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쁨 - 느리게 걸을수록 세상은 커진다
실뱅 테송 지음, 문경자 옮김 / 어크로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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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날 때 여행에 관한 에세이를 빠트리지 않는 편입니다. 비행기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여행에 대한 누군가의 생각을 읽다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문단의 데이비드 소로라고 불리는 에세이스트 실벵 테송의 <여행의 기쁨> 올 여름 더위를 피해 떠난 독일 여행에서 읽었던 책입니다. 어쩌면 ‘느리게 걸을수록 세상은 커진다’라는 문구에 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리학을 전공한 그는 비행기는커녕, 기차 심지어는 자동차도 타지 않는 여행을 즐기는 괴짜라고 합니다. 왜? 자신을 위해, 때로는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기도 하며 말없이 여행하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이 책은 문명이 주는 편리함을 모두 내팽개치고 아주 옛날 방식의 여행을 통하여 얻은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시간을 죽이듯 천천히 여유 있게 살았던 유목민의 삶을 뒤쫓다보면 시간에 쫓기듯 살고 있는 현대인의 틀에 박힌 듯한 삶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자 역시 틀에 박힌 듯 원칙만을 고수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언젠가는 핀란드에서 폭주족 무리에 섞여 오토바이를 몰기도 했답니다.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에 우주적 황홀감에 빠져들었다고 하니, 이 또한 생각이 자유롭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걷는 여행이 주는 즐거움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한 구절 옮겨봅니다. ‘걷고 있노라면, 뇌라는 두개골 상자, 여행자에게 가장 소중한 짐인 이 기록 보관 상자 속에 차곡차곡 쌓인 단층들이 기억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그 곳을 헤집어 추억을 추려낸다. 갑자기 번개라도 번쩍이면 이제는 잊고 있는 즐거웠던 순간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32쪽)’

그런데 이런 여행을 하기에 제가 부족한 점이 눈에 띄네요. 도보여행 길에서 텅 빈 공간과 싸우려면 시가 있어야 한답니다. 정신을 붙잡아두고 영혼을 확장시킨다고 하네요. 뿐만 아니라 음악이 되는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군에 박자를 붙여줄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조화도 만들어낸다는군요. 주변 환경에 맞춤한 시를 고르면 된답니다. 만약에 시를 지을 수 있다면 그 여행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편 제가 여행을 하면서 조금 해보고 있는 글쓰기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반더러는 걷는 동안 약탈해온 이 모든 행복을 저녁마다 자신의 공책에 모두 집결시킨다.’ 걸으면서 오감을 통하여 느끼는 모든 것들을 ‘약탈’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그렇게 얻은 소중한 느낌을 매일 저녁 글로 정리를 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긴 여정을 걸어가는 자에게 글쓰기는 가장 강력한 평정의 계기이고, 낮의 역량을 연장시켜주는 늘임표다(71쪽)’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걷는 여행이 아니라서 여정 중에 시간을 내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녁 혹은 이른 아침에 맑은 정신을 집중해서 정리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예습을 너무 많이 하는 것도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합니다. 여행지에 가면 사전에 예습한 내용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미지의 곳에 대한 호기심을 앞지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준비한 것을 그저 확인하는 것에 끝난다면 여행의 의미가 축소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아야 할 것들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적당히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가 즐기는 독특한 모험 가운데 하나는 대성당을 오르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대성당을 기어오르는 것은 ‘아직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109쪽)”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곳도 한밤중에 검은 옷을 입고서 말입니다. “바위 비늘들은 지각변동의 밀어 올리는 힘과 땅이 하늘 위로 솟구치지 못하게 하려는 하늘의 의지 사이의 전투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대성당의 안테나들은 인간의 신앙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아니 인간이 지닌 허영심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당의 첨탑을 등정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고딕성당은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일종의 가속장치’이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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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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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런드 러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란 점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가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라는 점은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러셀에 박병철교수의 <버트런드 러셀>에서 그의 삶의 궤적과 철학적 사유를 정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하여는 <철학은 무엇인가>를 통하여 엿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비평서인 <행복의 정복>의 경우는 꽤 긴 호흡의 독후감을 적어본 적도 있습니다. <인기 없는 에세이>는 세 번 째로 러셀을 만나게 되는 책읽기인 셈입니다.

