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8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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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실종되었던 장서관 사서보조 베렝가리오 수도사가 사체로 발견되는데, 그의 죽음은 묵시록의 예언을 증거하는 듯 보입니다. 세명의 수도사의 죽음이 미궁에 빠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황제측 사절단이 먼저 도착하고 이어서 교황측 사절단도 도착하게 됩니다.

 

교황측 사절단의 일원인 이단심문관 베르나르 기는 경호병을 이끌고 수도원 안팎을 조사하다가 수상한 행적을 벌이는 식료계 살바토레가 마을 여자를 붙잡는 것이 계기가 되어 레미지오 수도사의 과거행적이 들통나게 됩니다. 소형제회에 소속되었다가 돌치니와 함께 반교황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토벌대에 몰리자 돌치니가 잔당에게 전하는 밀서를 휴대하고 탈출한 레미지오가 이 수도원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이 심문을 통해서 밝혀지게 되는데, 이 사건은 교황측과 황제측 사절단의 청빈, 즉 소유에 관한 복음서의 해석을 두고 팽팽하게 맞서던 대립의 기울기를 한순간에 교황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습니다.

 

청빈을 내세우는 프란체스코수도회에서는 개인의 소유에 관하여 재산으로서의 소유와 일상의 소비재로서의 소유로 구분하고 일상의 소비재로서의 소유 이외에 교회의 재산소유를 부정하는 입장인 반면, 교황측은 교회에 소속된 신도들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들어 반박하였습니다. 사실 고래로 문헌의 자구의 해석을 두고 서로 다른 논리가 나오는 경우 쉽게 합일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의 해석을 두고 시작된 설전은 순식간에 상대에 대한 험담으로 발전하여 감정대립이 되고 마는데, 베르나르 심문관이 레미지오를 체포하는 것으로 순식간에 협상은 결렬되고 교황측 사절단은 레미지오를 아비뇽으로 압송하여 떠나게 됩니다.

 

사실 사절단의 협상은 아비뇽으로 대표되는 교황청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청빈을 내세운 수도회를 황제측이 수용하여 극한으로 치닫던 대립을 해소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이나 내막을 보면 협상을 깨뜨리려는 교황 측의 전략이 숨어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수도원에서 내밀하게 일어나는 일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무색할 지경으로 타락의 극치에 이르고 있다 할 지경이라서 종국에는 불어 닥친 파멸이 오히려 필연이었구나 싶습니다.

 

교황측과 황제측 사절단의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본초학자 세베리노가 시약소에서 타살된 채로 발견되어 장서관을 둘러싼 미스테리가 절정으로 치닫게 되지만,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들은 여전히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셜록 홈즈나 포아로 탐정들은 척보면 단서를 꿰뚫어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는 모습에 익숙한 독자 입장에서 답답하다 싶은 순간, 사건은 우연한 순간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윌리엄 수도사의 말처럼 전기를 맞게 됩니다.

 

