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널 행복하게 해줄 참한 남자를 못 만나니?"
엄마는 말한다. "좀 착하고 단순한 사람. 지식인이니 철학자니 하는 인간 말고" 우리는 링컨센터에서 열린 정오 콘서트를 보고 나서 9번 애비뉴를 걷고 있다. 엄마는 한 손을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펼쳤다. "왜 맨날 무능한 놈이랑 헤어지면 또 그런 놈을 고르는 거냐고? 말 좀 해봐라. 너 엄마 불행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지? 그게 뭐 하는 짓이냐고?"
"제발, 엄마. 그만해." 내 목소리가 더 기어들어갔다. "내가 남자를 ‘고르는‘ 게 아니야. 그냥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냥 여기서 살고 있을 뿐이라니까. 그러다가 어떤 일이 생겨. 그 사람에게 끌려. 그래서 끌리는 대로 해. 가끔은 마음속 저 안쪽에서,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기도 해. 혹시 이 사람과 진지해질 수도 있을까? 이 남자가 내 애인, 내 남편이 될 가능성도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대체로 떨쳐내. 왜냐면 이게 인생이니까. 엄마. 연애도 하고 사건도 생기고 열정도 생기고, 그렇게 삶이 굴러가는 거야. 그 안에 결혼이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 P186

남자와 나는 기자 간담회에서 만났다. 서로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끌렸고 그 뒤로 믿기지 않는 행복이 찾아왔다. 그 한 달 내내 꼭 붙어 지냈다. 콘퍼런스가 끝난 다음 나는 뉴욕으로 돌아오고 그는 하던 작업을 마저 끝내기 위해 중서부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6주 후에 뉴욕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그는 으레 내가 집에 도착할 무렵 전화를 하기로 약속했다. 2주가 지났고 전화는 없었다. 그는 전국을 돌며 취재 중이었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 2주 동안 농축된 불행이 내 인생을 잠식했다. 그 불행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인식하고 잠들기 직전에 인식하는 실체였다. 밤엔 깊이 잠들지 못하고 새벽이면 깨어나 내가 처한 상황을 상기하고 고통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집 안을 서성댔다. 이제 나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라 레싱의 소설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내 세상은 집착이라는 그림으로만 채울 수 있는 액자였다. 나는 액자처럼 좁은 이 공간을 음울하고도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다닌다. 나는 사랑의 경험이란 이전과 비슷하지만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 것, 그러면서도 동일한 열병과 환멸과 격정과 부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저주를 받은 현대 여성이다. - P189

우리가 걷는 이 도시는 우리 안에서 끓어오르는 이 격정의 드라마에 길바닥 버전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 유리문이 없는 공중전화기 앞에서 한 남자가 부스 안을 발로 쾅쾅 차며 수화기 건너편 상대에게 소리를 친다.
"지금 간다고 했잖아!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왜 가는지 안 가는지 자꾸 물어?" 구석에서는 여고생들이 사나운 표정으로, 폴리에스테르로 된 최신 유행 옷차림을 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옆을 지나는데 한 학생이 다른 두 친구에게 말한다. "그래서 내가 토니한테 그랬지. 질척거리지 좀 마. 나는 그렇게 들러붙는 남자 딱 질색이야." 엄마와 나는 조용조용 조심스레 공중전화기 앞 남자의 말도 엿듣고 골목 학생들 말도 엿듣는다. 엄마는 나를 옆눈으로 살짝 보더니 말한다."너 그 러시아 속담 알아?" 아니, 몰라. 내가 러시아 속담을 안다고는 말 못하겠네. 엄마는 러시아어 한 문장을 읊조리더니 번역한다. "썰매를 타고 싶으면 끌 준비도 해야 한다." 우리는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집에 도착할 무렵 나쁜 감정이 조금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 P190

침묵. 예상치 못한 긴 침묵이다. 매릴린은 한숨 쉰다. "넌 여전히 너희 엄마랑 똑같구나." 그가 말한다.
"뭐?" 나는 숨을 들이쉰다. "무슨 말이야?"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남자를 골라, 그런 다음 엄청나게 이상화를 해. 그다음엔 그 사람이 더 다가오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충격을 받아. 그 사람들이 모를 것 같니? 자기가 아니라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는 걸? 그다음부턴 네가 무조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그게 어떻게 우리 엄마랑 닮았다는 거야?"
"너희 어머닌 결혼 자체를 너무 이상화하셨잖아, 그리고 그 결혼이 끝나버리니까······ 넌 그러지 마라. 공허감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거야." - P193

