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책 -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물건의 역사
키스 휴스턴 지음, 이은진 옮김 / 김영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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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물건의 역사’라는 부제처럼 책이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물건인지는 한번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물건이던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금서의 역사를 비롯하여 책에 관한 다양한 역사를 살펴본 책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들에 관한 역사를 짚었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만드는 재료, 책의 본문과 삽화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책의 형태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하는 네 부문을 다루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책을 만드는 재료, 그러니까 점토, 파피루스, 양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이를 사용해서 책을 만들던 역사적 흐름을 짚은 <종이의 역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종이를 처음 만든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를 거쳐 전해진 일본의 종이제조 현장까지 챙겼으면서도 종이의 발전에 우리나라가 기여한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어 분노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책의 책>을 읽으면서도 저자가 서양중심의 시각으로 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역사를 다루었구나 싶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어 내내 찜찜한 느낌이 남았습니다. 책을 만드는 재료 가운데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다룬 분량에 비하면 종이에 대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중국에서 종이를 처음 만든 과정에 관해서도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양의 종이와 서양의 종이의 쓰임새가 달랐다는 점에 대하여도 별 언급이 없었습니다. 중국의 제지기술이 서양에 전해진 다음에 지금의 종이로 발전해온 과정에 무게를 두었던 것입니다.

책의 본문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필경에 할애한 부분에 비하면 동양에서 발전해온 목판인쇄의 발전과정에 대한 언급은 초라할 뿐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세계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는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구텐베르크의 업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책을 만드는 방법도 활자를 이용한 활판인쇄도 있고, 오프셋인쇄, 스크린인쇄, 잉크젯인쇄 등을 거쳐 레이저인쇄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지만, 최근의 인쇄술의 발전과정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럽역사에 관한 내용도 사실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이 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관하여도 4세기 중반 고트족이 발칸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부터 이야기합니다.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 롬바르드족, 부르군트족 등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것은 아시아계인 훈족이 서진함에 따라 밀려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의 변경을 따라 이동하다가 결국에는 로마까지 쳐들어가고 종국에는 멸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인쇄물을 제작연대가 분명치 않다고 하면서도 일본의 쇼토쿠 천황이 불교경전을 100만부나 인쇄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옮기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서적들을 수입해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770년에 이토록 어마무시한 출판사업을 해냈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책의 말미에 붙인 더 읽을거리를 비롯하여 미주로 처리한 근거자료, 도판자료 등의 목록을 정리한 쪽수가 100쪽을 넘어가는 것을 보면 저자가 방대한 자료를 검토한 것은 분명하나, 자료로부터 핵심내용을 추려서 정리하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에 무엇을 읽었는지 남는 것이 없을 지경입니다. 서두에 ‘이것은 책에 관한 책이다’라는 구절을 만나면서 기대 속에서 책읽기를 시작했으나 결과는 실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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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AFRICA - 낯선 곳에서의 자유, 힐링여행 아프리카
함길수 글.사진 / 상상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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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맹수, 그것도 사자가 사람과 교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을 합니다만, 어렸을 적부터 사람 손에서 키우는 경우에는 가능한 모양입니다. <소울 아프리카>는 케냐에 있는 킬리만자로 산자락에 있는 암보셀리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사자와 교감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주인공은 전설적인 야생동물 밀렵꾼이었다가 보호구역의 관리책임자로 일하는 불리트의 딸 파트리샤입니다. 그녀는 사자는 물론 야생동물들과도 교감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시빌은 야생동물과 교감하면서 보호구역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문명사회에서 지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화자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다가 마지막 여행지로 암보셀리 보호구역을 찾았던 것입니다. 물론 시빌의 친구로부터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도 있습니다. 파트리샤의 도움으로 야생동물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매력이 한 몫을 해서 상당한 기간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파트리샤가 야생의 동물과 가까워지려면, ‘바람과 태양, 풀의 맛, 더 나아가서는 물의 원천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들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하며, 심지어는 저들과 함께 숨을 쉬고 달리고 장난하고 입을 다물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사파리 차 옆을 유유히 지나는 사자를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파리 차에서 내리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파트리샤와 야생동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간단하게 끝이 났을 것입니다만, 마사이족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히게 됩니다. 작가는 마사이 전사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자들 역시 창을 멘 어깨 한 쪽에 천 조각 하나를 달랑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차라리 벌거벗은 차림새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꼿꼿한 허리에 목은 반듯하게 치켜들었고 이마는 도도했다.(154쪽)” 간결하지만 어디 하나 더할게 없는 안성 맞춤한 설명입니다.