이 책에서는 조지아대락교 사학과의 커크 윌리스교수가 1950년 9월 24일자 <선데이 타임스>와 1950년 10월 6일자 <스펙테이터>에 실은 서평을 서문으로 담았습니다. 윌리스교수는 먼저 ‘다들 알다시피 명성이란 변덕스러운 것이다’라고 서두를 떼면서 러셀의 굴곡진 삶을 짚었습니다. 젊은 시절 전직총리의 손자로 태어났다는 후광보다도 스스로의 명성을 거머쥐었던 그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계기로 정의가 실종된 전쟁이라는 확신 아래 반전운동에 뛰어들면서 대중의 인기도 식었을 뿐더러 반역자로 몰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층도 생겨나면서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시 명성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정부는 그의 귀국을 막았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그가 보여준 행적이 미심쩍었던 모양입니다. 1944년 트리니티 칼리지는 그에게 특별연구원으로 초빙하였고, 그가 미국에서 집필한 <서양철학사>가 인기를 끌면서 대중적인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기 없는 에세이>는 러셀이 다시 잘 나갈 무렵에 미발표 원고를 찾던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이미 써둔 8편의 글에 새로 4편의 글을 써 책으로 묶었다고 합니다. 배경이 그렇다보니 15년의 세월에 주제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는데, 어쩌면 그런 배경 때문에 <인기 없는 에세이>라는 제목이 썩 어울릴 수도 있겠습니다. 초고를 쓸 무렵에는 인기를 끌 요인이 없었지만 세월이 좋아지다 보니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윌리스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이 두서없는 상념이나 교묘하게 위장된 정치적 계산을 고려한 글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러셀경이 평생을 두고 지켜왔던 새 세상에서 지켜져야 할 진보적 가치를 새삼 일깨우는 그런 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관념들’, ‘인류에게 해를 끼친 관념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그는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다음 3가지 가운데 하나는 실현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1. 모든 인간, 어쩌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종말을 맞는다, 2. 인구가 파국적으로 감소하여 야만 상태로 돌아간다, 3. 주요 전쟁무기를 모두 독점한 단일 정부가 전세계를 통일한다.” 다행스럽게도 3가지 예언 모두 빗나갔습니다만, 두 차례의 끔찍한 전쟁을 지켜본 러셀경으로서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계산된 위험: 한국전쟁과 정치를 말하다>를 보면 세계는 극동의 작은 반도에서 일어난 국지전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스스로 쓴 부고’는 1937년에 쓴 것으로 사망하기 33년 전, 그러니까 65살이 되던 해 쓴 글입니다. 98세로 당시만 해도 장수한 러셀이었지만, 자신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싶었던 시점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 러셀경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하여 균형잡힌 판단이 부족했다고 자성합니다. 그와 함께 스스로가 오랜 세월을 이어온 고리였다고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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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길 위의 철학 - 플라톤에서 니체까지 사유의 길을 걷다
마리아 베테티니 & 스테파노 포지 엮음, 천지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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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물 안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가 알 수 있는 세상은 우물 안이 전부일 수밖에 없으므로, 우물 밖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사람을 빗대는 말입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세상사는 이치를 깨치는 학문이고 보면 철학자는 세상을 두루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행, 길 위의 철학>은 멀리는 플라톤으로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달리하는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세우는 과정에서 해냈던 여행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요즘에는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세계를 이웃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만들 정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여행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속된 말이 그 옛날에는 더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책에서 처음 다루는 철학자의 여행은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솔론, 플라톤, 아폴로니우스 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래된 세상의 지혜를 찾아 나선 여행인 경우도 있습니다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쫓겨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좋은 기회였음은 분명합니다. 이븐 시나 혹은 알 카잘리의 철학을 다룬 ‘페르시아에서 지식의 근원을 찾다’는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슬람에서 여행이 은유하는 바는 신비로운 생각과 감정이 함께 스며있는 공통의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다(77쪽)”

