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에게 권하는 영문학 - 청소년기에 영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10대에게 권하는 시리즈
박현경 지음 / 글담출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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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영어였습니다. 어렵게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해서도 영어 원서를 교재로 쓰는 과목이 문제였습니다. 교재 한쪽을 읽어내는데 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영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중학교 때 흥미를 돋우지 못하고 대충 시작했던 것이 평생 걸림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무렵 <10대에게 권하는 영문학>과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제 인생은 분명 다른 길을 따라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박현경교수님이 쓰신 <10대에게 권하는 영문학>을 읽게 된 것은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께서 저의 옆집에 사셨다는 인연으로 책을 보내주셨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으면서도 말입니다. 제게 보내주신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책을 읽었으면 느낀 바를 적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같은 것이 있는지라 몇 줄을 적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글담출판에서 기획한 “10대에게 권하는 (책)”의 연작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인문학, 문자 이야기, 역사, 공학 등에 이은 다섯 번째 주제로 영문학이 선정된 듯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제가 전공한 ‘의학’도 한 자리를 차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성적이 되면 우선 의과대학을 지원하는 세태이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 역시 저자처럼 이과출신인지라 영문학과 영어교육학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보니 학원에서 반편성을 바꾼 이력도 비슷하네요. 저자께서는 이과반에서 문과반으로 바꾸어 영문과를 지원하셔서 입학하셨다고 했습니다만, 제 경우는 서울대반에서 기타 대학반으로 바꾸었고, 덕분에 한번 떨어졌던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을 일이지만, 수능이 없던 옛날이라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10대에게 권하는 영문학>에는 영문학이란 어떤 학문인지, 영문학의 범주는 무엇이고, 영문학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10대들에게 영문학을 공부하라고 권하는 이유, 즉 영문학을 통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책을 쓸 때 사용하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식의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하거든요’, ‘~있어요’, ‘~이지요’ 등, 십대들의 눈높이에 맞춘 대화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리를 내어 읽지 않아도 저자가 곁에 앉아 조근조근 가르쳐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들은 정말 다양합니다. 더 중요한 점은 무슨 내용인지 아는 책들이 많아서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영문학을 소개하는 책이라서 당연히 영문학 작품이 먼저 소개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제 나이쯤 되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알고 있을 미국 가수 밥 딜런이 1962년에 발표한 <blowing in the wind(바람에 실려 오는)>을 제일 먼저 인용했네요. 아마도 밥 딜런이 201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를 노랫말 삼은 노래도 있고, 노랫말 가운데는 시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자께서 인용하는 많은 영문들에 우리말 번역을 달아놓으셨는데, 책이나 시의 경우는 이미 우리말로 옮겨진 것을 같이 인용하셨는데, 원문을 교수님께서 직접 번역하셨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가 요즘 쓰고 있는 여행기에서는 많이 부족한 솜씨지만 직접 우리말로 옮겨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형편입니다.

책의 뒷부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미래의 주인공이 될 10대들에게 영문학을 공부하면 좋은 이유를 잘 설명하고 계신 듯해서입니다. 70을 바라보는 제가 영문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혹적(?)인 권유였던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을 읽을 기회를 주신 저자께 제가 쓴 책을 보내드릴까 생각을 해봅니다. 방법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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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 디지털 시대는 어떻게 죽음의 의미를 바꾸었나?
일레인 카스켓 지음, 김성환 옮김 / 비잉(Being)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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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블로그를 시작한 지가 벌써 16년이 되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3년 전에 처음 시작했던 블로그가 문을 닫으면서 새로운 블로그를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블로그는 천만이 넘는 방문객을 맞은 소위 파워블로그였는데, 보건의료 관련 자료를 많이 모아두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08년 광우병파동 당시 뜨거운 공방이 있었던 것인데, 블로그가 문을 닫으면서 추억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아쉬움이 있습니다.

