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책
우르스 비트머 지음, 이노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독특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궁금했습니다. 아버지의 책이 무엇인지. 결국은 아버지의 일기였습니다. 이 책은 스위스의 어느 산골마을의 전통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이 마을에서는 아이가 열두 번째 생일을 맞으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성년을 축하하는데, 이때 그 아이는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상을 기록해야 하는 백서를 선물로 받습니다. 백서를 기록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누구도 들여다보아서는 안되며, 죽은 다음에는 모두가 그 책을 읽고 죽은 이의 삶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백서를 가장 먼저 읽을 권리는 큰 아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책>의 화자는 백서의 주인공 카를의 아들입니다. 카를이 죽은 다음에 백서를 읽게 된 아들이 카를의 삶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저도 선친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남기신 글을 모아서 책으로 펴낸 적이 있습니다. 읽기 쉽게 문장을 조금 다듬는 정도였던 것인데, <아버지의 책>의 화자인 카를의 아들은 백서 전부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딱 두 번 백서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 전부입니다.


공산주의자인 카를은 아내나 아들보다도 자신의 관심사가 최우선인 외골수적인 성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카를의 성향 때문에 아내와 아들은 나름 상처를 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내 클라라는 종국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합니다. 아들 역시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백서를 읽으면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남을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카를은 중세 프랑스의 민담을 수집하여 분석하거나, 책을 번역하거나 잡지에 투고를 하는 등 글쓰는 일을 해온 까닭인지 그가 남긴 백서는 리뷰에 옮기기가 무엇할 정도로 꽤나 솔직하고 난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구절을 옮겨봅니다. “때때로 나는 내가 디드로와 같다고, 내가 바로 디드로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다. 우리는 똑같다. 각자의 시대 속에서 서로를 투영하고 있다.(131쪽)” 디드로는 1745~72년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저작물인 〈백과전서〉의 편집장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분위기만큼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만, 카를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소집에 응하여 군복무를 하게 됩니다. 전쟁기간 중에 독일군이 스위스를 침략하지는 않았지만, 식량증산을 위하여 정원을 밭으로 개조하는 등 불안한 삶의 단면을 볼 수 있으며, 전쟁전 사상의 자유를 즐길 수 있던 분위기가 빠르게 우경화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통이 사라지는 모습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카를의 고향마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관을 미리 준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외지에 나가서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죽은 이의 아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준비해놓은 관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카를 역시 아버지가 죽었을 때 고향에 가서 관을 직접 짊어지거나 기차에 싣고 와서 장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카를이 죽었을 때 화자가 찾아간 고향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관을 깨서 불쏘시개로 썼다고 합니다. 단지 일본인 관광객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전통이 사라진다는 것은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평생을 기록해가는 백서라는 것이 아무리 두툼해도 공책 한권으로는 절대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년이 되어 읽어보니 너무 치졸한 듯해서 언젠가 버렸습니다만, 중학교 2학년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가 대학시절까지 10여권에 이르렀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버린 일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또 부담스러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듯 일기에 대한 양가감정을 느끼도록 만든,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책읽기였습니다. 요즈음에는 워낙이 쓰는 글이 많아서인지 일기를 따로 쓸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 기관사와 떠나는 철도 세계사 여행
박흥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것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모든 것의 ‘역사’를 읽기를 좋아합니다. 아마도 뿌리까지 캐들어 가면 무엇이든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음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정리한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12436588>를 라포르시안에서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는 철도의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지는 않았지만, 철도에 관한 많은 것들을 정리해냈습니다. 1814년 7월 24일 영국의 킬링워스의 마차용 선로 위에서 30톤의 화물을 실은 8량의 화차를 연결해서 시속 6.5km의 속도로 달린 기관차를 조지 스티븐슨이 만들어낸 것으로부터 기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차의 원리를 추적하다보면 중세 오스트리아의 라이스추크 철도, 고대 그리스의 철도 디올코스라인, 더 멀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건설공사 현장에서 적용한 음각궤도에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는 20년 넘게 기관차를 운전해온 철도기관사 박흥수의 작품입니다. 우리나라 철도의 메카인 영등포역 가까운 동네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철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기차를 운전하여 수려한 산하를 누비다가 철도노조의 간부를 맡아 정부의 철도민영화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철도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바꾸게 된다는 점에서 공부는 역시 좋은 것입니다. 철도에 대한 관심이 민영화를 반대하기 위한 논리개발로 시작한 철도공부가 역사로 거슬러 오르게 된 것은 작가에게는 행운이었던 셈입니다.