누군가 엄마의 그 지독한 우울함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겐 폭력이 된다고 하자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의 입과 눈은 상처와 분노로 번들거렸다.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내 기분이 이런 걸 어쩌란 말이니. 나는 내 기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내심 당신의 우울한 상태를 예민한 감성, 강렬한 정서, 숭고한 영혼의 표시라고 여긴다. 당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에겐 최소한의 상호관계가 필요하며 그 최저 수준 밑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생경하기만 할 뿐이다. 엄마는 당신의 악착스러운 불행이 어떤 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하이고 판단이라는 사실을 읽지 못한다. 마치 한탄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 너로는 부족해. 너는 나한테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없고 이 상태를 개선해줄 수도 없어.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긴 해. 그러니까 너에게 주어진 의무는 이해를 해야지. 내 이 모든 절망과 박탈감을 치료해주기에 너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매일 깨닫고 사는 게 네 운명이야." - P195

나에게 상상이라는 세계는 언제나 문제투성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느낌이 극단적일 정도로 깊숙이 다가왔다. 너무 깊고 좁고 강했다. 이 거리의 껄끄러운 현실들, 공기마저 하얗게 느껴지는 약국, 도서관 원목 바닥의 입자들, 식료품점 냉장고의 치즈 조각들을 내 세계의 전부라 여겼다. 이 모든 현실의 조각을 너무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상력이라고는 없었다. 이 모든 사물과 외관과 감회에 바보처럼 열중했고 그것이 세계의 전형적인 얼굴이라고 여기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거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거리였고 이 건물이 세상의 모든 건물이었으며 이 여자 남자들이 세상의 모든 여자 남자 들이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 P197

버클리대학교 영문학과는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 젊은 청년들 옆에 영문과 여학생들이 있다. 대부분 중서부 출신으로 피터팬 칼라(작고 둥근 플랫 칼라) 옷을 입고 내면에 열정을 품은 채 침묵을 유지하다가 3학년쯤 되면 이 전도유망한 남학생 중 한 명과 약혼을 한다. 그중에는 굉장히 명석한 여자가 많았다. 한 명은 이지적인 시를 썼고, 또 한 명은 헨리 제임스의 정신세계를 분석했고, 또 한 명은 에드먼드 스펜서의 장편서사시 「요정 여왕」을 재해석했다. […] 그리고 다른 부류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가 세고 주관이 뚜렷한 이들. 대차고, 까다롭고, 집시의 음울함을 풍기고(다른 말로 하면 뉴욕 출신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탁월한 지성을 갖추었으나 세심하지 않고, 감성은 공격적이지 온화하지 않으며, 말투와 태도는 냅다 직설적이고, 우아함이나 겸손함 따윈 결여되어 있으며 아슬아슬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 P201

나는 시종 불편하고 불안한 길을 가면서 내가 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단정하지 못했다. 나 또한 ‘조신하지 못한‘ 특징들을 끌고 버클리로 왔다. 이 세계의 마크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진즉에 알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과 내가 불화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의 불안함, 두려움, 방어 본능 때문이었다. 나? 나는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따지고 말대꾸하는 아내를 원하지 않고, 나 같은 여자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나 같은 여자를 무서워해"라는 말에 내가 아는 경멸을 가득 담기로 했다. 그런 두려움은 수준 낮고, 교활하고, 비딱하고, 졸렬하고 기생충 같은 것이다. 나 같은 여자를 겁내는 남자는 혀로 채찍을 휘둘러 아랫도리를 마비시켜버려야 한다. - P204

스테판은 왜 나와 결혼했을까? 나에게서 뭘 원했을까? 똑같은 것, 나와 같은 것을 원했다. 나 또한 그가 상상한 삶의 지도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일단 문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다. 합격. 또 윤리의식 투철한 유대인 여자다. 더 좋지. 나는 예술이라는 신전을 경외한다. 이제 만점이다. 우리가 함께 산다면 둘 다 안정적으로 우리 운명인 창작에 전념하면서 위대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영혼의 환상에서 탄생한 결혼이라 할 수 있었다. 기실 우리는 육체적으로 강하게 끌리지도 않았고 서로에게 낭만적인 애착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불행을 살아내야만 서로를 원하지 않았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 P207