블로그를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가족이나 친지들과 관련된 사진은 동의가 없으면 올리지 않는다거나, 공개가 가능한 수준의 개인사를 요약해주는 일종의 주간 일기 형식의 글까지만 올리고 있습니다. 첫블로그에서는 자료를 수집하는데 주력했다면 지금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는 주로 제가 쓴 글을 모아두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온라인에서 만난 이웃들을 오프라인에서도 만나곤 했습니다. 블로그를 오래 운영하다보니 만나고 헤어짐이 오프라인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웃들 가운데는 세상을 뜨는 분도 계셨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블로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죽은 뒤에 블로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아직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전혀 생각해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영국에서 심리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는 일레인 카스켓 박사가 쓴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를 읽고서 그런 생각이 분명해졌습니다.

저자는 블로그를 비롯하여 최근에 다양하게 쓰이고 있는 SNS를 운영하던 사람이 죽은 뒤에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모야 분석했습니다. 특히 사고나 사건과 관련되어 갑자기 죽는 경우에 죽은 이의 SNS계정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는 경우도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고인의 SNS계정이 여타의 자산처럼 지정 상속인에게 물려질 수 있는 절차는 아직 업는 듯합니다. 다만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분명히 해두었을 때는 폐쇄할 수도 있고, 죽은 이에 대한 추모공간으로 운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추모공간으로 유지한다면 해당 계정에 접속하여 소통을 하는 이는 일종의 유령과 대화를 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계정의 운영자가 바뀌었음을 분명하게 하고 전 주인이 남긴 자료는 필요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형식으로 운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SNS계정에 올려둔 자료 가운데 남겨진 사람들이 보기에 불편한 것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데이트폭력으로 희생된 사람의 불로그에 가해자의 사진이 다수 올려있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가족들이 보기에는 제2의 충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계정의 주인이 아니면 해당 자료의 삭제가 불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계정에 접속하는 방법을 가족들이 안다면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만,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사진과 함께 올리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에게 동의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큰 다음에 자신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간병일기를 사진과 함께 블로그에 올리고 책으로 묶어낸 이도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병으로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내보여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요? 생각해볼 일입니다.

저자는 운영자의 사후에 SNS계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복잡다단한 상황들을 수집하여 분석해냈습니다. 그리고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는 만큼 디지털 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해볼 수 있도록 하는 10가지의 일반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지침이 될 수도 있겠고, 자신의 디지털 유산을 처리하는 방법을 미리 생각해두면 좋겠다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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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에서, 느릿느릿
장다혜 지음 / 앨리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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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다녀온 프랑스 여행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시작해서 센강을 따라 모네가 작업한 마을을 따라갔다가 루아르계곡을 따라 내려와 프로방스 지방에 들어섰습니다. 장다혜님이 쓴 <프로방스에서, 느릿느릿>은 프로방스 지방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읽기였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은 것은 분명 프랑스를 여행하기 전이었을 듯한데, 독후감을 써두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새삼 독후감을 쓰는 이유입니다. 저자가 자필로 적어둔 글이 책장에 있습니다만, 제게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잘 나가는 가수들이 부른 노래의 노랫말을 쓰시기도 했다는 작가님은 현재 칸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배낭을 매고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돌아다니다가 프로방스에 도착했을 때, ‘이곳이야 말로 살아볼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행 내내 수도 없이 보았던 지중해가 유난히 찬란하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순한 여유로움 때문이었을까? 부자든 가난하든, 젊었던 늙었든, 하얗든 까맣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찬란한 햇빛과 해변, 그리고 이 특권을 매일 누리는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팔자에 역마살이라도 끼어있는 듯, 칸에 살면서 프로방스 곳곳을 누볐던 모양입니다. 프로방스의 크고 작은 마을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들을 8개의 주제로 나누어놓았습니다. 프로방스에서는 시간도 느리게 간다는 의미를 책제목에 달았는데, 작은 제목들도 꽤나 재미있습니다. 같은 해변 다른 느낌, 알록달록 빈티지 시장 구경, 아틀리에서 쉬다, 오감만족 페스티벌, 취향따라 즐기는 프로방스 취미생활, 살아 숨 쉬는 역사 속으로, 동화 속 마을 천천히 걷기, 달콤 쌉싸래한 와인 투어, 등입니다.