역시 마지막 무대는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는 장소가 되어야 제격인 것 같습니다. 사건의 실마리는 모든 것이 장서관의 숨겨진 장소 아프리카의 끝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권에서는 장서관의 이미지가 보르헤스의 <픽션들>에서 나오는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권에서 드러나는 장서관의 실제 모습은 오히려 에코가 바벨의 도서관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측면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의 도서관 복도에 붙어 있는 거울은 사물을 복제해서 도서관이 무한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반하여 에코의 장서관에 등장하는 거울은 사물을 왜곡시켜 잠입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미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고, 도서관은 빵이나 피라미드 혹은 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는 활용하기에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지만, 에코는 이 수도원으로 대표되는 도서관이 심지어는 수도사들마저도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를 감추는, 일종의 정보를 왜곡시키는 곳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 그 서책을 묻어버리고 있구나.(712쪽)” 문제는 금서로 지정되는 기준은 복음서의 해석에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그 해석은 수도원장과 사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소수의 편향된 철학에 따라서 대중의 권리가 제한되는 불합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미의 이름>에서 등장하는 장서관과 호르헤 수도사는 보르헤스에 대한 에코의 헌정이라고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보르헤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어, ‘바벨의 도서관’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서책에 대한 보르헤스와 에코의 기호학적 해석을 인용합니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이 서로 다를지라도 동일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즉, 띄어쓰기 공간과 마침표, 쉽표, 그리고 스물두 개의 철자기호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픽션들 102쪽)”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반면, 에코는 “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 사상(事象)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아무런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서책은 벙어리나 다를 바 없다.(7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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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 자연학자 이브 파칼레의 생명에 관한 철학 에세이
이브 파칼레 지음, 이세진 옮김 / 해나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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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6월 우리 과학계는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한국이 창조주의자의 요구에 굴복하다)”라는 제목의 서울발 기사로 시끄러웠습니다. “교과서진화론 개정 추진위원회”라는데서 압력을 가해서 우리나라 일부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에서 시조새 부분이 삭제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교육과학기술부가 교과서의 내용을 출판사에 맡긴 때문이라 합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490274).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에 해당하는 존재로 진화론의 상징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조새의 화석에 대한 논란이나 조류의 진화에 대하여 몇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진화의 상징이라는 시조새 화석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므로 진화론 역시 논란이 많은 이론일 뿐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려는 창조주의자 혹은 지적설계론자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이 진화론을 지지하는 과학계의 인식인 것 같습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627019).

 

학생들의 교과과정을 두고 진화론과 창조론이 뜨겁게 맞붙는 나라는 미국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전과학을 비롯하여, 천문과학, 지질학, 고생물학, 생화학 등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과학적 증거들은 우주의 생성을 비롯하여 생명의 탄생과 진화이론을 강화시켜오면서 창조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면서 그동안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을 퇴출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해 온 창조론 지지세력은 이제 교과과정에서 공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는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9333>에서 2000년대 초반 펜실베니아 도버시 법정에서 벌어진 진화론과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의 격돌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2004년 10월 펜실베니아 도버시 교육위원회에서 “학생들에게 다윈의 이론 및 이에 국한되지는 않지만 지적설계론을 포함한 기타 진화에 관한 이론들의 허점/문제를 알게 할 것”이라고 결정한데서 발단되었습니다. 피글리우치교수는 “지적설계론에 관해 간략히 분석해 보니, 이 이론이 초자연적 원인을 끌어들여 베이컨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 접근법을 위반하므로 과학이 아님이 드러났다.”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에서 사이비창조론 혹은 이를 변형한 지적설계론을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한 사이비과학으로 분류하고 있는 마이클 셔머는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9606250>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대비하여 과학적 타당성을 검증하고 있습니다.

 

창조론이 과학계에 제기하는 핵심적인 문제는 생명의 탄생과 우주의 시원에 관하여 분명한 과학적 증거가 있는가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담은 책들을 읽어왔습니다만, 최근 읽은 책으로 기억에 남는 것을 들어보면, <눈먼 시계공;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04835>에서 리처도 도킨스는 바이오모프 모델을 이용하여 진화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전체에 담긴 생물체의 형질에 나타나는 사소한 변화가 자연에 의하여 선택되어 살아남게 되고 그러한 변화가 누적된 결과가 종의 차이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생물학자 제럴드 캘러헌교수는 <감염;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66190>에서 인간의 DNA의 반 이상은 감염에 의하여 인간염색체에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감염을 통하여 인간의 유전자에 삽입된 미생물의 유전자가 인류의 진화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주의 시원과 생명체의 진화를 같이 다룬 대표적인 분은 칼 세이건교수입니다.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69363>이나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7810>에서 태양계의 탄생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하는 순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진화해온 과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천문학을 비롯하여 물리학, 분자 생물학, 진화 생물학, 진화 심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오랜 세월 쌓아올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현생인류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지구상에서 일어난 일을 뒤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우주의 시원과 지구생명체가 진화하는 과정을 다룬 책들은 대부분 과학자들이 쓴 것들이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자연과학을 전공한 분들의 책은 대체적으로 전공용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글이 어렵고 딱딱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소개하는 <신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소르본느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자연학자 이브 파칼레가 쓴 이 책은, 자연과학자가 아닌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본 우주의 시원과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사유의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혀 색다른 책읽기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파칼레는 시선을 태양계 넘어 우주의 시원으로까지 넓히고 있습니다. 빅뱅으로부터 시작된 우주 속에 태양계가 자리를 잡고 지구가 만들어지기까지 천문학을 비롯하여 우주물리학 등 다양한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7억년전 우주의 시원으로부터 인류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루기에는 원고의 분량이 지나치게 방대해진 탓인지 5억 4,200만년전 캄브리아기까지 지구상에 등장한 지구생명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세 가지 근본 관심 가운데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와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두 가지 질문은 <신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를 통해서 그 답을 설명하고 있으며, 마지막 질문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는 후속작인 <인간의 장편소설>에서 다룰 예정이라고 합니다.