저자는 그 계기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철도가 인류 역사에 등장한 이후 철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기관차, 선로, 역, 철도원뿐만 아니라 사랑과 이별, 전쟁, 역사, 예술에 이르기까지 철도와 관련된 것들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여행은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16쪽)’ 행운은 행운을 부르는 법, 2012년 겨울 작가는 우연히 <프레시안>기자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고, 격주 간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정 칼럼은 시작은 쉽지만, 곧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연재기간은 따로 적지 않았지만, 책의 부피로 보면 몇 년은 조이 해왔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방대한 자료를 읽어내야 하는 전제가 따라붙습니다. 자료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의 책들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는 모두 7부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에서는 철도가 탄생하기까지 밑거름이 되었던 지식, 그러니까 앞서 잠깐 언급했던 이집트의 피라미드건설현장, 고대 그리스의 철도 디올코스라인, 중세 오스트리아의 라이스추크 철도, 그리고 로마의 위대한 길 아피아 가도에 이르기까지 옛사람들이 앎이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개괄적으로 정리합니다. 2부에서는 철도시대의 문을 열수 있었던 행운의 사나이 조지 스티븐슨의 성공신화를 뒷받침해준 몇 가지 행운에 가까운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왜 프랑스가 아니고 영국이었는지도 말입니다. 3부에서는 철도가 바꾼 근대의 풍경을 담았는데, 옛 미술작품에 담긴 철도라든가, 철도시간이 탄생하게 된 재미있는 상황이나, 대형화된 참사로 탈바꿈하게 된 철도사고 등이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4부에서는 미국대륙에, 5부에서는 일본열도에 철도가 건설된 배경을 설명하고, 그 의의를 정리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철도역사에 곁들여서 우리나라에 처음 철도를 부설한 일본제국의 시커먼 속셈도 적나라하게 적었습니다. 흔히 쇄국의 껍질에 숨어 퇴화되어가고 있던 대한제국을 문명화시킨 공로를 드러내는 일본제국이 철도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을 어떻게 벌였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6부에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기간 중에 철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7부에서는 해방 이후 벌어진 철도 파업과 6.25동난 기간 중에 철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요약합니다. 어쩌면 연재를 시작한 배경에는 철도민영화의 허구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을 슬쩍 드러내 보인다거나 해방 이후의 남한 정부의 난맥상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읽히기도 합니다만, 이런 부분에서는 반대논리까지도 같이 소개하여 읽는 이들의 판단에 맡기도록 했더라면 빛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기관차경주대회를 찰스 디킨스의 중계와 칼 마르크스의 해설로 소개한 것도 참신한 것 같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선정된 사유는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개의 선로 위에 선 경주용 기관차 들이 동시에 달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하나의 선로에서 경주에 나선 기관차들이 한 대씩 달려서 가장 짧은 시간에 주행을 맞춘 기관사를 우승자로 결정했답니다. 저자는 단순히 기록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당시 철도가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사회의 분위기를 전한다거나 경쟁자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점 등도 잘 엮어서 들려주기 때문에 왜 당시에 그들이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철도는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결론을 미리 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철도민영화는 꿈도 꾸지 말라는 식의 설명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은 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끌어올리는데 사용되었는데, 이 무렵 석탄을 선로 위에 올려 이동시킨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은 꽤 많았던 모양입니다. 1802년 리처드 트레비식이 증기차에 대한 특허를 내어 시험운전을 하기도 했지만 실용화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기관차제작에는 성공했지만 빈약한 선로가 거대한 몸집의 기관차에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지 스티븐슨은 선로의 중요성을 깨달아 제대로 된 철로를 깔아 기관차가 달릴 수 있게 했던 것이 성공의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최초의 상업용 철도는 스톡턴과 달링톤 사이에 건설되었고, 본격적인 철도시대를 연 것은 1830년 9월 15일 개통식을 가진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의 철도라고 합니다. 리버풀항 가까이에서는 대도시의 지하에 2km 가까운 터널을 뚫어야 했고, 체트모스의 30㎢늪지대를 가로지르기 위한 선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청어뼈 모양으로 목재를 깔고 돌을 넣어 기초를 다지는 새로운 공법을 적용하였습니다. 영국에서 철도는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되어 투기열풍의 중심에 섰습니다. 수십 개의 철도회사가 설립되어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주식을 발행하여 한몫을 챙기려던 투기꾼들은 상투를 쥐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쟁을 통하여 적정한 운임이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경쟁은 초반 출혈경쟁을 유발할 수 있지만 이내 균형을 찾아가는 법이니까요.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횡단철도는 남북전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철도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던 것인데, 철도망이 잘 갖추어졌던 북군이 군수품조달이나 병력의 이동 등 전략면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서부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일었던 골드러시가 한몫을 했고, 유럽을 향하던 동부사람들의 관심이 아시아로도 나누어지면서 동서를 연결할 필요성이 생겨 대륙횡단철도의 부설이 추진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대륙횡단철도는 서부에서 만들어진 센트럴 퍼시픽 철도(CP)가 서부 쪽에서 건설을 시작하고, 아이오아주에서 시작하는 동부 쪽 철도는 유니온 퍼시픽철도(UP)가 맡았던 것입니다. 