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미술관 -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열네 번의 예술수업
조경진 지음 / 사월의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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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하게 말씀드려 저는 정서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은 탓인지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분야를 이해하는 능력이 많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라도 하면 나아지려나 싶어서 나름대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공부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느낌의 미술관>도 부족한 점을 채워보려 골라든 책입니다만, 책읽기를 마치고는 잘못했다 싶기도 합니다.

저자는 ‘작품을 대하고 당신의 느낌이랄 수 있는 세 생기고 당신만의 정연한 느낌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게 답입니다.(17쪽)’라고 적었습니다. 즉, 미술작품을 보고나서 나름대로의 느낌이 생긴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저자는 ‘비전문 독자와 현대 미술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으려는 목적에서 쓰였다.(9쪽)’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징검다리를 놓는 수준이 아니라 핵폭탄을 맞아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다리를 건설하려는 수준으로 미술작품을 느끼고, 그 느낌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키우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예술학을 공부하고 철학을 미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자가 공부한 예술론을 철학적 관점으로 승화시켜 미술작품을 차원 높게 이해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열네 번의 예술수업’이라는 부제를 보면 이 책의 성격을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그 열네 번의 강의 가운데 초반은 아무래도 긴장을 풀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지, ‘느낌’을 강조합니다. 쉽죠. 느낌이란 보는 사람마다의 다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느낌이라는 것의 조작적 정의가 점점 수위를 높여가면서 기호, 실재, 재현 등, 철학적 사유로 연결해 나갑니다. 그래서 책읽기가 중반에 접어들면 느낌이 점점 오리무중이 되면서 호흡이 가팔라지는 느낌입니다. 책읽기도 강약이 교차되면 수월하기 마련인데, 화두가 다시 느낌으로 돌아가는 듯하다가 이내 자의식, 표상 등 긴장의 강도가 다시 세기는 느낌입니다.