 

파칼레는 서문에서 시적이고 반어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이 책을 쓸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티투스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영향으로 받아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생명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는 생명체이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잘것없는 물질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점도 깨닫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파칼레는 우주가 인간의 모태 혹은 활동무대로 쓰이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거부합니다. 즉 창조론은 지구상에 나타난 생명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쌓아올린 오만의 극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주의 기원이라고 할 137억년 전 빅뱅이 일어나는 시기에 “태초에는 말씀도 없고 신도 없었다.(37쪽)”고 일갈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도는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구나”라고 <도덕경>에 적은 노자의 사상에 대하여 “하늘보다 앞서 있었으나 비어 있었고, 아무도 그것이 무엇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니 정말 기가 막힌 직관(66쪽)”이 아닐 수 없다고 탄복하고 있습니다.

 

파칼레는 매 장의 글머리에서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을 인용하고 현대적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원자론과 유물론을 계승한 책으로, 원자가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 공간에서 상호작용하여 모든 사건이 발생한다는 원자론적 우주관을 담은 고전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중간에는 일종의 하이쿠라고 할 만큼 두 세 줄의 짧은 시를 넣어 본문을 요약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빅뱅에 관한 시는 “신 없는 신 / 전부이자 무(無) /말할 수 없는 빅뱅(38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원에 일어난 빅뱅으로부터 소립자들의 작용으로 빛이 생기고 원시 원자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우주가 확산되는 과정을 요약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레너스 서스킨스교수가 <우주의 풍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7504>에서 상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다소 어렵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우주에 물질, 별, 태양, 태양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지구에 생명이 등장하여 진화하는 과정을 손에 쥘 듯 그리고 있습니다.

 

