갠지즈 강가에서 - 인도를 품는 어머니강 갠지즈의 사람 깨우는 이야기
김나미 지음 / 고즈윈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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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대한 생각은 이중적인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가 하면 잘 다녀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같은 것이 뒤섞이는 것 말입니다. <갠지스 강가에서>의 저자 역시 서두에 ‘인도에 다녀온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로 뚜렷하게 나뉜다.’라고 말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꼭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 그리고 죽어도 다시는 가지 않을 나라’ 아마 저는 이도저도 아닐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가보고 싶은 데가 너무 많아서 한번 가본 곳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왠만하면 죽어도 다시는 가지 않을 곳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독특한 면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인생 초반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뒤늦게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시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참스승을 찾아다니셨다니 말입니다. 다양한 종교인들을 만나다보니 종교전문 작가라고 하나봅니다. 논어(論語) 「술이(術而)」에서 온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내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라는 뜻입니다. ‘스승’이라하면 지덕(知德)을 갖춘 사람을 연상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택기선자이종지(擇其善者而從之) 기불선자이개지(其不善者而改之)’라고 하신 것을 보면, 공자께서는 누구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고 보셨던 것 같습니다.


저자 역시 공자님 말씀을 잘 새겼던 까닭인지 인도에서 만난 다섯 명의 어린이로부터 배웠던 것들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도사람들의 중심사상이 되고 있는 힌두교의 민낯을 가감없이 소개합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기까지 저자는 몇 번이고 인도를 찾았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전히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인도에 가게 만드는지, 무엇을 찾아 헤매는지 난 정말 모른다’라고 고백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만, 유일신을 믿는 몇몇 종교와는 달리 힌두교는 다양한 신을 믿는데, 심지어는 기독교의 하느님까지도 힌두신의 하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히 종교의 도가니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힌두교인을 개종시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토양에서 어떻게 불교가 생겨나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힌두신을 정성스럽게 모시면서도 타인(특히 외국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그들이기도 하다니 읽는 저도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떻든 인도사람들은 시바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합니다. 현생의 어려움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다음에는 더 나은 생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신에게 선물을 드리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윤회의 업을 끊어내서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구도자도 있다고 합니다. 환생을 결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전생에서 행한 모든 업, 카르마에 따르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의 인도여행은 무언가를 찾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인지 정해진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정이 되는대로 머물다가 그 상황이 마무리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그런 식입니다. 종교유적을 찾아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려함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많은 인도여행을 통하여 저자가 얻는 깨달음은 ‘당연히 누리던 것들에 대한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라는 것이라는데, 글쎄요. 꼭 인도여야만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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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오브 아프리카 열린책들 세계문학 87
카렌 블릭센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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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제작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누구와 함께 보았던가 기억은 가물거립니다만, 초원에 지는 장엄한 석양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어쩌면 이 또한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만... 영화는 커피농장의 여주인과 그녀의 남편과 친구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기억들을 가지고 원작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만, 영화의 전개와는 전혀 다른, 오히려 아프리카에 대한 원작자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영화에서처럼 연인관계였던 데니스 핀치헨턴에 관한 내용은 둘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구절조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농장에 자주 들르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묘사되었습니다. “버클리 콜과 데니스 핀치헨턴에게 우리 집은 공상주의 시설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의 모든 물건이 곧 그들의 것이었고 그들은 우리 집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부족한 것들을 가져다 채웠다.(192쪽)” 뿐만 아니라 커피농장이 파산지경에 이르자 농장을 정리하고 유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 데니스가 비행기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 죽음조차도 덤덤하게 적고 있습니다.


