야”라는 말은 해리 자신에게 했던 것인지, 아니면 마틴스에게 했던 것인지 작가는 분명하게 정하지 않았습니다. 책읽는 사람의 몫으로 돌리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마틴스에게 했던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돈을 벌 길을 주겠다는데 바보같이 발로 찼다는 의미겠지요.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게 전개되었던 것 같습니다만, 마지막 장면만큼은 다르더군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도 다시 한 번 보시고, 소설도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정원 아래서>라는 소설이 같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공 와일디치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윈튼홀에서의 기억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저 역시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저 환상이었는지 확인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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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0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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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이라는 개념은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의 <골렘; http://blog.joins.com/yang412/9549907>과 <닥터 골렘; 

http://blog.joins.com/yang412/11385707>에서 과학 혹은 의학이라는 학문이 가질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골렘은 유대인의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진흙과 물을 섞은 뒤 마법과 주문을 가해 사람들이 만든, 인간을 닮은 자동인형이다. 골렘은 강력하며, 또 날마다 조금씩 강력해진다. 골렘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 할 일을 대신해주고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보호해주지만, 반면 다루기가 힘들며 위험하다. 제대로 통제를 못 하면 골렘은 엄청난 힘을 마구 휘둘러 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소개하면서 “과학이란 바로 골렘(Golem)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백과사전에 따르면, 성서(시편 139:16, 형상)와 <탈무드>에 나오는 골렘의 개념은 태아 상태거나 완성되지 못한 물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중세 무렵부터 오늘날 사용하는 골렘의 의미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6세기에는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 인식된 것은 프라하의 랍비인 유다 뢰브 벤 베주렐이 만든 골렘의 전설때문이라고 합니다. 1915년에 발표된 구스타프 마이링크의 소설 <골렘 Der Golem>은 이 전설을 토대로 쓴 것으로 유명하다고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골렘>의 말미에 옮긴이가 재구성한 작가와의 인터뷰에는 작가가 차용한 골렘의 개념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골렘은 중세 밀교신앙자가 창안해낸 존재인데 프라하의 랍비 뢰브가 게토지역의 유대인을 수호할 인물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작가는 골렘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는 어둡고 미로 같은 게토지역에 감도는 집단적인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골렘>에서 이렇게 표현된 부분입니다. “한 세대에 한 번씩 하나의 정신적인 전염병이 번개처럼 이 게토 지역을 훑고 지나가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영혼을 습격한다. 그때 어떤 독특한 존재의 윤곽을 신기루처럼 나타나게 한다 어쩌면 이곳에 수백년을 살았을 그 존재가 이제 형태와 모습을 갖추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59쪽)”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골렘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골렘>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아타나시우스 페르나트는 배를 타고 블타바강을 건너 조그만 비탈길 위에 있는 성으로 갑니다. 그리고 성안의 대리석 건물 계단에 서 있는 또 다른 아타나시우스와 그가 사랑하는 미리암이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다른 아타나시우스는 거울 속의 나를 보듯 나와 너무나 흡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과연 누가 골렘이고 누가 아타나시우스인지 알 수가 없는 듯합니다. 어쩌면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라고 해석하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과 같은 생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프라하에 갔을 때는 단체관광이라서 게토지역에는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게토지역을 보았더라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실비 제르멩의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http://blog.joins.com/yang412/14300614>에 등장하는 여인이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골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게토에서 보석세공사로 명성을 떨치는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이웃 셰마야 힐렐과 고물장수 아론 바서트룸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이 복잡하게 엮여 은원관계가 만들어지고 관계가 정리되면서 대부분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맞는데,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초반 분위기는 쉽게 몰입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골렘의 존재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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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