고대 원자론을 확립한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산물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지구라는 행성에 우리가 살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태양계가 은하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지구가 지금의 위치에 만들어진 우연(偶然)이 함께 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시지구에서 생명의 원천이 되는 유기물질이 만들어지고 이들 물질이 생명체로 발전해 나오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읽은 어떤 책보다 구체적입니다. 유기물질로부터 유전물질이 만들어지고 유전물질이 단세포동물이 되고 단세포동물이 다세포동물로 발전하는 과정에는 우연도 작용하였지만, 지구환경의 급변이 계기가 되어 생존을 위하여 마련한 자구책의 결과였다는 설명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하게 된 몇 차례의 전기가 있었다는 것인데, “첫 번째는 137억년전 빅뱅과 함께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로서 한 번 태어났고, 40억년 전에 리보자임과 핵없는 세포로서 다시 한 번 태어났으며, 10억년 전 진핵세포와 성(性)의 출현으로 세 번째 태어났고, 5억 3,000만년 전에 척삭동물 계열이 출현하면서 네 번째 태어났는데,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00만년이 조금 못 되었을 때, 호모(Homo)속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550쪽)”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중심의 사고를 벗어던진 저자는 진화가 특정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존재가 진화(進化)에서 ‘정점’을 찍거나 ‘궁극’이라고 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지구생물들의 정점에 서 있는 인간도 고생대 혹은 중생대에 일어난 대규모 멸종을 통하여 사라진 생명체들처럼 어느 순간 지구를 떠나게 될 운명을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583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에서 보면 태양계에 속하는 위성에 대한 설명이나 캄브리아기에 나타난 생물들에 대한 설명들은 어떻게 보면 사족처럼 느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캄브리아기를 전후해서 등장한 생물들에 대한 설명은 명칭부터 생소한 탓인지 이미지조차 떠올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석연구를 통하여 밝혀진 캄브리아기에 살았던 생물 가운데 상당수는 현존하는 어떤 동물과도 닮은 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유전자변이가 일어나 진화가 시도된 생물군이 살아남지 못한, 즉 지구 생태계로부터 진화를 승인받지 못하고 폐기된 생물일 것이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설명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물론 철학자로서 저자는 아이들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창조론이 여전히 권세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창조주의 의지에서 나왔고, 하느님의 법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교권정치사회에서는 창조론 이외의 다른 이론은 설 자리조차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신론자인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32803>에서도 천지창조에 신의 의지가 개입된 바 없다는 주장을 읽은 바 있습니다만, 이브 파칼레의 <신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에서는 물리학, 천체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유전과학 등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주와 물질,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장대하고 웅장한 대서사시를 철학과 과학 그리고 문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필치로 펼쳐내고 있어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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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8-2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7349
 
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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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골랐습니다. 1932년 태어난 에코는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볼로냐대학교의 교수로, <장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에, 에코 자신의 해박한 인류학적 지식과 현대의 기호학 이론이 무르녹아 있는 놀라운 지적 추리 소설”이라고 소개하도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서 프랑스 사제 뱅자맹 발레가 불어로 번역한 아드송의 수기를 우연히 입수하고 번역까지 마쳤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잃어버리고 나서 그 내용의 진위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드송의 행적을 뒤쫓으면서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968년 얻은 스토리를 1980년에 책으로 내는 것에 대하여는 “1968년 당시에는, 작가는 모름지기 현실 참여를 위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식자들(식자들 고유의 권리를 되찾은)은 쓴다는 작업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22쪽)”라는 설명으로 작가관의 변화가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장황하게 스토리를 소개하는 일이 스포일러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출판사에서 요약한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그를 수행하는 아드소와 함께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잠입한다. 수도원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연쇄 살인이 〈묵시록〉의 예언에 따라 벌어지고 있었고, 사건의 열쇠를 쥔 책은 그들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미궁을 꿰뜷는 거대한 암호를 풀어낸 윌리엄은 어둠 속에서 수도원을 지배하는 광신의 정체를 응시하게 되는데…….”

 

