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첫 방북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원산에서 고속도로를 지나 이 자리로 옮겨진 모두가 고개를 숙일 때, 나 혼자 멍하니 동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 뒷머리에 손을 얹고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몇 초 후 다시 머리를 들 때까지 그 손은 계속 내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부동자세에서 풀려난 후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머리를 누르다니, 부모도 한 적이 없는 짓이었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름 끼치는 굴욕감을 맛보았다. - P65
어린아이를 포함한 모든 북한 사람은 현지 매체의 카메라 앞에서든 해외에서 취재를 온 인터뷰에서든 "장군님 덕택에 행복합 니다. 감사합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라고 말한다. 평양에서 나고 자란 양씨 집안 아이들은 〈디어 평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많이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 한다. 조부모를 향한 소박한 감사 인사처럼 보이는 이 말이 실은 강렬한 아이러니라는 것을 파악한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 P67
아버지는 이미 일흔넷이었으므로 고희연이라고 주장하기는 다소 애매했지만, 부모님에게는 소정의 목적이 있었다. 오빠들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에 사는 먼 친척들까지 평양으로 불러 모아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이었다. 칠순 잔치는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평양으로 갈 통행 허가증을 얻기 위한 ‘공식‘ 사유였다. 정년퇴직 후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간부가 된 아버지는 칠순 잔치를 당신이 건강할 때 해야 할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했다. 6.25전쟁 전에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갔다가 차별과 빈곤을 견디지 못하고, 북송 사업으로 북에 넘어간 친구들도 초대해야 한다며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옥류관에 불러 모아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에 크게 뽑아서 돌릴 거야. 액자에 딱 넣어서 선물이랑 돈도 좀 넣어주고.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아버지는 늘상 야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 P70
아버지는 북송 사업의 선봉대 역할을 자처했다. 북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동포 사회에서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인 활동가였다.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미화해서 타인에게 이주를 추천하는 무모함을 혁명적 임무라고 믿고 수행했던 것이다. 자기 자식들 손에까지 편도 표를 들려서 북한에 보낸 몇 년 후, 그 나라에 방문해서야 누구보다 북송 사업의 실태를 잘 알게 된 사람이었다. 후회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뿐더러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자각도 있었을 터이다. 세 아들과 가족들이 ‘인질‘이 되고야 말았으니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훈장을 달고 활짝 웃는 부모님의 얼굴이 피에로 같다고 생각하며 나도 웃었다. 북조선을 조국으로 선택해 살아온 두 분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없었다. 그저 믿고 살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 부모님이 웃고 있었다. - P71
뉴욕에 오기 전 함께 일했던, 일본을 대표하는 TV 뉴스 프로그램의 디렉터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베개 밑에 깔린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니 항공기가 충돌해 연기를 내뿜고 있는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을 모든 채널에서 내보내고 있었다." […] 그날부터 조지 부시 대통령은 연설 때마다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나라들을 언급했다. 언론에서 ‘DPRK(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가 오르내릴 때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국 미국은 이듬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는데, 일본이든 미국이든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가족이 살고 있는 나라를 적대시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일 무력에 의한 보복을 외쳐대는 것 또한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 P75
"안녕, 영희.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파일이 학생비자 신청을 위해 대사관에 제출할 서류예요. 불안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려요. 당신은 우리 대학원의 정식 학생이고, 어떠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학생의 배울 권리를 지키는 것이 대학의 의무입니다. 만약 미국에 오기 위한 비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우리가 직접 주일 미국대사관에 요청할 거예요. 이 건에 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우리에게 맡겨요. 가족을 만나러 간다면서요. 여행 잘해요!" - P80
아버지는 저녁에 반주를 들 때마다 뉴욕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한국인 유학생 친구가 많이 생겼다고 하자 무척이나 기뻐했 다. 어머니는 남편과 딸이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안심하면서 평양으로 가져갈 짐을 싸는 데 여념이 없었다. 뉴욕에서 오사카까지도 멀지만, 오사카에서 평양까지 가는 길 또한 쉽지 않은 여정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돌아가면 그만큼 평양의 가족들은 기뻐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와주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조카들에게 ‘뉴욕 고모‘는 인기 만점이었다. 부모님에게도 뉴욕에서 일부러 와준 딸은 자랑거리였다. 가장 중요한 점은 30년 만에야 겨우 가족이 모두 모였다는 사실이었다. - P81
나는 옥류관에서 열린 잔치를 카메라로 기록하면서 채플린의 말을 떠올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내 가족을 롱숏으로 바라보기 위해 렌즈의 힘을 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해도 미워해도 답답해도 멀리 떨어져 살아도 가족과 정신적으로 거리를 두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존재를 부감하여 다각도로 보기 위해서는 밀어낼 필요가 있다. 가족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원거리에서 응시하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다. 살아온 날들을 해부하여 내 백그라운드의 정체를 넓고도 깊게 알고 싶었다. 그런 다음 가족과 나를 분리하고 싶었다. - P87
아버지의 연설을 들으며 내 가족을 해부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던 아버지가 실로 많은 말을 삼키면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가족들 역시 많은 말을 삼켜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 번은 꼭 해야지" 하던 아버지의 말과 연설 사이에 나는 서 있었다. 둘 다 아버지의 말이었다. 둘 다 아버지였다. 잠옷 차림으로 진심을 말하는 아버지도,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버지도 모두 나의 아버지였다.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어른‘들이 그렇게 본심과 명분 사이를 오가지 않을까. 본심 속에도 명분이 있고 명분도 본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다면체라 여러 측면으로 둘러 싸여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비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평범해 보여도 인간이란 그러한 생명체인 것이다. 훈장을 단 아버지를 보면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떠오르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혁명을 외치는 아버지도 평범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88
"수용소에 들어가서 몇 년 후에 무죄라고 밝혀지면 보통은 손 해배상감이지."내가 말했다. "너는 입 다물고 있어." 어머니가 말했다. 불합리한 일은 어느 나라에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가족이 살고 있는 나라의 불합리성에는 특히나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원래 그런 나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예외로 두는 건 불 공정한 것 아닌가. ‘김씨 왕조‘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공정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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