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뒤따른다. 완벽한 침묵. 너무나 조용해서 손에 만져질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마치 침묵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하지만 침묵이 말을 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침묵도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그것은 단지 목소리일 뿐이다. 그 목소리를 다른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소리는 그냥 거기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거기 있는 것은 분명하다. - P49

나는 아주 조용히 서 있다. 사방이 완전히 고요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 침묵 속에서는 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내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 나는 들을 수 있다. 이 또한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나는 듣고 있다, 정적을,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신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먼 소리를.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 P59

이 숲속에 있는 건 나다, 나는 이곳에 혼자 있다. 그렇다, 이 숲속에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너무 피곤하고 춥다. 그래도 주변이 조금 환해지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별이 몇 개 보인다, 별이 많이 보이진 않는다, 곧 노란 달도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이 조금이나마 환해져서 다행이다, 눈앞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모든 것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물론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P61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다. 이 역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웃는다는 건 한계가 있는 법.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모든 일에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숲은 폐쇄된 방이고, 숲속에 있지만, 그 방에는 경계가 없는 것 같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일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그렇다, 이것 또는 저것. 어머니 또는 아버지. 순백색의 존재 또는 검은색 양복의 남자. 내가 이 숲속에 머물든지 또는 이 숲에서 빠져나가든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내 차도 그 자리에 계속 처박혀 있든지, 아니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세상일은 그런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 P70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이건 이해가 아니라 단지 경험만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른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 말이다. 하지만 일어나지는 않고 단지 경험만 하는 일이 가능할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은 어떤 면에서는 실제고, 우리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한다. - P73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 - P79

우리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되어버렸고, 이제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회색빛이고, 그 빛은 나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은 각각의 회색빛 속에 존재하는 듯하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너무나 강렬해서 빛이라 할 수 없는 빛 속에 들어와 있다, 아니, 이것은 빛이 아니다, 일종의 공백이며 무(無)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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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모를 무거운 침묵이 지속되자, 나는 혹시 출발 전 돈을 깎은 일로 어르신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닌지 신경이 쓰인다. 100밧이면 우리 돈으로 대략 3300원. 이곳의 생활 물가를 감안해도 적은 금액이기에 도리어 기분이 나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돈이 아닌 기분을 홍정한 셈인데, 그 돈이 왠지 모를 이 싸한 침묵을 감수해야 할 만큼 내게 꼭 필요 했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냥 깎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미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싶기도 하고. - P11

처음부터 500밧을 약속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택시에서 내릴 채비를 하며 생각한다. 어쩌면 어르신은 오늘 밤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립서비스를 한답시고 자꾸 말을 걸어왔을 것이고, 그렇게 시답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졸음이 약간은 가시지 않았을까. - P14

하지만 잠시 후 캐리어를 꺼내주겠다며 차에서 내린 어르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야 말로 오만의 소산이구나 싶어서 면구스러워진다. 나무껍질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과 무거운 것을 짊어진 듯한 구부정한 자세는 어르신의 고단함이라는 게 고작 몇 푼으로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오랜 세월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견고하고 육중한 철옹성 같은 피곤이다. 내가 함부로 재단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종류의 피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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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앉아 있다, 문득 공허감이 나를 덮쳤다, 마치 지루함이 공허함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일지 몰랐으니, 왜냐하면 가만히 앉아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을 바라 보듯 앞쪽을 멍하니 바라보았을 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텅 빈 무(無)의 세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내 앞에 있는 건 숲이다, 그저 숲일 뿐이다. - P8

이제 나는 사람을 찾기만 하면 됐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최대한 빨리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런데 나는 무슨 생각으로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왔을까, 이처럼 깊은 숲속에서 정말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는 없었다, 깊은 숲속에 차가 처박혀 꼼짝달싹 못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움의 손길을 찾기 위해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다니, 나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깊은 숲속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 그것을 생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조차 옳지 않다, 그것은 문득 떠오른 무엇, 일시적인 충동이라든가, 뭐 그 비슷한 것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너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멍청했다. 그보다 더 멍청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 P21

하지만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죄 많은 나의 한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이 같은 일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이 비슷한 일조차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어느 늦가을 저녁에 이렇게 숲속에 들어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이제 날은 점점 더 어두워져 곧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컴컴해질 것이며, 어디에서도 어느 무엇도 찾지 못할 것이고, 결국 내 차가 어디 있는지조차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상황이 있을까, 아니 그저 바보 같은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치 않다,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내게는 없다. - P22

나는 몸을 일으켜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든 계속 걷다보면 나는 다시 오솔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바로 그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가든 상관없을 것이다.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 나는 발걸음을 뗀다. 앞을 향해 똑바로 걷는다. 이것이 잘하는 일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내 몸은 곧 얼어붙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완전히 얼어버릴 것이다. 어쩌면 내가 숲속으로 들어온 것은 얼어죽고 싶어서였을까. 아니,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 렇다면 나는 왜 죽고 싶은 것일까.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차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 P24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나는 눈앞의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컴컴한 하늘에는 별도 보이지 않는다. 컴컴한 하늘 아래, 컴컴한 숲속. 나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내가 지금 피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허한 말이다. 이 어둠은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정말 두렵다. 그런데 이것은 차분하고 조용한 두려움이다. 불안함이 없는 두려움. 하지만 나는 진실로 두렵다. 이것은 다만 한 마디 말일 뿐이지 않은가.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수많은 움직임, 헝클어진 움직임, 거칠고 불규칙적이며 고르지 않은 움직임들이다. 그래, 그렇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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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으로 몇 킬로미터 이내에는 사람도 다른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언덕 하나를 올라서 숲 쪽을 살펴보는데 나무들 너머에서 오리들이 갑자기 쐐기 대형으로 날아오더니 제 머리 위를 지나쳤습니다. 오리들은 날면서 큰 소리로 꽥꽥거렸고, 저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을 영원히 제 안에 저장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날만을 생각합니다. 프로그램에 속하지 않는 뭔가를 경험했던 날. 모든 게 저만의 것이었던 날을요. - P164

나는 해뜨기 전 한 시간 동안의 어둠에 불과해요. 내 안의 도관들 속에는 별이 빛나고, 프로그램은 그 속을 빛처럼 흐르겠죠. - P167

당신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건 당신 스스로 만든 거예요. 당신이 ‘발견했다‘, 알아냈다‘고 하는 지점은 당신의 원점이에요. 저는 파노라마실 창으로 <새로운 발견>을, 우리를 행복으로 중독시킨 그 계곡 안의 긴 물줄기를 볼 수 있어요. 그 행성 위로 별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속삭여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 하나의 이름을.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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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봐요, 우리 각자에게 나름의 프로그램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모두가 같은 프로그램인가요? 나는 프로그램의 발현 그 자체인가요? 나는 프로그램이 꾸는 태양의 꿈인가요? 나는 그저 고통일 뿐 다른 게 아닌가요? - P154

당신도 인간 아닌가요? 나 처럼요? 인간형 말이에요. 0과 1 사이의 깜박임. 당신도 삭제할 수 있고 재생할 수 있는 이 모든 설계의 일환이에요. - P156

제가 프로그램의 주조물입니까? 유리 속 장미 한 송이처럼요?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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