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치고 싶은데 난 울고 있다.
물어버리고 싶은데 핥고만 있다.
찢어버리고 싶은데 쓰다듬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걷고 싶은데 난 언제나 마구 달리고 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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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겹다. 그만해라. 전시회를 본 동기는 그런 문자를 보내왔다.
또다른 동기는 변태라는 두 글자만 보냈다. 그나마 지도교수는 정중한 편이었다. 조금 더 가려보세요, 김군. 다 드러내는 건 결코 아름답지 않아.
동기들은 내 그림을 아무도 사지 않을 거라 했다. 전업 작가로 살겠다는 내 의지를 비웃었다. 그 비웃음에서 악의를 압도하는 혐오감이 느껴졌다. 손님 없는 밤길을 달리다보면, 그들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럴 때는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쓸쓸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 P301

"몇 시간 동안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요.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는 기분이에요. 그러니까 타인처럼 내 몸을 볼 수 있죠. 그 기분이 반복되면,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몸이 아닌 영혼이 보여요."
"나는 어떤가요?"
"당신은......."
당신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기괴해요."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은 웃는 나를 말없이 지켜 보았다. 상처받았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그 마음조차 들킨 것 같았다. - P304

"눈이 계속 올까요?"
당신이 물었다.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이번에도 당신은 기다리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질문은 혼잣 말이어서 굳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청한동은요. 눈이 쌓이면 차가 꼼짝할 수 없어요. 운전기사를 둔 사람들도 죄다 걸어야 하죠. 누가 그랬어요. 눈은 비랑 다르다고. 모두에게 공평하다고요." - P308

나는 처음부터 당신이 좋았다. 당신은 분명 미인에 속했다. 그러나 모든 미인이 괜찮은 그림의 모델이 되는 건 아니었다. 모델에게는 결핍이 필요했다. 그것이 그림에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당신은 목이 굽고 양쪽 어깨 비대칭이 심했다. 지치고 피곤한 상태를 자세가 그대로 보여주었다. 물론 그런 모습 때문에 당신에게 매력을 느낀 건 아니었다. 내가 주목한 건 당신의 눈, 피곤을 견디려고 부릅뜬 두 눈이었다. 당신의 동공은 부엉이와 닮았다. 노랗고 투명했다. 크로키를 하는 동안, 나는 당신의 두 눈에 야만성을 담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이 배반하길 바랐다. 자신을 지치게 하는 일과 그 일에 품은 열망을. - P309

"언덕길에 가로등이 별로 없거든요. 혼자 올라가기 무섭네요."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당신에게 묻고 싶어졌다. 나는 무섭지 않나요? 사람을 해칠 만큼 힘이 세 보이지 않아요? 왜소한 몸과 짧은 팔다리로는 어떤 위협도 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 왜죠? - P314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다니까요. 말할 필요도 없어요. 같이 밥 먹을 의무도 없고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돼요. 책 읽고, 영화 보고."
그렇게만 하면 돈을 준다고 했다. 처음에는 의심스럽고 눈치도 보였지만, 이제는 편하게 쉬다 오는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돈은 월급처럼 받는다고 했다. 매달 말일이 되면 당신은 오만원권 칠 십 장이 담긴 흰색 봉투를 받았다. 노부인은 그 돈을 작품 대여비라고 불렀다.
나는 불쾌한 기분 탓에 얼굴이 굳었다. 그 일이 편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타인의 시선을 받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 P315

"세상엔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게 참 많아요." 당신 말이 맞았다. 나는 그제야 당신이 언덕을 오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도시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청한동 언덕에는 존재하는 것들을 당신은 열망했다. 어쩌면 그 열망이 당신을 지치게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상기된 당신의 얼굴을 외면했다. 종이컵을 손으로 꽉 쥐었더니, 남은 커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은 결코 제 발로 노부인의 집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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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광범위하게 편협한 사람입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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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봐도 빤했다. 큰돈 한번 만져보니 욕심이 나는 거겠지. 이 바닥에는 경제적 예속을 빌미로 아이를 극악하게 굴리고 후에는 더 큰 돈을 요구하고 갈취하는 부모들이 더러 있었다. 내 어머니도 그랬다. 시장서 두부값 깎는 것도 죄스러워하던 그 여린 분이 돈맛을 보자 어찌나 그악스러워지던지, 종국에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이틀간 잠도 못 자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손님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밤에는 신령님들과 영통할 수 없다고 거짓말하자 어머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호통치셨다.
얘, 신령들은 시간 정해서 온다니? - P265

친구는 있을까. 있어도 일상을 공유하거나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대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가 얻은 생은 여느 평범한 이들의 삶과는 다르니까. 저 나이에 나는 평범한 삶을 살고 범상한 몸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는데, 한 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저주처럼 여겼는데
저애도 비슷할까.
신애기는 음료에 기포를 만들며 오후를 보낸다. 평범하게. 나도 몰래 그것을 따라해본다. 볼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보글보글 보글보글. - P270

네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던 문화재. 그거 나 하게 해준다고. 할멈이 넌 너무 늙었다네. 늙은 게 야심만 가득해 흉하다고.
신애기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는다. 큭큭큭큭, 큭큭큭.
손가락 사이로 기분 나쁜 웃음이 새어나온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린다. 종아리가 풀리고 손이 저려온다. 모르겠다. 지금 나를 향해 조소하는 것이 할멈인지 저애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일렁인다. 그 불길에 저애에게 잠시 가졌던 연민이며 동질감, 할멈을 향한 애증과 경외심도 모조리 타버린다. - P274