반면에 농장에서 데리고 있던 원주민들, 마사이족, 키쿠유족 등 원주민 이웃들에 대해서는 미주알고주알 적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자연에 관한 그녀의 묘사는 섬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무와 꽃 심지어는 공기에 이르기까지... “이곳의 나무들은 활 모양이나 둥근 지붕 모양이 아니라 수평으로 층을 이루며 자랐기 때문에 외로이 서 있는 키 큰 나무들은 마치 야자수처럼 보이거나 돛을 말아 올린 전장(全裝-‘활짱 전체에 애끼찌를 대어 만든 활’이라는 의미인데, 혹시 ‘배의 앞쪽에 있는 돛대’라는 의미의 前檣이 아닐까 싶습니다) 범선 같은 웅대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가장자리 모양이 이상해서 마치 나무 전체가 미세하게 떨고 있는 듯했다. (…) 풀들은 백리향이나 머틀 같은 허브처럼 향이 났는데,d jEjs 곳에서는 그 향이 너무 짙어서 코가 얼얼할 정도였다.(…) 한낮에는 땅 위의 공기가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아 있었다. 흐르는 물처럼 섬광을 발하고 물결치고 빛났으며 모든 사물을 거울처럼 비추어 둘로 만들고 거대한 신기루를 만들어 냈다.(13-14쪽)”


유럽사람들이 남쪽 나라와 남쪽 사람들을 동경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아프리카에 도착하면서부터 원주민에게 뜨거운 애정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았는데, 예민한 그들을 놀라게 하면 눈 깜박할 사이에 자신들의 세계로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지만, 사파리에서 혹은 농장에서 알게 된 원주민들과 사적이고도 견고한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다양한 방법으로 원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주민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 것을 보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준비하고 있는 아프리카 여행길에 케냐의 나이로비의 은공언덕에 있던 그녀의 삶의 터전을 볼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세렝게티에서 예정되어 있는 경비행기 탑승을 통하여 그녀가 데니스의 비행기를 타고 초원을 날던 느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햇살 속에서 날았으나 산허리에는 투명한 갈색 그림자가 져 있었고 우리는 곧 그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하늘에서 버펄로 떼를 발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처음 보았을 때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생쥐들이 마룻바닥에서 곰실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래로 하강하여 사정거리 내인 45미터쯤 위에서 맴돌며 지켜보자 평화로이 뒤섞이고 흩어지는 버펄로들의 수를 헤아릴 수 있었다.(218쪽)” 이런 묘사들을 읽다보면 이번 여행에서 같은 느낌을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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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처럼 2017-04-08 09:02   좋아요 0 | URL
마침 세렝게티를 경비행기로 나는 상품이더라구요..
가공되지 않은 원시의 비경을 느껴볼 수 있을까 싶습니다.
 
