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3 로마제국쇠망사 3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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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3>에서는 제국의 변방에 살던 고트족, 반달족 등이 세력을 얻어가는 과정, 아시아에서 이동해온 훈족의 영향, 그리고 서로마제국의 멸망 등을 다루었습니다. 이 무렵에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들은 통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향락을 탐닉했다고 합니다. 궁정은 물론 속주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과 부정이 자행되었지만, 이들의 죄를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국정장악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국이 융성할 때는 페르시아 등과 국경을 다투는 전쟁도 자주 있었고, 변병의 이민족들의 반란에도 곧바로 출병하여 제압하곤 했지만, 이민족들의 국경 침입도 눈감아주는 사태가 벌어졌고, 심지어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고트족이 쳐들어와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했고, 카르타고에 자리잡고 있던 반달족 역시 함대를 몰고 이탈리아반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제국의 심장 로마로 진격해온 훈족과 협상을 통하여 국경 밖으로 물러나는 조건으로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제국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저자는 진정한 의미의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선두에서 군대를 이끄는 등 전 제국에 걸쳐 널리 권위를 인정받았던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테오도시우스의 사후 로마제국은 분할되어 그의 두 아들이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의 황제, 그리고 호노리우스가 서로마의 황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훈족의 이동에 따라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로마제국을 압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과 훈족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시우스황제의 사후에 로마군의 보조역할을 하던 고트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그 이유는 새 황제가 보상금을 중단한 것에 대한 항의가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들이 살던 도나우강 북쪽의 척박한 땅보다는 윤택한 남쪽 땅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영민한 지도자 알리리크의 영도에 빠르게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서기 408년 고트족은 로마를 포위하였고, 1년 뒤에 보상금을 받고 물러났지만, 410년에 다시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고트족은 9일 만에 약탈을 끝내고 물러났던 것에 반하여 로마제국의 황제를 자처한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하였을 때는 9개월 동안 끔찍한 약탈극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5세기 중반 반달족이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로마의 속주를 점령하였습니다.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은 서기 455년 로마를 점령하고 14일간에 걸쳐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고의 또는 무지에 의한) 예술 문화의 파괴’행위를 반달리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반달족의 약탈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유럽 사람들의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달족이 로마에서 저지른 짓은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점령하였을 때, 아예 도시를 폐허로 만든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아마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을 때 저지른 약탈 정도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한 에스파냐제국은 금은보화의 약탈을 넘어 문명 자체를 파괴하는 짓을 자행하였으니 반달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로마이즘 혹은 에스파냐이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로마제국의 멸망에 단초가 되었다고 하는 훈족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훈족의 기원을 소략하게 적고 훈족의 융성기를 이끌었던 아틸라를 중심으로 2개의 장을 할애하였을 뿐입니다. 아마도 훈족에 관하여 유럽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제국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훈족은 아틸라 사후에 여러 세력으로 쪼개져 갈등을 벌이는 바람에 금세 쇠퇴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아틸라와 같은 뛰어난 지도자의 존재가 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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