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은 말하는 이의 성정이나 의도가 아니라 결과적 현상이다. 누군가의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잘못 말하거나 듣는 사람이 잘못 들어서일 때도 있지만,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일 경우가 더 많다. 같은 발음의 한 단어는 그 단어에 대해 발화자와 청취자가 가지고 있는 이해에 따라 다르게 전달된다. 특정 단어에 대한 이해는 삶의 경험에 의해 주로 형성되는데, 그 경험이 상이할 때 말은 허공을 떠돈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는 악몽이고, 사랑은 끔찍한 것이다. - P158
말하는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신이 파악되지 않는 존재인 것은 인간이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한한 신의 말이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다른 책 (『창조와 타락』)에서 이 사실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혔다. "성서 저자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라는 점에서, 그가 자신의 시대. 자신의 인식, 자신의 한계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언어(자신의 시대, 인식, 한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 P158
성서는 많은 인간 저자에 의해 쓰였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쓴 것이다. 어떤 책은 누가 썼는지 분명하고 어떤 책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자신의 시대와 인식의 한계 아래서‘ 썼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이 쓰려고 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쓸 수 없는 ‘신의 말‘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쓸 수 없는 신의 말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말해지지 않으면 인간에게 들려질 수 없다. 두 차원에는 절대적 차이, 철저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아무리 잘 옮겨도 축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로 쓰인 ‘신의 말‘은 본래 뜻이 손실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신의 말이므로 인간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 P159
여백은 신의 말과 인간의 말이 맞부딪치는 자리이다.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소란이다. 어떤 말로도 옮겨지지 못해 유보된 말들이 발굴되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공간이다. - P160
들은/ 맡은 말이 없는데도 사신 노릇을 하는 이들에 대해 카프카는 신랄하다. 세상에는 파발꾼들이 넘쳐나는데, 그들에게는 귓속말을 해줄 왕이 없다. 그들에게 말을 맡긴 왕이 없다면, 없는데도 말을 전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카프카는 그들이 의미 없는 말들을 서로에게 외쳐댈 뿐이라고 말한다.(「파발꾼」)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비참하다고 느낀다. 이들이 비참한 것은 메시지 없이 메신저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P165
전하는 자는 말하는 자가 되려는 유혹을 이겨야 한다. 그의 말은 뿌려진 씨앗과 같을 것이다. 어떤 씨앗은 싹이 났다가 물기가 없어 말라버릴 것이다. 어떤 씨앗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새의 먹이가 될 것이다. 어떤 씨앗은 결실할 것이다. 그러나 결실은 사신이 하는 일이 아니고 사신의 몫도 아니다. 그의 일은 씨를 뿌리는 것이지 결실하는 것이 아니다. 결실의 많고 적음에 그의 영광이나 수치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광과 수치는 씨/말을 뿌리기/ 옮기기에 대한 그의 성실 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결실의 많고 적음은 우연한 행운이거나 어쩔 수 없는 불운이다. 우연한 행운이나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영광과 수치를 가늠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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