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음 아카데미의 보르헤스 강좌에서 다룬 두 번째 텍스트는 <알레프>였습니다. 1949년에 발표된 <알레프>는 <픽션들>과 더불어 보르헤스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초판 <알레프>에는 모두 열세편의 단편을 수록했는데, 1952년 네편을 더해서 모두 열입곱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알레프>에 실린 작품들 가운데 ‘엠마 순스’와 ‘전사와 여자 포로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모두 환상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번역하신 송병선교수님은 “그는 환상문학을 목적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나 믿음을 파괴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서, 이 장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224쪽)”고 적고 있습니다.

 

픽션들에서 차용했던 미로(迷路)는 <알레프>에 실린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와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픽션들>에서 심플하면서도 심오한 동양적 미로였다면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에서 차용한 미로는 크레타섬에 있었다는 미궁의 구조를 연상케합니다. 하지만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에서는 아무런 장치가 없는 열린 공간, 즉 사막 한 가운데를 미로로 차용하여 사람을 가두고 있습니다.

 

<픽션들>과 닮은 점이 미로라고 한다면 다른 점은 바로 죽음과 남미적 분위기가 물씬한 가우초가 등장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 ‘죽은 사람’, ‘또 다른 죽음’ 등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진시황이 들었더라면 분명 사람을 보냈을 영생을 얻게 되는 강물을 마시게 된 주인공이 오랜 세월을 살면서 다양한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앞서 <픽션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8043>에서도 잠깐 말씀드렸던 팔림세스트기법인데 저는 이 단편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었던 영국드라마 <닥터 후>가 생각난 이유는 아마도 영생을 얻은 시간여행자가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을 증언하고 심지어는 개입까지 한다는 설정이 바로 이 이 작품의 분위기와 닮았다 싶어서입니다.

 

단편 ‘알레프’에서 다중우주의 개념을 읽을 수 있었다는 말씀은 <픽션들>에서 드렸던 바 있습니다만, 민음아카데미에서 송병선교수님은 단편 알레프에 네루다에 대한 보르헤스의 비웃음이 담겨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알레프’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스와 카를로스 아르헨티노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 노라 란지와 네루다가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시처럼 호화로우면서도 천하기 짝이 없는 시를 쓰는 우리 친구의 풍자입니다.”라는 말에서도 보르헤스의 심중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우초문학에 대한 보르헤스의 관심은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알레프>의  ‘타데오 이시도로 크루스의 전기’와 <픽션들>에 실린 단편 ‘끝’에서는 아르헨티나 시인, 호세 에르난데스(José Hernández)가 1827년 발표한 가우초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장시(長詩) 『마르틴 피에로』에 나오는 마르틴 피에로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마르틴 피에로는 순수한 가우초이지만,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일탈하게 되지만 독립적이고 영웅적이며 희생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알레프>에 실린 또 다른 단편 ‘또 다른 죽음’에 등장하는 페드로 다미안의 죽음과 함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가 강제로 가우초들을 징집해 국경으로 보내 원주민들과 전쟁을 하도록 만든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얼마 전에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가 아랍어로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독일어 번역본을 국내에 소개한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0768>을 읽은 탓인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랍어로 번역하던 무렵의 아베로에스의 생활을 가상한 단편 ‘아베로에스의 탐색’은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모든 철학의 원천인 이 그리스인(아리스토텔레스)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도록 점지된 사람이었다. 아베로에스가 자신에게 부여한 목표는 마치 회교 율법학자들이 『코란』을 해석하는 것과 같이 그의 책들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 아랍인 의사는 자기 자신과 14세기나 떨어져 있는 사람의 사상에 전념했다. 그런 그의 헌신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역사상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117쪽)”

 

