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 그리고 허무 그리고 허무(nada y pues nada y pues nada)."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행여 아직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세월이 흘러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될지 모른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언젠가 내가 읽은 적 있는 삶이라는 것을. - P61
서사의 각 국면에서 우리는 세 개의 물음(모티프)과 만나게 된다. 첫째,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예술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이야기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을 극복하면 모든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악기 하나만으로 저승에까지 갈 수 있었고 아내를 데려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는 설정은 위대한 예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지대한 신뢰와 동경을 입증할 것이다. 둘째, 이것은 금지와 위반에 대한 이야기다. 플루토가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이유는 분명치 않다. 죽은 자는 살려내선 안 된다는 자신의 원칙을 깨기 위해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르페우스가 결국 돌아보고 말았다는 점이다.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결국 돌아보게 된다. 이 모티프가 구약의 창세기에서 한국의 민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것은 이 설정이 욕망의 본질(금지가 있는 곳에 위반이 있다)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이것은 상실과 애도에 대한 이야기다. 오르페우스는 애도를 끝내는 데 실패하고 타살의 형식으로 자살한 인물이다. 이상 세 가지 모티프는 이 원형적인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는 세 개의 문이 된다. - P73
오르페우스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이것이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죽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 연인은 나를 떠남으로써 내게서 한 번 죽는다. 그런데 더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이별의 순간에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 수 있다. 죽은 연인을 살리려는 노력이 외려 그를 한 번 더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 경우 떠난 것은 너이지만, 네가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내가 되고 만다. - P75
너무 오랫동안 울음을 참아온 그는 정작 자신이 그래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이 슬픔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슬픔이다. - P78
진정한 고통은 침묵의 형식으로 현존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스럽다고 말할 힘이 없을 것이다. - P88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아니 에르노의 《집착》(문학동네, 2005)은 ‘고통‘이라는 단어의 출현 빈도가 분량 대비 가장 높은 작품일 것이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근래 읽은 고통의 기록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닮아 있는데 그것은 이 소설들이 고통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 P88
질문은 진실을 말하라고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대체로 인간 개개인의 진실이라는 것은 도무지 한두 마디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일 때가 많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실은, 이렇게 시작되는 긴 이야기의 끝에서야, 겨우 떠오를 것이다. - P92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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