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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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새롭게 번역하여 소개하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갇힌 여인에 이르렀습니다. 출간된 한참 뒤인 지난해 4월에 소돔과 고모라를 읽었던 것인데도 벌써 1년반이나 지났기 때문에 전편의 상세한 부분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무래도 마지막편이 나온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갇힌 여인은 국일미디어판과는 달리 두 권으로 나누었습니다.


갇힌 여인은 마르셀과 알베르틴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민음사판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에서는 갇힌 여인의 전반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알베르틴은 마르셀이 발베크에 머물 때 바닷가에서 만난 소녀들 무리 가운데 한 명입니다. 마르셀은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고, 드디어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가 만나온 여자들로부터 태어내기 위하여 함께 파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콩브레에 계신 까닭에 큰 어려움 없이 함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에서야 혼전에 동거도 하는 분위기입니다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마르셀이 알베르틴을 집으로 끌어들인 것에 대하여 프랑수와는 아주 못마땅한 듯합니다. 그런데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관계가 주고 못사는 분위기는 아닌 듯합니다. 발베크에서 만났을 때는 한눈에 반했던 것인데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눈에 씐 콩깍지가 벗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면서 옷이니 모자니 구두니 장신구 등을 사주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마르셀은 여성에 금세 빠지기도 하지만, 이내 관심을 거두는 성격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한 사람에게 순정을 바치는 성격은 아닌 듯하다는 것입니다. 마르셀이 처음 관심을 가졌던 스완씨의 딸 질베르트이나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경우도 처음에는 집착하는 듯하다가 시나브로 마음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콩브레로 가는 열차에서 만난 시골처녀에게 눈길이 끌리기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알베르틴의 외출을 감시하면서도 본인은 함께 외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당시 마르셀은 글쓰기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집필을 시작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르셀이 아주 민감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처음부터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갇힌 여인의 시작부를 보면 외부세계의 변화를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세밀하게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와 같은 특성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이야기>라는 장편이 탄생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앞서 몇 차례 언급을 했습니다만, 민음사판은 국일미디어판에 비하여 각주가 더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 단어의 의미라거나 작가의 의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프루스트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인용한 다른 작품의 구절에 대하여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전을 찾아서 해당 구절이 나오게 된 배경이나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각주에 적힌 내용 가운데 갇힌 여인의 구성을 설명한 대목도 있습니다. 마르셀이 알베르틴과 동거한 기간은 6개월 정도인데, 이를 고전 비극의 형식에 따라 5일 동안 있었던 일로 압축하여 적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가면서 책을 다시 읽으면 새롭게 이해되는 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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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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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을 벼른 끝에 읽게 된 책입니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는 서울대학교 병원 암병동에서 근무하시는 종양내과 김범석 교수님이 암환자를 진료하면서 얻은 생각들을 담았습니다. 고인이 된 올리버 색스는 19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진료현장에서의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의사들의 습관이 과학이 발전하면서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서구의 이런 경향과는 달리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진료현장에서의 경험을 전하는 의사들이 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진단기술의 발전으로 암을 조기에 발견하는 경우도 많아졌고, 항암제, 방사선 치료, 면역치료 등 다양한 치료법이 개발되어 암을 완치시키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수명이 늘고, 암이 완치된 이후에도 치료와 관련하여 혹은 별도로 다른 암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암환자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같은 암을 앓는다고 하더라고 환자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암환자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오래 전에 암을 진료하시는 종양내과 교수님의 은퇴를 하고 제가 근무하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오셔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평생 해오던 암환자 진료와는 무관한 일을 해보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위중한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그만큼 부담이 컸던가 봅니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쓴 김범석 교수님 역시 진료현장에서 만나는 환자들이 삶과 죽음으로 살아있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들이었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환자들의 가르침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는데, 어떤 죽음들은 자신을 무겁게 짓눌렀고, 어떤 죽음은 몸시 가슴 아프게 했으며, 또 어떤 삶은 자신을 겸허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 나오는 환자들 대부분은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입니다. 세상에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절대로 없는 것처럼 죽음을 맞는 모습들도 참 다양합니다. 저자는 그런 죽음들을 크게 예정된 죽음 앞에서’, ‘그럼에도 산다는 것은’, ‘의사라는 업’, ‘생사의 경계에서,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사연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어쩌면 특별한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죽음일 뿐 특별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미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옛날 제가 했던 일이기도 해서 사후뇌기증을 하신 폐암환자의 사연에 눈길을 끌었습니다. 죽은 뒤에 자신의 뇌를 뇌은행에 기증을 하는 일인데, 이는 생전에 미리 기증의사를 밝혀 등록을 하신 분이 돌아가셨을 때 바로 뇌은행에 연락을 해서 뇌를 적출해서 뇌은행에 기탁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부담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알츠하이머병 등 치매를 일으키는 질환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방법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분들의 뇌와 정상적인 삶을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뇌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의료환경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서울대학병원 같이 국가가 운영하는 기관에서도 사립병원들과 마찬가지로 박리다매식 진료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의료환경입니다. 그런 상황을 외래환자 진료를 시속 15명으로 내달려야 겨우 맞출 수 있는 형편이고, 환자들이 원하는 시속 5명으로 진료를 하는 경우에는 적자를 면치 못한다고 하니,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의료체계임이 틀림없습니다.