고전의 해석 혹은 번역의 어려움을 시사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는 『시학』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확실치 않은 두 단어 때문에 멈춰야 했다. (…) 그런데 이슬람권에서는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17쪽)” 해석 혹은 번역의 대상이 되는 글을 쓴 사람이 살던 시대, 혹은 사회에 대한 다양한 정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으면 엉뚱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느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소리]에 소개할 책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고 할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읽고 북소리에서 소개한 박종호선생님의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7325>에서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로, 아르헨티나출신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시인으로는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기억에 관한 어떤 책에서 바로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에 수록된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인용하고 있어서 꼭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이기도 했습니다. 보르헤스와의 인연은 마침 민음사에서 주관하는 민음아카데미가 7월에 네 차례에 걸쳐서 보르헤스와 그의 작품을 해설하는 강좌로 까지 이어졌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1596). 바로 보르헤스의 작품 <픽션들>과 <알레프>를 번역하신 울산대학교의 송병선교수님께서 강좌를 주관하셨으니 보르헤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번역하신 송병선교수님께서 작품해설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픽션들>은 열여덟편의 단편소설들을 수록한 얇은 책이지만 20세기 후반의 문학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사회, 과학, 철학 등 세계 지성사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북소리]에서 <픽션들>을 소개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보르헤스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얻는 느낌은 ‘어렵다’는 한마디로 정리되었는데 민음아카데미에 참여하면서 이해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세계를 환상문학에 속한다고 합니다만, 그의 작품세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젊었을 적에 실패한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는 1920년대 노르웨이 이민가정의 노라 란지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한 서사시 혹은 소설을 쓰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막상 그녀가 1926년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계획을 접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픽션들>에 실린 열여덟 개의 단편을 읽고서 우선은 단편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다양함에 놀라게 됩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중동아시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미 알려진 텍스트를 활용하여 허구의 인물이나 사실을 얹혀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기법은 팔림세스트의 이미지처럼 표현하는 것인데, 팔림세스트는 동일한 양피지 위에 새로운 텍스트가 이전의 텍스트를 숨기지 않은 채 보이게 하는 그런 양피지를 말한다고 합니다. 즉, 보르헤스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순수한 의미의 창작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문학을 생산 혹은 재생산 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토리 전개과정에 다양한 형식의 미로(迷路)를 차입하고 있는데,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을 읽으면서는 주인공이 중국출신인 까닭인지 젊었을 적에 빠져들었던 중국무협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미로의 진법 혹은 미로기관을 떠올렸습니다. 단순하게 막대기 하나는 던져놓은 미로의 진에 갇힌 사람은 미로의 진을 탈출할 수 있는 보법을 모르면 아무리 헤매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서양에서도 미로의 역사가 참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스왕이 반은 소이고 반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가두어두었던 미궁(Labyrinth)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서양에서도 미로에 대한 개념이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 등장하는 미로는 공간적인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시간적 이미지의 미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춘은 작가인 조부의 작품세계를 완벽하게 해석하게 된 중국학자 앨버트를 살해하여 뉴스화함으로써 독일에게 공격목표를 알리는 스파이활동을 하기로 합니다. 한편 앨버트는 유춘이 자신을 살해하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킬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맞아들여 조부에 관하여 설명하고 결국 유춘이 쏘는 총을 맞게 됩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행동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미로는 공간적 개념보다는 시간적 개념이 적용된 것으로 요즈음 방영되는 드라마 <닥터 진>에서 차용하고 있는 타임슬립을 통한 시간여행의 개념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또한 워쇼스키형제가 감독한 1999년작품 <매트릭스>에서 시간과 공간이 복합적으로 얽혀드는 보르헤스의 미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과 나침반’에서도 미로의 개념을 차입하고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미로는 단순하면서도 상황을 복잡하게 이끌고 있습니다. 뢴로트탐정과 범죄자 샤를라트의 지적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추리소설 양식의 ‘죽음의 나침반’에서는 자신과 동생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뢴로트에게 복수를 하려는 샤를라트가 살인사건이라는 함정을 만들어가면서 뢴로트를 마지막 범행장소로 이끌어 들이는데 성공하는데, 그 과정을 미로찾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미로에 있는 세 개의 선은 너무 많아. 나는 단 하나의 직선으로 된 그리스의 어느 미로에 대해 알고 있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 직선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잘것없는 탐정도 충분히 길을 잃을 수 있을거야.(183쪽)”

샤를라트는 삼각형을 이루는 장소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사건을 통해서 뢴로트를 최종 범행장소로 쉽게 이끌어 들이는데, 그 네 번째 장소가 마름모꼴을 완성하는 삼각형 꼭지점의 대칭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 하나의 직선으로 된 미로의 의미는 바로 삼각형의 밑변을 이루는 직선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놀라운 것은 보르헤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면 뢴로트와 샤를라트가 동일인일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내 단편 「죽음과 나침반」을 영화로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이상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름까지 혼동된다. 한 사람은 ‘로트’이고 다른 사람은 샤를라흐, 즉 붉은색과 주홍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감독에게 알려주어 한 배우가 두 배역을 맡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살인만 있는 게 아니라 자살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좌에서 저도 제기를 했습니다만,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을 미러 이미지로 설명하기도 한답니다.

