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린이 대답했다. "그래. 나는 문득 우리가 모든 역사를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삶에는 자연도태의 법칙이 있잖아. 알리기 싫은 것들이 있으면 삶은 모종의 방식으로 그걸 감춰버리지. 그럴 때는 아예 몰라도 되는 거야. 어차피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더 많고 아는 일은 적으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힘들게 알아낸 것들이 당시의 진실이라고 보이지도 않아."
룽중융이 말했다. "네 말은 몰랐던 일을 굳이 들쑤셔서 알 필요가 있느냐는 거지?"
"사실 여기 올 때만 해도 생각이 확실했던 건 아니야. 그런데 오늘 밤 갑자기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 특히 루씨 가문 도련님의 ‘영원히‘ 결심을 들었을 때. 그들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후손에게 절대 알리지 않겠다잖아. 모든 걸 시간의 풍화에 맡기겠다는 철학을 가진 듯했어. 그렇다면 나는 몰랐던 것을 왜 굳이 알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원래 아무 관련이 없던 이곳과 왜 굳이 관계를 맺으려는 걸까 싶기도 하고." - P399

"네 말은 어머니가 알려주신 것들은 그저 단편적인 단어에 불과하고, 그것들을 그냥 조각난 상태로 두는 게 더 낫겠다는 거지? 그 자잘한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걸 생각해낼 수 있겠지. 하지만 정말로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내 원형을 복원하면, 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니까. 더군다나 네가 맞춰낸 원형은 진정한 원형이 아닐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 P400

칭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평온하고 평범해 보이는 삶도 뜯어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아, 나는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역사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평범한 사람은 대항하지 않는 법이지.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나는 자연스럽게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잊는 법을 배우고 싶어.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이니 시간을 따라갈래."
룽중융이 응했다. "평범한 사람은 대항하지 않는 법이라고, 그래! 그렇다면 그러자. 이제 내려놓고 더 생각하지 마. 더 묻지도 말고. 나는 이해할 수 있어." - P402

반면 딩쯔타오는 무척 담담했다. 시아버지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자기 집만 건사할 수 있어도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엄청난 불행으로 끝났다. 그는 상황을 잘못 읽어서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구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의 증오는 서로 아는 집안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부자를 증오했다. 부자의 재산을 나누는 게 모든 가난한 사람이 원했던 일이었다. - P409

그때 딩쯔타오는 모란 이불을 침대에 깔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깜짝 놀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신방 전체가 그 이불 때문에 환해지는 듯했다.
원래 내 인생에도 그렇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딩쯔타오는 생각했다. - P414

끝없는 어둠 속으로 야생화가 전부 숨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검은 밤과 한몸을 이루고 있었다. 앞쪽의 등불만 검은 장막 위에서 명멸하는 유령처럼 불규칙적으로 흔들흔들 빛날 뿐이었다. - P421

칭린이 말했다. "장원의 삶이 안락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여자와 아이들만 그런 생활을 누렸을 뿐 주인은 늘 긴장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아. 이 망루와 포구를 보면 알 수 있잖아."
룽중융이 동의했다. "여기 주인은 의지가 강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도 잘 챙겼던 것 같아. 사실 망루가 초소와 포루를 합친 건데, 거기에 뾰족한 지붕을 가진 정자까지 올렸잖아. 그건 주인이 낭만적이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곳은 화포를 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읊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지." 그런 다음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망루의 매력은 전쟁과 평화를 한데 품었다는 점 같아."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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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린은 알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사람이 늙으면 명예나 이익에 무덤덤해지고 심지어 무심해진다고 했던가. 나이가 들면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P161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바깥이 온통 산이고, 산 뒤에 또 산이 있었다. 그 속의 인간은 먼지처럼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가만히 세어보니 리둥수이는 오십 년 넘게 누명을 쓴 채 살아왔다. 그의 자식과 손자도 영향을 받아 남들 밑에서 일하며 수많은 기회를 놓쳐야 했다. 그런데 지금, 위로 몇 마디와 ‘영웅‘이라는 인정만으로 모든 억울함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 P170

웃고 나서 생각해봐도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먼지는 먼지일 뿐이지. 잊어야 하는 일이든 잊지 말아야 하는 일이든 결국에는 모두 잊을 수밖에. - P171

언젠가 시아버지 루쯔차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풍성한 혼백을 가지고 태어났다가 살면서 차츰 잃어간다. 그러다 다 잃어버리면 혼이 사라지지. 옆에서는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라진 거다. 그 사람은 다시 몸을 돌려 조금씩 자기가 뿌려놓은 혼백을 줍기 시작하지. 도로 다 회수하면 득도할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집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다 회수하지 못하면, 잘은 모르지만 내세에 돼지나 개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 혼을 조금씩 모두 회수해야 해, 다음 생에는 좋은 삶을 살 거야, 더는 생고생하기 싫어, 하고 생각했다. - P197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흙을 메웠는지 몰랐다. 평소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재잘재잘, 바스락바스락 울리던 집안의 소리가 전부 사라졌다. 한때 미소 짓던, 슬퍼하던, 키득거리던, 찡그리던, 침울해 하던 얼굴이 전부 똑같이 변해버렸다.
이런 밤을 겪었는데 제가 살아 있는 것 같나요? 그녀는 속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 P201