이슬람에서 말하는 신비한 여행의 전형은 무함마드의 미라지(mi'raj)를 꼽는다고 합니다. 메카의 카바사원에서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에 도착해서 승천하는 경험을 하룻 밤에 해치웠다니 말입니다. 무함마드의 미라지는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 파리드 알딘 아타르의 <새들의 언어>를 통하여 영혼의 정화와 성장과정으로 그려졌다고 합니다. 즉, “한 마리의 새가 창조주를 찾아 하늘을 날아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초월의 경지로 들어서면서 신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깨달음의 이미지가 더 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니체의 초인 역시 사색을 겸한 그의 여행에서 탄생한 것이고 본다면 스스로 안으로 천착할 수 있는 그런 장소로의 여행을 통하여 얻어낸 성과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성맞춤한 장소를 만나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았던가 봅니다.

루소 역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8권>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소란스러운 세상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외로움은 나를 괴롭혔다. 나는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야했고, 또 어느 곳에서도 편안하지 못했다(206쪽)” 이런 루소의 방랑벽을 ‘여행중독증후군’으로 진단한 이는 보르도대학의 에마뉘엘 레지교수였습니다. 루소와 같은 방랑벽에는 체질적 혹은 유전적 소인이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루소는 여행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옮기지 앓았다는데, 진정한 철학적 여행은 글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루소는 자연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가고 전적으로 자신을 즐기는 일종의 방랑여행과 달리 일 때문에 하는 사회적 여행은 사람들이 사는 사회적 공간을 지나게 되고 경제적 목적을 따르기 마련이라 했습니다(218쪽).

그밖에도 그자비에 드메스트로가 쓴 <내 방 여행하기>도 관심을 끄는 대목입니다. 이동하지 않는 방은 세상의 모든 부와 좋은 것들이 들어 있는 기쁨의 장소로, 철학적 자극을 주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니체에 관한 글의 한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의 강의 시원에 와있다, 외관상으로는 단순하다, 시간과 공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이 끝나가는 것이다(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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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커뮤니케이션의 쟁점과 과제
송해룡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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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최근에 우리네 주변에 숨어 있는 위해물질의 위험도에 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위험커뮤니케이션의 쟁점과 과제>를 읽게 된 것도 책쓰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해마다 크고 작은 위해물질 사건이 터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건 사고가 너무 자조 터지다 보니 정부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에 의문이 생기고, 그렇다보니 정부에서 발표하는 바를 믿지 못하겠다는 심리가 굳어가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위험요소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이를 받아들이는 국민들 사이의 격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일단 저자는 우리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규정합니다. 아마 어느 나라나 같은 처지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현대는 위험요소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요소의 관리가 체계화된 선진국에서는 우리 국민들보다는 덜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짚어보았습니다.

위해분석의 요소로는 위해요소의 인식, 위해성 평가, 위해성 관리, 그리고 위해성 소통 등으로 구성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건사고를 통하여 위해요소를 인식하는 사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어서 위해성 평가를 하고, 관리대책을 내놓지만, 대체적으로 위해요인에 대한 소통과정이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저자는 위험소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5가지의 과제가 성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위해요소에 대한 객관적인 학술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설명해야 하며, 둘째는 관리대책에 관하여 상호합의된 선에서 관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셋째는 위해평가의 방법론에 대한 포괄적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네 번째는 관련 이해집단의 관점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으로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한다, 등입니다. 또한 소통의 형태로는, 문서형태의 기록, 정보, 대화, 결정과정의 직접 참여 등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위해소통을 위하여, ‘합리적인 숙고가 필요하며, 상황에 적합한 그리고 사회의 복수적인 가치를 위험평가에 포함시켜야만 한다’라는 것입니다.