처음으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내 몸에는 보헤미안의 피가 흐르지 않았고 그에게는 모범 시민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 나는 물리적인 환경의 부조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는 완벽하게 정리를 마친 듯한 단정한 방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명료한 사고를 섬겼고 그는 신비로운 계시에 끌렸다. 매일 낮이면 짧지 않은 불행의 순간들이 찾아왔고 거기에서 회복되는 데 몇 시간씩 걸렸다. 매일 밤이면 우리의 혼란, 우리의 갈망, 우리의 고집을 침대로 가져갔다. 육체가 휴식을 가져다주는 순간도 있긴 했으나 길어야 시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성애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지만, 아침이 찾아오면 전날 저녁과 똑같은 크기의 외로움만 남았다. - P213

결혼하고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스테판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를 끓였네." 나는 충격받았다. 우리 둘 다 커피 애호가가 아니라 커피 맛을 따지지도 않았고 맛이 있건 없건 누가 커피를 끓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날 갑자기 식탁 위 맛없는 커피는 나라는 인간의 결함이 되었다. - P216

원칙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매일 부딪치는 일상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같은 시간에 같은 것을 원할 수 없게 생겨먹은 사람들 같았다. 우리는 점점 자기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양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밀려나 찌그러지면서 내가 아닌 내가 되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원한 건 그저 평범한 생활이야! 왜 모든 게 이렇게까지 힘에 부쳐야 하지? 왜 우리는 늘상 화가 나 있거나 긴장해 있지? 왜 시도 때도 없이 상처받고 이것에도, 저것에도, 고작 저 따위 것에도 이토록 생각이 다른 거지? - P221

그날 흔들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테판이 내 서재로 들어오더니 같이 산책을 가자고 했다. 나는 무릎에 있던 책을 다시 들고 가기 싫다고 했다. 이 장 마저 읽어야 해. 이튿날 밤에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싫어, 오늘 너무 피곤해. 그 이튿날 밤엔 학교에서 열리는 모임에 같이 가자고 했다. "당신 혼자 가. 그런 데 갈 기분이 아니네." 그는 문가에 서서 나를 한참 동안 주시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내가 뭘 하자고 하건 다 싫지? 아니면 그냥 내가 싫거나. 어? 뭘 어떻게 해도 네 성에는 안 차잖아. 마음에 안 들잖아. 아니야? 넌 나를 그렇게 느끼게 해. 백날 그래. 지금만 그런 것도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어. 넌 항상 불만족스럽고, 실망해 있어. 모든 것에 있어서 그래.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 노력은 요만치도 안 해. 그저 불만만 가득해서는 그 빌어먹을 흔들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잖아."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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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P174

하밀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은 시인들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그가 나를 빅토르라고 불렀던 것이 갑자기 떠올라 웃음이 났다. 어쩌면 신이 할아버지를 통해 시인이 되라는 계시를 내게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상 속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희고 붉은 새들을 보았다. 새들의 발에는 내가 함께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끈이 달려 있었다. - P179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 P252

내 말을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유태인 노인네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눈은 하밀 할아버지가 "이건 최고로 아름다운 양탄자란다"라고 말하던 양탄자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하밀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양탄자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으며, 알라신도 양탄자 위에 앉아 있었다고 믿었다. 내 생각에는, 알라신이 속임수 더미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 P254

"로자 아줌마, 왜 내게 거짓말을 했어요?" 그녀는 정말 놀라는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다구?"
"열네 살인데, 왜 열 살이라고 하셨냐구요."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로 그녀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네가 내 곁을 떠날까봐 겁이 났단다, 모모야. 그래서 네 나이를 좀 줄였어. 너는 언제나 내 귀여운 아이였단다. 다른 애는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네 나이를 세어보니 겁이 났어. 네가 너무 빨리 큰 애가 되는 게 싫었던 거야. 미안하구나."
나는 덥석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 팔로는 마치 내 아내인 양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 P256

"이제 모두 다 지겨워요. 로자 아줌마만 빼고요.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 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이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선생님이 인정머리 없는 늙은 유태인이 아니고 심장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 진짜 유태인이라면, 좋은 일 한번 해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안 보여요. 그 낯짝을 재현시키는 것조차도 안 된대요.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피아들을 풀어서 막잖아요.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건 범죄라구요······." - P264