딩쯔타오는 자기 집과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친정인 체런루의 문은 시댁의 문보다 컸고 일반적인 집처럼 두 짝이었으며 검은색에 문고리도 있었다. 왜 우리집 문은 루가 저택의 문과 달라요? 그녀의 물음에 아버지가 대답했다. 대대로 학자 집안이라 숨길 필요가 없어서란다. 거리낄 게 없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해도 돼. 사실 세상에서 제일 이목을 끌지 않는 사람은 모두와 똑같은 사람이란다. 그래야 제일 안전하고.
그런 기억을 떠올리다가 딩쯔타오는 냉소를 지었다. 어떤 식으로 몸을 낮췄든 전부 곱게 죽지 못했잖아요, 하고 생각했다. - P212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갔는데도 봄은 더디게 오고 있었다. 석양빛이 초봄의 한기에 얼어붙은 듯 열기를 내지 못해 그날 밤은 유난히 추웠다. - P222

그는 강기슭에서 점점 멀어지는 칭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볼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익숙한 감정은 아주 아득한 익숙함, 오래 전에 잊어버린 익숙함이었고 지금 불현듯 그의 가슴 위로 떠올랐다. 왜 이런 감정이 들까? - P225

류샤오안은 완저우에서 초등학교를 몇 년 다녔다. 그때만 해도 완현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게 많을 줄 알고 비행기에 오른 뒤 옛일을 떠올리며 잔뜩 흥분했다. 하지만 도착한 뒤 당황하고 말았다. 완전히 낯선 곳으로 변해 이곳에 살았던 느낌이 전혀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차를 몰고 아내와 한참이나 시내를 돌아다닌 후에야 옛 흔적이 남은 곳을 몇 군데 발견해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도착하기 전에 조금씩 쌓아올렸던 감정들은 생소함에 이미 산산조각난 뒤였다. - P226

그러던 어느 해 류샤오안과 베이징으로 출장 가 거리의 작은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칭린은 갑자기 흥이 올라 그때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류샤오안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인생에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왜 꼭 아버지처럼 출세하고 싶어 하거나 동생처럼 부자를 꿈꿔야 하지? 아내는 나와 인생관이 같아.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과 살면 정말 편하겠다고 생각했어. 오랜 시간을 통해 내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고. 아내가 돈을 좀 밝히지만, 절대 내 삶을 희생해가며 출세하거나 돈을 벌어오라고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 류샤오촨의 아내를 봐. 은행에 수억 위안을 저축해놓지 않으면 잘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잖아. 그런 다음 내 아내를 보라고. 걱정 없이 잘 먹고 마시고 놀면 그만이야. 어떤 인생이든 사실은 소소한 인생이고 누구나 소소한 일상을 제일 많이 살아. 다시 말해 소소한 인생은 소소한 일상과 어울려야만 가장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 P228

완저우는 당연히 류샤오안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바로 직전에 유럽에서 화려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소도시를 보고 왔기 때문에 심리적 격차가 너무 컸다. 특히 류샤오안의 아내는 툭하면 이렇게 낙후한 곳에 볼 게 뭐가 있느냐고 툴툴거렸다. 하도 툴툴거려 류진위안의 낯빛이 변하자 칭린이 여기에 놀러온 게 아니라 추억을 찾아온 것이라며 눈치 빠르게 나섰다. 추억은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럽 마을이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사실 후대인의 추억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 P229

고향 말을 하면서 고향 국수를 먹고 웃으니 무척 즐거웠다. 류진위안은 이게 바로 행복이며, 이런 행복은 전투할 때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오래전에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그는 평생을 정말 성공적으로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 P236

다이원이 대꾸했다. "제가 살기 싫다면요?"
"넌 살기 싫어도 살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든, 돼지나 개처럼 살더라도 살아야 해. 이게 네 운명이야!"
"저들에게 죽음으로 보여줄 거예요."
"저들은 상관도 하지 않을 거다. 네가 죽어봐야 개가 죽은 듯 여길 거야. 너희 온 가족이 죽었는데 신경쓰는 사람이 있더냐?" - P250

그날의 일을 딩쯔타오는 전부 기억해냈다.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다. 자신의 심정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나더러 살라고 해서 난 정말로 살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게 죽는 것과 뭐가 다르죠? 내가 사는 게 후씨 가문, 루씨 가문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모두 사라졌는데, 내가 후씨 가문 사람인지 루씨 가문 사 람인지 누가 신경이나 써요? 다들 내 목숨을 지켜주려 했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몰라요. 이런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딩쯔타오는 이제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눈물이었다. - P257

이제 딩쯔타오는 열번째 층에 도착했다.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희망을 채우고 있는 것들 때문에 절망하고 말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고 인생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그런 일을 겪고도 왜 살아 있는지는 또 기억나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주저 없이 죽음을 선택한 건 죽음이야말로 제일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 P258

다행히 칭린은 생각이 깊었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어머니 삶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도착한 곳은 다른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일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며, 그 방식은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에 어머니의 숨결이 있는 한 안심할 수 있다는 거였다. - P265

세상 누구에게도 속물근성이 없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칭린은 생각했다. - P267

