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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 소돔과 고모라 1 ㅣ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네 번째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서 창세기편에 나오는 죄악이 극에 달한 악명의 도시로 유황과 불로 멸망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죄악은 폭력을 일삼고 성적문란상은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물적 본능에 충실하여 쾌락을 뒤쫓는 삶이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죄의식이 사라져 오히려 죄악을 자랑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되돌릴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시고 유황과 불로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프루스트가 그리고 있는 19세기 당시의 프랑스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될 정도로 도덕의식이 무너지고 있었을까요? 지금까지의 이어진 이야기로 보아서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당시에 이미 공공연해지고 있었지만, 누가 나서서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던 동성애를 작품소재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형태의 애정행각이었을 것 같습니다. 프루스트 역시 독자들로부터 비난은 물론 친지들로부터 절교를 당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발표한 것이라 합니다. 결과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격려를 받았다고 하는데, 사회적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느새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나올 정도로 공공연해지고 있고, 그들을 성소수자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동성애적 경향에 선천적 요인이 작용한다는 의학적 근거들이 나오고 있어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만, 그들의 애정행태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제목에 들어가 있는 소돔은 남성 동성애를 의미하고 고모라는 여성 동성애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작가가 그리고 있는 사교계 활동에서 만난 동성애자들의 행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성애라는 주제를 펼쳐놓기 전에 곤충이 매개하는 꽃의 수태에 관한 식물학적 지식을 끄집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암꽃은, 만약 벌레가 오면, 그 암술대를 요염하게 휘어, 벌레가 들어오기 쉽도록, 새침하면서도 정열적인 색시처럼,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 길을 줄여 준다.(9쪽)” 작품해설에서는 프루스트가 성도착 경향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등장하는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야기는 지난 편에서 초대여부로 긴가민가하던 게르망트 대공 부인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그린 다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에 등장했던 발베크에서 생긴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교 모임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느 정도 심드렁해졌다 싶습니다만, 새로 등장한 주제인 동성애에 관한 저자 나름대로 관찰한 기록은 흥미로운 부분도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1)’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쥐피앙과 사를뤼스씨의 관계를 숨어서 관찰하는 모습이 흥밋거리에 대한 저자의 호기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건 하나로 아쉬웠던지 끝부분에 이르러서 샤를뤼스씨가 파리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저자도 잘 아는 샤를리 모렐과 수작을 붙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들끼리 통하는 신체언어가 있어 그들의 눈에는 같은 동성애자를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모양입니다.
여성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1)’의 뒷부분에서 다루고 있는데, 특히 전편에 다시 등장해서 ‘나’와 긴밀한 관계가 열리게 되는 알베르틴이 친구 앙드레와 왈츠를 추는 장면에서 그 기미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렇다면 알베르틴은 동성애와 이성애 모두에 열려있는 셈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알레르틴보다는 블로크의 누이동생이 전직 여배우와 동성애적 행위를 공공연하게 벌이는 모습을 더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데, 사실은 ‘스완네집으로’에서 이미 몽주뱅에서 뱅퇴유 아가씨가 그녀의 여자친구와 사디즘적 행위를 묘사하여 동성애에 대한 저자의 관심을 드러낸 바 있기도 합니다. 알베르틴의 경우는 동성애자로 보이는 여성의 유혹을 받는다는 등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언급은 ‘게르망트쪽’에서도 이미 샤를뤼스씨가 ‘나’를 집으로 불러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의 동성애적 취향 가능성을 드러내는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다루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와는 전혀 거리가 있는 주제가 되겠습니다만, ‘게르망트쪽’에서 다루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할머니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낸 반면 할머니의 장례과정을 너무 간략하게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편에서 어머니와 함께 간 발베크의 호텔에 들었을 때, 갑자기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나의 전인간적인 전복. 초저녁부터, 피로 때문에 심장이 뚝딱거려 괴로운 것을 꾹 참으면서, 나는 구부려 천천히 신중히 신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편상화의 첫 단추에 손을 대자마자, 뭔지 모를 신성한 것의 출현으로 가득 차 나의 가슴은 부풀어, 흐느낌에 몸 흔들리고, 눈물이 눈에서 주르르 흘러나왔다.(207쪽)” 지금까지 애도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죽음이 뒤늦게 현실이 되면서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인데, 역시 기억의 심연에 묻혀진 할머니에 대한 생각들이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 더, 여기에서 ‘나’는 발베크의 호텔 지배인을 빌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프랑스어의 용례를 바로 잡는 열정을 볼 수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우리글 왜곡현상을 바로 잡는데 좋은 비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