 

저자가 차용하고 있는 미로의 다양성은 장치조차도 없는 미로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바로 <알레프>에 실려 있는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에 등장하는데, 그곳에는 올라갈 계단도 없으며 힘들게 열어야 하는 문들도 없고, 돌아다녀야 할 진저리나는 복도들도 없으며 당신의 길을 막을 벽들도 없는 곳입니다. 어디일까요? 바로 사막 한가운데였습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또 주목할 개념은 도서관입니다. 1955년 페론정권을 무너뜨린 새 정부가 보르헤스를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한 이래 보르헤스는 18년 동안 도서관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책 한권을 뒤적거리다가 책으로 가득한 모든 책장들을 쓸모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바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언어구조와 스물다섯개의 철자 기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변형체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허튼소리는 하나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의 상상 속에서 도서관은 우주로까지 영역을 넓혀갑니다.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97쪽)”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우주의 모든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보면서도 ‘바벨’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바벨탑이 무너진 이후로 나타난 언어의 다양성으로 혼돈에 빠진 인류가 도서관이라는 장소를 통하여 정보와 개념의 통일을 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이해를 확대하는 듯한 점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클레멘티눔 도서관이 소장한 사십만 권 중의 한 책에 있는 한 페이지의 글자들 중 하나에 있어요. 내 부모들과 내 부부들의 부모들은 그 글자를 찾았지요. 나도 그것을 찾느라 눈이 멀어버렸소.(191쪽)” 보르헤스는 스스로를 문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찾는 구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통하여 우주로까지 사유의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만, 우주로 확대시킨 미로의 개념이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는 미로이면서도 정돈된 우주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어 지구의 또 다른 세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중우주의 개념은 <알레프>에 담긴 단편 ‘알레프’에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이면서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모든 별들과 모든 등불들, 모든 빛의 원천들도 담겨있다는 현대물리학의 초끈이론에서 설명하고 있는 다중우주가 바로 알레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초끈이론에 관하여는 [북소리]에서 소개한 <우주의 풍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7504>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픽션들>을 읽게 된 계기가 된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보르헤스가 그리고 있는 기억의 천재 이레네오 푸네스는 열아홉살이 되던 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의식을 잃었는데, 의식을 회복하고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사소한 기억까지도 명확하게 되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기억에 관한한 놀라울 능력을 가진 푸네스지만, 그에게는 일반적인 사고, 즉 플라톤적 사고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즉 얻은 정보를 통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일한 개체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면 별도의 정보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즉, 푸네스의 놀라운 능력은 그저 단순한 정보수집체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푸네스의 기억능력은 <기억전달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1323>의 조너스가 엄청난 기억력뿐 아니라 기억을 종합하여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통합사고능력이 결여된 기억은 오히려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왜 우리는 보르헤스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은 송병선교수님은 보르헤스의 작품들이 현대의 고전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보르헤스의 소설이 다원성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역사의 측면을 여러 상이한 관점 아래서 파헤칠 수 있으며, 이런 역사의 다원성을 통해 획일화를 추구하는 종래의 정치관과 공식 역사관의 허구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를 읽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더의 7가지 언어 - SERI CEO 인기 스피치 강좌
김은성.김재원 지음 / 알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구슬 하나하나도 보기에 참 좋지만 이것들을 꿰어 놓으면 그 아름다움이 더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앉아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아내로부터 받곤합니다. 아마도 제가 아이들하고 대화가 없다는 지적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렸을 적에 꼭 밥상머리에서 야단을 맞거나 하던 때 속으로 불편하였던 기억 때문에 만들어진 버릇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말로서 전달하지 않으면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고 계신 두 분께서 말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조직의 리더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라면 더우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습니다. 바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CEO를 대상으로 하는 인기 스피치 강좌를 이끌고 있는 김은성 아나운서님이 동료 김재원 아나운서와 함께 만든 <리더의 7가지 언어>입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부담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요청을 받게 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리뷰를 쓰기 위해서 기억을 정리하다 보니 2004년엔가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의 연구소를 방문하였을 적에 열렸던 만찬회에서 갑작스럽게 만찬사를 요청받았던 때가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공식행사에서는 미리 준비한 A4용지 한 장분량의 축사를 6시간 정도 연습한 끝에 일본어로 읽어 내려갈 수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만찬사를 영어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대표하고 있던 기관과 방문기관 사이에 이어져온 긴밀한 관계가 앞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방문과정에서 보여준 환대에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진심을 담아 말씀드렸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구름위에 떠있는 기분으로 정신없이 어떻게 마무리를 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는데, 동행하셨던 황우석교수께서도 좋은 만찬사였다고 칭찬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미리 준비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누구나 공통적으로 당면하는 일이지만 특히 리더라면 세상과 소통이 중요하고, 소통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크고 효과이면서도 위험요소가 많은 방법이 바로 언어, 즉 말입니다. 저자들은 동서고금을 살펴 성공한 리더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정리하여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콕 짚어주고 있습니다. 마치 족집게과외 하듯이 말입니다. 다양한 사례가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용되고 있고 그 사례를 다시 쉽게 설명하고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말 부러워하는 스타일입니다. 말도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쓰는...