당시 대륙횡단철도건설에는 정부가 부지는 물론 철로주변의 땅을 무상으로 불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두 회사는 한 치라 더 건설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시에라네바다산맥과 로키산맥을 넘어야 하는 CP가 많이 불리했던 것인데, 건설현장이 열악하여 노동자를 구할 수 없었던 것도 커다란 장애였습니다. 이 문제는 중국인을 동원하여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UP의 동부 쪽 철도건설에는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공사를 맡았는데, 건설에 참여한 민족들 간의 경쟁도 볼만했다고 합니다. 두 회사가 건설해온 철로는 1865년 5월 10일 유타주 포트몬트리 언덕 위에서 만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연수 중에 차를 서부를 여행하면서 만난 대륙횡단열차는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은 평원 위를 달리는 기차의 길이가 장난이 아닌 것입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화차가 몇 량이나 연결되었는지 헤아려보려고 도전했습니다만, 금세 헷갈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책에서 보니 9~10대의 기관차를 선두와 마지막, 그리고 중간에 적당한 간격으로 끼워서 모두 3백량 정도의 화차로 구성되는 ‘몬스터’라고 부르는 화물열차 운행편이 있다고 합니다. 화차 하나의 길이를 17m로 쳐도 5.3km에 이른다고 하는데, 서울역에서 용산역을 지나 한강다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합니다. 땅덩어리가 크니 화물열차도 장난이 아닌 듯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는 열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해보는 꿈을 가졌습니다만, 일정과 방법을 찾지 못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웬만한 도시는 비행기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데, 굳이 철도여행을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여객수송용 열차운행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폐지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화물열차의 경우는 비행기나 트럭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측면이 있으므로 여전히 가능성이 있는 사업분야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부예산에만 기대고 있다면 효율적 운영에 소극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일본의 경우도 개항 이후 철도가 선진화를 이끄는 동력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도입 당시에는 영국의 자본과 기술로 건설하였기 때문에 초기에 외국자본에 휘둘린 측면이 없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게 된 일본은 조선의 철도부설권을 얻어내기 위하여 별별 수단을 다 썼던 것이고, 조선의 조정이 견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도 부설권을 사들이는 무리수를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건설과정에서 투자비를 넘게 뽑아내는 재주를 보였으니, 아무래도 협상에 약하거나 뒷구멍으로 딴 주머니를 찬 모리배들의 장난에 나라가 멍든 꼴이 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근대화과정에서 조선철도 부설과 관련된 뒷이야기를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어 슬픈 과거지사를 새기게 됩니다. 한 번의 잘못은 저지를 수 있지만, 꼭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현명함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시기에 만주는 우리백성들에게는 희망이 땅이었던 것 같습니다. 붙일 땅뙈기도 없는 농민들이 흘러들어 버려진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고, 이곳에서 힘을 길러 조국을 수복시킬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저자는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 변화를 보였다고 적었습니다. 초반에 투쟁을 주도하던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뜻을 접은 다음에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불씨를 이어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조직을 파괴하려는 세력으로 만주국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조선인들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간도특설대 출신 조선인들은 해방 이후 남한에서, 항일무장투쟁세력은 북한에서 자리잡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의 국내 정세나 6.25동란 기간 중에 철도와 기차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공방전 등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의 기록도 있는 듯해서 조만간 찾아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출장이 적지 않은 편인데 대체적으로 열차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속버스보다는 철도를 선호하는 것은 쾌적하고 흔들림이 적어 책읽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도 중요한데, KTX를 이용하면 고속버스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이동이 가능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철도여행이 비행기나 고속버스 등 다른 여행수단과 비교해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비스 개선을 위한 다각적 모색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철도민영화도 충분히 고려할 바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젊은이들이 쓰는 말 가운데 ‘4차원’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독특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비교적 점잖은 표현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불리는 4차원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논외로 하고 말입니다. <오베라는 남자>로 우리와 친숙해진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브릿마리 여기 있다>를 읽게 되었습니다. 오베도 그랬지만 브릿마리 역시 4차원인 것 같습니다.