"모모야,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어. 넌 어른이 되어서도 딴 사람들과는 다를 거야. 나는 언제나 그걸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카츠 선생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너는 언젠가 특별한 사람이 될거야."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건 어쩌면 내 아버지가 정신병자였기 때문일 거예요."
카츠 선생님은 환자처럼 보일 정도로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렇지 않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넌 너무 어려서 이해를 못 하겠지만······."
"선생님,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 P267

"아, 그래. 너는 아주 영리하고 예민한 아이야. 너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해야겠지. 종종 로자 부인에게 말했지만, 너는 정말 남다른 사람이 될 거다. 훌륭한 시인이나 작가나, 아니면······."
그는 또 한숨이었다.
"반항아가 되거나······ 하지만 안심해라. 네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은 결코 아니니까."
"나는 절대로 정상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
"정상인을 말하는 거다."
"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 - P268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 P275

"난 너무 추한 꼴이 되었구나, 모모야." 나는 화가 났다. 늙고 병든 여자에게 나쁘게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니까. 하나의 자로 모든 것을 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마나 거북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듯이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슬퍼서 우는 건지 근육이 풀려서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P276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 P295

"나는요, 자연의 법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요. 롤라 아줌마."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개나 물어가라고 해요.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어요. 구역질나는 그 따위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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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 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38

나는 내가 커서 경찰이 될지 테러리스트가 될지 아직 몰랐다. 그것은 나중에 커봐야 알 것이다. 아무튼 어떤 조직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사람을 죽이는 건 정말 싫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야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다. - P141

로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이빨도 거의 없었다. 미소라도 지어야 아줌마는 평소보다 덜 늙어 보이고 덜 미워 보였다. 그녀의 미소에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 P147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도 닮지 않았고 아무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녀에게 "롤라 아줌마, 아줌마는 어느 누구와도 무엇과도 닮지 않았어요" 라고 했더니 그녀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대답했다. "그래, 귀여운 모모야, 나는 꿈속의 사람이란다." 그런데 정말로 그녀는 푸른 옷의 광대나 내 우산 아르튀르처럼 아무것과도 닮지 않았다. "모모야, 너도 크면 알게 되겠지만, 아무 의미도 없으면서 존경받는 외부적인 표시가 있단다. 예를 들면 불알 같은 거 말이다. 그건 조물주의 실수로 만들어진 거란다." - P158

로자 아줌마는 병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 살면서 겪어온 경험 때문에 이런 방문에는 식은땀을 흘렸다. 점점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게 되자 그녀는 더 힘들어했는데, 사람이 늙으면 그런 것이다. 인사를 하려고 애써 사층이나 올라온 이 프랑스 사람은 그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방문은 마치 그녀의 죽음에 앞선 저승사자의 방문처럼 되어버렸다. 더구나 그 사람은 검정색 양복에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나타났던 것이다. 로자 아줌마에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죽고 싶은 욕망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저런 욕망이 아니라 그저 습관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런 생각을 하느니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 - P162

얼마간 더 침묵 속에 있다가 샤르메트 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로자 아줌마에게 자기가 프랑스 철도를 위해 평생 공헌한 일들을 매우 사무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상태가 매우 악화된 늙은 유태인 여자에게는 무척 부담이 되는 얘기여서 그녀는 점점 더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둘 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샤르메트 씨가 불쌍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나오는 연금이 있다 해도 그 역시 돈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는 노인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 말이다. - P164

노인들이 결국 죽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내가 흥분할 일도 아니다.
샤르메트 씨가 기차며, 역, 그리고 출발시간 따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들어줄 만했다. 마치 그는 아직도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환승역에서 갈아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탄 기차가 이미 종착역에 다다라서 이제 내릴 일만 남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P165

"할아버지는 또 빅토르라고 불렀어요."
"그, 그랬니? 미안하구나."
"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때요. 어제부터는 좀 어떠세요?"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생각해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듯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양탄자를 팔러 다니던 생활을 그만둔 뒤로는 매일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다보니 백지 위에 백지만 쌓아온 셈이어서 별다른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낡은 책 위에 오른손을 얹고 있었다. 그 책은 마치 장님이 도움을 받아 길을 건널 때에 의지하는 손길처럼 그의 손에 매우 익숙해진 것 같았다. - P171

신 얘기는 이제 지겨웠다. 신은 언제나 남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니까.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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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 P113

지금도 나는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똑같았으니까. 내 생활은 매일이 똑같기는 했지만, 때로 다른 때보다 휠씬 기분이 안 좋은 때가 있었다. 아픈 데는 하나도 없는데 팔다리가 다 떨어져나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하밀 할아버지도 그런 경우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 P118