시대적 배경은 1309년 교황 클레멘스5세가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긴 ‘아비뇽의 유수’라고 부르는 때입니다. 클레멘스5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요한22세와 프랑스가 교황성에 간섭하는데 반발하는 영국과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황제가 대립하는 가운데 양측이 협상이 필요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수기를 적은 아드소는 루트비히측에 속하는 윌리엄수도사를 수행하는 수련사로, 협상장소로 선정된 아페니노산맥의 어느 기슭에 있는 사원에 먼저 도착하게 되는데, 윌리엄수도사는 도착하는 날부터 발생하는 수도사들의 죽음을 규명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장미의 이름>의 전편에서는 당시 교황청의 전횡에 반발하여 청빈을 내세우는 교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나고 교황청은 이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화형에 처하는 대립상황에 대하여 윌리엄수도사를 비롯하여 호르헤수도사 등 원로 수도사들의 입을 빌어 전하고 있어 당시의 종교계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교황청의 부조리에 대하여 “루트비히 황제가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아비뇽에 진치고 앉아 사악한 왕위찬탈과 성직매매를 일삼으며 사도를 욕되게 한 저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척결하고...(30쪽)”이라고 적시하고 있으며, 성 프란체스코가 나타나 교회의 계율과 모순되지 않는, 청빈에 대한 사랑을 가르친 이래 프란체스코회를 비롯하여 청빈을 내세우는 수도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리하다 보니 성격이 모호한 집단도 없지 않아서 이단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운 국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며, 억울하게 이단으로 몰려 처형된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수도원은 엄청난 규모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고, 수도사들이 이를 필사하거나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건이 일어나는 발단이 되는 셈입니다. 중세 수도원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주로 그리스에서 생산된 저술들을 넘겨받아 이를 보관하고 필사하여 정보를 배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보권력을 쥐고 있었던 셈입니다. 수도원의 이런 정보독점은 독일의 구텐베르크(?1398~1468)가 활판 인쇄술을 개발하고 1460년경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해 출판한 것을 계기로 정보혁명을 계기로 일반의 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드소들이 방문하는 수도원은 “귀 수도원의 장서관은, 바그다드에 있는 서른여섯개의 장서관, 비지르 이븐 알알카미의 1만 권의 필사본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빛이라는 사실도 알고...(75쪽)”라는 윌리엄수도사의 헌사처럼 상당한 규모에 이르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필사 등을 담당하는 수도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장서관은 오직 사서계의 수도사만이 출입이 허용되고 있으며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인 것”이라는 수도원장의 설명처럼 복잡한 미로구조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수도원의 장서관을 이토록 폐쇄적으로 운영해온 원장의 전횡에 반발하는 수도사들은 장서관을 공개하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게 하는 상황은 그저 장서관이라는 미로의 성채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축적되는 장소로서의 장서관의 이미지와 그 구조가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픽션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8043>에 수록된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이 떠오릅니다. “도서관은 하나의 구체이며, 그 구체의 정 한가운데는 어떤 종류의 육각형이건 육각형이고, 그것의 원주로는 접근할 수 없다.(픽션들 99쪽)”는 알쏭달쏭한 구절이 생각나고, 장서들을 배치하는 기호들, 혹은 책에 쓰여 진 글자 역시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기호 혹은 암호라는 설명이 이 수도회의 장서관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느낌이 듭니다.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완전하고 비밀스러운 보물의 주인이라고 느꼈다.(픽션들 103쪽)”는 구절에서 장서관을 지키려는 수도원장의 굳은 결심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기호학자로서 에코 역시 보르헤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장미의 이름>의 상권에서는 세명의 수도사가 죽음을 맞거나 실종된 상황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아델모수도사와 베난티오수도사의 죽음은 요한의 묵시록의 계시처럼 보일 뿐 아니라 장서관의 미로에 등장하는 작은 방들에도 요한 묵시록에서 인용한 구절이 적혀있는 것처럼 묵시록과 베난티오가 남긴 암호로 대표되는 기호의 의미가 하편에서 밝혀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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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 소돔과 고모라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네 번째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서 창세기편에 나오는 죄악이 극에 달한 악명의 도시로 유황과 불로 멸망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죄악은 폭력을 일삼고 성적문란상은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물적 본능에 충실하여 쾌락을 뒤쫓는 삶이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죄의식이 사라져 오히려 죄악을 자랑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되돌릴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시고 유황과 불로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프루스트가 그리고 있는 19세기 당시의 프랑스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될 정도로 도덕의식이 무너지고 있었을까요? 지금까지의 이어진 이야기로 보아서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당시에 이미 공공연해지고 있었지만, 누가 나서서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던 동성애를 작품소재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형태의 애정행각이었을 것 같습니다. 프루스트 역시 독자들로부터 비난은 물론 친지들로부터 절교를 당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발표한 것이라 합니다. 결과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격려를 받았다고 하는데, 사회적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느새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나올 정도로 공공연해지고 있고, 그들을 성소수자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동성애적 경향에 선천적 요인이 작용한다는 의학적 근거들이 나오고 있어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만, 그들의 애정행태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제목에 들어가 있는 소돔은 남성 동성애를 의미하고 고모라는 여성 동성애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작가가 그리고 있는 사교계 활동에서 만난 동성애자들의 행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성애라는 주제를 펼쳐놓기 전에 곤충이 매개하는 꽃의 수태에 관한 식물학적 지식을 끄집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암꽃은, 만약 벌레가 오면, 그 암술대를 요염하게 휘어, 벌레가 들어오기 쉽도록, 새침하면서도 정열적인 색시처럼,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 길을 줄여 준다.(9쪽)” 작품해설에서는 프루스트가 성도착 경향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등장하는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야기는 지난 편에서 초대여부로 긴가민가하던 게르망트 대공 부인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그린 다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에 등장했던 발베크에서 생긴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교 모임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느 정도 심드렁해졌다 싶습니다만, 새로 등장한 주제인 동성애에 관한 저자 나름대로 관찰한 기록은 흥미로운 부분도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1)’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쥐피앙과 사를뤼스씨의 관계를 숨어서 관찰하는 모습이 흥밋거리에 대한 저자의 호기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건 하나로 아쉬웠던지 끝부분에 이르러서 샤를뤼스씨가 파리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저자도 잘 아는 샤를리 모렐과 수작을 붙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들끼리 통하는 신체언어가 있어 그들의 눈에는 같은 동성애자를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모양입니다.

