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만 해도 차디찼던 피부가 몹시도 뜨거웠다. 한낮의 태양 같은 열기가 온몸에 퍼졌다. 하지만 새벽 다섯시였으니 태양빛일 리는 없었다. 정확히는 다섯시 이십구분 사십오초. 그건 폭탄의 열기였다. 이내 그렇게 갑자기 시작되었던 것이 갑자기 끝났다. 열기가 흩어졌고, 빛도 사라졌다. 환호하고 손뼉 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이들이 기쁨에 겨워 소리지르며 자축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몇몇은 말이 없었다. 다른 몇몇은 우리 머리 위에 피어오른 불길한 버섯 모양의 구름을 올려다보며 기도했다. 구름 내부에서는 자줏빛 방사선이 생경하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은 성충권까지 높이, 더 높이 올라갔고, 폭발로 시작된 무시무시한 우렛소리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산에 부딪혀 왔다갔다하며 계속해서 되울렸다. - P153
돌이켜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칼로 물 베듯 선명히 구분할 수는 없다. 부다페스트를 떠날 때의 아픔과 전쟁으로 상실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잊히질 않고, 십대 시절 털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목에 금메달을 건 채 스케이트를 탈 때 내 이름을 연호하던 사람들의 아득한 목소리가, 뚜껑 없는 마차를 타고 성대한 파티에 갈 때 머리칼을 나부끼던 바람이 지금도 생생하다. 파티는 아버지가 우리집에서 연 것이었는데, 진짜 집시 악단이 와서 주말 내내 멈추지 않고 노래를 연주했다. 친척 어른들과 사촌들, 우리 대가족의 친구들이 별안간 시끌벅적하게 등장하면 피아노와 가구를 옮기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추며 놀았다. 이 모든 행복한 기억이 번지면서 악몽과 뒤섞인다. - P155
미국의 지옥경을 누비던 기나긴 오디세이 동안에 나의 일부는 분명 죽음을 맞이했다. 견디기 힘든 열기 속에 땀을 흘리며 광활한 공허함을 응시하던 일, 가도 가도 끝나지 않던 밝은 초록색의 옥수수밭,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생긴 주유소들, 왜인지 조니가 선호했던 추레한 모델들, 활짝 웃지만 머리는 텅 빈 여자들을 만나 같이 웃어 주어야 했던 작은 마을과 소도시, 식당과 가로변 술집과 레스토랑에서 무지함을 뽐내던 멍청한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잠자고 있어야 했던 일까지. 그 나라에는 문화라는 게 아예 없었다. 그저 행복한 아내들이 애국심 넘치고 지극히 미국적인 1950년대 낙관주의에 젖어 자기네들 가전제품을 극찬하고, 미련한 남편들은 술병을 들고서 새로 산 잔디깎이를 미는 그런 나라. - P162
다음날 아침 남편은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그날부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다 른 모든 걸 외면한 채 모든 형태의 기술 발전에 자신을 쏟아부었다. 순수수학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나란 존재도 깡그리 지워졌다. 그는 어떠한 유예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으며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도 이 세상에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핵 딜레마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그의 최고와 최악의 모습을 완벽히 반영하고 있었다. 빈틈 없이 논리적이면서 완벽히 반직관적이고, 사이코패스의 경계에 걸쳐 있을 만큼 철저히 이성적인 모습. 많이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남편은 인생을 순전히 게임으로 보았다. 얼마나 치명적이고 심각한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한번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새끼 들짐승의 놀이 방식이 미래에 목숨이 위험해질 상황에 대비한 훈련인 것과 똑같은 이치로, 어쩌면 수학도 그저 기묘하고 놀라운 게임들을 모아놓은 집합체이며, 누구도 상상 못한 미래를 대비해 개인의 차원에서건 집단의 차원에서건 인간 정신을 천천히 변화시키는 것이 그 기획의 진짜 목적,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 너머의 목적이라는 것. 하지만 인간의 고삐 풀린 상상력에서 튀어나온 그 끔찍한 게임들의 문제는, 그것을 현실에서 실행할 때 우리가 어떠한 지식도 대처법도 갖고 있지 않은 위험—그야 현실의 규칙과 진짜 목적은 신만이 알고 있으므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65
나는 조니에게 1928년 그가 발표한 논문 「실내 게임이론」을 읽었노라고 말을 꺼냈다. 혹시 그게 체스 같은 게임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내가 묻자 그는 프로펠러를 힘차게 한 번 돌린 뒤 대답했다. "아뇨, 아니, 아니지! 체스는 게임이 아니니까! 그건 잘 정의된 형식의 계산이지요. 복잡해서 정답을 찾아내는 게 어려울 수는 있어도 이론상 체스에는 반드시 해법이나 최적의 방식이, 체스판의 말들이 어느 자리에서 어떤 형세를 이루고 있건 간에 완벽한 다음 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진짜 게임은 그렇지 않아요. 현실 속 게임은 딴판입니다. 현실에서 이기려면 거짓말과 속임수가 필수니까요. 나는 치밀한 속임수로 구성된 게임에 흥미를 느낍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 마저 속이는 게임 말입니다! 그런 게임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상대의 생각을 읽어내야 합니다. 상대에게 어떻게 대응할지 또 상대가 나의 다음 수를 어떻게 예측할지 생각해야 하지요. 나의 이론은 그런 게임을 다릅니다." - P169
MAD의 원리에 따르면 핵무기를 실어나르는 장거리 폭격기가 일 년 삼백육십 오 일 이십사 시간 내내 착륙하지 않고 지구를 돌아야 하고, 그 비행기들은 핵탄두를 잔뜩 싣고 심해를 순찰하는 거대 잠수함단과 거대 네트워크를 통해 연계되어야 하며,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워싱턴에서 모스크바까지 날아갈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수천 대가 지하 저장고와 요새화된 벙커에 깊이 묻힌 채 아포칼립스의 나팔소리를 침착하게 기다려야 했다. 이 위태로운 평형상태, 섬뜩한 게임은 냉전이 끝나고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너무나도 많은 무기가 그대로 남아, 결함 있고 노쇠한 통제 장치의 감시를 받으며, 마치 오래전 죽은 고대 파라오의 시체처럼 강철관에 보존된 채 죽음과 함께 삶이 시작될 날만을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다. - P174
인생은 게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삶의 풍성함과 복잡함은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방정식이라 해도 포착할 수 없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완벽한 포커 플레이어가 아니다. 대단히 비합리적이기도, 의욕만 앞서기도, 감정에 좌우되어 온갖 모순에 종속되기도 한다. 사방에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유발되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성의 광기 어린 꿈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자비이자 이상한 천사이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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