"엄마, 내년 설에는 절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꼭 건강을 되찾으셔야 해요. 매일 생선과 고기를 구워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저는 이미 오랫동안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을 못 먹었어요."
그렇게 말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칭린은 눈물을 닦지 않고 흘러내리게 두었다.
그해 섣달그믐의 저녁식사 때 가장 기억에 남은 맛은 바로 그 눈물의 맛이었다. - P272

우 노인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산속에서 지내면 아무도 모르게, 죽은 것처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하늘이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번 살아보자. - P273

그러자. 죽은 듯 살자. 이미 죽었는데 뭔들 참지 못할까. - P274

1948년 겨울
어쩌면 12월, 혹은 해가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 노인은 시간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다. 하늘을 보면 밥때를 알 수 있고 추위와 더위는 저절로 알게 된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 P275

1949년 정월
맞는지 모르겠다. 이미 새해가 밝았다고 짐작할 뿐이다. 사실 짐작할 필요도 없다. 어느 해면 어떻겠는가. 무의미한 시간의 지옥이란 이런 것이리라. - P276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며칠 동안, 이미 배운 사람이 산에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자기와 함께 산을 나가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고, 그건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거라고, 더는 전쟁이나 굶주림이 없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누구나 공부할 수 있고 누구나 직업을 가지며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울 거라고 말했다. - P282

생각하다보니 문득 자신은 이 과정을 고작 몇 시간에 겪었지만, 아버지는 몇 년 동안 겪었겠구나 싶었다. 시간이 길어지면 이해하기 힘든 일들도 단순해지고 자연스러워지지 않던가. 시간의 소화력이란 강력해서 아무리 강렬한 감정이라도 밋밋하게, 엄청난 결심도 무기력하게 바꿀 수 있음을 칭린은 잘 알고 있었다. - P283

가다가 마을에 묵을 때마다 주민들이 무척 반기며 비적의 악행을 고한다. 그들의 열정은 감동적이다. 우리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떠나기 전에 마당과 길을 깨끗이 청소한다. 예전에는 해방군이 이런 걸 전혀 몰랐다. 이제 나는 류 정치위원을 따라 산에서 나온 게 매우 옳은 선택이었음을 안다. 모든 과거는 지나갈 수 있다. 나는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이 삶은 내 과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내 과거를 영원히 묻어버릴 것이다. - P284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대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깊은 그리움과 기억이 담겨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 성함은 둥푸칭, 할머니는 전린이시구나. 지금까지 가문이라는 개념이 없던 칭린에게 갑자기 어떤 지역의 사람들, 유서 깊은 지역의 사람들과 친밀한 혈연관계가 생긴 듯했다. 그는 자신의 핏줄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거대한 체계와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피가 통하고 흐르기 시작했다. - P295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슬픔이 깊고 무겁게 담겨 있었다. 그녀의 기억상실도 어쩌면 강한 충격 때문일지 몰랐다. 그런 충격 때문에 그녀의 본능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그녀가 부럽다. - P298

그렇다면 아버지의 ‘혹시‘라는 말과 물음표는 무슨 의미일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부모님은 그토록 특별한 상황이 되었을까? 두 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너무도 깊이, 거의 아무도 알지 못하게 숨어 살았다. - P299

그는 부모님의 인생이 왜 그렇게 뒤틀렸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깊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게 꼭꼭 숨겼는지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생의 전반부를 자질구레한 일상 속에 숨겨버렸다. 이런 은폐는 그들이 외부인에 대해 얼마나 깊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지 암시하고 있었다.
세상이 뒤바뀌는 격변의 시대에 개인은 얼마나 고독하고 미약해지는 걸까? 시대의 한줄기 미풍이 어쩌면 그들 인생의 배를 완전히 전복 했을지도 몰랐다. - P300

나 한테는 이 가련한 여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같다. - P307

매일 쯔타오를 데리고 성당에 간다. 루르드 성모상 앞에 이르렀을 때 쯔타오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당시 사람들도 "누구세요?"라고 물었으며 그녀는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노라고 알려줬다. 쯔타오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서 성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바닥에 글자도 써줬다. 쯔타오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원죄가 없다는 뜻이라고 답한 뒤 이 세상에서는 나와 그녀 모두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리송한 눈치였지만 내 말을 가슴에 새겼다. 다음날에는 루르드 성모를 보고 속으로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게 옳다. 내게는 그녀의 평온이 필요하다. - P310

아들아, 또 한 가지 당부하는데, 혹시 흔적을 따라가다가 참혹한 일을 발견하면 중단하거나 포기하거라.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 무척 많으니 그런 일이 하나 더 있다고 해도 아무 상관 없단다.
과거를 잊는 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이다. 망각이 있어서 나와 네 어머니는 이렇게 오랫동안 편안히 살 수 있었다. 망각은 네 부담을 줄여주고 미래를 가볍게 맞이하도록 해줄 거다.
네가 평생 평온하게 살길 바란다. 네 아이 세대가 되면 과거의 모든 것은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 - P314