말씀해보세요. 말씀 좀 해보세요!
중언부언하며 악을 지르는데도 할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계속되는 침묵에 분이 가시지 않아 할멈상을 들어올리다, 흠칫한다. 한 번도 인지한 적 없었는데, 너무 가볍다. 원래 이랬던가. 이게…… 원래 이렇게 가벼웠나. 할멈상을 벽에 던진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할멈상이 바닥에 나뒹군다. 텅, 텅, 텅……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큭, 큭큭 큭큭큭. 큭큭큭. 큭큭큭. 멈춰보려 해도 딸꾹질처럼 웃음이 계속해 터진다.
큭큭큭, 큭큭큭큭. - P275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서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 P280

룸 미러를 통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승객의 하관과 어깨선 정도였다. 얼굴 전체가 보이는 때도 있기는 했다. 만취해서 좌석에 몸을 푹 파묻은 사람을 태우면 그랬다. 술에 취한 사람은 얼굴에 드러나는 사연이 모호했다. 얼굴만 봐서는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술에 취하면 진심이 드러난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대개는 진심 속에 숨어 있던 야만성이 드러나곤 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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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현철에게 끊임없이 가해의 언어를 쏟아부으며 스스로 죄를 경감하고 현철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고자 하지만, 현철 또한 매번 과거와 같은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스스로 책정한 배상의 내용을 결코 수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 존재 가치를 자신만이라도 붙들고 있기 위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어쩌면 이 시시한 복수극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고 할지라도, 현철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포를 무릅쓰고 트라우마와 맞선 경험을 얻음으로써 최소한의 자기 존엄은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P195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일으킨 파문은 그러므로 작을지 언정 결코 하찮지 않다. - P196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두 눈 부릅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 P206

왜 원하는 걸 주장하지도 못했을까. 정현은 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어떤 때는 그런 마음이 정현을 완전히 사로 잡았다. 한없이 작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부피도 질량도 거의 없다시피한 아주 작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반려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 역시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듯 정현은 자신도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 P207

연락이 끊긴 이유를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알게 되었을 때 정현은 절망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자기가 무얼 잘못했나 자책했으며 이제 앞으로 사람을 어떻게 믿나…… 하고도 생각했다. 앞으로는 사람을 쉽게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현은 자신에게 그런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현이 누군가를 믿고 안 믿고는 정현이 향후 만들어갈 관계에서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정현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신뢰 못 할 인간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신용 점수가 또래보다 한참이나 낮다는 조회 결과를 자주 들여다봤다. 열심히 빛을 갚아왔고 딱 한 번 연체했을 뿐인데도 여러 군데서 빌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빌린 탓인지 신용 점수는 쉽게 높아지지 않았다. 이 경제적인 신용도가 자신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빚이 일억 육천 있는 사람과 만날 수 있어? 팔천은 전세 대출금이긴 한데. 누군가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어도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211

정현은 연애 상담을 해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무리 봐도 구제불능인 애인과 헤어질까 말까를 고민하며 보내온 사연을 볼 때면 도대체 저걸 왜 고민하고 앉았냐고 당장 헤어져야지 이 덜떨어진 인간아! 하고 욕을 퍼부었었는데 막상 자신에게 문제가 닥치자 그런 합리적인 판단을 신속하게 내릴 수가 없었다. 합리적인 셈법으로는 도무지 취합되지 않는 자료들이 정현의 마음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자료들은 정현이 단호한 결정을 내리려 할 때마다 정현이 계산해놓은 결괏값들을 죄 뒤섞어놓았다. - P216

정현은 서일을 믿고 싶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번 더. 하지만 문제는 정현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점이었다.
그간 자신이 선택했던 것들이 자신을 배반한 역사가 너무 길고 깊었다. 그동안 조금이라도 뭔가를 배웠다면 자신은 더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됐다. 특히 서일을, 그러니까 자신이 내리는 판단을, 그 근거가 될 만한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신뢰해서는 안 됐다. 정현은 서일을 너무나 믿고 싶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 P217

형님은 볼 때마다 젊어지는 것 같아요. 몸도 탄탄하시고 주름도 없고요.
아냐, 나도 늙었지, 이젠.
얼마 전 보톡스를 맞았다며 그는 눈가와 입가를 가리킨다. 어떻게든 젊게 보이려 안달하는 나이든 의원들을 손가락질하고 비웃던 혈기 왕성한 시절도 있었는데,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어리면 환대받고 늙으면 외면당해. 이 바닥이 그래.
생전 안 입던 청바지를 꺼내 입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다음주에는 눈썹 문신을 예약했다고 황보는 말한다. 어디 정계뿐이겠는가. 내가 몸담은 바닥에서도 나이든 사람은 내쳐지는데, 생각하며 잘 숙성된 와인을 들이켠다. - P261

황보가 말을 잇는다.
다 우리 할머니 덕이지.
그 말에 맥이 빠진다.
할게. 굿보다 더한 것이라도 해야 한다면 해야지.
그가 잡고 싶은 동아줄은 나일까, 할멈일까. 남은 와인을 들이켠다. 뒷맛이 쓰고 텁텁하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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