 

저자는 리더들의 언어에서 나타나는 특성을 일곱 가지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자기철학의 언어, 2. 비전의 언어, 3. 명확성의 언어, 4. 공감의 언어, 5. 반응의 언어, 6. 균형의 언어, 7. 언행일치의 언어 등입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덕목이 없습니다만, 역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저자가 제일 앞에 둔 자기철학의 언어가 될 것 같습니다.

 

자기철학의 언어라함은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깨달은 것을 담은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연예 프로그램을 시청하다보면 출연자가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작가가 써준 것이라는 티가 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작가로부터 건네받은 대본을 충분히 읽어 자신의 경험으로 소화하지 못하였거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꾸며내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일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느끼기에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처럼 포장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저자는 자기철학의 언어를 설명하면서 중견기업의 대표로부터 윈스턴 처칠, 버락 오바마의 사례를 들어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듣는 이에게 어떠한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의 출발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자기 경험과 추억은 말을 하기 위한 최고의 재료이며 콘텐츠이다.(21쪽)”

 

그밖에도 저자들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에 모두 요약한다는 것은 제가 좋아하는 리뷰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어떻든 제가 맡고 있는 리더로서의 역할에 도움이 될 믾은 것들을 이 책을 통하여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등대로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숙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의 리뷰를 쓰기 전에 박인희씨의 <목마와 숙녀>를 찾아 듣습니다. 젊었을 적 가을이 되면 음악다방에서 참 많이 듣던 곡입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등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을에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이야기가 안타까워서 였던가? 아니 어쩌면 바람에 쓰러진 술병에 별이 떨어지고 가을바람소리가 쓰러진 술병속에서 목메여 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박인희씨의 노래로 익숙한 버지나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게 된 것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에서 자아의 인식과 의식의 흐름을 화두로 삼아 신경학적 논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플 때 사람이 어떻게 여러 다른 인물로 쪼개지는가는 신기한 일이다.(조나 레러,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298쪽)”라고 술회할 정도로 자신의 병 덕분에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렇게 인식한 사람 마음의 변덕스러움과 다중성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라는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3부로 이루어진 <등대로>에서 작가는 19세기 말 근대사회가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영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런던에 사는 램지가 사람들이 스코틀랜드 서쪽에 있는 헤브리스제도의 한 섬에 있는 별장에서 초대한 손님들과 머무는 동안, 등장인물들이 하는 생각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부는 램지씨의 별장에서 건너다보이는 등대를 방문할 계획에 들뜬 자녀들에게 날씨가 악화될 것이므로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램지씨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램지부인의 비중이 가장 많은데 2부에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10년 동안 사회적 변화와 램지가에 일어난 사건 그리고 별장이 변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3부에서는 남아 있는 가족들 가운데 별장에 모인 램지씨와 제임스 그리고 캔이 등대를 찾아가고 1부에서 등장했던 화가 릴리가 다시 손님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쓰고 있는 철학백과사전의 Q항목에 묶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램지씨와 그런 남편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과 평소 엄격한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는 남편에 대한 증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보이는 램지부인의 복잡한 성품이 드러나는 그녀의 생각들이, 마치 등대에서 오는 빛이 집안을 훑고 지나가듯 교차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1부에서 램지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등대로 가려는 계획을 들은 램지씨가 날씨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장면과 3부에서 드디어 램지씨와 등대로 가는 배 안에서도 막내아들 제임스가 아버지 램지씨에 대한 살해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별도 설명은 없었습니다만, 버지이나 울프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시사한다 생각합니다만, 결국은 램지씨가 제임스가 등대로 가는 배를 잘 조종하였음을 칭찬하면서 갈등이 해소되고 있는 것을 보면 램지씨의 엄격한 자녀훈육관의 면모로 자녀들이 아버지로부터 인정(認定)받기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에고 트릭;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3764>에서 줄리언 바지니는 자아의 본질을 정리하면서,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여러 요소들의 묶음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만,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에 벌써 우리의 자아가 영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한순간 지속될 뿐이며 ‘파도 위의 구름처럼’ 지나가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가에게 ‘등대는 무슨 의미였을까?’를 붙들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읽어갔습니다만, 정작 등대에 갈 계획을 세웠던 램지부인은 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고 램지씨와 제임스 그리고 캔이 3부에서 등대에 이르게 되고 이들의 의식 속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있던 의식의 숙제가 풀리게 됩니다. 한편 이들이 등대로 향하는 동안 역시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인간이란 기계는 그림을 그리거나 감정을 느끼기엔 정말 비참할 정도로 비효율적인 기계(279쪽)”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민을 하던 릴리 역시 마지막 순간에 그림을 완성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그녀는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흐릿해 보였다. 마치 두 번째로 그것을 분명히 본 듯 그녀는 거기 중앙에, 갑자기 온 힘을 다해 선을 하나 그었다. 그림이 완성되었다.(3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고 트릭 - ‘나’라는 환상, 혹은 속임수를 꿰뚫는 12가지 철학적 질문
