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는 현철에게 끊임없이 가해의 언어를 쏟아부으며 스스로 죄를 경감하고 현철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고자 하지만, 현철 또한 매번 과거와 같은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스스로 책정한 배상의 내용을 결코 수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 존재 가치를 자신만이라도 붙들고 있기 위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어쩌면 이 시시한 복수극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고 할지라도, 현철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포를 무릅쓰고 트라우마와 맞선 경험을 얻음으로써 최소한의 자기 존엄은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P195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일으킨 파문은 그러므로 작을지 언정 결코 하찮지 않다. - P196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두 눈 부릅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 P206
왜 원하는 걸 주장하지도 못했을까. 정현은 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어떤 때는 그런 마음이 정현을 완전히 사로 잡았다. 한없이 작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부피도 질량도 거의 없다시피한 아주 작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반려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 역시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듯 정현은 자신도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 P207
연락이 끊긴 이유를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알게 되었을 때 정현은 절망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자기가 무얼 잘못했나 자책했으며 이제 앞으로 사람을 어떻게 믿나…… 하고도 생각했다. 앞으로는 사람을 쉽게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현은 자신에게 그런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현이 누군가를 믿고 안 믿고는 정현이 향후 만들어갈 관계에서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정현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신뢰 못 할 인간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신용 점수가 또래보다 한참이나 낮다는 조회 결과를 자주 들여다봤다. 열심히 빛을 갚아왔고 딱 한 번 연체했을 뿐인데도 여러 군데서 빌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빌린 탓인지 신용 점수는 쉽게 높아지지 않았다. 이 경제적인 신용도가 자신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빚이 일억 육천 있는 사람과 만날 수 있어? 팔천은 전세 대출금이긴 한데. 누군가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어도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211
정현은 연애 상담을 해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무리 봐도 구제불능인 애인과 헤어질까 말까를 고민하며 보내온 사연을 볼 때면 도대체 저걸 왜 고민하고 앉았냐고 당장 헤어져야지 이 덜떨어진 인간아! 하고 욕을 퍼부었었는데 막상 자신에게 문제가 닥치자 그런 합리적인 판단을 신속하게 내릴 수가 없었다. 합리적인 셈법으로는 도무지 취합되지 않는 자료들이 정현의 마음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자료들은 정현이 단호한 결정을 내리려 할 때마다 정현이 계산해놓은 결괏값들을 죄 뒤섞어놓았다. - P216
정현은 서일을 믿고 싶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번 더. 하지만 문제는 정현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점이었다. 그간 자신이 선택했던 것들이 자신을 배반한 역사가 너무 길고 깊었다. 그동안 조금이라도 뭔가를 배웠다면 자신은 더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됐다. 특히 서일을, 그러니까 자신이 내리는 판단을, 그 근거가 될 만한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신뢰해서는 안 됐다. 정현은 서일을 너무나 믿고 싶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 P217
형님은 볼 때마다 젊어지는 것 같아요. 몸도 탄탄하시고 주름도 없고요. 아냐, 나도 늙었지, 이젠. 얼마 전 보톡스를 맞았다며 그는 눈가와 입가를 가리킨다. 어떻게든 젊게 보이려 안달하는 나이든 의원들을 손가락질하고 비웃던 혈기 왕성한 시절도 있었는데,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어리면 환대받고 늙으면 외면당해. 이 바닥이 그래. 생전 안 입던 청바지를 꺼내 입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다음주에는 눈썹 문신을 예약했다고 황보는 말한다. 어디 정계뿐이겠는가. 내가 몸담은 바닥에서도 나이든 사람은 내쳐지는데, 생각하며 잘 숙성된 와인을 들이켠다. - P261
황보가 말을 잇는다. 다 우리 할머니 덕이지. 그 말에 맥이 빠진다. 할게. 굿보다 더한 것이라도 해야 한다면 해야지. 그가 잡고 싶은 동아줄은 나일까, 할멈일까. 남은 와인을 들이켠다. 뒷맛이 쓰고 텁텁하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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