읽다보면 이렇게 죽음을 맞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김범석 교수님이 만난 환자들은 분면 반면교사이거나 정면교사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책을 읽고나면 나의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겠다는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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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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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인이 된 신경과의사 올리버 색스는 아주 오래전에 <깨어남>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깨어남>은 로버트 드 니로 와 역시 고인이 된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롯한 16권의 책을 썼고, 우리나라에도 대부분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어본 책은 <깨어남><오악사카 저널> 2권에 불과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색스를 유명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을 이제야 읽게 되었습니다. 신경과 전문의인 그가 만났던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내용이라서 저로서는 읽기에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제가 요즈음 준비하고 있는 책에서 다루면 좋을 듯한 내용도 눈에 띄었습니다. 책읽기도 인연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글을 쓰는 작가(?)라서인지 들어가는 글의 모두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을 쓸 때 가장 마지막에 결정해야 하는 것은 처음에 무엇을 쓸 것인가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래서 여러분이 읽게 될 기묘한 이야기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체계를 잡고 책머리에 쓸 인용문 두 개를 정하고 나서 나는 내가 무엇을, 왜 했는지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봐야만 했다.(9)”라고 이어갔습니다. 즉 책 원고의 마지막을 서문쓰기로 하였는데, 이게 참 어렵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여덟 번째 책도 전체의 틀을 잡고, 시간이 나는 대로 토막글 형식으로 본문을 써놓았습니다. 마무리단계에서는 토막글들을 제자리에 배치하는 작업을 마치면 저도 들어가는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모두 20명의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저자의 말로는 8편의 글은 여러 매체에 이미 발표되었던 사례이고 12편을 새로 썼다고 합니다. 20편의 글들을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의 세계 등 신경계의 기능변화에 따라 4부로 나누어 담았습니다. 각 부의 시작부분에는 주제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상실에서는 “‘결손이라는 용어는 신경학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로, 신경 기능의 장애나 불능을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런가 하면 과잉이라는 주제는 신경과 영역에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정신과 영역에서는 관심대상이라고 합니다. “정신의학에서는 흥분성 장애나 생산적인 질환[상상력 과잉, 충동 과잉], 조등 등]을 질환으로 문제 삼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경계를 기계나 컴퓨터로 간주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개념과 비전은 지극히 편협하다고 비판합니다. 당연히 좀더 유연하고 현실에 맞게 개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료현장에서 만났던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의사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련의 신경심리학자였던 알렉산더 루리아는 글로 남기는 힘, 이것은 19세기의 위대한 신경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보편적인 자질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자고 말았다. 우리는 이 힘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색스는 이점에 관하여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습관은 19세기 절정을 이룬 후, 신경학이라는 객관적인 과학의 도래와 함께 쇠퇴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환자가 가진 의학적 문제가 왜 생겼는지, 진행과정도 설명합니다만, 지금으로부터 40년 이전에 경험한 사례들이라서 그 사이에 발전한 질병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점도 없지 않을 듯합니다. 또한 뒷이야기라는 덧붙이는 글에서 환자에 대한 혹은 해당 질환에 대한 뒷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학술지나 다른 의사들과의 교신에서 비슷한 환자에 관한 이야기도 제공받았고, 혹은 기왕에 발표한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옮겨 적기도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사례들은 의료현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환자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진단을 제대로 하고 치료방법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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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2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딱 맞는 거 같아요 신경질환에 대한 아라비안나이트라니 처음처럼님 대단 !