열네 번의 강의를 이어가면서 그녀와 그남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구조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현대미술에 대하여 초짜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어느 사이에 그남과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 거의 전문가에 다름이 아닌 듯 합니다. 즉 그녀와 그남은 저자 자신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녀와 그남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을 취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몇 가지 책을 읽으면서 얻어 들인 앎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미학은 개개의 존재가 가지고 있거나 경험하는 느낌에 관한 학문(60쪽)’이라는 작가의 정의가 있습니다. 미학에 대한 다른 이의 견해도 인용합니다. 미국의 미학자 아서 단토의 경우 ‘내가 미학(Aesthetics)이라고 할 때, 그건 다음을 의미한다. 미학은 사물이 스스로 나타나는 방식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사물이 다른 방식이 아니라 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그 이유에 관한 것이다.(61쪽)’라고 했다는데, 생각을 더 해봐야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저자의 주장 역시 동의가 쉽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과학이나 수학, 철학 등 전문적인 방식의 기술이 아닌 이상 미술작품에 대한 기술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림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분별이 필요할 뿐이죠.(310쪽)” 과학이나 수학은 일정한 공식을 이해하면 쉽게 풀어 설명이 가능합니다만, 미술은 역시 나름의 느낌을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앞서 말한 ‘기억은 가장 위대한 마법 중의 하나’라는 대사 기억하지죠.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기억 작용 자체는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331-332쪽)” 기억의 과학은 그 근본 원리에 접근해가고 있습니다. 즉 마법이 아니라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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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맛 - 로제 그르니에가 펼쳐 보이는 문학의 세계
로제 그르니에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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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어느덧 일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보고 싶지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책의 맛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이자, 작가이자,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위원인 로제 그리니에의 <책의 맛>이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1919년 프랑스 캉에서 태어났으니 금년에는 100수가 되는데, <책의 맛>이 출간된 것은 2011년이나 90세를 넘긴 나이에 쓴 것이었습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나이에도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숱한 책들이나 그밖에 자료들의 핵심 주제는 물론 내용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고를 쓰는 일이 대단한 체력을 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는 청년작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지력과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여쭙고 싶어졌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홉 가지 주제, 다시 말해서 글쓰기와 책에 대하여 아홉 가지의 시각에서 이야기합니다. 옮긴이가 요약한 내용을 옮겨보겠습니다. “미디어를 점령한 사회뉴스와 문학의 관계를 짚어보고, 여러 문학작품이 그리는 기다림에 주목하며 글쓰기가 시간과 맺는 관계도 살핀다. 그리고 자기모순에 빠질 권리와 떠날(죽을) 권리에 대해,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성찰하고, 기억과 소설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문학의 해묵은 주제인 사랑도 빠뜨리지 않고, 작가들에게 미완성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피고, 글을 쓰는 이유와 글을 쓰려는 욕구에 대해서도 성찰한다.(226쪽)”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위원을 오래 지낸 만큼 세계적인 문호들과의 개인적인 교류뿐 아니라 그들에 관한 뒷이야기까지도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갈리마르에서 출간한 책들은 대부분 읽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책들의 대부분은 갈리마르의 것이기도 합니다. 옮긴이는 ‘이 노작가의 해박함은 위압적이지 않다. 그의 문체는 과시적이지 않고 소박하며 섬세하고 깊이가 있다’라고 적었습니다만, 책을 읽는 동안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관심을 두고 있던, 기억과 망각,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에 대한 생각을 보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진짜 주제는 “세상에 대한 철학적 비전을, 감정적 시간의 경험을, 그리고 자신의 천직을 찾는 인간의 모험을 표현한 것이다.(129쪽)”라고 적은 부분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었을 때는 ‘시간의 층위 속에 묻혀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의 소환’에 무게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 자신이 작가로 발전해가는 과정, 즉 할머니의 지원을 바탕으로 책읽기가 몸에 배었던 것이나 부모의 후광으로 유명작가와의 만남 등이 이어졌던 것이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만 세상에 대한 철학적 비전 부분은 책읽기의 역량이 부족했던지 윤곽을 그려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달에 종영한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과도 연관이 있습니다만, 그라나다 지방에 전해오는 마법과 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에 관한 이야기를 미완성 작품이라는 주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마녀가 쳐놓은 덫에 걸린 주인공은 결국 묘지의 교수대 아래서 마법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이 책의 서문을 쓴 로제 카이유아는 그 상황에 대하여 ‘마치 저주의 거울이 끝없이 비추듯이’라고 적었던 것입니다.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의 끝 장면을 두고 작가는 판타지 드라마라는 점을 고려했다는 설명이지만, 게임의 특성을 고려해서라도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별해서 마무리를 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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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넘어서 - 사회와 타자
버나드 맥그레인 지음, 안경주 옮김 / 이학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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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경하는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면서 관심도 다양해지는 것 같습니다. 인류학에 대한 관심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만, 인류학을 쉽게 설명하는 대중서가 많지 않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인류학을 넘어서>는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구에서 논의되어온 ‘이질문화’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들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인류학의 고고학’을 밝히려는 시도이다”하고 합니다.

인류학이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는 하지만 연구대상과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여 19세기 이후 들어서 학문으로 체계화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인류학이라는 학문 전체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의 기본 개념에 해당하는 ‘타자’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찾아가는 것이 과연 적절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형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이 인류학에 속하는 세부학문으로 나뉘고 있다고 한다면, 저자가 이 책에서 논하고자 하는 ‘타자’의 개념은 문화인류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타자’에 대한 인식의 변천과정을 뒤쫓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인류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사회가 제3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닿게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주체로서의 유럽인들이 비유럽인들을 주체가 아닌 타자로 인식하여 그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인류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합니다. 비유럽문화, 특히 오지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유럽 사람들의 원시모형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인들이 유럽 밖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계몽주의가 시작되던 시기 그리고 19세기 근대의 시기를 거쳐 오늘날의 인류학의 관점을 세우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우주론, 심리학, 진화론 등 다양한 이론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오히려 유일신으로서의 기독교 중심의 사고에 매몰되어 있던 유럽사회가 비유럽 사회의 다양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에서 문제가 출발한다고 보면 간단할 것 같습니다.