고토 히데키 지음, 허태성 옮김 / 부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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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노벨상 수상자가 모두 결정되었습니다. 금년에 선정된 수상자 가운데 문학상부문의 밥 딜런이 단연코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문 수상자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만, 요시미 요시노리가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것에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처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래 금년까지 22명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2007년, 2009년 그리고 2011년, 201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2014년과 2015년에는 두 명의 수상자를, 심지어 2008년에는 네 명의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요? 김대중 대통령님이 받은 노벨 평화상 말고는, 특히 학문적 영역에서의 노벨상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과연 노벨상을 받을 수는 있는 것인지 자조 섞인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구식 학문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이 불과 70년이고, 초창기 어수선한 마당에 전쟁까지 치르면서 먹고 사는 문제해결이 급선무였던 수십년을 빼고 나면 학문다운 학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나라 사정을 일본과 바로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업적을 보면 평생을 바쳐 연구한 끝에 얻은 것들임을 본다면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일본이 받는데 우리나라가 못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틀린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정이 비교가능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교토 대학 출신이 6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토대학은 노벨상을 많이 받는데 도쿄 대학은 그렇지 못한 사연을 비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여건이 같은데도 수상자를 내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혹은 개인적 차이에 기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는 그런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는 책읽기가 될 것입니다. 신경생리학을 전공한 저자인 고토 히데키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과학부문의 노벨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를 동경해 물리학자를 꿈꾸며 물리학과 원자핵공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다 중도에 의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신경생리학을 연구해온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의 과학연구 수준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잘 정리해냈습니다. 먼저 일본과학의 여명기를 소개하고, 이어서 일본과학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그리고 패전 후의 일본과학계의 동향을 소개합니다. 4장에서는 저자의 전공분야에 해당하는 의학에서의 연구동향을 그리고 5장에서는 일본사람들이 노벨상과 인연이 깊은 이유를 정리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에는 집필 동기나 책의 얼개를 설명하는 서론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옮긴이의 말을 앞에 두었습니다. 옮긴이는 “언젠가 노벨상을 꼭 받고 말겠다고 결심했던 젊은 날의 유카와처럼 이 책을 읽은 독자 가운데도 노벨상 수상을 목표로 하는 야심 찬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8쪽)”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기획방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국가행정과 과학의 관계에서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원자력 발전의 진행 여부, 구체적인 진행 방안에서 기술과 행정의 문제, 그밖에 연구에 대한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 등 우리의 현실과 매우 밀접한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고 했습니다.


저자의 설명이 때로는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면이 있어 읽기에 거북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20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세력판도를 요동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을 지나치게 일본적 시각으로 해석한 듯한 부분도 있습니다. 조금 길다 싶습니다만, 이런 대목입니다. “개국에 즈음해 일본은 서양의 기술과 학문을 배우고 스스로의 인프라를 갖추고자 혼신을 다했다. 그러한 태도는 중국이나 조선 등 여타 동아시아 국가와는 대조적이었다. 중국의 서태후는 독일의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전력 배선을 맡겼다. 조선에서도 여자 군주를 칭한 정순왕후 김씨가 일족의 이익을 중시해 전대의 개혁 노선을 말살하여 나라를 정체시켰다. 일본은 얼마 되지 않는 외화를 쏟아 부으며 목숨을 걸고 서양에서 배우고자 하였다.(25쪽)” 그와는 달리, 동아시아로 몰려온 유럽제국들이 청나라는 물론 동남아시아 지역을 유린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은 반드시 독립을 지켜야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동아시아 3국은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처한 상황이 달랐습니다. 중국은 서구세력의 목표가 되었던 것이고, 조선은 서구 세력의 관심권의 밖에 있었으며, 일본은 목표가 되는 중국을 향하는 길에 숨을 돌리기에 맞춤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처럼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아 식민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은 서구의 실체를 여전히 별 것 아닌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일본은 외세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고,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시각이 섞였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시아를 집어삼키던 시기를 지나서 네덜란드가 동아시아항로를 이어받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일본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외국인들의 본토상륙을 제한했던 막부였지만 서구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던 것도 한몫했습니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받아들이던 문명과는 차별화된 서구문물이 대륙진출을 꿈꾸어 온 그들의 야심을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1866년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삿초 동맹을 맺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지배구조가 성립하였습니다.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즉위한 뒤에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한 사회개혁을 모색하였습니다. 