 

여성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1)’의 뒷부분에서 다루고 있는데, 특히 전편에 다시 등장해서 ‘나’와 긴밀한 관계가 열리게 되는 알베르틴이 친구 앙드레와 왈츠를 추는 장면에서 그 기미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렇다면 알베르틴은 동성애와 이성애 모두에 열려있는 셈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알레르틴보다는 블로크의 누이동생이 전직 여배우와 동성애적 행위를 공공연하게 벌이는 모습을 더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데, 사실은 ‘스완네집으로’에서 이미 몽주뱅에서 뱅퇴유 아가씨가 그녀의 여자친구와 사디즘적 행위를 묘사하여 동성애에 대한 저자의 관심을 드러낸 바 있기도 합니다. 알베르틴의 경우는 동성애자로 보이는 여성의 유혹을 받는다는 등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언급은 ‘게르망트쪽’에서도 이미 샤를뤼스씨가 ‘나’를 집으로 불러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의 동성애적 취향 가능성을 드러내는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다루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와는 전혀 거리가 있는 주제가 되겠습니다만, ‘게르망트쪽’에서 다루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할머니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낸 반면 할머니의 장례과정을 너무 간략하게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편에서 어머니와 함께 간 발베크의 호텔에 들었을 때, 갑자기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나의 전인간적인 전복. 초저녁부터, 피로 때문에 심장이 뚝딱거려 괴로운 것을 꾹 참으면서, 나는 구부려 천천히 신중히 신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편상화의 첫 단추에 손을 대자마자, 뭔지 모를 신성한 것의 출현으로 가득 차 나의 가슴은 부풀어, 흐느낌에 몸 흔들리고, 눈물이 눈에서 주르르 흘러나왔다.(207쪽)” 지금까지 애도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죽음이 뒤늦게 현실이 되면서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인데, 역시 기억의 심연에 묻혀진 할머니에 대한 생각들이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 더, 여기에서 ‘나’는 발베크의 호텔 지배인을 빌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프랑스어의 용례를 바로 잡는 열정을 볼 수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우리글 왜곡현상을 바로 잡는데 좋은 비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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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밀란 쿤데라 전집 7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쿤데라의 소설을 읽다보면 난수표의 숫자들을 연결하듯 해서 집중해도 의미가 쉽게 정리되지 않은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불멸>이 그런 경우였는데, 그 독특한 구조 때문에 작가의 뜻이 쉽게 붙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두 일곱편의 이야기들은 마치 독립된 단편소설처럼 읽히기 시작하지만, 어디선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팁이 숨겨져 있습니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큰 줄기는 쿤데라가 직접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데, 현대 파리의 헬스클럽 실내수영장 앞에서 아베나리우스교수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마주친 예순 근처의 부인으로부터 아녜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을 하나 둘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녜스와 남편 폴, 아녜스의 동생 로라와 그녀의 애인 베르나르 베르트랑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큰 줄기 사이에는 괴테의 주변을 끊임없이 돌고 있는 베티나 브렌타노로 인하여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그리고 있는데, 저자는 소설의 제목이 되고 있는 <불멸>의 의미를 괴테의 말을 빌어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81쪽)” 쿤데라는 자신의 고향 모라비아의 기억을 떠올려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생각하는 불멸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또한 쿤데라는 사후세계에서 괴테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만나 불멸의 존재가 된 사람이 세인의 갑론을박으로 얼마나 불편한지 따지기도 합니다.