주제에 따라서 몇 번 씩 등장하는 도시나 마을도 있습니다만, 등장하지 않은 마을이나 도시도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행이란게 세상 구석구석을 샅샅이 돌아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심지어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동구 밖에도 나가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주유천하를 했음직한 철학자 칸트 역시 태어나 살던 쾨니히스베르크를 100km이상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많이 한 분답게 여행에 관하여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적어두었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풍경들을 마주한다. 꼼꼼하게 이리저리 살펴보고, 그 조화의 의미를 읽어낼 때 비로소 느낌이 오는 심오한 풍경도 있고, 긴장을 풀어 미소 짓게 하는 정겹고 따뜻한 풍경도 있다. 또 한눈에 통하는, 말이 필요 없는 풍경도 있다.(22쪽)” 그런 느낌을 어떻게 적는가는 작가적 역량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생라파엘 해변 풍경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해변 패션도 극명히 갈린다. 이곳 할머니들은 색깔도 디자인도 과감한 비키니 차림으로 나다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다. ‘처진 가슴도 자랑스러운 내 신체의 일부분일 뿐’이란 생각으로 어디서든지 과감하게 노출을 즐긴다.(39쪽)”

작가가 여행지에서 느낀 점을 적는 여행서가 주로 읽힌다는 이야기를 출판계 사람들로부터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행지에 관한 정보는 인터넷에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터넷에 넘쳐나는 여행정보들 대부분은 두서가 없거나 현지 언어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찾아 정리하는데 한 세월이 걸린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여행작가들이 여행서에 적어내는 그 느낌이라는 것이 대부분 주관적인 듯하면서도 천편일률적이다는 생각은 어쩌면 저만의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방스에서, 느릿느릿>은 작가의 느낌을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적고 있으며, 여행지에 대한 정보 역시 간단하면서도 핵심 위주로 정리하고 있어서 저에게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많은 사진들도 프로방스의 여러 마을에 가보지 않아도 충분한 느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님이 이 책에 정리한 곳을 모두 돌아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프로방스에서의 일정이 아주 촘촘하게 짜여 있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도시와 마을에서 버스를 멈추고 잠시라도 돌아볼 수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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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한중록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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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독서동아리에서 읽은 책입니다.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읽을 기회가 없었을 터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이 쓴 작품인데 규방가사 혹은 궁중소설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영조-정조 간의 궁중비사를 다룬 영화나 연속극이 적지 않은 것은 그만큼 극적인 사건이었고 사건에 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은 임오화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제외하고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정조가 세손시절 영조에게 주청하여 파기되었으며, 정조 또한 자신의 일기인 일성록을 사건 전후 2개월 이상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1999년 12월에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문이 공개되었습니다. 묘지문에는 사도세자의 행적을 적고, 죽임을 당하는 이유가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고 합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태갑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오호라, 자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를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한겨례신문 2017년 12월 1일자 기사. ”영조가 사도세자 묘지문에서 직접 밝힌 죽음의 이유“ 참고)