딩쯔타오는 아버지가 그들 땅을 사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아버지는 아무리 싸도 그들 땅은 사지 않겠다며 우리는 조상들 사이에 생긴 원한을 이어가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딩쯔타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가 틀렸어요. 아버지가 그들보다 더 잘사는 이상 원한은 저절로 이어져요. - P322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산꼭대기에 늘 눈이 얕게 깔린데다 음산하고 추웠다. 해가 비치는 날에도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쯔타오는 갑자기 고향이 생각났다. 고향의 겨울은 언제나 그랬다. 추위가 줄기차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지금도 찬바람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피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 P325

딩쯔타오의 눈에 빛이 보였다.
어렴풋한 그 광선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춤추는 검은 조각 같기도 하고 흩날리는 눈송이 같기도 했다. 딩쯔타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제 출구에 가까워졌나? 나가면 어떻게 될까? […] 밖으로 나간들 누구와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게 진심이 아니었다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 P334

그때 딩쯔타오는 극히 냉정한 상태가 되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어떻게 그토록 단순하게 생각했을까? 훨씬 잘 이별할 수 있었는데 그 어리석은 고육책 때문에 본인들 목숨도 구하지 못하고 오빠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잖아. 나도 목숨만 건졌을 뿐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이 증오하게 되었고. 내 손까지도 그 죄를 기억하고 있잖아. - P339

자신은 왜 아직도 살아 있을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왜 살아야 할까? 무슨 이유로 죽지 않았을까? 그런 것들을 그녀는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
이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또 누구를 더 알아야 할 까? 심지어 그들의 그런 죽음이 더 나은지, 자신의 이런 삶이 더 나은 지 딩쯔타오는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 P340

"다이원, 누가 귀찮게 굴면 네 아버지에게 루쯔차오의 사돈이라고 말하라고 해. 너도 길에서 누가 시비 걸면 루씨 가문 며느리라고 하고."
다이원이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게 소용 있을까요?"
시아버지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 근방 수백 리 안에서는 그래도 아직 우리 집안 말발이 선다. 현의 간부 중에 나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더냐?"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데요? 예전과 다르잖아요."
"내가 그들에게 세워준 공이 얼마인데, 그걸 봐서라도 어느 정도는 체면을 세워줄 거다. 내 말대로 해라."
그때 딩쯔타오는 자기도 모르게 시아버지처럼 냉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루쯔차오의 체면을 세워준다고요? 본인 목숨까지 잃고도 무슨 체면을 논합니까? 그런 오만함과 우월감으로 온 가족이 아버님을 따라 죽었어요. 그런 자부심이 무슨 소용입니까? 한 푼 가치도 없는 것을! - P342

"드라마를 보는 것 같군. 자네 집에 이렇게 흥미로운 일이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기억을 잃은 뒤 잠재의식 제일 밑바닥에 남는 건 가장 사랑했던 곳일까, 아니면 가장 증오했던 곳일까?"
[…]
류샤오촨이 말했다. "나라면 제일 싫어했던 곳이 남을 것 같아. 상처를 심하게 받아서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류샤오안이 대꾸했다. "봐봐, 나는 너랑 완전히 반대라고. 나라면 제일 사랑했던 곳을 기억할 거야. 그래야 계속 살아갈 힘이 생길 테니까." - P352

칭린은 문득 놀랍고 기이한 일들이 우리 곁을 수시로 스쳐지나가는 데 우리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넘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무심히 넘긴 일들의 뒤편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 P357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에 한 대야씩 머리에 물을 끼얹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지나가자 강렬한 감정도 차츰 쓸려나갔다. 갈수록 칭린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은들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구나 어머니 연세가 이미 이렇게 많은데 과연 깨어나실 수 있을까? 정말로 친척을 찾는다고 해도 지금껏 남으로 살아왔으니, 그런 낯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또 아버지도 그 일들을 알 필요가 없다고 적어두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본인들이 떠올리기 싫다고 했던 과거를 내가 굳이 파고들어야 할까? 그냥 두 분 생각대로 하자. - P358

시간이란 정말 무서운 존재다. 그런데 현실은 그보다 더 독해서 감정이 끓어넘치던 사람을 담담하기 그지없는 실용주의자로 바꿔놓을 수 있다. 칭린도 그랬다. 그는 자기 일, 눈앞의 삶에 충실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돌아볼 게 아니라 미래를 봐야 하며, 시간을 거슬러갈 게 아니라 앞으로 따라가는 게 옳았다. […]
그렇게 생각한 칭린은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그 일을 아버지의 가방처럼 구석에 내려놓았다. - P359

민간 건축, 특히 부자들의 대저택은 건축적인 의미에서는 사실 새로운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배경, 예를 들어 기원과 변천, 결말에는 건축 자체보다 훨씬 가치 있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지난 오십여 년 동안 사회의 질적 변화 때문에 거의 모든 남방 장원이 주인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장원은 학교나 창고, 사무실이 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의 가족 구성원이 모두 사망한 장원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그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쇠락이 아니라 사회에 의한 파괴라 할 수 있었다. - P359

그런데 떠나기 전날 갑자기 류샤오안이 칭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칭린, 내가 연장자로서 자네보다 세상을 좀더 알잖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네. 만약 찾기 힘들면 그냥 포기해도 돼. 진상을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세상의 모든 일에 진상이 있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단순하고 편안하게 사는 게 언제나 인생의 진리라는 말이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칭린은 통화 내용을 가슴에 담았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창문 앞으로 걸어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 P361

