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학자의 한반도 여행기 코리아에서 / 스코틀랜드 여성 화가의 눈으로 본 한국의 일상 그들이 본 우리 21
장 드 팡주.콘스탄스 테일러 지음, 심재중.황혜조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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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는 듯합니다. 과거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두고 미국과 일본이 남한쪽을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쪽을 지지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북한의 핵개발문제와 관련해서는 외견상 한 목소리로 반대하던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미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느낌입니다.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는 미국은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특히 일본에게 상당한 역할을 기대하는 듯 합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만들기 위하여 전통의 우방인 북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도 합니다. 일본 역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있어 한국과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혹자는 한국이 전통적 우방인 미국이 우려할 정도로 중국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는 것 아닌가 우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양국간의 교역량을 비롯하여 다양한 영역에서의 교류를 고려할 때 중국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는 것이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재의 국제정세가 20세기가 열리던 시점과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국제정세에 둔감하던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상황을 잘못 읽는다면 비슷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흔히 울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둑이나 장기에서 보면, 판을 제일 잘 읽을 것 같은 당사자보다 수가 낮더라도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더 좋은 수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문학번역원이 기획 출간하고 있는 ‘그들이 본 우리 총서’가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김주연원장은 발간사를 통하여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서구가 바라보았던 우리 근대의 모습을 ‘번역’을 통해 되새기는 것은 서로의 거리감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한 과정”으로, “그들이 묘사한 우리의 근대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우리를 확인하고, 지금의 우리가 과거의 우리를 바라보는 깨어있는 시각을 요청한다(5~6쪽)”라고 하였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임진란의 기록>으로 시작한 살림출판사의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16세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서양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궤적을 살피면서 오늘날의 우리가 형성되어 온 과정을 고찰하려는 시도”라고 하였습니다. 임진란, 일본의 한국 통치, 청일전쟁, 병인양요, 러일전쟁 등 한국을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한 책들이 있는가 하면, 조선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거나 심지어는 서울에서 치른 감옥생활 혹은 한국에서 보낸 신혼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들도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은 프랑스 역사학자와 스코틀랜드의 여성화가가의 글을 제목대로 <코리아에서/한국의 일상>이라고 하면 너무 밋밋할 것 같았던지 <프랑스 역사학자의 한반도 여행기 코리아에서 스코틀랜드 여성 화가의 눈으로 본 한국의 일상>이라는 아주 긴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국호가 대한제국이던 1902년경으로 추정되는 ‘코리아에서’와 비슷한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일상’은 각기 다른 시선으로 우리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코리아에서’를 쓴 장 드 팡주는 프랑스 명문 귀족 출신의 남성 역사학자로, 일본을 거쳐 제물포를 통해 서울에 들어와서 금강산과 원산을 여행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자신의 여정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일상’을 쓴 콘스탄스 테일러는 스코틀랜드의 여성 화가로서, 일반사료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과 하인들의 생활, 결혼 및 장례 문화, 인사 예절, 명절 모습, 복식과 가마, 신발과 갓의 모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일상적인 모습을 아주 섬세하게 적었습니다.

 