마사이 전사는 사자를 사냥해서 자신의 용감함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사이 전사 오리우냐는 파트리샤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파트리샤의 친구 사자를 죽임으로서 자신의 용맹함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파트리샤와 사자가 같이 있는 순간 찾아온 오리우냐는 사자에게 맞서고, 사자 역시 마사이의 속셈을 알게 됩니다. 파트리샤는 오리우냐와 사자 모두를 다독여 대결을 말리려합니다. 사자는 파트리샤의 말에 따르지만 마사이는 파트리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리우냐가 던진 창은 사자의 몸에 명중하자 파트리샤도 사자를 말릴 수가 없습니다. 창을 맞은 사자도 힘을 끌어모야 오리우냐를 덮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습니다. 어쩌면 파트리샤는 오리우냐와 사자의 대결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애지중지하는 사자가 부상을 당하자 오리우냐를 죽이도록 명령을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호구역을 관리하는 불리트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야생동물의 공격을 받을 때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파트리샤는 아버지의 입장보다는 사자 편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자를 쏘아 죽여야 하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녀는 결국 암보셀리를 떠나 나이로비에 있는 기숙학교로 가기로 합니다. 친구가 없는 암보셀리는 의미가 없었고, 친구를 죽인 아버지와 같은 공간에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한 것입니다.

이 책은 1958년에 발표되었는데 지금도 프랑스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환경전문가들은 이 책이야 말로 인류가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기록이라고 평가한답니다. 이야기는 2003년 프랑스 TV 채널 2에서 영화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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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3국의 커피, 누들, 비어 - 프렌치 커넥션을 따라 떠나는
이영지 지음, 유병서 사진 / 이담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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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참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를 같이 다녀왔더라도 기억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방문하는 장소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해당 지역은 물론 개별적인 대상과 관련된 역사는 물론 문학작품까지도 살펴보려 노력합니다. 그러다보니 구경을 다녀온 장소에 관하여 공부한 것들을 정리해놓은 것이 재미가 없는 편이라고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익했다는 분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여행에 관한 책들은 여전히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책들을 보면 차별이 되는 독특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여행에 관한 글이 정보중심이다 보니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다 나온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뒤지는 품을 파는 것이 그리 쉬운 노릇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3국의 커피, 누들, 비어>를 읽고서는 느낀 점이 많습니다. 먼저 ‘이런 여행도 하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책을 내실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아직 라오스에는 가보지 못했고,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묶어서 며칠 다녀온 것이 전부입니다. 일과 무관하게 해외여행을 처음 가본 곳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쓰신 이영지님은 상품 및 브랜드 마케팅 전문가로 일하면서 인문여행서를 출간하신 여행작가이기도 합니다. 제목에 들어가 있는 세 나라와 커피, 누들, 비어를 어떻게 엮어서 한권의 책으로 꾸며내신 것을 보면 기획능력이 출중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세 나라는 뒤늦게 해외식민지 경영에 나섰던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인도차이나를 구성하던 지역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프랑스풍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라오스는 아니더라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도 특별한 느낌이 없었던 커피와 누들, 그리고 비어가 인도차이나 지역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는 저자 서문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커피와 비어는 19세기에 이 지역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가 경제적 착취를 목적으로 이식한 산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들은 쌀국수로 대표되는데 이는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헤어날 수 없었던 가난 때문에 주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베트남 하노이의 쌀국수 포(Pho)는 프랑스의 ‘포터포(Pot au Feu)라고 하는 소고기 국물요리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밀가루이건 쌀가루이건 곡물의 가루를 반죽하여 뽑은 누들의 원조를 두고 동서양의 여러 나라가 자기네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생각해볼 거리는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인도차이나지역은 쌀을 많이 재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 나라 사람들은 문화나 삶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이렇게 표현된다고 합니다. “베트남인은 쌀을 심는다. 캄보디아인은 쌀이 자라는 것을 본다. 라오스인은 쌀이 잘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19쪽)”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벼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벼는 농부가 애정을 쏟는 만큼 수확을 낸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작가가 소개하는 문장에서는 쌀이 아니라 벼라고 하는 게 옳겠습니다. 쌀은 가을에 수확한 벼를 정미해서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베트남과 라오스에서는 세 가지 주제를 깊이 천착하는 느낌이 드는데 정작 캄보디아에서는 깊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커피에 관한 내용이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앙코르와트의 매력에 빠지는 바람에 주제에 집중하지 못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세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용한 숙소 또한 소피텔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커피, 누들, 비어라는 주제를 고려하면 조금 서민적인 숙소를 이용했더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숙소에 대한 지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숙소에 관한 묘사의 비중이 적지 않은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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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7