처음처럼 2021-12-06 17: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죽음을 바라봅니다
김영희 지음 / 아름다운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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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이 개발완료되면서 수습이 낙관되던 우한폐렴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앞날을 예측하는 일은 커녕 눈앞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미리 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우리나라야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벌써 2년 가까이 이어진 희망고문에 지쳐가는 백성들이 불쌍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집단면역을 이룰 만큼 예방접종을 달성한 나라에서도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백신을 개발한 제약사만 엉뚱하게 배를 불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한폐렴에 걸려 죽고, 우한폐렴에 걸리지 않겠다고 예방접종을 받았는데 부작용으로 죽고, 지난 가을에는 생뚱맞게 독감백신 맞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만, 지금처럼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죽음은 저의 오랜 화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바라봅니다>라는 제목이 눈에 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많이 읽어왔습니다만, 이 책은 색다른 점이 있습니다. 저자를 소개한 글에서는 삶을 신이 주신 선물로 여기면서, 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인생,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인문학적 성찰과 접근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며 살고 있는, 평범한 철학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저자는 죽음이 뭘까?’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합니다. 일과를 마친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면, “죽게 되면 어떻게 될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게 뭔지, 소멸이라는 것이 뭔지고민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것 같습니다. ‘온몸이 얼어버릴 듯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 온몸을 감까는 느낌은 너무 생소하고 무섭게 느껴집니다. 죽음의 공포, 영원한 소멸. 이걸 처음 느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어느 감정보다 적나라하게 당신을 지배할 겁니다. 두려움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이 떨리게 될 겁니다.’ 제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인지 꼭 이럴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경지를 겪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자는 <죽음을 바라봅니다>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생각과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삶에 대하여 말합니다.‘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에서는 모두 13꼭지의 주제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에서는 모두 18꼭지의 주제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합니다. 좋은 접근방법인 듯합니다. 책을 모두 읽고서 든 생각으로는 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소멸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사람에게 혹은 후손들에게 기억으로 남는다는 주제를 더했더라면 좋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종교와 철학의 논리로 죽음을 바라봅니다. 기독교, 불교, 도교, 유교 등 다양한 종교와 철학에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생각이 일통하지 않은 듯합니다. 첫 번째 주제인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다에서는 죽음으로 신체와 영혼까지 소멸한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있는지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서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지극히 온당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내세와 윤회를 교리로 삼는 종교의 존재까지도 부정함이 옳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특권입니다.’라는 주제도 근거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면 그들만이 아는 죽음의 장소로 이동한다거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슬픈 눈으로 운다는 것, 혹은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는 등의 모습을 보면 동물도 죽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일부의 설명이 전체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으며, 종교를 부인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도 맥락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담담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죽음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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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희진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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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는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입니다. 우한폐렴이 아니었더라면 금년 가을쯤에는 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떻든 조만간 가볼 생각으로 고른 책읽기였습니다. 특히 노마드의 시작, 방랑자들의 성소라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노마드의 기원이며, 유목하는 인간에 대한 성찰과 탐수가 이끈ㄴ 철학적으로 여행했다는 문구에 이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57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이야기의 맥락이 와 닿지 않았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들어서면 분명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를 여행하면서 세계의 다른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어서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옮긴이의 설명을 읽으면서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앞부분은 작가가 러시아계인 아카디의 도움을 받아 내륙의 오지들을 돌아보면서 오스트렐리아의 원주민 애버리지니들을 만나, 그들이 노래를 통하여 땅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일종의 노래지도라고 할 송라인(Song line)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토지를 갖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자기 사유재산으로서 조상의 노래 한 자락과 그 노래가 지나가는 땅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노래 구절은 토지에 대한 권리증서라고 합니다. 그것은 남에게 빌려줄 수도 있었고, 빌릴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팔거나 없앨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애버리지니들에게 영토란 선들혹은 이어진 길들이 서로 엮인 그물망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백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것은 애버리지니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살아온 송라인을 잠식해 들어온 백인들에게 밀려 지금은 오지로 밀려났습니다. 저자가 만나는 애버리지니들의 생활을 보면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의 고유한 삶을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오스트레일리아는 1901년 시작하여 1978년 노동력이 부족한 현실을 고려하여 철회할 때까지 백인들의 이민만을 인정한 백호주의를 지켜왔습니다.


전반부에 작가가 애버리지니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작가가 사람들과의 만남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소상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진정한 애버리지니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애버리지니들의 삶과 철학에 대하여는 주로 러시아계인 아카디로부터 들어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국 출신인 작가는 20대 무렵까지 유명한 미술품 경매회사에서 근대회화부문의 전문가로 일하면서 잘나갔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가 회복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아프리카를 여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단에서 유목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후에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유목생활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았다는 것입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작가가 그동안 모아온 유목생활과 관련된 자료들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성서, 신화, , 철학, 고고학, 동물행동학 등 다방면의 자료들입니다. 그동안의 성찰을 통하여 작가는 인간이 떠도는/이주하는 삶의 본능을 타고난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레일리아에 와서 애버리지니들의 송라인에 대하여 알게 되면서 유목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곳에서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를 오가면서 겪는 일과 작가의 모아둔 자료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어서 읽는 호흡이 참 부담스러웠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끝을 분명하게 매조지하지 못한 느낌입니다. 즉 다음 쪽에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미완의 소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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