장 드 팡주의 <코리아에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급한 ‘미국화’의 열기에 사로잡혀 용을 쓰고 있는 현대 일본의 ‘일급 호텔들’과 체계적으로 개발된 경관을 벗어난 지 얼마 안되어 코리아(Corée)에 발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어떤 평온함을 느끼게 된다.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헐렁한 흰색 옷차림의 무사태평한 코리아 사람들을 보노라면 황화론(黃禍論)의 망령 따위는 이내 사라지고 만다.(19쪽)” 일견해서는 우호적인 시각으로 조선을 보았구나 싶기도 합니다만, 어쩌면 오랫동안 유럽을 바라보던 일본이 어느 사이 시선을 미국으로 돌리고 있다는 의구심으로 생긴 반작용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황화론을 인용한데서 유럽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인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의 한 조각을 읽게 되는 듯합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청일 전쟁 말기인 1895년경에 주장한 황화론은 ‘황인종이 융성하고 번성하는 것은 백인종에게 위협이 될 것이므로 유럽 열강이 단결하여 그에 대처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유럽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몽골의 유럽원정에서 기인하는 황화론은 그 이후 아시아 국가가 주목을 받을 때마다 불거지곤 했던 것입니다. 저자의 시선에서 보면 신흥제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일본이 유럽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속내를 무사태평한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빌어 에둘러 표현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듯 무사태평해 보이는 조선 사람들이지만 청일전쟁이 끝나고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상투와 담뱃대 그리고 저고리 소매를 자르는 등 조선의 전통을 말살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사실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의 첫 번째 임금 이태조를 왕위 찬탈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옮긴이의 해석의 차이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찬탈’이라 함은 ‘임금의 자리나 국가 권력, 정권 등을 반역을 하여 빼앗는 것’인데, 국호나 국가의 정체성에는 변화가 없는 상황으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즉위한 세조가 찬탈의 대표적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조 이성계의 경우는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론의 근간이 되었던 유교 때문에 불교가 탄압받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에서 조선왕조에 대한 저자의 부정적 인식이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불교가 고려왕조의 몰락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알았다고 한다면 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저자는 불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바꾸기 어려웠겠다 싶은 대목도 있습니다. “이내 독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를 들으면 달빛 가득한 앙코르 사원의 거대한 층계 꼭대기에 웅크린 승려들의 독경 소리가 떠오른다. 습한 열대림에서부터 코리아의 눈 덮인 산봉우리까지 극동 아시아의 전역에 부처의 거대한 탄식소리가 매일 저녁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듯하다.(52쪽)” 12세기에 세워졌지만 오랜 세월을 열대밀림 속에 숨어 있던 앙코르 유적이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라고 합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던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가 1860년대 앙코르유적지를 발견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여행기에 담았던 것이 유럽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던 것인데(http://blog.joins.com/yang412/13389236), 저자는 조선에 이르기 전에 이미 앙코르 유적을 방문했던 모양입니다.

 

제3장에서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둔감한 조선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는 저자의 심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일이 되고 말았지만, 코리아는 자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들 중 하나이다. (…) 인구 밀도가 낮고 자신들의 부를 활용할 줄도 모르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의 해안을 따라 일본 열도가 펼쳐져 있는데, 일본으로서는 먹여 살릴 수 없는 초과 인구를 이주시킬 새로운 땅을 획득하는 것이 아주 절박한 당면 과제이다.(69~70쪽)” 저자는 대륙을 향한 일본의 야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러시아, 미국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정작 조선 사람들만이 일본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한국의 일상>은 스코틀랜드의 여성화가 콘스탄스 테일러의 기록입니다. 그녀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조선에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1884년 조선과 영국이 수호조약을 맺은 뒤 영국여행자들이 빈번하게 조선을 찾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시 여러 화가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녀는 1894년부터 1901년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R이라고 하는 여성과 같이 서대문 근처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녀들은 중국인 요리사와 한국인 여종들을 부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일상>은 몇 장의 사진보다도 저자가 스케치한 그림과 그녀가 보고 들은 것들을 회화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서울을 묘사하는 제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화사한 여름 저녁에 처음으로 서울 도성 곳곳을 산책했다. 이 시각이면 동서로 뻗어 있는 주요 거리는 항상 사람들로 웅성거린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같은 군중들 위로 차분한 빛을 던진다. 사람들은 아주 옅은 푸른색이나 연한 초록색, 엷은 자주색, 옆은 황색, 혹은 눈처럼 흰 긴 옷을 나부끼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머리에 쓴 검은 모자는 다채롭게 섞인 색깔과 어울리며 중심을 잡아주었다.(111쪽)”

 