고대 도서관의 역사 - 수메르에서 로마까지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1
라이오넬 카슨 지음, 김양진 외 옮김 / 르네상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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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즈음은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고 있습니다. 고대 문화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뉴욕대학교 라이오넬 카슨 명예교수가 쓴<고대 도서관의 역사> 역시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입니다. 동네 도서관에서 도서관에 관한 책을 읽은 셈입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이 고대의 도서관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살펴본 최초의 연구서로, 기원전 3천년 고대 근동에서 처음 도서관이 등장한 후부터 4,5세기 기독교와 수도원제도의 확산으로 도서관의 역사가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초기 비잔틴제국 시대에 이르는 동안 도서관에 대하여 알려진 모든 것들을 총괄적이고도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라고 적었습니다. 저자가 정리한 부분에 관해서는 이 책을 통하여 도서관의 등장과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동과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제국의 역할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은 점은 아쉬웠습니다. 중동지역에 들어섰던 압바스 왕조를 비롯하여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왕국들이 고대 그리스의 책들을 수집하여 아랍어로 번역하여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학문적 전통을 이어낸 역할을 분명히 짚었어야 할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남쪽 니푸르 근처에서 기원전 3000년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점토판들이 발견 된 것이 최초의 도서관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주장은 지나친 욕심은 아니었을까 싶은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알레포 남쪽에 있는 고대도시 에블라에 있는 왕궁터에서 발굴된 2,000여개의 점토판은 목록을 작성하는 등 근대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왕궁도서관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앙카라 남쪽에 있는 히타이트제국(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3세기까지 존재)의 수도였던 하투사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방대한 양의 점토판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도서관의 설립자를 거론할 수 있는 최초의 도서관으로는 아시리아의 종교적 수도 아슈르에 있는 아슈르신전에서 발굴된 다수의 점토판은 기원전 1115년부터 기원전 1077년까지 아시리아를 다스린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가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아시리아왕인 아슈로바니팔(기원전 668년부터 627년까지 재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도서관의 설립자로 고대 근동에서 맨 처음 체계적으로 장서를 갖춘 도서관을 세웠고, 그 규모는 그후 3세기반 동안 최대 규모였다고 합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 무렵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 종이에 기록한 책이 등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 초반 프톨레마이오스왕조에서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첫 공공도서관을 세웠습니다. 그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대한 규모의 개인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장서를 모아들인 다양한 수법(?)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로마에 저항하여 이집트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방어 목적으로 불을 질렀을 때 불행하게도 이 도서관이 불탔다고 풀루타르코스는 기록하였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종말은 서기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팔미라왕국의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로마제국에는 다양한 규모의 도서관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을 통하여 약탈한 책자들을 바탕으로 개인도서관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를 죽기 직전에 그리스 책과 라틴 책을 소장한 공공도서관 건립계획을 확정하였는데, 그가 죽은 몇 년 뒤에 아시니우스 폴리오가 계획을 실현에 옮겼다고 합니다. 에페소스에 있는 켈수스도서관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된 자료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서기 642년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아랍군의 지휘관이 칼리프 오마르에게 도서관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을 때, “만일 이 그리스 책들이 신에 관한 것이라면 이것은 쓸모없고 보존될 필요가 없으며,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유해하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289쪽)”라고 하여 목욕탕의 연료로 태웠다는 기록도 믿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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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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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읽은 것은 인도, 특히 갠지스강변의 바라나시를 무대로 간절한 무엇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는 설명을 어디선가 읽은 까닭입니다. 삶의 정점을 돌아선 이소베, 미쓰코, 누마다, 그리고 기구치는 어쩌면 작가의 분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소베는 전형적인 일본 남자로, 아내가 죽은 뒤에서야 더 많은 관심을 주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미쓰코는 자유분방한 청춘기를 보내면서 신을 이해하려 애쓰는 오쓰라는 남자친구를 유혹하였다가 버리는 팜므파탈적 행동에 대한 앙금을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구치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얀마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패주하면서 전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전쟁 당시 맞서 싸웠던 미얀마와 인도사람들에 대한 속죄의 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화작가 누마다는 어쩌면 작가 자신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보입니다. 한때 치명적인 질병을 앓는 동안 힘이 되었던 구관조가 수술을 받고 보니 죽어버린 것이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있습니다.

 

미쓰코가 이소베의 아내가 암으로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간병인으로 도움을 준 인연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누마다, 기구치 그리고 신혼여행지로 인도를 고른 산조 내외나 이들을 안내하는 에나미씨는 모두 초면입니다. 이야기는 이소베의 아내가 죽음을 맞기까지의 과정을 먼저 소개한 뒤에 바로 인도여행에 가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회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행에 참여하는 미쓰코와 누마다, 기구치의 속사정을 차례로 설명합니다. 젊은 산조 내외는 아마도 사진작가를 꿈꾸는 산조가 특별한 사진을 얻으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등장인물은 태평양전쟁 이전 세대로부터 아주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적당한 간격의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삶과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일본인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 자신은 가톨릭신자이면서도 <깊은 강>에서 추구하는 신의 존재는 다신교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 미쓰코가 유혹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릴 것을 주문했던 오쓰가 결국은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치열하게 신의 존재를 뒤쫓아 가지만 궁극으로는 가톨릭 사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단일신을 믿지 못하고 신은 어떤 사물이나 생명체에도 깃들 수 있다는 범신론적인 믿음을 굳혀가는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신은 엄격하고 징벌적인 부성적 신이 아니라 배교도 할 수 있는 나약한 인간마저도 품어 안는 모성적 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모성적 신의 전형을 에나미의 안내로 바라나시에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에나미는 일행을 나크사르 바가바티 사원으로 안내해서 차문다라는 여신을 소개합니다. .컴컴한 지하의 묘지에 그려진 차문다 여신상의 모습을 이렇습니다. 그녀의 젖가슴은 이미 노파처럼 쭈글쭈글합니다. 하지만 그 쭈그러든 젖가슴에서 젖을 내어, 줄지어 있는 아이들한테 나눠 줍니다. 그녀의 오른발이 문둥병으로 짓물러있고, 배도 허기 때문에 움푹 꺼질대로 꺼졌고, 게다가 그걸 전갈이 물어뜯고 있습니다. 이런 병고와 아픔을 견디면서도 쭈그러든 젖가슴으로 인간에게 젖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차문다 여신상은 인도인들이 오랫동안 겪어야 했던 병고와 죽음과 굶주림을 담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유일하게 가진 것을 인간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이 숭고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오쓰는 프랑스의 신학교에서 이스라엘의 수도원을 거쳐 바라나시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도 여전히 답을 구하지 못한 채 갠지스강변에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산조의 돌출행동이 빚은 유족들의 분노를 몸으로 막아내다가 아마도 죽음을 맞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읽어가면서는 물론 읽고나서도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물론 죽음 이후에 대하여 분명한 무엇이 붙잡히지는 않았지만, 많은 생각이 오가는 그런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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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7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종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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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다는 제임스 조이스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고향 더블린에 대한 애증을 치열한 성찰과 탐구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킨 <더블린 사람들>은 이후 펼쳐질 방대한 조이스 문학 세계의 시작이자 그 정수를 담은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더블린 사람들>은 더블린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그린 열다섯 편의 단편으로 묶은 단편집입니다. 조이스가 그려낸 더블린 사람들은 짝사랑하는 이웃 소녀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밤거리로 나서는 소년, 가난에 찌든 생활에서 벗어나 먼 곳으로 떠나려는 여인, 런던에서 출세한 친구를 부러워하면서도 경멸하는 남자, 우아한 겉모습 뒤에 숨겨 온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부인, 하느님과 함께 돈을 섬기라고 설교하는 신부, 무위도식하는 건달들 등등 정말 다양한 모습들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더블린 사람들을 유년기, 청년기, 성년기, 그리고 공공 생활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 등장인물을 배치하는 등 나름대로는 면밀하게 계산아래 작품을 구성하였다고 합니다.