개혁의 목표를 부국강병에 두고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를 천황을 중심으로 추진했던 것입니다. 1872년 외무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의 견구사절단이 유럽으로 떠났는데, 도쿠가와 막부시절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선하고,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메이지정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서구로 유학을 보냈고, 그들은 서구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예를 들어 코흐연구소에 갔던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는 연구소의 난제였던 파상풍균의 배양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항독소를 제조하는데 성공하여 파상풍치료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고, 그 업적으로 제1회 노벨 의학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과학계의 분위기 때문에 베링이 수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 과학계가 두드러진 연구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국가로부터 독립된 민간연구소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 1913년 초에는 재계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민간연구소 설립이 힘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민간이 추진하면서도 상업화와는 무관한 순수과학에 집중하는 연구소를 만든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그 무렵 터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정보전, 공학, 외교전, 전비 조달, 군진의학 등 다방면에서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끝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하여 기술력에 따라 전쟁이 좌우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정부가 다양한 영역에서 과학에 투자를 한 것은 궁극적으로 대륙을 목표로 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주축국의 일원이 되어 아시아 각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종국에는 하와이를 침공하여 미국을 아시아지역의 전장에 끌어들였습니다. 일본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핵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는 “바보스러운 전쟁을 시작했군. 미국의 진정한 힘을 모르니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곧 큰일이 날거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일본의 과학자, 의사들은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과학적 뒷받침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본 육군은 그때로서는 상상도 못할 규모의 세균전을 기획하였는데, 연구책임을 교토대학 출신의 이시이 시로가 맡았습니다. 바로 유명한 731부대입니다. 이 부대는 페스트, 콜레라, 파상풍, 이질, 티푸스 등 약 20종의 세균은 물론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독극물에 대한 실험도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731부대가 800명의 희생시켜 실험을 진행했다고 적었지만, 위키백과의 731부대 항목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한국, 중국, 몽골, 러시아의 군인과 시민,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병기의 실험 재료로서 살해되었으며, 731부대에서 개발된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731부대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한 이유는 전후 일본정부가 미군측과 비밀협상을 통하여 실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미국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러시아에는 넘겨주지 않는 대가로 관련자들의 처벌까지 면제받았다고 하니 아우슈비츠의 전범재판과는 처리과정에서 너무나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사람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주도한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잘못은 인식하지 않고 그 비밀을 묻은 미국에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전후에 보여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에 대하여, “일본의 맹우 독일은 전쟁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를 완전히 부정했다. 독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고 말았다. 반세기가 지나도 바닥 모를 상실감에 괴로워했다.(140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같은 사안에 대한 저자의 편향적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원자물리학 분야의 연구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미국이 독주하듯 만든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하여 종전을 앞당긴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원자폭탄제조는 미국만이 아니라 독일도 은밀하게 추진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입니다. ‘전쟁이 격렬해지면서 원자폭탄을 빨리 완성하라는 군부의 압박이 심해졌다’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의 핵물리학자들 역시 전쟁 중에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국력이 달려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도 해군은 반년 안에 원폭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는데, 과학계는 이미 지난 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러일전쟁에서 보았던 것처럼 일본은 전쟁과 관련된 기술개발에 상당한 투자를 해왔던 것입니다. 원천기술을 일찍 확보한 경우도 있는데 이를 사용가능한 수준으로 향상시키지 못한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GDP는 놀랍게도 세계 6위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일찍 수용한 서구문물을 바탕으로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부를 쌓아올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쌓은 부를 좋은 일에 사용하지 못하고 이웃을 괴롭히는 일에 사용하였으니 결과가 좋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패전 후 일본은 보유한 군사기술을 조선, 여객기, 신칸센 등 평화산업으로 전환하여 세계 2위의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자부심의 한 자락을 내비쳤습니다만,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기간이란 것도 장구한 역사의 한 토막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 옛날이여!’라고 할 날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처럼 일본화학회에서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인물이 있다는 점이 일본 과학계의 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묵묵히 자신에 세운 학문적 목표를 향하여 매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과를 재촉하지 말고 과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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