세상에서 제일 일찍 죽는 것은 개들이다. 열두 살만 되면 쓸모가 없어져서 새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다음에 내가 개를 갖게 되면 갓난 놈으로 골라서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데리고 있을 작정이다. 광대들만은 죽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킹콩이든 프랑켄슈타인이든 상처 입은 붉은 새떼라도. 그러나 엄마만은 안 된다. 그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 P119

결혼해서 아이를 둔 경찰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르 마우트와 함께 경찰을 아버지로 두는 것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르 마우트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그런 상상은 아무 쓸모 없는 짓이라고 말하더니 가버렸다. 약물중독자와는 토론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세상 일에 대해 호기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P121

나는 아주 먼 곳,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 찬 곳에 가보고 싶은데, 그런 곳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연히 그곳을 망칠 것 같아서이다. 그곳에 태양과 광대와 개들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들은 그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에 맞게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까지 하다. - P122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저능아다.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 그러면 난처해진 부모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열 살처럼 행동을 하는 식이다. 문제는 그런 아이는 혼자 벌어먹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열 살짜리 아이가 열다섯 살처럼 행동하면 학교에서는 내쫓아버리기도 한다. 학교가 엉망이 된다나. - P131

그때 내게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서 엄마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땅바닥에 앉아 있는 내 모습과 그런 내 앞으로 가죽으로 된 미니스커트를 입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다리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얼굴을 보려고 눈을 치켜뜨려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나는 그것이 나의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추억만으로는 눈을 치켜뜨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좀더 먼 과거로까지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나를 어르며 재우고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두 팔이 느껴졌다. 배가 아팠다. 나를 따뜻하게 안고 있는 사람이 콧노래를 부르며 좌우로 몸을 흔들며 걸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가 아파서 바닥에 똥을 쌌고, 그제서야 더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 따뜻한 사람은 나에게 뽀뽀를 해주더니 가볍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 P134

"재밌니?"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화면에는 이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금발의 여자가 내게 다가왔고 방 안에 불이 켜졌다.
"아주 좋아요."
뒤이어 은행 직원인지 반대파 중의 한 명인지 배에 총을 잔뜩 맞은 채 "날 죽이지 마, 죽이지 마!"라고 울부짖는 남자가 다시 나왔는데, 그렇게 울부짖는 것은 참 멍청한 짓이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그는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죽기 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봐줄 만하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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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아줌마는 심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층계를 오르내리며 장을 보러 다니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녀에게는 층계가 제일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줌마는 날이 갈수록 숨을 쌕쌕거렸고, 덕분에 나도 천식에 걸렸다. 카츠 선생님은 심리적인 것보다 더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심리적 전염이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매일 아침, 나는 로자 아줌마가 눈을 뜨는 것을 보면 행복했다. 나는 밤이 무서웠고, 아줌마 없이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면 너무나 겁이 났다. - P82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 P91

말을 마친 후 로자 아줌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츠 선생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창녀들에게는 마음의 눈이 있다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 P93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지 않으며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네 인간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낙타(까다로운 사람, 고약한 사람에 비유된다)에게조차도 호감이 갔다. 녀석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마치 거드름을 피우는 중년 부인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걸어다녔다.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철사줄 위에 있는 광대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열 흘 동안 나는 그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떨어지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 P106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 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메카에까지 다녀왔다. - P108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갑자기 내 속에서 희망 같은 게 솟았다. 당장 내가 따로 살 곳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살아 있는 한 아줌마를 버리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닥쳐올 미래를 생각해두어야 했다. 나는 밤마다 미래를 꿈꾸곤 했다. 누군가와 바닷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꿈,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어떤 사람. 그렇다, 나는 가끔 로자 아줌마를 배신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죽고 싶어질 때 머릿속으로만 그랬을 뿐이다. 나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망이란 것에는 항상 대단한 힘이 있다. 로자 아줌마나 하밀 할아버지 같은 노인들에게조차도 그것은 큰 힘이 된다. 미칠 노릇이다. - P109

뭔가를 이해하는 데 내가 워낙 젬병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두어야겠다. 나는 늘 연구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낸다. 하밀 할아버지 말이 맞다.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하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한동안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을 뿐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 P110

사실 나는 이상한 일이란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일들이란 게 알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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