모두 8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위험요소에 관한 사회, 문화, 생태학적 고찰을 선행한 다음, 위험과 위기소통과 관련한 연구의 쟁점과 방향, 효과적인 위험소통의 전략과 공중참여를 통한 정책결정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짚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전문가집단의 일반적인 행동양식이 위험소통의 장애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물론, 위험소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언론 역시 위험요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보다는 쟁점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고착되어 있는 점 역시 위험소통의 장애요소가 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앞부분에서 인용하고 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사건을 위해사건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와 그로 인한 처벌, 다모클레스의 검이 위험요소를 안고 있지만, 발생 가능성이 그리 커 보이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키클로페스, 판도라, 카산드라, 메두사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통하여 몇 가지 위험의 유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위험관리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괄목할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학문영역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상당히 위험관리와 소통문제를 학술적으로 풀어내고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우리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이며, 신화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통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소문을 듣고 불안에 떠는 것보다는 도대체 왜,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안다면 불안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위험요소를 관리하는 분들도 위험소통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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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16
존 버거 지음, 박범수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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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존 버거의 책은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어 있다는데, 저는 <본다는 것의 의미>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 이어 두 번째 읽는 책입니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리스본과 크라쿠프의 모습이 너무 생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1966년에서 1979년 사이에 썼던 본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글을 모은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속에 존재하는 새로운 의미의 층위들을 드러내도록 만드는 관찰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을 탐구한다’라고 이 책의 성격을 정리하였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보게 되는데, 저자는 특히 동물원의 동물들을 어떤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지를 짚었습니다. 두 번째 글 묶음은 사진술에 관한 내용의 글로 모두 4꼭지의 글을 담았고, 체험된 순간들은 여행 등을 통하여 만난 장소 등에 관한 18꼭지의 글을 수록했습니다.

먼저 동물원의 동물을 대상으로 한 글에서 저자는 동물과 인간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거론합니다. 사람이 동물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동물도 사람을 지켜봅니다. 물론 동물이 사람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서로 뜻을 통할 수 없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동물원에 가보면 우리 안의 동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의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저자는 동물원에 수용된 동물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우리와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지만, 사실은 강제로 주류에서 밀려난 존재로 이해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빈민가, 감옥, 정신병원, 강제수용소 등에 수용된 사람들 역시 주류에서 밀려난 존재로 이들과 비슷한 처지라는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두 번째의 글 묶음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봄’을 주제로 합니다. 독일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들, 특히 베스트발트의 시골 농부가 연주회에 가기 위하여 양복을 쫘악 빼입은 사진, 혹은 폴 스트랜드가 찍은 루마니아 농촌의 부부의 모습 등의 사진에 담긴 의미를 살펴봅니다. 이는 사진작가의 직접적 관찰에 의하여 얻는 사진을 타인이 봄으로서 얻는 느낌이 작가의 의도와 얼마나 일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기에 미 공군의 폭격을 받은 하노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추적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이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외면함이 맞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고통이 담긴 사진을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도록 신문에 게재하는 것은 결국 신문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할 것이며, 생각 없는 독자는 신문사의 꼬임에 넘어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제, ‘체험된 순간들’은 미술작품에 관한 글입니다. 대상이 되는 작품을 그린 화가도 밀레, 프랜시스 베이컨, 쿠르베, 마그리트, 로댕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생소한 화가와 작품들이라서 실감이 덜했던 것 같습니다. 미술작품 역시 우리가 ‘본다는 것’의 대상이 됨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미술작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가 생긴다고 합니다. 특히 화가가 유명을 달리하는 시점을 경계로 하여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세케르 아흐메드의 <숲속의 나무꾼>이라는 작품에 표현된 숲속 공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철학의 책무는 베그[weg: path 오솔길], 즉 숲을 통과하는 나무꾼의 소로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 소로는 리히퉁[Lichtung: clearing 숲속의 공터], 즉 바로 공간이야말로 빛과 통찰력에 개방되어 있고, 존재에 대한 가장 놀라운 것이며, 바로 존재자의 조건인 숲속의 공터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127쪽)” 즉, “이 공터는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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