세상에는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일들이 있잖아. 혹은 잊어야만 하는 일이나 사람도 있고."
룽중융은 한참 동안 대꾸하지 않다가 차가 충칭을 벗어나서야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래. 그런데 어떤 사람이나 일은 말이야, 잊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드시 기억하려는 사람도 있거든." - P362

룽중융이 차창 밖의 산을 보며 탄식했다. "비적이 많을 만하네. 나무와 풀, 흙과 물이 있으니까.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할 수 있잖아. 숨기 쉽고 달아나기도 어렵지 않고."
"당시 비적들이 꽤 편했을 거란 말이야?"
"분명 가난한 사람보다 살기 쉬웠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비적이 되겠어?"
"일리가 있네. 무슨 일이든 개별적 사건이 현상이 될 때는 심오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니까. - P364

룽중융이 말했다. "봐봐! 충칭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입체감이 분명한 도시라 한층 한층 단계적으로 높일 수 있는데 굳이 산꼭대기에 고층 건물을 세웠지. 산간도시의 아름다운 입체감을 기어코 망가뜨렸잖아. 거리를 걸을 때 지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해. 안타깝다니까, 안타까워."
칭린이 웃음을 지었다. "하늘과 누가 높은지 겨루는 꼴이지."
"대자연과 대결해 성취감을 만끽하자는 신조를 받들면서 조화를 우선시한다는 원칙을 버렸어. 정말 어리석지 않아?" - P365

우연일까? 칭린은 계속 우연 쪽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우연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우연이 겹치면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 P383

"[…]조카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둘째 도련님이 처가를 방문하려 했는데 마을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떠날 때 ‘영원히‘를 세 번 말했다는 거야.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 이곳을 영원히 고향으로 여기지 않겠다. 자손들에게 이곳을 영원히 모르게 하겠다. 이 얼마나 지독한 말이냐고." - P397

루싼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다들 귀신의 집을 보면 너무 처참하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말은 바로 해야지. 루씨 집안이 그렇게 된 건 결국 그들의 선택 아닌가? 왜 진뎬의 집안에 대해서는 처참하다고 말하지 않지? 루씨 집안에서 진뎬 집안의 땅을 빼앗지 않았으면 그 집이 망했을까? 설마 가난한 집은 망해도 별일 아니지만, 부자가 망하면 더 처참하다는 건가? 그러니까 이 일은 루씨 집안에서 왕씨 집안을 망가뜨린 바람에 보복당한 거라고 봐야 해. 이건 두 집안의 일이라고. 더군다나 그들은 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를 파멸시켰어. 하인들까지 놓아주지 않고. 진은 자신을 길러준 그들 부모의 묘비를 세웠으니, 원한도 갚고 은혜도 갚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이를 갈면서 고향을 원망하는 게 무슨 도리지? 더 예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느냐고? 아편을 팔아서 자기 배를 살찌웠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 장사로 집을 잃고 목숨을 잃었는데? 남들은 이를 갈며 화내지 않는데 그들은 왜 내려놓지 못하느냐고?"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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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파리 씨의 이름은 관해파리다. 적어도 우리가 헤엄치는 범위에 그 개체는 하나뿐이니까. 관해파리는 식물처럼 자신을 복제하여 자라나며 영원히 산다. 천 년을 살았는지 만 년을 살았는지 아는 물고기는 아무도 없다. 관해파리 씨의 몸집은 고래만큼이나 크다. 관해파리끼리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저주파로 대화한다. 그 낮은 목소리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지구를 반 바퀴 돌며 대양 전역에 이른다. 그래서 관해파리 씨는 고래들처럼 이 대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은 저 멀리뿐 아니라 아득한 옛날의 일까지도 다 안다는 점이다.
그리 오래 살아왔어도 남을 해칠 힘은 없는 분이라 누군가 작정하고 뜯어 먹으려 한다면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겠지만, 심해 식구 누구도 관해파리 씨를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건 대양의 역사를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니. 이 세계의 기록을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될 테니. - P14

삶이란 게 그렇지. 어떻게든 잘 참고 견디고 버티는 듯하다가도, 팽팽하게 당긴 끈처럼 한순간에 툭 끊어져 다 무너져버릴 때가 있지. 부디 그들이 물고기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를.
"이 심해에 내려올 때는 모두 같아."
나는 기도를 드렸다. 큰니가 빛을 죽이며 같이 몸을 숙였다.
"모두 같지."
"맹독이든, 병균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여기에서는 모두 같아. 모두가 아름다운 눈송이가 되지. 은혜로운 양식이자 생명의 기쁨이 되지."
"썩지 않는 것들만 빼고." - P16

나는 몇 년 전 알을 낳기로 결심하고 여자로 전환한 친구를 떠올렸다. 번식의 주체가 되고 일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고난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퇴화하여 반려의 장기 일부가 되느니 기왕에 태어난 삶, 한생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보겠노라고 했다. - P18

"자연계는 신비로운 것이야, 나무수염. 통상의 상식은 통하지 않아." - P19

그럴 때가 온다. 끈이 끊어질 때가. 아등바등도 인내도, 의지조차도 기력을 다할 때가. - P20

"세상의 끈이 끊어졌군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세상도 오래 참고 견뎠어요. 의연하고도 인내심 있게." - P21

