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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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최문희 작가님의 <난설헌>이 출간 10년 만에 15만부를 찍었다고 합니다. 다산책방은 이를 기념하여 표지를 새롭게 하여 출간하면서 독자들을 위한 행사를 열어 읽어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혼불문학상은 <혼불>을 쓴 최명희 작가님을 추모하고 <혼불>의 문학적 가치와 위상을 재정립하면서, 한국문학을 이끌어갈 작가를 발굴하기 위하여 전주문화방송이 2011년에 재정한 문학상입니다. 1회 혼불문학상의 심사평을 보면, “조선 중기의 천재적 여류 시인 허날설헌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작품으로 그미의 빛나는 시편들이 사실은 그미의 한없이 고단했던 삶의 고통을 디뎌가는 과정 속에서 도래한 것임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367)”라고 하였습니다.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 그러니까 결혼 전과 결혼 후의 삶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설정이 단연 이채롭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인상적이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조선 중기의 전통혼례의 절차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다는 점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이 결혼 전부터 학업을 등한시하고 기방출입이 잦았다고 하였는데, 혼담이 오가는 과정에서 이런 소문들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난설헌의 부친 허엽이 대사간을 지냈고, 이복 오빠 허성과 동복 오빠 허봉이 조정에 나가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김성립이 당대의 명문 안동김씨의 일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내세울 것은 없었던 모양으로 좋은 혼처는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조선 중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지만, 고어가 아닌 쉽게 이해되는 우리말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님의 대단한 필력을 먼저 짚었어야 했습니다. 물론 조금은 생소해 보이는 단어들이 적지는 않았지만, 이야기 흐름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허난설헌은 8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김성립과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시모의 시집살이까지 만만치 않았고, 두 자녀가 어려서 돌림병으로 죽고, 그 충격으로 유산을 하는 등 결혼 후 그녀의 삶은 질곡의 연속이었던 듯합니다. 그런 어려움을 시작으로 녹여냈지만 스물일곱이 되던 해에 미상의 병으로 타계했다고 합니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자신의 거처에 있던 작품들을 모두 태웠다고 하는데, 친정에 있던 작품들까지도 소각하라는 당부를 동생 허균이 따르지 않고 보관하였다가 그녀의 사후 10년째 되던 해에 명나라에서 출간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남편과 시집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던 사정으로 인하여 그녀의 작품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1608년 출간된 <난설헌집>이 명나라 문인들의 격찬을 받았으며, 1612년에는 시작품 168편과 산문글 1편이 실린 <취사원창(聚沙元倡)>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일본에서도 1711년에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郎)에 이하여 그녀의 시집이 발간되어 문인들이 애송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조선 중기의 동아시아에 한류를 전파한 여성시인이었던 셈입니다.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전하는 바는 없을 것이나, 작가는 그녀의 지난한 삶이 조선 중기 남성들의 지금과는 다른 여성관을 비롯하여 양반 가문의 지나치도록 엄한 가풍에서 기인하였음을 암시하는 장치를 곳곳에 심어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납함례를 치르던 날, 비가 퍼부어 상서롭지 않은 조짐으로 상정하고 야밤에 든 도둑이 지붕위에 올라 시집에서 예물로 보낸 녹의홍장을 갈가리 찢었다거나 그녀가 천정의 사랑에 드나들던 최순치의 연모를 거절하지 못하는 등, 시댁에 오해를 살 빌미를 주었다거나 하는 등의 장치 말입니다. 그녀에게 암수를 쓴 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의심이 갈만한 인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보아서는 가당치 않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요즘 글쓰기를 하면서 외래어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말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 <난설헌>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이 더 많아질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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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 한국에서의 일 년
베라 홀라이터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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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공사에서 <미녀들의 수다>라는 연예편성이 방송된 것은 2006년이었고, 2010년까지 5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50여 개국에서 온 125명의 미녀들이 순차적으로 출연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의 여성들이 출연하여 매주 일정한 주제를 두고, 그녀들이 우리나라에서 느낀 점을 자국의 문화와 비교하여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관련 주제에 대하여 가감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내놓아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독일에서 와서 이화여대 외국어학당에서 우리말을 배우던 베라 홀라이터가 우리나라에 처음 와서 적응하면서 겪었던 사건, 사고들을 솔직하게(?) 적은 수필집입니다. 이 책은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간되었던 것을 우리말로 옮겨 소개된 것인데, 번역서가 출간되기도 전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외국에 사는 독일인 혹은 독일에 사는 외국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여행서의 한 분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 관한 책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지만, 한국에 관한 책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작가는 재미와 웃음을 바탕으로 (독일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썼다고 합니다. 당연힌 긍정적인 모습으로 포장된 것이 아니라 속살을 여지 없이 드러내는 것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작가의 솔직함이 독일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독일에서 출간된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전에 책에 담긴 내용의 일부가 누리망을 통하여 소개되면서 소동을 빚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발췌과정에서 전체의 맥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오역되어 사실관계가 잘못 전달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글쓴이의 의도는 한국만의 특이한 모습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꼭 하게 되는 실수들, 그리고 특히 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유머를 끌어내자(7)’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독일인 특유의 솔직함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실험실에 근무하던 여비서가 독일 분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보면, 독일 사람들은 듣는 이의 귀에 달콤하게 변주하는 것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 읽었던 루이자 메이 올코트의 <작은 아씨들>에도 독일 청년이 등장하는데, 다정다감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은근한 매력이 있는 남자로, 큰 언니 맥과 결혼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럽에서 열리는 학회에서도 독일에서 온 병리의사들을 많이 만났지만, 대부분 진중한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작가는 여느 나라의 젊은 여성처럼 발랄하고 삶을 제대로 즐기는 그런 성격인 것 같습니다. 술도 잘 마시고, 무도장에도 가고, 노래방에서는 부족한 노래실력을 대담한 엉덩이 흔들기로 보완할 줄도 아는 개방적이라고 합니다. 독일 사람들은 어떻더라는 것도 편견이었던 것입니다.