 

쿤데라가 논한 불멸의 의미를 새기다 우연히 소설가 오정희선생님께서 조선일보의 [101 파워클래식]에서 박경리선생님의 <토지>를 읽은 느낌을 “원고지 4만 장에 ‘뭇생명’ 담고… 박경리는 그렇게 ‘불멸’이 되었다.”라는 제목으로 적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오정희선생님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또한 떠나고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도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한 세계는 살아 숨 쉰다. (…) 필멸의 작가는 그가 창조한 세계로서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리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세인들이 불멸의 존재가 된 작품은 잊고 작가의 시시콜콜한 삶을 떠들게 될 것을 우려하는 듯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책들이 불멸하리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죠.(345쪽)”

 

작가는 메인 스토리와 연결되는 보조 스토리를 넘나들면서 다양한 영역의 역사적 인물들을 이끌어  이고 있습니다. 아녜스와 로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를 인용한다거나, 앞서 언급한 헤밍웨이를 비롯해서 소설가 로맹 롤랑,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폴 앨뤼아르, 음악가 베토벤에 이르기까지...(이런 분위기는 보르헤스의 단편들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쿤데라는 이들을 인용하는 것은 괴테와 베티나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들은 괴테에게 향하는 베티나의 감정이 사랑이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지만 쿤데라는 그녀를 쇠파리같이 귀찮은 존재였다는 괴테의 입장에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매개가 되어 괴테는 “베티나가 그를 실제로 사랑했으며, 그녀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부당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327쪽)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인물인 아녜스는 네 번째 이야기가 되는 ‘호모 센티멘탈리스’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충격을 안겨줍니다. 이런 이야기의 진행은 아녜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폴과 로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녜스가 끔찍하게 죽은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로라가 고통에 짓눌린 폴을 방문했다. ‘폴, 이제 이 세상엔 우리뿐이군요.’하고 그녀가 말했다.(328쪽)” 사실 로라는 형부 폴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언니의 존재 때문에 접게 된다는 느낌을 여러 번 시사하고 있습니다. 폴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마지막 이야기에 등장하는 루벤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파리를 방문할 때면 만나던 류트의 여인이 바로 아녜스였다는 점도 놀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話者)의 역할을 하고 있는 쿤데라는 작품 곳곳에 직접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카메오로 등장하듯이 말입니다. “술집 주인이 말했다. ‘쿤데라 선생은 좀 늦을 겁니다. 기다리는 동안 기분전환이나 하라고 이 책을 두고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폴리오’라는 보급판으로 발행된 나의 소설 <삶은 다른 곳에>를 그에게 내밀었다.(250쪽)”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자신의 소설에 대하여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355쪽)”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도 직접 등장(?)하여 “소설은 사이클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해.(382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주고 싶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또한 <농담>의 성격에 대하여도 “소설 속의 소설이고,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것(382쪽)”이라고 말하면서 이 소설의 제목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등장인물 사이에 복잡하게 펼쳐지는 복선과 미로찾기에 흥미있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할 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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