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불빛 아래 거울을 보니 잿빛 얼굴 여기저기 반점이 가득했다. 부디 계시라도 있기를, 내게 힘을 내리시기를. 승강기가 덜컥하며 멈췄는데도 위장은 계속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손잡이에 의지해 중심을 잡아야 했다. 교황의 즉위 초기 함께 이 승강기에 탔을 때였다. 대주교 둘이 들어오더니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주님의 대리자를 직접 마주하자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교황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고 일어나시게나. 나도 늙은 죄인일 따름이라네.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 P18

"교황직은 어차피 격무입니다. 사람들도 그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요."
트림블레이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벨리니는 시선을 떨구었다. 묘한 긴장감. 로멜리는 잠시 후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교황직이 격무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릴 경우 사람들은 더 젊은 남자가 교황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아데예미는 겨우 60대 초반이며 다른 두 추기경보다 거의 10년이나 젊었다. - P31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멀어져 갔다. 차단봉 안쪽에서 기자들과 사진사들이 추기경들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동물원 짐승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유혹하는 관광객들 같았다. - P38

벨리니가 로멜리의 팔을 잡았다. "기도에 어려움을 겪으신다고요? 성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아시겠지만 그분도 종국엔 회의 때문에 고통받으셨답니다."
"성하께서 하느님을 의심하셨단 말씀입니까?" 그후 벨리니의 말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요! 하느님이라니요! 성하께서 신념을 잃은 상대는 교회였습니다." - P39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죽은 교황은 이따금 지나칠 정도로 검소와 겸손을 강조했다. 결국 과도한 겸손은 또 다른 차원의 허영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자신의 겸손을 과시한다면 그것도 죄다. - P47

아치길을 통과하자 안뜰이 계속 이어졌다. 안뜰 너머 안뜰, 또 안뜰. 비밀 회랑의 미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항상 왼쪽에 두고 돌았다. 성당의 벽돌 벽은 밋밋하고 어두침침해서 볼 때마다 실망스러웠다. 도대체 인간의 천재성은 어째서 온통 저놈의 화려한 내부에만 쏟아붓는 걸까? 로멜리가 보기엔 그놈의 천재성마저 지나쳐 미적 소화 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반대로 외부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탓에 그저 창고나 공장처럼 보였다. 아니면, 일부러 그 점을 노린 걸까? 지혜와 지식의 보물은 하느님의 신비한 내부에 숨어 있기에······. - P49

이따금 헬기 소음 너머로 시위 목소리도 들렸다. 수천의 목소리가 한목소리로 노래했다. 이따금 경적과 북소리, 호각 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이유로 시위를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동성 결혼 지지자, 동성 연합 반대파, 이혼 찬성 옹호자, 가톨릭 통일체 지지 가족 협의회, 사제 서품을 요구하는 여성들, 낙태와 피임을 원하는 여성들, 무슬림과 반무슬림, 이민자와 반이민자 그룹······ 이들이 하나로 모여 분노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터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하나, 둘, 다시 셋······. 소음은 마치 서로에게 구애하며 도시를 헤집는 것 같았다.
이곳이 방주로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란의 파도에 휩싸인 방주. - P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