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이다. 묘하게도 로멜리는 저 늙은 야만인에게 향수를 느꼈다. 어쨌든 함께 살아남은 두 사람이 아닌가. 둘 모두에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콘클라베인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참석자 대부분 과거 한 번도 콘클라베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만일 추기경단이 젊은 교황을 선출한다면, 거의 대부분 다시는 구경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저들은 지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깊어갈수록 더 많은 추기경들이 가방을 들고 비탈길을 올라왔다. 이따금 혼자이기도 하나 대개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었다. 로멜리는 이 희대의 역사에 많은 이들이 고무해 있음을 보고 감동했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얼마나 다양한 인종을 대표하는지 보라. 이 넓디넓은 우주 교회에서 문화도 지형도 다르게 태어났건만, 이렇게 주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함께 모이다니! - P61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딘가 특별하면서도 고귀한 추기경 무리가 등장했다. 교황청의 추기경 24인. 영원히 로마에 살며 교회의 주요 부서를 운영하는 이들이다. […] 그래서 로멜리가 다른 추기경들과 마찬가지로 따뜻하게 환대한다 해도, 전 세계에서 찾아온 추기경들과 달리 이들한테서 경건한 모습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선한 사람들이기는 하나 이미 너무 많이 겪었기에 무덤덤해진 것이다. 로멜리 자신도 영적 상처를 입고 그런 식의 일탈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 바 있었다. 죽은 교황도 종종 추기경들을 다그쳤다. "마음 단단히 먹게, 형제들이여. 허영과 호기심, 악의와 험담의 죄들, 사악한 방해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네. 절대 굴하지 말게나." 교황이 죽던 날 벨리니가 해준 얘기가 있었다. 교황 역시 교회를 향한 믿음을 잃었다고······. 로멜리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얘기였기에 어떻게든 마음에서 몰아내려 애썼지만······ 교황이 말한 교회란 분명 이들 관료일 것이다. - P63

천박한 자들은 늘 모든 것을 알려고 들지만,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로는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이었다. - P77

"잠깐만요, 정말 그래야 할까요?" 그가 속삭였다.
"아닐 이유는?"
"성하께 정말 이런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세요?"
"조심하세요, 친구. 그런 발언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성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어요. 그분의 바람을 존중할 의무뿐이죠."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은 교리 문제입니다. 임면권까지 무결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교황의 무류성에 어떤 한계가 있는지는 잘 알아요. 하지만 이 문제는 교회법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점이라면 나도 추기경 못지않게 일가견이 있답니다. 교황령 39절은 아주 구체적이죠. ‘추기경 선거 인단이 사전에 즉 신임 교황이 선출되기 전에 도착한다면, 선거가 어느 단계이든 상관없이 참여하도록 허락할지어다.‘ 저 양반은 합법적인 추기경입니다!" - P87

"중동의 기독교는 이미 입지가 위태롭습니다. 예하께서 추기경이신데 로마까지 직접 나타나신 사실이 알려지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위험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 때문에 고민도 많이 했죠. 그래서 여기 오기 전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에, 아무튼 선택을 하셨으니 그 문제는 넘어가죠. 하지만 이곳에 오신 이상, 어떻게 바그다드로 돌아가실 생각인지 암담하기만 하군 요."
"당연히 돌아가야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제 신앙의 결과를 받아들일 겁니다."
"추기경님의 용기와 신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하의 귀국은 외교 마찰을 빚을 테고 그렇게 되면 예하의 결정과 무관하게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예하의 결정과도 무관하겠죠. 예하, 제 결심은 차기 교황을 위한 것입니다." - P88

베니테스가 어찌나 놀란 표정을 짓던지 잠시 한 번도 식사 기도를 해보지 않았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마침내 그가 "물론입니다, 예하.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라며 인사를 받고는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다. 추기경들도 따라 했다. 로멜리도 눈을 감고 기다렸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로멜리가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할 때쯤 목소리가 들렸다."오, 주여, 우리를 축복하소서. 이제 우리는 주님의 너그러우신 선물을 마주했습니다. 또한 이 음식을 함께하지 못 하는 이들을 축복하소서. 오, 주여, 우리가 먹고 마실 때, 굶주리고 목 마른 이들, 아프고 외로운 이들, 그리고 오늘 밤 우리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를 도와줄 수녀들을 잊지 않도록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 P99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선교사–사제가 왜 그렇게 교황 성하의 마음을 끌었는지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신을 만나고 싶으면, 안락한 제1 세계 교구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가장 절박한 곳으로 가야 한다. 그분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든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질지어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삶을 버리면 구할 것이니라······.
베니테스는 정확히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교회의 장벽을 통해서라면 결코 이곳에 이르지 못할 사람.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을 사람. 그래서 사회적, 사교적으로 늘 어색한 사람. 그렇다, 저렇듯 특별한 성직 수여가 아니라면 어떻게 추기경단에 속할 수 있었겠는가. 로멜리는 비로소 그 모두를 이해했다. - P101

로멜리는 거대한 암흑의 무저갱을 그려보았다. 구덩이는 하늘에서 그에게 집어 던진 조롱의 목소리들로 어지러웠다. 의심이라는 이름의 신성한 계시.
절망. 절망. 절망. 로멜리는 《묵상》을 집어 벽으로 던졌다. 책은 벽에 부딪혀 탁 소리를 냈다. 코 고는 소리가 잠시 그쳤다가 다시 이어졌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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