줄리언 바지니 지음, 강혜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살다보면 갑자기 ‘내가 누구인가?’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라고들 합니다만, 정체성(正體性)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 또는 그 특성을 가진 존재.(다음 사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정체성(正體性)’이란 사람이 ‘환경이나 사정이 변해도 자기가 어떠한 변하지 않는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 또는 ‘그렇게 깨달아진 변하지 않고 독립적인 자신의 존재’라고도 하지만, 대상이 개인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사회집단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체성이란 다른 의미에서 자신을 타인과 구분하는 특성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특성을 형성하는 주체, 즉 자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확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란 “사고, 감정, 의지, 체험, 행위 등의 여러 작용을 주관하며 통일하는 주체.(다음 사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심리학에서 자아(ego, 自我)란 “기억·평가·계획하고 여러 방식으로 주변의 물리적·사회적 세계에 반응하며 그 속에서 행동하는 부분이다.(다음 브리태니커 사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발달된 자아는 특히 위협·질병 및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전생애에 걸쳐 변화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변하지 않는 특성이라고 한 정체성의 정의와 다소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에고 트릭>은 영국의 대중철학자 줄리언 바지니가 ‘나는 왜 나인가?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자아의 핵심이 존재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하여 철학뿐 아니라, 심리학, 신경과학, 종교, 사회학 등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사유한 결과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면 사랑하는 가족이 치매 혹은 중증의 신경질환을 앓아 기억이나 인식능력 등과 같은 개인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퇴화되어 버린 경우에 현재 질병으로 변한 모습의 이 사람이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했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런 분들이 당면하고 있는 의문에 정해진 답은 아닐 수 있지만, 가까운 답을 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자아가 무엇인지를 찾고 있습니다. 자아와 육체와의 관계, 뇌의 구조와 기능을 살펴 자아와의 관계를 따지고 있으며, 나아가 기억과 자아와의 관계, 실재여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영혼과 자아의 관계를 따져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중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고려하여 다중적 자아라는 개념과 소속된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자아에 대하여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올바른 자아관, 즉 ‘자아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본질을 담고 있는 어떤 것 혹은 특정 부분은 없다. 사람의 육체, 뇌, 기억은 모두 우리 정체성에 중요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사람의 정체성이 머무는 자아의 핵심, 즉 진주가 아니다. 둘째, 사람은 비물질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이는 다른 모든 생물체의 구성요소와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셋째, 진주 관점을 부인하는 것은 자아의식이 하나의 구조물임에 분명하다는 의미다. 우리를 현재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단일한 무엇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 공조하는 몇몇 부분 혹은 사물들로 이루어진 결과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스스로를 동일한 사람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자아의 통일성은 어떤 점에서는 취약하고 한편으로는 강건하다. (…) 우리의 자아의식은 분명 사회적 환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식 자체는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것이지 외부에 뿌리를 두고 있지는 않다.(160쪽)”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1. 자아의 통일성은 심리적 속임수가 만든 결과물이다. 2. 우리는 물질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물질 이상이다. 3. 속성 자체가 변하기에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세 가지 명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를 나로 만드는 변함없는 핵심이 존재한다는 ‘진주 관점’이라고 하는 일반적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묶음에 가깝다는 ‘묶음이론’이라 불리는 관점입니다. 저자는 ‘진주 관점’의 허점들을 제시하면서 ‘묶음이론’이야말로 자아를 보는 올바른 관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미래의 자아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환생이 즉 자아의 생존을 의미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육체의 지속을 의미하는지 논하고 있으며 기술의 진화가 자아를 다시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장수사회에서 야기될 자아의 문제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는 무거운 철학적 주제를 다양한 학문적 영역에서 실제 사례를 인용하여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