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연초에 펀트래블의 일본근대문학기행에서 도쿄를 방문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가와사키, 요코하마를 거쳐 가마쿠라까지 가면서 구경한 도쿄만 풍경을 떠올리는 다음과 같은 독자의 감상평의 한 대목이 <동경만경>을 읽게 만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풍경 묘사가 매우 뛰어나고, 등장인물도 각기 개성이 또렷해 인상적이다.” <동경만경>은 혜성처럼 나타났다는 요시다 슈이치의 연애소설입니다.
물론 도쿄를 무대로 하지만 핵심 배경은 시나가와와 만 건너편의 오다이바입니다. 남자주인공 료스케는 시나가와에 있는 물류창고에서 일하고, 여자주인공 미오(료코)는 오다이바에 있는 고층건물에 있는 홍보관련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발전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조연으로는 료스케의 동료이자 기숙사의 옆방에 사는 오스기와 그의 애인 유코, 그리고 유코의 소개로 료스케와 만나게 되는 마리, 그리고 료스케가 일하고 있는 물류창고를 비롯하여 시나가와 주변의 풍경을 취재하러 온 작가 아오야마 등이 등장합니다. 여자주인공 쪽은 회사 동료 요시노, 상사 구보과장, 그리고 아버지의 권유로 맞선을 보게 된 초등학교 동창 유키하루 등이 등장합니다.
만만치 않은 숫자의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관계의 촘촘하게 엮어 긴박감이 느껴지도록 만든 작가의 역량이 느껴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작가 아오야마가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동경만경>이라는 제목의 연재소설을 통하여 이름은 다르지만 역시 이 책의 주인공이 펼쳐내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따라간다는 점입니다. 소설 속에 소설이 등장하는 액자소설에서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는 많이 보았습니다만 같은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특이한 액자소설을 처음 만났습니다.
앞서 이 소설이 풍경묘사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고 적었습니다만, 풍경 묘사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프루스트 풍의 묘사를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료스케와 료코가 처음 만나 도쿄만 모노레일을 탔을 때의 장면을 소개합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모노네일 차창 밖으로 조명이 환하게 밝혀진 아름다운 공항풍경이 펼쳐졌다. 광활한 활주로를 따라 밝혀진 파랑, 노랑, 빨강 불빛을 받으며 터미널에 정박한 여객기들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29쪽)”
앞서 주연과 다수의 조연들 사이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데, 최근의 일본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행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학생과 여선생, 여직원과 직장상사 사이의 일회성 관계, 티격태격하면서도 5년을 이어가는 사랑, 친구 애인의 소개로 만난 여성과의 의미 없는 사랑. 그런가 하면 남자주인공에 관심을 가졌지만 구체적인 관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작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리망에서 만나 일회성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관계가 깊은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관계가 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첫 만남에서 가명을 쓰고 직장도 속였던 여자주인공에 대하여 어떤 감정이 남아있었던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메일을 보낸 남주인공이나 그 메일에 대해 답신을 보낸 여주인공의 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몇 차례의 만남 끝에서야 관계를 맺게 되고, 결국은 류스케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출근을 하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합니다만, 이별을 통보한 여친이 여주인공의 실체를 밝히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발전을 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위기로 치닫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이야기를 발전시킬 여력이 없는 작가가 연재를 쉬는 사태를 개선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입니다.
소설 속의 작가가 토로하는 고민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작가의 재능으로 전개하는 것 아니냐는 료스케의 질문에 “재능? 그런 건 데뷔작을 쓰는 시점에서 모두 버리고 없어요. 그 후에는 같은 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반복해 쓸 뿐이에요. (…) 내 소설은 거의 다 이런 패턴의 반복이에요.(180쪽)” 사실 이런 경향을 보이는 작가들은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소재를 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