작가가 우리나라에 오게 된 배경에는 우리나라 남자친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친구의 가족들과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갈등구조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지만, 나름 현명하게 해결해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결혼이라는 단계까지 발전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개인사의 영역이라는 생각으로 밝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작가가 태권도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 참여했을 때, 송판깨기를 했다고 합니다. 각자의 소망을 적은 송판을 깨는 과정은 소망을 비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작가는 자신의 소망 자체를 깨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꿈과 야망을 놓는 일, 스스로의 자아를 깨는 일이라는 심오한 뜻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처럼 깊이 있는 이야기는 물론 책의 전반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점은 글을 참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는 점이었고, 더하여 딱딱할 수도 있는 독일어를 참 유려하게 우리말로 옮겼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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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 영웅과 희생자, 괴물들의 세계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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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근무하던 사무실에 있던 책이었는데, <군인>이란 제목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군인에 대한 무슨 이야기를 이렇듯 두툼한 한 권의 책으로 풀어냈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군인이란 결국 누군가와의 싸우기 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현대전은 이미 전쟁터에서 군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원격으로 작동하는 무기들이 전투에 투입되면서 군인은 전투 현장이 아닌, 심지어는 대륙 너머에서 전투를 조종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전투가 일어난 지역을 차지하려면 군인이 투입되어 깃발을 꼽아야 하겠습니다만....


영웅과 희생자, 괴물들의 세계사라는 부제를 달아놓았습니다만, 지구상에 인류라는 존재가 출현할 때부터 시작된 싸움, 혹은 전쟁의 역사를 훑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흔히는 서문으로 시작하는 책을 저자는 추도사라는 제목으로 서문을 대신하였습니다. 지난 3천년 동안 세계사의 큰 동력이자 공포와 경탄, 경악의 대상이었던 군인은 누구보다 많은 고통을 가했지만, 또 누구보다 스스로 더 큰 고통을 받을 때도 많았다고 보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앞으로의 전쟁은 군인이 전장에 투입되지 않는 사이버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군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붙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 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전쟁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역사의 수많은 전선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군인이라는 존재, 혹은 현상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합니다.


