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책
우르스 비트머 지음, 이노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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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독특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궁금했습니다. 아버지의 책이 무엇인지. 결국은 아버지의 일기였습니다. 이 책은 스위스의 어느 산골마을의 전통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이 마을에서는 아이가 열두 번째 생일을 맞으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성년을 축하하는데, 이때 그 아이는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상을 기록해야 하는 백서를 선물로 받습니다. 백서를 기록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누구도 들여다보아서는 안되며, 죽은 다음에는 모두가 그 책을 읽고 죽은 이의 삶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백서를 가장 먼저 읽을 권리는 큰 아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책>의 화자는 백서의 주인공 카를의 아들입니다. 카를이 죽은 다음에 백서를 읽게 된 아들이 카를의 삶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저도 선친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남기신 글을 모아서 책으로 펴낸 적이 있습니다. 읽기 쉽게 문장을 조금 다듬는 정도였던 것인데, <아버지의 책>의 화자인 카를의 아들은 백서 전부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딱 두 번 백서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 전부입니다.


공산주의자인 카를은 아내나 아들보다도 자신의 관심사가 최우선인 외골수적인 성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카를의 성향 때문에 아내와 아들은 나름 상처를 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내 클라라는 종국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합니다. 아들 역시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백서를 읽으면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남을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카를은 중세 프랑스의 민담을 수집하여 분석하거나, 책을 번역하거나 잡지에 투고를 하는 등 글쓰는 일을 해온 까닭인지 그가 남긴 백서는 리뷰에 옮기기가 무엇할 정도로 꽤나 솔직하고 난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구절을 옮겨봅니다. “때때로 나는 내가 디드로와 같다고, 내가 바로 디드로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다. 우리는 똑같다. 각자의 시대 속에서 서로를 투영하고 있다.(131쪽)” 디드로는 1745~72년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저작물인 〈백과전서〉의 편집장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분위기만큼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만, 카를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소집에 응하여 군복무를 하게 됩니다. 전쟁기간 중에 독일군이 스위스를 침략하지는 않았지만, 식량증산을 위하여 정원을 밭으로 개조하는 등 불안한 삶의 단면을 볼 수 있으며, 전쟁전 사상의 자유를 즐길 수 있던 분위기가 빠르게 우경화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통이 사라지는 모습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카를의 고향마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관을 미리 준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외지에 나가서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죽은 이의 아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준비해놓은 관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카를 역시 아버지가 죽었을 때 고향에 가서 관을 직접 짊어지거나 기차에 싣고 와서 장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카를이 죽었을 때 화자가 찾아간 고향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관을 깨서 불쏘시개로 썼다고 합니다. 단지 일본인 관광객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전통이 사라진다는 것은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평생을 기록해가는 백서라는 것이 아무리 두툼해도 공책 한권으로는 절대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년이 되어 읽어보니 너무 치졸한 듯해서 언젠가 버렸습니다만, 중학교 2학년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가 대학시절까지 10여권에 이르렀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버린 일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또 부담스러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듯 일기에 대한 양가감정을 느끼도록 만든,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책읽기였습니다. 요즈음에는 워낙이 쓰는 글이 많아서인지 일기를 따로 쓸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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