수백 년간 이어진 영국 식민 통치에서 갓 벗어난 20세기의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찌든 가난과 폐쇄적인 민족주의, 타락한 교회 등 어디 하나 긍정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암울한 현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그런 아일랜드의 모습을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그려냄으로서 변화를 위한 자기인식을 꾀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에 경도된 친영주의자들이 존재했고, 그런 친영주의자들에게 날선 비판을 퍼붓는 민족주의자들이 갈등을 빚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일랜드 역시 식민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는 못 했던가 봅니다. 그런가 하면 친영주의자에 대한 조작적 정의가 분명치 않아서인지 누군가가 친영주의자로 지목을 하면 그냥 몰리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모두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작품 「자매」에서는 신부님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부정적 생각은 당시 아일랜드 가톨릭의 부패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민족주의자로부터 친영주의자로 지목된 주인공이 아내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늠해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저자는 더블린 시의 풍경이나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 등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책을 읽는 내내 더블린에 머물면서 그곳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블린을 떠나려다가 결국 부두에서 주저앉는 처녀 에블린에 대한 이야기는 더블린의 어느 거리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행인이 뜸했다. 거리 끝에 있는 집에서 나온 남자가 귀가하느라 지나갔는데, 그 발걸음 소리가 콘크리트 포도를 따라서 타박타박 들리다가, 뒤이어 새로 지은 붉은 집들 앞 석탄재를 깐 길에서는 저벅저벅 소리가 들렸다.(44쪽)”


하숙하는 총각을 엮어 사위를 보려는 엄마와 손발을 맞춘 듯한 딸의 모습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폴리는 잠시 침대 가에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눈물을 훔치고 거울 있는 데로 갔다. 물 단지에 수건 끝을 담가 찬물로 눈가를 훔쳤다. 자신의 옆모습을 바라보고는 귀 위로 꽂힌 머리핀을 바로 잡았다. 그런 다음 침대로 돌아가 발치에 앉았다. 오래도록 베게를 쳐다보고 있자니 그 모습에 은밀하고 달콤한 기억이 떠올랐다. 목덜미를 차가운 철제 침대 난간에 기댄 체 공상에 빠져들었다.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라곤 이미 찾아 볼 수 없었다.(89쪽)”


옮긴이에 의하면 <더블린 사람들>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을 불완전하게 마무리하거나 심지어는 감추기도 한다니 쉽게 읽힌다고 해서 휙 지나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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