윌리엄 골딩 지음, 안지현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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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왕>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골딩의 후속작입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비극적인 대면을 통해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 속성인 폭력과 이기심에 대해 탐구한 수작’이라는 출판사의 소개 글에 끌려 읽게 되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한 현생인류 크로마뇽인을 소개한 <크로마뇽>을 읽으면서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하는 고인류가 멸망했고, 크로마뇽이라는 현생인류와는 어떤 관게였을 지 아주 궁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크로마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강력한 힘과 용기를 가졌으며 가장 단순한 옷차림에 무기를 소지한 원시적인 인류로, 그들은 말로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지적능력에 한계가 있었다.”고 추측하였습니다. 반면 크로마뇽인은 “최초의 해부학적 현대 유럽인으로, 그들은 잘 발달된 뇌와 언어능력, 혁신적인 성향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가진 모든 놀라운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었다.(5쪽)”라고 하였습니다. 두 집단이 충돌하였을 가능성도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모두 열어놓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속자들>에서 그려낸 네안데르탈인의 정체성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물을 표면적으로 인식하고 현재 시점에서만 이해할 뿐 논리적으로 사고하거나 정교한 언어로 표현할 능력이 없었다’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언어능력은 아주 취약하지만 오히려 그림을 공유함으로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한 부분은 과거의 일이라기보다는 미래에 등장할 신인류가 가질 법한 능력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네안데르탈인이나 현생인류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특성을 비교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가 보여주려 한 현생인류의 특성은 지적, 육체적으로는 진화하였지만 야만적인 본성이 낯설게 느껴지도록 했다는 것인데, 현생인류의 야만성은 의의로 뿌리가 깊어서 고인류를 너머 유인원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야만성이 현생인류만의 특성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이 언어능력이 취약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 등장인물의 이름을 자연에서 만날 수 있는 사물의 이름을 끌어오고 있어서 이야기 안에서의 맥락에 따라 눈치껏 관계를 유추해야 한 점도 불편했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오아’라는 존재는 일종의 신화적 인물로 첫 번째 네안데르탈인을 낳은 존재라고 설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구인류에게도 현생인류와 같은 신화가 존재했으리라는 믿음이 타당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고능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자연현상을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는 주장도 이해되지 않은 대목입니다. 다른 동물이 사냥한 주검을 가져오면서 ‘고양이가 널 죽였으니 잘못은 없어(62쪽)’라고 위안을 삼는 대목입니다만, 고고학적 성과에서는 네안데르탈인도 다른 동물을 사냥했을 뿐 아니라 다른 네안데르탈인을 잡아먹은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이 순수하다는 것은 작가적 상상 같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계를 제외한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이 크로마뇽인과 섞여 살면서 교배도 일어났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공격하여 멸종시켰다는 주장도 있지만, 같은 생존방식을 가진 현생인류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도태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현생인류집단에 흡수되어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현생인류에 대한 설명이 그리 많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을 공격했다는 설명도 분명치 않다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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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이라는 책
알렉산다르 헤몬 지음, 이동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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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보스니아의 모스타르를 찾았을 때, 보스니아 내전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시 곳곳에 무너진 집들이 남아있고,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였습니다. 그나마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스타리 모스트는 세계인들의 관심 덕에 복원이 되어 다행이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의 이탈을 막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하면서 인종청소와 문명파괴행위가 자행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세르비아군에 의하여 장기간 포위되어 있었는데, 분지 안에 들어있는 사라예보의 시가를 감시하는 세르비아 저격수에 의하여 희생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는 저격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사라예보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삶이라는 책>은 보스니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쓴 일종의 자서전입니다. 네 살반이 되던 1969년의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동생이 태어나던 날의 기억을 적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 역시 네 살반이 될 무렵 막내 동생이 태어났던 것은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집안 분위기 이외에 세사한 정황은 기억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가 당시 사라예보에 갇혀있던 보스니아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면, <나의 삶이라는 책>의 작가는 운 좋게도 사라예보가 포위되기 전에 미국을 방문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외자의 시각으로 사라예보 사태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성장과정에서부터 50 중반에 이르는 동안의 저자의 삶에 대한 기록을 보면 철저하게 삼자적 시각을 유지합니다.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만한 대목도 가감 없이 적은 것 같습니다.

책의 제목에는 묘한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저자는 대학시절 시와 비평을 강의하던 콜제비치교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만남이 있었다고 합니다. 콜제비치교수의 다섯 살 난 딸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제목이 바로 ‘나의 삶이라는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책은 첫 장을 쓴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2장부터는 인생경험을 더 쌓은 뒤에 쓸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콜제비치교수와의 인연은 보스니아 내전을 계기로 완전히 끊어졌다고 합니다. 교수가 세르비아 맹렬민족주의 단체인 세르비아 민주당의 고위당원이 되었고, 당을 이끌던 라도반 카라지키를 수행하면서 매사가 세르비아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점철되어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기의 후반에서는 1살도 되지 않은 어린 딸이 비정형 기형 횡문근 종양(Atypical teratoid rhabdoid tumor; 이 책에서는 비정형 유기형 간상 종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의학용어로는 적절한 번역이라 하기 어렵습니다)에 걸려 세상을 하직하는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지식을 먼저 보내는 일은 부모로서 정신적으로도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느끼는 심리적 고통을 생생하게 적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종교가 저지르는 가장 야비한 오류는 바로 고통을 무슨 깨달음이나 구원에 이르는 한 단계쯤으로 숭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의 고통과 죽음은 이사벨 본인에게도, 우리에게도, 이 세상도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했다. 이사벨의 고통이 한 게 있다면 그건 오직 아이를 죽음으로 이끈 것뿐이다. 우리는 배울 만한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누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경험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사벨이 더 나은 어딘가로 날아갈 수 없을 거란 사실만 더 분명해졌다.(242쪽)”라는 대목이 오히려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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