그런데 조선 남성들은 그녀에게 지저분하고 게으르게 비쳐진 모양입니다. “아침 6시, 이제 막 대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벌써 담뱃대를 불고 문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그의 무거운 눈에는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았고, 때 묻은 흰옷은 간밤에 진 구김이 펴지지 않은 채로 지저분하다. 하루 일과에 대한 생각이 아직 그의 흐릿한 머릿속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124쪽)” 이미 활기가 돌고 있을 차이나타운이나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을 인도의 힌두교도들과 비교하면 조선 사람들은 게으름에 무딘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이면서도 조선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장 드 팡주와는 달리 콘스탄스 테일러는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기자조선으로부터의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기자조선은 요하와 대동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107년 중국 황제가 정복해서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고 적었습니다. 아마도 한사군을 설치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 무렵 부여와 고구려가 중국 주변에서 유일하게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664년 중국에 점령되었다고도 기록하였습니다. 기원3세기 무렵 일본의 신공황후가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정복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하여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일축하였지만, 후고구려의 궁예와 고려의 태조에 대한 기록도 분명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후 일본군이 1876년까지 부산을 점령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는 등, 조선역사에 대한 그녀의 기록은 전반적으로 소략하면서도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아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나온 역사서를 참고하였던 모양입니다. 한편 그녀가 고종황제를 알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황제는 궁정에 우글거리는 탐욕스러운 아첨꾼들과 사대주의자들에게 휘둘렸으며, 그들은 황제의 온갖 변덕을 부추기는데 일조했다. (…) 그는 잠으로 한나절을 보내고, 밤이면 대신들이나 고문관들과 논의를 하거나 기생들의 공연을 보고 즐긴다(145-147쪽)”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고종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 드 팡주와 마찬가지로 콘스탄스 테일러 역시 한글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세종대왕의 창의적 발상으로 창제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그저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된 문자로 이해하였던 모양입니다. 이들이 한성에 머물 당시만 해도 한글서적들이 풍부하게 유통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한글에 대한 이들의 이해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유일하게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하고 싶은 멋진 매력을 가진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여행기에 별점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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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6
제롬 카린 지음 / 시공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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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수많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리고 뉴스에서 보고 들어 아주 익숙한 듯 하면서도 막상 그곳에서 숙소를 얻어 묵은 적은 꼭 한 번 있습니다. 아참 악천후로 비행이 취소되는 바람에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던 경우도 한 번 있기는 합니다. 처음 뉴욕을 방문했던 것은 미네소타에서 출발해서 보스턴을 거쳐 플리머스에서 대서양을 만나서 워싱턴까지 내려가는 길에 뉴욕을 구경하느라 맨하탄에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묵은 것이 처음입니다. 뉴헤븐에서 뉴욕으로 들어가는 길에 도로 옆 옹벽에 스프레이를 뿌려 그린 그래피티를 발견하고서 ‘드디어 뉴욕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차를 운전해서 이동하면서 구경을 했는데 뉴욕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결국은 호텔을 차를 세워두고 하루 버스투어를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주마간산식으로 지나면서 가이드의 말도 안되는 설명을 들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황망한 추억만 남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뉴욕의 본토박이 소설가 제롬 카린이 쓴 <뉴욕, 한 도발적인 도시 연대기>는 뉴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인 뉴욕, 마천루와 슬럼이 어우러진 도시의 제국, 이민의 도시, 범죄의 도시이자 금융의 도시. 다양한 기상천외의 문화를 발 산해내는 뉴욕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미래를 조명하고 있는 책으로 풍부한 원색 사진과 삽화를 곁들였다.”라는 책소개말이 이 책에 담긴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로 유럽인들에 의하여 뉴욕이 개발되는 과정을 간추린 역사를 먼저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1626년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가 설치한 뉴네덜란드라고 하는 작은 식민지의 총독으로 지명된 페테르 미뉴잇이 단돈 24달러를 주고 알곤킨이라는 떠돌이 인디언 부족으로부터 맨해튼섬을 사들였다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습니다. 미뉴잇은 맨해튼의 곶 끝에 요새를 구축하고 뉴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붙였고, 200여명이 거주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664년에는 영국이 총 한방 쏘지 않고 이곳을 빼앗아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뉴욕을 119년간 독재적인 몽유병 환자처럼 식민지를 다스렸을 뿐 영국적 요소를 남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영국 국왕에게 저항하는 13개 식민지들의 저항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독립을 쟁취한 뒤, 뉴욕은 뉴욕주의 주도였고 미합중국의 수도가 되었지만, 이내 주도는 올버니로, 수도는 워싱턴으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처음 차를 운전해서 뉴욕을 찾았어도 숙소까지 문제없이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맨해튼섬의 격자모양으로 된 독특한 도로망 덕분이었습니다. 맨해튼섬의 도로구획이 격자구조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1835년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하여 뉴암스테르담의 구 시가지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뉴욕시의 초대 시장인 드 위트 클린턴과 미래의 거리 설계도 작성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들은 2928개의 블록으로 이루어진 도시, 맨해튼의 격자구조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뉴욕항에서 배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건너가는 길에 만난 엘리스섬이 당시 이민자들을 선별하던 장소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엘리스섬을 ‘눈물의 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같이 배를 타고 온 가족들이 때로는 헤어져야만 하는 운명으로 눈물을 뿌리기도 했고, 트라코마라는 전염성 안질환을 걸러내기 위한 눈검사가 고통스럽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격변기에 빠르게 변모해단 뉴욕의 모습을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는 이야기체로 풀어냈는데, 작가는 할렘가를 별도의 이야기로 정리해냈습니다. 사실 할렘가는 버스에서 내려보지도 못하고, 창밖의 사람들과 눈도 맞추지 말라는 가이드의 엄중한 경고 때문에 제대로 내다보지도 못하고 지나쳤던 아쉬움이 남아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컸습니다. 사실 밤 중에 숙소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까지 걸어서 구경을 다녀올 정도로 시내의 치안은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뉴욕에서 지내면서 나름대로는 많이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뉴욕, 신화적 범죄도시’라는 제목 아래 풀어내고 있는 설명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제가 뉴욕을 방문했던 1993년 봄만해도 뉴욕항을 떠나는 연락선에서 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과거는 그랬습니다만, 뉴욕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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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서재 - 길에서도 쉬지 않는 책읽기