"저 위의 주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제 세상이 조금은 좋아지려나요? 흙 위를 뒤덮은 괴물들이 지금 다 사라지고 나면, 썩지 않는 것을 먹고 죽는 아이들도, 그런 것에 목이 감겨 살이 짓물러가며 죽는 아이들도 사라지려나요?" - P22

여자가 주인공인 게임은 여성향일까, 남성향일까? 게임 주인공은 유저가 이입하는 대상인가, 아니면 욕망하는 대상인가? 누구에게 어느 쪽이 작용할지 알 수 없으니 정석은 두 성별을 다 내놓는 것이다. 초창기 게임들은 모두 이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게임 그래픽이 화려해지면서 도리어 성별이 하나로 고정되기 시작했고, 몰입감은 예전보다 약해지고 말았다. 만약 예산상 한 명밖에 구현할 수 없다면 어느 성별이어야 하나? - P30

이세연이 말하는 ‘직접 내게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법칙은 수없이 많았다. 유저가 멍하니 화면을 지켜보는 시간은 5분을 넘지 않게 할 것. 단순하게라도 주기적으로 조작과 선택을 하게 할 것. 선택지를 줄 때에는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이도록 할 것.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일지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져야 하며,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 선택으로 큰 피해나 이득을 보는 일은 없도록 할 것. 단지 다양한 분기를 보여주는 데에 그칠 것. 몇 가지 선택은 운명을 크게 바꾸어야 하고 엔딩은 충분히 많아야 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엔딩을 얻기 위한 경로는 가장 어려워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의 엔딩은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백 시간의 플레이에 대한 보답이 비극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 P44

"우리 인생도 선택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스러운 선택도 할 수가 없어. 원하지 않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는 거야······.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아.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나는 저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겠구나.‘ 세계의 이면을 다 보고, 모든 가능성의 경로와 결과를 다 볼 수 있겠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게임이야. 그게 진짜 게임 시나리오라고." - P46

게임은 절대 오래 만들면 안 되는 물건이다. 게임은 1년이면 유행이 변한다. 책은 유사 이래로 종이에 쓰였고 영화는 유사 이래로 영화관에 걸렸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다. 1년이면 모든 기기가 업그레이드되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기종과 기술이 나와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어버린다. 개발 기간이 2년만 넘어가도 변한 기술을 뒤쫓느라 게임을 뒤엎어야 하고, 그러면서 비용이 늘고, 늘어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점점 기획이 커지면서 비용이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악몽 같은 쳇바퀴 늪에 빠지고 만다. 아니면 내놓을 때는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리든가. - P51

"돈이야. 돈이 현실감을 주지. 누가 얼마나 많은 돈을 게임에 퍼부었느냐에 따라 대우를 다르게 해주는 거지. 서민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부자들에게 그들이 때려 넣은 돈 만큼 보상해주는 거야. 그 막대한 자본력을 보며 유저들이 경탄하고 찬사를 바치게 하는 거지. 그러면 그 돈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이자 영웅이 되는 거야. 그 사람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모든 선택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게 밸런스야. 그게 공정함이야. 진짜 현실감 넘치는 시나리오지. 현실과 똑같으니까. 유저도 좋다고 몰려오고 회사도 떼돈을 벌고." - P67

"있잖아, 나."
홍운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생각해봤는데. 나, 네 세계에 남아도 될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려고 이런 대사를 넣었을까. 하지만 이것도 이세연이 끌어안고 살던 산더미 같은 법칙 중의 하나였다. 할 법한 말을 할 것.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예측을 살짝 넘는 말을 할 것. 그래서 이 상황에 개연성이 있다고 믿게 할 것.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그래서 몰입하게 할 것. - P70

그랬었지. 잘 짠 몇 개의 퀘스트가 게임 전체를 빛나게 한다고. 유저는 시나리오의 평균값을 체험한다고. 그것도 시나리오 작가 혼자 생각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게임을 잘 살펴 몇 마디의 대사로 모순을 없앨 것. 시스템이 만드는 괴리를 시나리오로 풀처럼 발라 메울 것. 그렇게 모순이 없어지면 몰입감이 생긴다. 그래서,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시나리오 작가가 조용히 그런 일을 해주지 않으면 그 게임은 망하지만, 왜 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 P74

예측할 수는 있지만 예측을 살짝 벗어나는 이벤트로 유저를 놀라게 할 것. 이벤트를 볼 확률은 높게, 하지만 놓쳤을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여 그 일이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게 할 것. 그래서 믿게 할 것.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 같은 선택도 할 수 있는, 누구보다도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 P77

"얼굴 좋아 보이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간 별일 없었어?"
마치 내가 그간 어떤 선택을 했든, 어떤 길을 걸었든, 우리가 어떤 다툼을 했든, 모든 일들은 세월에 마모되고 윤색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추억만이 이 자리에 남아 빛나고 있다고 말하듯이. - P77

쓰지 않는 물건은 사라진다. 인적이 드문 장소는 없어진다. 때로는 산이나 개울이 없어지고 어느 날에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계속 쓰거나 지켜보아야 한다. 양자역학의 원리를 빌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 존재하여 관찰로 고정해야 하는 셈이려나. - P87

