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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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골랐습니다. 1932년 태어난 에코는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볼로냐대학교의 교수로, <장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에, 에코 자신의 해박한 인류학적 지식과 현대의 기호학 이론이 무르녹아 있는 놀라운 지적 추리 소설”이라고 소개하도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서 프랑스 사제 뱅자맹 발레가 불어로 번역한 아드송의 수기를 우연히 입수하고 번역까지 마쳤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잃어버리고 나서 그 내용의 진위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드송의 행적을 뒤쫓으면서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968년 얻은 스토리를 1980년에 책으로 내는 것에 대하여는 “1968년 당시에는, 작가는 모름지기 현실 참여를 위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식자들(식자들 고유의 권리를 되찾은)은 쓴다는 작업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22쪽)”라는 설명으로 작가관의 변화가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장황하게 스토리를 소개하는 일이 스포일러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출판사에서 요약한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그를 수행하는 아드소와 함께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잠입한다. 수도원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연쇄 살인이 〈묵시록〉의 예언에 따라 벌어지고 있었고, 사건의 열쇠를 쥔 책은 그들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미궁을 꿰뜷는 거대한 암호를 풀어낸 윌리엄은 어둠 속에서 수도원을 지배하는 광신의 정체를 응시하게 되는데…….”

 

시대적 배경은 1309년 교황 클레멘스5세가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긴 ‘아비뇽의 유수’라고 부르는 때입니다. 클레멘스5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요한22세와 프랑스가 교황성에 간섭하는데 반발하는 영국과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황제가 대립하는 가운데 양측이 협상이 필요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수기를 적은 아드소는 루트비히측에 속하는 윌리엄수도사를 수행하는 수련사로, 협상장소로 선정된 아페니노산맥의 어느 기슭에 있는 사원에 먼저 도착하게 되는데, 윌리엄수도사는 도착하는 날부터 발생하는 수도사들의 죽음을 규명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장미의 이름>의 전편에서는 당시 교황청의 전횡에 반발하여 청빈을 내세우는 교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나고 교황청은 이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화형에 처하는 대립상황에 대하여 윌리엄수도사를 비롯하여 호르헤수도사 등 원로 수도사들의 입을 빌어 전하고 있어 당시의 종교계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교황청의 부조리에 대하여 “루트비히 황제가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아비뇽에 진치고 앉아 사악한 왕위찬탈과 성직매매를 일삼으며 사도를 욕되게 한 저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척결하고...(30쪽)”이라고 적시하고 있으며, 성 프란체스코가 나타나 교회의 계율과 모순되지 않는, 청빈에 대한 사랑을 가르친 이래 프란체스코회를 비롯하여 청빈을 내세우는 수도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리하다 보니 성격이 모호한 집단도 없지 않아서 이단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운 국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며, 억울하게 이단으로 몰려 처형된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수도원은 엄청난 규모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고, 수도사들이 이를 필사하거나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건이 일어나는 발단이 되는 셈입니다. 중세 수도원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주로 그리스에서 생산된 저술들을 넘겨받아 이를 보관하고 필사하여 정보를 배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보권력을 쥐고 있었던 셈입니다. 수도원의 이런 정보독점은 독일의 구텐베르크(?1398~1468)가 활판 인쇄술을 개발하고 1460년경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해 출판한 것을 계기로 정보혁명을 계기로 일반의 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드소들이 방문하는 수도원은 “귀 수도원의 장서관은, 바그다드에 있는 서른여섯개의 장서관, 비지르 이븐 알알카미의 1만 권의 필사본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빛이라는 사실도 알고...(75쪽)”라는 윌리엄수도사의 헌사처럼 상당한 규모에 이르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필사 등을 담당하는 수도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장서관은 오직 사서계의 수도사만이 출입이 허용되고 있으며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인 것”이라는 수도원장의 설명처럼 복잡한 미로구조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수도원의 장서관을 이토록 폐쇄적으로 운영해온 원장의 전횡에 반발하는 수도사들은 장서관을 공개하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게 하는 상황은 그저 장서관이라는 미로의 성채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축적되는 장소로서의 장서관의 이미지와 그 구조가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픽션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8043>에 수록된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이 떠오릅니다. “도서관은 하나의 구체이며, 그 구체의 정 한가운데는 어떤 종류의 육각형이건 육각형이고, 그것의 원주로는 접근할 수 없다.(픽션들 99쪽)”는 알쏭달쏭한 구절이 생각나고, 장서들을 배치하는 기호들, 혹은 책에 쓰여 진 글자 역시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기호 혹은 암호라는 설명이 이 수도회의 장서관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느낌이 듭니다.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완전하고 비밀스러운 보물의 주인이라고 느꼈다.(픽션들 103쪽)”는 구절에서 장서관을 지키려는 수도원장의 굳은 결심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기호학자로서 에코 역시 보르헤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장미의 이름>의 상권에서는 세명의 수도사가 죽음을 맞거나 실종된 상황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아델모수도사와 베난티오수도사의 죽음은 요한의 묵시록의 계시처럼 보일 뿐 아니라 장서관의 미로에 등장하는 작은 방들에도 요한 묵시록에서 인용한 구절이 적혀있는 것처럼 묵시록과 베난티오가 남긴 암호로 대표되는 기호의 의미가 하편에서 밝혀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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