이권우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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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격이 모호한 듯합니다. 제목을 보면 여행에세이인 듯하지만, 막상 읽다보면 여행기를 적은 책을 읽은 느낌을 적은 북칼럼집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행자의 서재’라는 제목이나 ‘길에서도 쉬지 않는 책읽기’라는 부제가 적절한가 싶습니다. ‘책을 따라 떠나는 여행기’ 정도가 안성맞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도 요즘 여행기 읽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책 또한 그런 이유로 읽게 된 것입니다. 오래전 메모해두었던 북미 여행기록을 바탕으로 유기(遊記)를 써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여행기에 탐닉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지금-이곳을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이 저를 여행기로 이끈 듯합니다. 짐 챙기는 사람이 그러하듯, 책장을 넘기며 저는 중력의 법칙에 묶여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상상하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24권의 여행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들을 네 개의 영역으로 분류했습니다. 그 영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영역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1장 국경을 빠져나오자 여행이 시작됐다, 2장 걷는 길 위에 고독과 행복이 동시에 있다, 3장 사람들 속에서 내 청춘의 길을 찾다, 4장 장막을 걷어라, 창문을 열어라, 등입니다. 제목이 문학적이라고 해야 할지 현학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4권의 책 가운데 제가 읽어본 책은 3권에 불과해서 저자의 생각과 저의 느낌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은 아쉽습니다만, 좋은 책을 소개받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윤여일의 <여행의 사고 셋>입니다. 기왕의 여행기에서 볼 수 있는 틀에 박힌 형식을 버리고, 여행의 본질이 무엇인지, 타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윤리 감각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지 끊임없이 사유할 거리들을 독자들에게 던지는 방식으로 적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행자의 서재>의 저자는 윤여일이 <여행의 사고 셋>에서 적고 있는 번역에 관한 생각을 인용하면서, 번역을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한 여행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겪고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언어로 옮기는 일은 상당히 지난하고 위험하다. 자칫 여행기가 감상의 범람으로 넘치고 마는 일이 벌어진다. 진짜 여행기는 ‘금욕’의 수사학이어야 한다. 함부로 말하지 않되, 그곳의 활력을 전하는 글은 쓰기 어렵다 더욱이 해석하는 대목에서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번역만큼 어려운 것이 여행기 쓰기란 말이다.(37쪽)” 이권우와 윤여일의 여행기에 대한 정의를 읽고 나서는 유기를 써보겠다는 생각을 크게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마다의 느낌이 다르고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다르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도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com/yang412/13104741>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읽으면서 느낀 점입니다. 물론 읽으면서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오소희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에 대한 글에서 저자는 어리다 못해 돌이나 지났을까 싶은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하는 외국인을 보면서 그들의 여행태도를 높이 평가했다는 누군가의 글을 인용하면서 어렸을 때 두루 보고 듣게 해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아이가 살아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쓰려고 하는 유기에 등장하게 될 우리 아이들은 저와 함께 여행을 할 무렵에 초등학교 저학년, 그리고 네 살 정도 되었는데, 두 아이 모두 북미대륙을 종단하고, 횡단한 여행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소희는 세 살 박이와 단 둘이서 터키를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초등학교의 고학년은 되어야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기억을 분명하게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 더, “희한한 여행기다. 처음 가본 곳의 풍경이나 유물에 대한 넋두리는 절제되어 있다. 대신, 그곳에 가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와, 책을 읽어 머리 안 이야기와, 가서 들은 이야기로 범벅되었다.(180쪽)” 제가 최근에 읽은 김별의 <스페인을 여행하는 세 가지 방법; http://blog.joins.com/yang412/13465682>이 딱 이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페인 여행에 대한 정보가 아쉬웠던 까닭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윤여일의 <여행의 사고> 시리즈의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기왕의 여행서들은 단순 가이드북이거나 관광 명소를 좇으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간략히 소개하고 지은이의 감상을 곁들이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나아가서 인문학 여행기라고 해보아도 작가의 인문학적 지식을 곁들이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저자의 특화된 책읽기와 여기에서 얻은 느낌을 정리하고 있는 점은 분명 무언가 제가 남기는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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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 바다의 정복자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53
이브 코아 지음 / 시공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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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네소타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를 갔을 때 우연히 방문한 박물관에서 바이킹의 유적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바이킹 박물관으로 기억합니다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Runestone Museum인 것 같기도 합니다(http://www.roadsideamerica.com/story/2607)] 1898년 스웨덴에서 이주한 농부에 의하여 발견된 이 바위에는 1362년에 8명의 고트족 사람과 22명의 노르웨이 사람이 이 지역을 탐험했다고 룬문자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룬문자가 조각된 바윗돌의 진위 여부를 분명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때 박물관에서는 허드슨만에 상륙한 바이킹들이 캐나다를 종단해서 알렉산드리아 지역까지 진출했다고 설명했던 것 같습니다. 박물관 앞에 서 있던 거대한 바이킹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미네아폴리스에 근거를 둔 아메리칸풋볼팀의 이름이 바이킹스입니다. 바이킹과의 인연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 상륙하였을까요?