바람이 불었고 갈매기가 끼루룩 울었다. 파도가 부서져 우리 발치까지 부글거리는 거품을 흘려보냈다가 물러났다. 별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구름이 달을 가리며 황금빛으로 빛났다. 바다에 비친 달이 물결에 금싸라기처럼 부서졌다. 나는 그 모두를 눈에 담았다. […]
아름다웠다. 내 말은, 풍경이 말이지. 뭐 어쨌든. - P91

"너를 제일 만나고 싶었어."
네가 급작스럽게 갔기에.
그래서 너의 이야기에는 결말이 없었기에.
연재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중단된 소설처럼, 문장 중간에 뚝 끊긴 말처럼, 하다 만 대화처럼. 나는 다음에 뭔가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하는데,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 속에서 남은 삶을 살았다.
[…]
그리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상적이지 않아도 좋으니. ‘아,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싶은, 그런 소소한 결말을. - P106

늘 바라마지 않았다. 이런 풍경이 너의 결말이기를.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고, 따듯하고 푹신한 곳에 편히 누워 고요함 속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를. 너의 결말이 안온함 가운데 찾아오기를. 그렇게 뚝 끊긴 너의 이야기에 내가 지금 만든 이 작은 결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위로 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너의 새 결말을 같이하는 것으로 또한 내 이야기를 다시 마무리하기를. 내가 그랬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내 남은 아이들도 위로받기를, 너와 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을 맺기를.
비록 겉보기만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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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들은 류진위안의 머릿속에 띄엄띄엄 희미하게 남아서 하나로 연결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기억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아 류진위안은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87

"내일 아침에 일어나시면 원래대로 회복하실지도 모르지요. 예전에 저희 할머니가 낮에 할 수 없는 일을 밤에는 할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우리 어머니도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변할 수 있다고 하셨어. 두 분 말씀이 맞기만을 바라야지." - P94

칭린은 어머니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는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의 어머니, 인사불성이 된 어머니가 어떤 일로 인해 엄청나게 변해버린 듯했다. 더이상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비밀을 간직한 사람 같았다. 그 비밀 때문에 어머니가 거대한 책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표지만 알았을 뿐 내용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 - P98

그때 멍하니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룽중융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영혼은 현세에 없어."
[…]
칭린과 중융은 대경실색했다. 룽중융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세 글자 이상 말한 적이 없다면서, 처음 병을 잃기 시작했을 때 본인이 현세를 떠나 또다른 세계로 천천히 가고 있다고 자주 말했노라 알려줬다. "두 분이 받아들이는 게 우리 상식과 다른지도 몰라. 혹시 이런 상태는 병이 아니라 당신들 소망이 아닐까." - P101

칭린은 첫번째 일기를 펼쳤다. 처음부터 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퇴색한 만년필 글씨에 시선을 떨군 순간 갑자기 불안이 밀려왔다. 그는 여기에 무엇이 기록됐는지 몰랐다. 여기에서 완전히 낯선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낯섦이 그의 인생에 충격을 가져오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났다. 칭린은 그때 어머니는 왜 본인이 죽고 나서 보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P105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살아 있어야만 통증도 있어. 죽으면 아픔도 사라지지." 그 장면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어린 그녀는 수예방에서 공작의 꽁지깃을 수놓다가 바늘에 찔렸다. 새빨간 피가 손 끝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고 그녀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다가와 힐끗 쳐다보고는 야단치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또다른 방법도 있어. 기억을 없애는 거야. 그러면 아팠는지조차 몰라." - P109

시간은 늘 자신만의 방식으로 흘러갔다. 어쩌면 하루나 일 년, 또 어쩌면 백 일이나 백 년일지도 몰랐다. 그때 갑자기 검은색의 농도가 흐려졌다. 흐릿한 잿빛이 머리 위로 나타났고, 그 빛 속에는 부드러운 베일이 나풀거리는 듯했다. 딩쯔타오는 그 베일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잿빛이 시작되는 쪽을 향해 일정한 선이 계단처럼 고르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세어봤다. 열여덟까지 세고 나자 잘 보이지 않았다.
18층, 왜 하필 18층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 P110

어디선가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이 순식간에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딩쯔타오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문득 오래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그때 그녀는 호숫가의 작은 대나무 정자에 앉아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물결과 호수 위를 나는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수면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한기를 느끼고 중얼거렸다. "보슬비 내리는 꿈속의 변방은 아득하고, 누대를 메운 옥피리 소리는 차갑구나." - P112

류샤오촨이 칭린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말했다. "시간은 앞으로도 많아. 우리 아버지가 예순 살에 퇴직하셨거든.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흥분하셔서는 드디어 아내와 제대로 살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어. 그렇게 이십여 년을 함께 하셨지. 나중에는 전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고. 그러면서 예전에 늘 떨어져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하시더라. 아니었으면 한 사람과 오륙 십 년이나 함께 산 것을 떠올릴 때마다 인생이 가치 없게 느껴졌을 거라고. 봐봐, 이게 바로 살아본 사람의 심오한 깨달음이라고." 칭린이 웃으며 어르신의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 P134