1이제 전쟁에는 군인이 필요없다에서는 군인이 아닌 기계가 전투를 치르거나, 핵무기와 같은 가공할 살상무기가 투입될 수도 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형태의 전투, 즉 인간폭탄이나 유격대를 운용하는 전투가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2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서는 전투 혹은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3어떤 무기로 싸웠을까?’에서는 군인이 전투에 혹은 전쟁에 사용한 무기의 변천사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는 시선을 군인 자체로 돌려 4부에서는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5부에서는 무엇으로 강요하고 속여 넘겼을까?’, 6부에서는 어떤 꼴로 죽었을까?’ 그리고 7부에서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에 이릅니다.


저자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논리를 풀어냈습니다만, 간혹은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한 부분도 없지 않아 보였습니다. 제가 요즈음 이집트에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알게 된 내용입니다. 저자는 이집트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는 피라미드, 신전, 궁전, 용수로를 건설하는데 많은 노예가 필요했다.(220)’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나일 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농삿일을 할 수 없는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세금으로 거둬들인 물자를 보관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공공사업의 성격으로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고고학적 발굴에서 나온 유물들을 통하여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한획을 그은 테르모필레 방어전에 대한 부분도 제 생각과는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천형의 요새인 테르모필레에 방어선을 치고 페르시아군을 격퇴할 전략을 세웠던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은 자원하여 남은 스파르타군사 3백과 테스피아 군사 7백명을 주축으로 그리스 연합군이 철군하여 전열을 다시 가다담을 수 있도록 결사적으로 페르시아군을 막다가 전멸하였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델뷔르크가 <전술사>에 적은 테르모필레의 방어는 그 자체로 보면 가망이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군사 실무적으로는 분명한 실수였지만, 도덕적으로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요청이었다. 테르모필레 협곡은 처음부터 패배한 초소나 다름없었고, 그로써 레오니다스에게는 명예롭게 죽을 사명이 맡겨졌다. 그리스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라는 부분을 인용하여 레오니다스왕의 분사(憤死)를 영웅화하였습니다.


하지만 레오니다스왕은 테르모필레의 천형적인 지형만을 믿고 우회로를 지키는데 소홀한 결과 페르시아군을 앞뒤로 맞아 독 안에 든 쥐 꼴을 자초한 전략적 실패를 한 셈이니, 사력을 다하여 페르시안군의 진격을 차단한 공은 높이 살 수 있겠으나 경계에 실패하여 패전을 자초한 점은 면죄를 받을 길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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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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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직장을 그만 둘 때 같이 근무하던 분이 주신 책입니다. 얄팍하지만 무게감이 적지 않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책을 받았을 때는 고양이를 버리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장해서 기억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일상적인, 엄하셨던 모습일 것 같습니다. 작가 역시 아주 평범한 일상의 흔한 풍경이 가장 생생하게 되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작가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무렵 집에서 키우던 암고양이가 임신을 하자 버리기로 했던 모양입니다. 작가는 아버지를 따라 집에서 2km 정도 떨어진 북적거리는 해수욕장에 고양이를 버리고 왔다고 적었습니다. 고양이를 버리고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집에 돌아온 고양이가 반기는 바람에 놀랐다고 합니다. 결국 고양이를 계속 키우게 되었다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꼬투리로 하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의 한 조각이라는 작가의 후기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글로 정리해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시작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가족에 대해 쓴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무렵의 일을 글로 정리해보려는 생각을 수십 년째 하고 있지만 막상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어 충분히 공감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가족과 관련된 일을 줄줄 풀어놓았던 고 최인호작가님은 참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는 부제를 단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보면 고양이를 버리러 해변에 갔던 일에서 시작한 작가의 아버지에 관한 일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지난한 세월을 살아야 했던 선친의 발자취를 뒤쫓는 일이었습니다. 하루키의 선친은 동자승으로 시작하여 장성한 뒤에는 주지승이 되어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1917121일에 태어났으니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을 터인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해야 할지....’라고 표현합니다.


참전 군인들의 경우는 전쟁터에서의 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작가 역시 선친의 생전에 전쟁중의 일을 자세하게 묻지 않았고, 선친 역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족적을 뒤쫓는 일이 수월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루키의 선친은 일본군 보병 16사단의 16연대에서 치중병으로 참전했는데, 16사단 20연대 소속으로 착각했다고 합니다.