개명되었다는 오늘날에도 유럽 사람들은, 혹은 유럽 사람에 업혀가는 비유럽사람들까지 아시아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슬람과 함께 유대교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뿌리는 같으나 예수와 무함마드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이들 종교의 차이가 아닐까 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성경의 근본을 뒤흔든 사건이었을 터인데, 이를 어떻게 봉합하여 수습했는지 궁금합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그 세력이 많이 위축되어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그동안 믿음으로 믿어왔던 것들이 과학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사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충돌이 일어나고 있음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책의 내용에 관한 생각 가운데, ‘르네상스 시대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지는 미개사회에 대한 생각들로 독자를 이끈다.’라는 관점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유럽사람들이 비유럽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은 르네상스 시대의 악마적이고 열등한 것이 아니고, 계몽주의 시대의 무지와 미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진화론적 발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화적 차이, 혹은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만, 이런 인식은 그저 인류학을 전공하는 집단 내에서의 움직임으로 찻잔 속의 작은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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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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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쓰는 페터 비에리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비롯하여 <말의 격;> 등으로 이미 친숙한 느낌이었는지, 그의 신작이라는 <교양 수업>을 선뜻 골라들었습니다. 사실 ‘교양’이라는 단어는 아주 익숙한 편입니다. 아마도 대학에서 ‘교양과목’이라는 학과목들을 이수하면서부터 본격 교양수업을 듣게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제 경우는 의과대학의 예과과정에서 공부를 했는데, 생각해보면, 국사, 의학사, 문화사, 철학, 종교철학,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 지금 생각해보면 주중에 한 시간을 빼고는 하루 8시간에 토요일 4시간까지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수업시간표가 숨찰 정도로 강의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페터 비에리는 이 책에서 철학적 사유를 통한 교양의 정의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없지는 않습니다. 어떻든 서두에서 “교양이란 사람이 자신에게 행하는 그리고 자신을 위해 행하는 어떤 것을 말한다(9쪽)”라고 교양을 정의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교양을 쌓는 일은 남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교양 쌓기는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 ‘어째서 그런지 이해하는 것’을 양대 축으로 하여 앎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이라고 정리합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알아야 할 것들의 비율적 관계를 이해하고, 정확함을 의식해야 한답니다.

교양을 정의하기 위하여 저자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 ‘깨인 사상’, ‘역사인식’, ‘표현’, ‘자아인식’, ‘주체적 결정’, ‘도덕적 감수성’, ‘시적 경험’ 등의 관점에서 교양의 의미를 살펴보고, 교양을 쌓는 길은 열정이 필요하다고 마무리를 합니다.

저자는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교양과 연결이 되었을 때 파괴적이고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즉 전체주의적 세계관이 교양이 가진 넓은 시선을 위축시키고 심지어는 질식시킬 수 있다는 지적인 셈입니다. 종교는 형이상학적 진실 여부를 가리기 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삶에 부여하고자 하는 삶의 한 형태로서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입니다.