저도 누군가처럼 브릿마리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 즉 고용센터에서 일자리를 찾는 장면을 읽으면서 짜증이 치밀었습니다. 상대의 처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성격인 사람들 때문에 힘든 경험을 한 자락씩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브릿마리는 일종의 원칙주의자였습니다. 자신이 정한 원칙을 지켜가면서 살아가는데 미심쩍은 부분은 확인에 확인을 거치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말입니다. 이런 성격 정말 피곤합니다. 하지만 이런 분과 합이 맞는 사람은 또 편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막무가내는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브릿마리의 처지를 알게 되면 이해가 갈만한 점도 없지 않습니다. 평생 남편수발하는 것 이외에는 집밖에서의 일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브릿마리로서는 고용센터를 통해서 호구지책이 될 만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시급했던 것입니다. 고용센터의 아가씨는 브릿마리의 끈질김에 손을 들었는지 소도시에서도 떨어진 보르그라는 쇠락해가는 마을에 있는 레크레이션센터의 임시관리직을 소개해줍니다. 어리버리한 브릿마리처럼 이곳 사람들 역시 만만치 않은 4차원인 것 같습니다. 마을이 쇠락하다보니 번듯한 일자리도 점점 사라지고 마찬가지로 사람들 역시 사라지는데, 남아있는 사람들도 떠날 기회만 보고 있는 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타지에서 흘러든 브릿마리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진솔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타지인을 따듯하게 맞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따돌리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쓸고 닦고 챙기는 것을 즐기는 브릿마리의 천성이 빛을 발하여 축구를 좋아하는 마을 청년들이 따르게 되고, 이들의 코치를 얼떨결에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축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브릿마리이지만, 젊은이들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브릿마리의 천성인 듯합니다.


속표지 뒷장에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얽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쇠락해가는 도로변 마을이라고 해도 번듯한 가게라고는 미지의 인물이라는 여자가 경영하는 피자가게겸 우체국, 구멍가게 겸 자동차 정비소 등 만물점이 하나있고, 그리고는 레크레이션센터가 모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는 축구를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그 가족 일부 등등. 이렇듯 빈약해보이는 인적 자원으로 눈물 쏙 빠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을 보면 작가적 역량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심장마비가 왔을 때 내연의 여자집에 있던 남편이 이 동네까지 찾아와 브릿마리에게 재결합을 청하였을 때, 보르그 지역의 경찰관 스벤의 구애를 뿌리치고 남편을 따라가는 브릿마리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집은 왜 나왔누?


그리고 사이코가 저지른 일과 관련해서 새미가 죽음을 맞는 상황은 상세한 설명이 생략되고 있어 왜그래야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특히 베가와 오마르라는 두 동생을 브릿마리에게 부탁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권총강도를 저지른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설정이 가능한지, 아니 독자들더러 이해해달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제국 쇠망사 3 로마제국 쇠망사 3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마제국 쇠망사3>에서는 제국의 변방에 살던 고트족, 반달족 등이 세력을 얻어가는 과정, 아시아에서 이동해온 훈족의 영향, 그리고 서로마제국의 멸망 등을 다루었습니다. 이 무렵에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들은 통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향락을 탐닉했다고 합니다. 궁정은 물론 속주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과 부정이 자행되었지만, 이들의 죄를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국정장악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국이 융성할 때는 페르시아 등과 국경을 다투는 전쟁도 자주 있었고, 변병의 이민족들의 반란에도 곧바로 출병하여 제압하곤 했지만, 이민족들의 국경 침입도 눈감아주는 사태가 벌어졌고, 심지어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고트족이 쳐들어와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했고, 카르타고에 자리잡고 있던 반달족 역시 함대를 몰고 이탈리아반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제국의 심장 로마로 진격해온 훈족과 협상을 통하여 국경 밖으로 물러나는 조건으로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제국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저자는 진정한 의미의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선두에서 군대를 이끄는 등 전 제국에 걸쳐 널리 권위를 인정받았던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테오도시우스의 사후 로마제국은 분할되어 그의 두 아들이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의 황제, 그리고 호노리우스가 서로마의 황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훈족의 이동에 따라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로마제국을 압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과 훈족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시우스황제의 사후에 로마군의 보조역할을 하던 고트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그 이유는 새 황제가 보상금을 중단한 것에 대한 항의가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들이 살던 도나우강 북쪽의 척박한 땅보다는 윤택한 남쪽 땅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영민한 지도자 알리리크의 영도에 빠르게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서기 408년 고트족은 로마를 포위하였고, 1년 뒤에 보상금을 받고 물러났지만, 410년에 다시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고트족은 9일 만에 약탈을 끝내고 물러났던 것에 반하여 로마제국의 황제를 자처한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하였을 때는 9개월 동안 끔찍한 약탈극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5세기 중반 반달족이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로마의 속주를 점령하였습니다.