20연대는 난징전투의 선봉에 섰던 부대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20연대에 배속된 사람들은 난징전투에서 참혹한 일들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난징전투는 일본군이 30만명에서 100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작가는 선친이 난징대학살에 관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시작한 본격적인 취재를 5년 만에 마치고 보니 하루키의 선친은 전투병이 아나리 치중병이었고, 전쟁 중에 소집이 해제되어 대학에 다녔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선친은 전쟁 중에 포로를 살해하는 현장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가는 결국 전쟁이 한 인간-아주 평범한 이름도 없는 한 시민이다-의 삶과 정신을 얼마나 크고 깊게 바꿔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쓰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굴러갔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 역시 선친께서 참전했던 6.25 동란의 종전을 전후하여 수태되었던 터인데, 전쟁 기간 중의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줄 분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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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장 루이 셰페르 지음, 김이석 옮김 / 이모션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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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폐렴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극장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3(三密)의 위험이 높은 장소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명화극장은 즐겨보지만 극장에서 본 영화는 그리 많지 않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공감은 하는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를 골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미술평론가이자 미학자, 수필가라는 장 루이 세폐르의 책으로는 처음 읽는 책입니다.


프랑스 작가가 쓴 영화이야기라는 점에서 난이도가 높을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야 했습니다. 프랑스 영화는 느낌 없이 즐기는 희극이거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종잡지 못하다가 끝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러다니는 평범한 남자로서 나는 어떤 본질적인 이야기를 말하지는 못할 것 같;.”라고 운을 떼는 것에서 책읽기기 지난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일단 저자는 결코 평범한 남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가 여기에 쓴 것은 시간에 관한, 운동에 관한, 이미지에 관한 특정한 경험이라고 이 책의 특성을 요약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형성하게 되는 어떤 (savoir)’의 문제를 환기하려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순전히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 여기에는 영화들의 내용과 관련된 것도 있겠지만, 심지어는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줄기에 떠도는 먼지에 이르기까지 영화관에 관한 이야기도 논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서문에 이어지는 신()(Les dieux)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내용의 수필 31꼭지를 담았고, 이어서 범죄의 인생(어떤 영화)에서는 주로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관련된 글 4꼭지를 담았습니다안타깝게도 저자가 인용한 영화들 가운데 제가 본 영화는 한편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저자의 사유가 어떻게 빚어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이 형성하게 되는 의 문제라는 것도 저자의 것, 즉 저자의 시선으로 해석한 것이므로, 듣고나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그것도 영화를 보았을 때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젊었을 적에 동아리를 같이 하던 선배가 바로 저자와 비슷한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영화입니다만, <러브스토리(1970)>는 명문가의 상속자이자 하버드 법대생인 올리버와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에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다니는 제니가 도서관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는 이야기입니다. 올리버는 제니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의절을 하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다웠습니다만,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제니가 백혈병으로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제니가 죽은 뒤에 올리버가 병원 문을 나서는데 병원에 찾아오는 아버지를 현관에서 만나게 됩니다. 올리버가 현관에 있는 회전문에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도 같이 회전문에 진입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두고 선배는 올리버와 아버지가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회전문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관문이 자동으로 열리기도 하지만, 굳이 회전문이 있는 현관에서 촬영을 한 감독의 장치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장면을 본 선배가 나름의 해석을 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와 연극의 차이를 설명할 때, 영화는 이미 필름에 담긴 대로의 장면이 반복되는 것이지만, 연극은 그 장면을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서 혹은 같은 배우라도 연기할 때마다 다른 감정으로 연기를 하기 때문에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작가는 영화를 다시 보러 갔을 때, 동일한 효과가 동일한 순간에 발생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서로 다른 시점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 자신이 나이, 언어, 감정의 질 등에서 이미 변했기 때문에 역시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의문을 가졌던 평범한 사람의 조작적 정의를 옮긴이의 해설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상식을 갖춘 사회인의 뜻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장소에 속하는 일종의 이방인이라는 점이다.(324)”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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