 

시공디스커버리 시리즈로 나온 이브 코아의 <바이킹: 바다의 정복자들>은 그런 의문을 풀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바이킹의 뿌리를 찾아들어가면서 이들이 유럽 제국을 넘어 아시아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한 흔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바이킹의 선조들은 기원전 6,000년부터 원시적인 작은 배를 타고 스칸디나비아 주변의 바다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바이킹들이 살던 곳은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크입니다. 로마제국이 붕괴되면서 바이킹들은 북유럽국가를 시작으로 침략을 시작하였는데, 9세기에 이르러 바이킹은 서유럽 전역을 강타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300년 이상 바이킹은 끊임없이 이웃나라를 침공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스웨덴인, 덴마크인(데인인) 그리고 노르웨이인으로 갈라졌다고 합니다. 스웨덴인은 동쪽으로 데인인과 노르웨이인은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노르웨이인은 아일랜드를 침공하여 바이킹부족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고, 대서양을 건너 그린란드에도 거주한 바 있으며, 북아메리카 인디언과 교역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는 콜럼버스보다 5세기나 앞선 992년의 일로서 붉은 털 에리크의 아들 레이프는 35명의 바이킹들을 이끌고 그린란드를 거쳐 래브라도반도에 상륙하여 빈란드라고 이름짓고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탐험에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주우하여 대결을 벌이기도 했으며, 세 번째 방문에서는 600명의 남녀 바이킹족들이 아메리카대륙으로 떠났지만 결국은 정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린란드로 물러났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바이킹이 자신들의 삶의 근거지를 벗어나 다른 나라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조선술과 항해술에 기반하고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이킹들은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등을 침공하여 그곳에 거주하기도 했으며, 러시아를 경유하여 내륙의 강을 거슬러 비잔틴세계에 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전략 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생활상과 종교 등에 대하여도 설명하였습니다.