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은 서기 455년 로마를 점령하고 14일간에 걸쳐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고의 또는 무지에 의한) 예술 문화의 파괴’행위를 반달리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반달족의 약탈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유럽 사람들의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달족이 로마에서 저지른 짓은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점령하였을 때, 아예 도시를 폐허로 만든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아마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을 때 저지른 약탈 정도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한 에스파냐제국은 금은보화의 약탈을 넘어 문명 자체를 파괴하는 짓을 자행하였으니 반달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로마이즘 혹은 에스파냐이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로마제국의 멸망에 단초가 되었다고 하는 훈족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훈족의 기원을 소략하게 적고 훈족의 융성기를 이끌었던 아틸라를 중심으로 2개의 장을 할애하였을 뿐입니다. 아마도 훈족에 관하여 유럽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제국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훈족은 아틸라 사후에 여러 세력으로 쪼개져 갈등을 벌이는 바람에 금세 쇠퇴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아틸라와 같은 뛰어난 지도자의 존재가 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제국 쇠망사 2 로마제국 쇠망사 2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마제국 쇠망사2>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창건하고, 밀라노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시대로부터 뒤를 이은 아들 콘스탄티우스황제 시대의 혼란상에 이어 갈리아군단에 의하여 추대된 철학자 율리아누스황제가 페르시아원정길에 전사하고, 역시 전장에서 추대된 요비아누스의 옹졸한 정치적 행보, 그의 뒤를 이은 발렌티아누스황제가 동생 발렌스와 제국을 나누어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할하였고, 발렌티아누스황제의 사후에 발렌티니아누스의 사망·그의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을 계승하였고, 그라티아누스의 죽음 이후에는 테오도시우스가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던 시기를 다루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공표한 서기 324년부터 훈족에 밀려난 고트족이 로마의 영역에 자리잡은 서기 395년까지의 시기입니다.


<로마제국 쇠망사2>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교의 공인과 이어 벌어진 삼위일체를 둘러싼 교리다툼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다양한 파벌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교가 타 종교에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갈등의 수준을 뛰어넘어 권력을 쥔 쪽이 상대를 엄청나게 탄압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세력을 잃은 쪽에서는 숨어서 권토중래를 노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데, 소아시아의 동굴에서 숨어지내던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제국이나 이슬람제국의 탄압을 피해서 숨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반대파를 피해서 숨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1>에서 보았던 것처럼 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았던 것은 제국의 수호신들에 대한 경배를 기피하는 정도를 넘어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배타적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그러니까 화를 자초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고, 역시 이교도에 관용적인 입장을 견지한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린 다음에 철저하게 짓밟은 것을 보면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에 대하여 생각을 더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군의 독특한 구성도 제국의 쇠망을 가속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는데 주력했던 로마군은 본국의 인적자원만으로는 도처에 깔아놓은 전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복한 야만족(철저하게 로마의 시각에서의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의 인적자원을 징발하여 군단을 창설하였던 것이며, 이들이 군대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에 뒤에는 속주출신의 황제가 탄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로마제국은 황제가 지배했다기 보다는 로마의 귀족들이 본토를 지키면서 황제들은 곳곳에 깔려있는 전장을 바쁘게 오가는 신세였는지도 모릅니다. 콘스탄니누스대제 시절에는 통합관리하던 제국을 116개의 속주로 나누어 통치를 위임하는 일종의 지방분권제도를 정착시켰던 것입니다.콘스탄티누스황제의 그리스도교의 공인 배경에는 정적을 제압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고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기번은 그리스도교인들의 특성, 즉 종교집단의 결속력과 정신력을 활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인에게 중요한 보직을 맡겼던 것이고, 그들은 황제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며, 비그리스도교 관리들을 개종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적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는 소위 기적에 대한 기번의 입장은 “참으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믿을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로 교묘하게 혼합되었던 것(165쪽)"이라고 정리된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2>의 마지막 장에서 정리된 훈족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분명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훈족이 중국을 위협하던 흉노족이었고, 한나라가 자리를 잡으면서 흉노족을 압박하자 이들이 나뉘서 중국의 영토 안으로 이주해서 살게 된 집단과 서쪽으로 이주한 집단이 있었다는 것인데, 중국의 북방에서 유럽까지의 이동경로가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공부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