이 책의 후반부는 이해의 다양한 모습을 논합니다. 그러니까 학문 언어와 문학 언어는 그 쓰임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앞서 논한 교양 쌓기도 결국은 표현을 통하여 표출해야만 하는 것인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앎을 표현하는 언어는 ‘우리를 이해 능력이 있는 존재로 만든다’라고 규정합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여, 적절하게 표현해야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소설을 쓰는 이유도 자신이 쌓아올린 앎을 적절한 표현방식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문학은 앎을 정확하게 서술하기 위한 방편인 셈입니다. 적확하지만 평범한 말로도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플라톤적 대화의 방법을 통하여 이 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문법적으로 잘 구성된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섣불리 말하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문장도 실제로는 생각의 내용을 조금도 담지 않은 그저 헛소리인 경우가 숱하게 많다.(66쪽)”

저자는 자신이 쓰는 말과 글에서 철학적으로는 사고의 일치성이, 문학적으로는 사건에 투명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적절한 은유와 적확한 단어와 문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철학적 깨어있음과 언어적 깨어있음이 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데 있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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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가로질러 - 밤, 잠, 꿈, 욕망, 어둠에 대하여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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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십니까? 필자만 해도 ‘사방이 캄캄한 어둠에 싸여있는 세상’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만,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그러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밤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밤’하면 또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과학사를 가르치고 있는 에른스트 페트 피셔교수는 <밤을 가로질러>에서 ‘밤, 잠, 꿈, 욕망, 어둠에 대하여’하는 부제를 붙인 것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날이 밝을 때까지 밤새 잠을 자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들과 관련한 내용을 충분히 다를 것이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삶이 밤을 가로지르면서 어떤 속성을 획득했는지 살펴볼 것이다.(14쪽)”라고 적었습니다.

과학사를 전공하는 만큼 밤과 관련된 작은 주제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7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첫 번째 장은 우리의 선조들은 밤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부터 시작하여 밤이 존재하는 이유를 지구과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밤’하면 떠오르는 검은색이라는 이미지의 정체와 인간이 색조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도 설명합니다. 결국의 우주의 탄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러한 서사구조는 이어지는 두 번째 장의 인류의 기원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쩌면 밤이 존재했기에 인류는 단종되지 않고 이어져올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어서는 촛불과 마녀사냥 등 밤의 어두움이 주는 공포와 관련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어둠과 빛, 밤과 낮이라는 대비를 통하여 ‘올바로 보기’를 이끌어내고 있는데, 그 대목에서 ‘반대편의 말도 들어라’라는 참을 깨닫는 중요한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독일 자우얼란트의 성직자 마하엘 슈타페르트의 논문에 실려있는 안경의 알은 태양과 달이 그려져 있는데, 두 개아 안경알을 연결하는 부위에 Falsum an Vero et Verum a Falso(거짓을 참으로부터, 또한 참을 거짓으로부터)‘라는 라틴어 경구가 적혀있다고 합니다.

4장은 수면에 관한 내용입니다. 잠을 문학적으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선조들은 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짚은 다음 잠이 드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꿈으로 넘어갑니다. 사실 잠은 인간이 깨어있는 동안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수집한 앎을 기억에 저장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더하여 에너지를 절약하고 잠을 자는 동안 기력을 회복하며 성장과 재생이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5장의 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연히 꿈의 해석 등 꿈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적에는 시시껄렁한 개꿈도 기억하던 것과는 달리,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도 무슨 꿈을 꾸었는지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어났을 때는 잠시 생각이 나더라도 금세 잊어버리게 됩니다. 아마도 기억능력이 퇴보하면서 최근에 보고들은 것이 기억에 잘 남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에 나온 것들은 기억에 남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6장 자연과학의 밤 측면은 밤에 관한 일종의 종합선물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케쿨레가 벤젠고리 모형에 관한 영감을 얻은 것이 꿈이었다거나, 진화론을 착안한 다윈과 월레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과학의 발견에 인간의 낮측면과 밤측면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금세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7장 인간 속의 악은 더욱 그러합니다. 큰 주제의 흐름에서 이탈한 듯한 느낌이 남습니다.

저자는 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창조적인 밤을 믿는다. 왜냐하면 사람들 자신도 육체적으로 밤에서 기원하여 사랑을 통해 밤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삶은 밤을 통해 가치를 얻는다.(335쪽)”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낮, 즉 빛을 뒤쫓았지만, 여전히 밤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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