 

시공디스커버리 시리즈의 특징인 권말부록 성격의 기록과 증언에는 바이킹족들이 남긴 서사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이킹족은 1,000년 무렵 라틴문자가 전해지기까지는 다뉴브강 중류지방의 게르만인이 처음 사용하여 덴마크로 전해졌다는 룬문자를 사용하여 비석 등에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바이킹문명의 대표적 문학작품으로 <에다>에 실려 있는 시들이 있는데, 구전되어 오던 이 시들은 스칸디나비아의 신화를 노래한 것들로 13세기들어 스너리 스투를루손이 집대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에다의 시들은 입으로 읊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글을 쓰거나 읽으면 그것이 지닌 본래의 맛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시들은 두운법(頭韻法)의 기교와 악센트로 묘미를 살리는 시의 연, 온갖 수사적인 장치로 자익된 시로서 영웅적 행위와 영광스러운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합니다.(139쪽)

 

또한 부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뉴펀들랜드 북서 해안 근처의 랑소메드에서 빈란드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일찍 북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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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인디언의 땅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3
필리프 자캥 지음 / 시공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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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에서 여행하면서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만난 곳은 글레시아 국립공원 가는 길에서 만난 플레인 인디언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러쉬모어 지역에 조성하고 있는 크레이지 호스 유적, 그리고 아리조나주에 남아 있는 인디언 마을 유적, 그리고 콜로라도 메사버데에 남아 있는 인디언 유적 등입니다. 그 옛날 광활한 대륙을 무대로 거침없이 살아왔던 이들의 삶은 유적으로 남아 있거나 인디어 보호구역으로 제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부터 줄지어 영화관에 가서 단체로 서부영화라도 볼라치면 멋진 기병대를 공격하는 인디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면 손뼉을 치고 기뻐하던 생각이 납니다. 마치 제가 영화의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하고는 습격해오는 인디언들을 무찌르는 기병대가 된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기병대가 침입자이고 인디언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려는 지난한 싸움을 한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던 인디언들의 땅을 컬럼버스에게 들킨 것이 비극의 시작이 된 셈입니다. 그렇게 등장한 유럽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제 발등을 찍는 일이 된 셈이기도 합니다.

 

넓은 땅에 흩어져 살아온 인디언들은 규모가 작은 부족 단위로 독립적으로 살면서 때로는 부족 간에 전투도 불사하는 등 부족들 간에 긴밀하게 단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던 것이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집단에게 끊임없이 밀려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오랫동안 외부세계와 교류없이 살아온 까닭에 외부세계에서는 이미 집단면역이 형성되어 있던 전염성질환에 속수무책인 것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미합중국의 인디언정책은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주류사회와 격리하고 생활을 지원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것이 결국은 이들의 생존능력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이주시킨 이면에는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한 속셈이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땅>에서 저자는 유럽에서 물밀듯이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하여, 이 땅의 원래 주인이라고 할 북미 인디언들이 어떻게 소멸되어 갔는지 그 비극적 삶의 궤적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러쉬모어 지역에 거대한 조각상으로 새겨지고 있는 수족의 오글랄라 인디언 추장이었던 크레이지 호스가 남긴 말을 새겨둘 만합니다. “아무도 당신들 보고 이곳에 오라고 하지 않았소. 위대한 정령께서는 우리가 살도록 이 땅을 주신 것이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땅이 있소. 당신네들을 괴롭힐 마음은 추호도 없소. 위대한 정령께서는 우리들이 살 수 있도록 광활한 대지와 들소, 사슴, 영양 등 사냥감들을 마련해 주셨으니 말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의 땅을 강탈한 것이오. 당신들은 우리 사냥감을 죽이고 있소. 그래서 우리는 살기 어려워졌소. 지금 당신들은 우리더러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소. 하지만 위대한 정령께서는 우리를 노동이나 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냥을 하라고 만드신 것이오. 그렇게 원한다면 당신네 백인들이나 노동을 하면 되지 않소. 왜 우리에게 문명을 멀리 하냐고 묻는 거요? 우리는 당신네들의 문명을 원치 않소! 우리의 아버지처럼. 그 이전의 아버지들이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살아갈 것이오.(146쪽)”

 

저자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땅>에서 인디언들이 이주민족들에 밀려 쇠락해간 과정에 국한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인디언들의 고유한 삶과 문화에 관한 부분은 소략한 점이 아쉽습니다. 그들의 전통문화를 복원하여 전승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미합중국을 세운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진정한 화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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