이 점에 관하여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밝히기를 사도세자가 영민하였기 때문에 영조께서도 거는 기대가 컸다는 것입니다. 다만 사도세자의 마음이 여려서 영조의 하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면서 차갑게 대하였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가운데 사도세자도 장성하게 되었고, 자연 반발하는 심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가 궁인을 포함하여 주살한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친모 영빈 이씨에게 영조를 죽이겠다고 토로했다는 사실을 영빈이 직접 영조에게 고하여 죽이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화나 연속극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시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된 당쟁의 희생이었던 것처럼 그려지는데, 사도세자가 소론에 기울었던 것을 노론 쪽에서 지나치게 경계한 탓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노론에 속하였는데, 평소에는 세자를 옹호하다가 그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포기한 것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한중록>은 모두 4편으로 구성되었는데, 1편은 혜경궁 자신의 출생부터 성장기, 9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를 거쳐 50년에 걸친 궁중생활을 간추렸습니다. 정조 19년(1795년)에 쓴 것으로 임오화변에 관한 기록은 차마 담을 수 없다 하여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반에는 정적들의 모함으로 친정식구들이 화를 당한 전말을 기록하였습니다. 나머지 3편은 각각 순조1년(1801년), 순조2년(1802년), 순조5년(1805년) 등에 기록된 것으로 순조1년에 동생 홍낙임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된 뒤에 적은 것입니다. 화완공주의 양면적인 행태를 고발(?)하고,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한 배경을 적으면서 손자인 순조에게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4편에는 임오화변의 진상을 밝히는데 사도세자의 광포한 행동이 정신질환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중궁궐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궁궐 안에서는 아무래도 얻어들을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이 편향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친소관계에 따라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정보원을 다양하게 두지 않으면 특정한 세력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극이 싹틀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왕가의 여인들이 국정에 깊숙하게 개입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왕조에서 수많은 비극이 벌어진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혜경궁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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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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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독서동아리에서 읽은 책입니다. 시, 소설 중심이던 책읽기가 확대되는 느낌이 좋습니다. 시선이 나 혹은 우리에서 세계로 넓혀진 느낌이랄까요? 제목이 아주 충격적입니다. 설마 세계인구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쓴 장 지글러교수는 사회학자이자 정치인이자 활동이기도 합니다. 2000년부터 국제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지도가 나오고 모두 23개의 국가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거론된 나라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기아문제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만, 러시아, 브라질과 같은 나라도 기아문제가 심각한 줄은 몰랐습니다.

성공회대 우석훈교수는 이 책의 서두에 붙인 해제, ’기아에 관한 어느 국제 전문가의 비망록‘에서 “이 책은 지글러가 어린이 무덤에 바치는 참회록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2006년 10월에 낸 보고서에 언급되어 있는,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5천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아들 카림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갑니다.

세계적인 기아문제에는 다국적기업과 선진국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선진국에서 필요로 하는 농작물이나 기호품을 생산하는데 매달리다보니 정작 자국민들이 먹어야 할 식량생산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국제시장에서 비싸게 사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농지가 황폐화하고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 도시빈민이 되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꼬집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들 국가의 내부적인 문제는 없는지도 짚어볼 일입니다. 그마저도 외부의 책임으로 돌릴 것인지도 말입니다. 특히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의 개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동지에게 배신을 당한 상카라의 죽음으로 부르키나파소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예로 들기보다는 1966년 독립하여 2005년 일인당 국민소득이 11,410달러에 이른 보츠와나의 성공사례를 드는 편이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르키나파소와 보츠와나의 결정적 차이는 정책입안자가 어떤 철학을 가졌는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기아로 고통받는 나라의 대부분은 권력을 쥐고 정책을 입안하는 집단의 철학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문제는 인구집단을 구성하는 종족 간의 갈등이 핵심일 수 있습니다. 이들 나라를 지배했던 유럽제국들이 힘겨루기를 통하여 설정했던 경계선을 바탕으로 독립이 결정되고, 그러다보니 서로 다른 종족들이 한 나라에 속하게 되면서 갈등이 내재되었던 것이라면 궁극적인 책임은 유럽제국에 있는 것이 옳겠습니다. 독립을 결정할 때, 일단은 단일 종족으로 중심으로 나라를 구성하고 국경을 정하도록 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의 기아문제를 두고 인도적 구호활동은 적지 않게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주는 빵 한 덩이는 배고픔을 잠시 잊게 해주는 효과 밖에는 없습니다. 빵을 만들 수 있는 밀을 생산하고 빵 기계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작은 아이의 책인데, 책을 읽다가 2007년에 진료소 책모임에서 읽었다는 요약문을 발견했습니다. 서울역 노숙자들을 진료하는 봉사단체에서 활동할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약문 가운데 “우리나라의 사회구조조차 바꾸지 못하는 상황인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구조가 바뀌어야 해결될 일이라는 생각으로 막막하고 무력함을 느끼게 했던 책”이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막막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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