칭린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처럼 빈손으로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현실적이지 않으면 어떻게 현실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적이어서 지금처럼 만족할 수 있었다
다만 인생의 가치에 대해 류샤오촨의 아버지가 했다는 말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맞는 말이었다. 바쁘지 않은 인생이라도 똑같이 피곤할 수 있었다. - P135

한 학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룽 선생님, 부자가 이런 곳에 살았다고 확신하세요? 심지어 화려한 저택까지 짓고요?"
룽중융이 대답했다. "이 세상은 말이지, 사람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가능해."
칭린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 P137

룽중융이 대꾸했다. "보지 않았을 땐 몰랐는데 보고 나니 가슴이 뛰네. 느낌이 아주 좋아. 부자가 저택을 짓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아주 좋아했을 지역 같아. 중국 부자들은 괜히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뿌리 박고 정착하는 걸 좋아하지. 그렇게 뿌리를 내리는 곳이 고향이 되고. 지나치게 가난한 지역은, 예를 들어 물과 나무가 부족한 곳은 생활이 불편해서 원치 않았을 거야. 그런데 여기는 위치가 정말 좋아. 겹겹의 산이 병풍 같고 물도 풍부해. 조금 멀 뿐이지. 돈 있는 사람한테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아. 심지어 외질수록 더 좋아하기도 해. 재산을 숨기기 쉬우니까. 또 궁벽한 시골에 사는 친족들은 소박하고, 왕법 보다 가볍을 중시하거든. 관청보다 종가를 두려워한다고. 그러니 다루기 쉽지. 자기 집안사람을 잔뜩 데려오면 그 지역을 지키기도 쉽고. 원수가 있어도 찾아오기 쉽지 않을 거야. 말하자면 세상의 은신처 같다고 할까." - P139

그들은 차 안에서 남방과 북방의 지주 저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서민의 부유함이 왜 국가 부강의 기반이 되는지, 전통 민가가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지, 민간 건축에서 빠지지 않는 중국식 문화의 특징이 무엇인지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룽중융은 이제는 그런 게 없어졌다고 말했다. 건축사가 없던 시대에는 오히려 알고 있었어. 건축이란 자연을 경외하고 자연 속에 녹아 유기적인 한 부분이 되어야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말이야. 반면 지금은 대부분의 마을이 자연에 시위하는 형태로 건물을 짓지. 마치 봐봐, 내가 너보다 훨씬 대단하니까 더 빛나고 멋져야 해, 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 그런 건축은 결말이 좋을 수 없어. 자연의 힘은 이길 수 없거든. - P140

칭린은 뭔가를 잡은 것 같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혼란에 빠진 것도 같았다. 두 손을 깊고 짙은 구름 속에 넣어 분명히 움켜쥐었는데 양손이 텅 빈 느낌이었다. - P143

칭린은 세상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는지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장원에서 봤던 커다란 ‘인‘과 ‘내‘ 글자가 떠올랐다. 요동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글자들이 무슨 쓸모가 있었겠는가?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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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선이 문 오른쪽 담장의 대나무로 향했다. 대나무에서 새로 올라온 가지와 잎이 무척 파랬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창 앞의 대나무, 맑고 푸름이 홀로 기이하구나‘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로, 얼굴마저 아른아른 떠오르는 듯했다. 딩쯔타오가 자기도 모르게 "사조로구나" 하고 말했다. - P52

모든 것이 짙은 구름에 싸여 새하얗게 변하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끊임없이 움켜쥐었지만 무의미한 헛손질에 그칠 뿐이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끝없이 새하얀 대지가 정말로 깨끗하구나!‘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홍루몽』에 나오는 ‘끝없이 새하얀‘이라는 표현은 이런 광경을 두고 한 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어디까지 가는지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느낌만 남았다.
그녀는 눈부신 구름 위에서 하염없이 떨어졌다. 눈앞의 새하얀색이 회색으로 변하고 계속 진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새까매졌다. 그 어둠은 밑도 끝도 없었다. - P63

누구도 그녀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게 어둠의 심연이며 자신이 이미 그 속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 P64

익숙했던 모든 것이 낯설어지고 오랫 동안 알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당연히 류진위안도 잘 알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갈 곳이었다. 낯익은 사람들이 먼저 가 있는 것도 좋았다. 그가 갔을 때 훨씬 지내기 좋을 테니 슬프지 않았다. 다만 고정적 기준이든 가변적 기준이든, 과거의 기준이 조금씩 소실되거나 변형될 때면 그의 머릿속에서 매듭지어진 줄이 누군가에 의해 뭉텅뭉텅 잘리는 듯했다. 기억 속에 저장되었던 것들이 그 가위의 움직임에 따라 줄기차게 제거되었다. 그건 사람의 속성이었다. 오래된 것들을 떠올리지 않으면 아주 많은 일이 아예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화되었다. 예전에 그의 부하였던 우자밍은 망각이 인간의 몸에서 제일 좋은 본능이라고 말하곤 했다. - P69

그는 갑자기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에 휩싸였다.
마음이 너무 쓸쓸한 탓 같았다. - P72

그에게는 할 일이 없었다. 살아가는 것 그리고 시간과 잘 지내는 것만이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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