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모든 것이 너무도 익숙하면 때로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구별해내기 어렵다. 어떤 노래가 친숙해지면 그 노래의 개별 음정을 듣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 P12

땀이 이마와 머리의 경계를 따라, 척추를 따라 배어 나온다. 두 발은 발작적으로 땅 위를 움직이고, 이런 생각이 처음으로 든 것은 아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궁금해진다. 일터에서 집으로, 가족과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는 한 아버지. 아니면 너무 많은 책과 너무 많은 보고 서를 넣은 서류 가방을 들고 시간에 쫓긴 채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는 한 남자. 청년기를 지난,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이 아주 살짝 가늘어지고, 밑창을 교체할 때가 된 신발을 신고, 꿰매야 할 양말을 신은 한 사람. 남자는 이 불볕더위에 고통받는다. - P23

그는 현관문을 열고 매트에 발을 디디며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소리친다. "안녕! 나 왔어!"
그는 잠시, 정확히 자신의 관념 속 인물이 된다. 일터에서 돌아와 현관에서 이제 막 가족을 맞이할 남자. 세상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과 그가 사적으로 인지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분열도 없다.
"아무도 없어?" 그가 다시 외친다.
집은 고요하기만 하다. - P25

아빠와 아들은 잠깐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궁금하다. 일터를 나서면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찌는 듯한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이 타는 듯한 도시를 가로질러 오면서 그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내내 두려워했다는 점을 휴이가 아는지 궁금하다. 집에 도착하면 아내는 주방에서 향긋하고 영양이 풍부한 무언가를 아이들에게 차려주고, 아이들은 깨끗하게 제대로 차려입은 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를, 이 가망 없는 희망을 품어왔다는 것을 이 아이는 알까? 이 아이는 최근 벌어지는 일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까? - P27

그는, 다시 그리고 잠시, 바로 그 관념 속의 사람이 된다. 부엌에 있는 한 남자, 딸을 공중으로 안아 올리는 남자. 그는 나무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냄비를 내려놓는다. 팔로 아이를 감싼다. 충만해진다—무엇에? 사랑보다, 애정보다 더한 무언가. 너무 예리하고 원초적이어서 동물의 본능과도 같다. 잠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 애를 잡아먹는 일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딸을 먹어버리고 싶다. 목의 주름에서 시작해서 진주처럼 빛나는 부드러운 팔까지. - P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말하는 것은 그 공원 전체의 분위기에 대한 것입니다. 암흑한 동굴을 이면에 두고 있으면서도 앞쪽으로 돌아서면 항상 명랑하고 즐거운 얼굴 표정을 하고 호기심에 찬 대담한 눈빛을 반짝이며 밤이면 밤마다 짙은 화장을 자랑하는 공원 전체의 정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웃음도 눈물도 모두 한데 녹여내고 점점 더 교묘한 현혹의 빛을 내뿜고 현란한 색채가 넘쳐 나는 거대한 공원의 바다와도 같은 장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 P44

"당신처럼 성실하고 온화한 아가씨가 이 무시무시한 거리 모습을 어떻게 태연히 바라볼 수 있지?"
나는 여러 번 그녀에게 물어보려다가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그런 질문을 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내가 태연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서 받은 감화 덕분이에요."라고 할까요. "내게는 당신이라는 연인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의 암로에 들어선 자에게는 두려움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답니다"라고 할까요.—그렇습니다. 그녀는 분명 그런 대답을 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그럴 만큼 열렬하게 나를 믿고, 그 정도로 순수하게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 P57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의 영혼 저 깊은 곳에는 정도 차이는 있겠으나 내가 느끼는 바와 똑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내가 꿈꾸는 바와 똑같은 꿈을 꾸는 소질이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나처럼 그것을 의식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는가, 라는 점만 서로 다른 것이지요.—나는 딱히 별다를 것도 없이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 P67

"돈이 많다는 것은 물론 행복한 일이지만 자칫하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낳게 돼. 부는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마는 거야."
"아니, 그럴 걱정은 없어. 부자가 타락하는 것은 그 재산을 더 불려 보겠다고 사업에 뛰어들 때뿐이지. 돈이 많은 자는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항상 행복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별반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습니다. - P89

"우스꽝스럽게 느끼지는 않더라도 어떤 종류의 쾌감을 갖는 것은 확실하지. 오히려 그림으로 하는 게 더 재미있을 정도야. 애초에 예술적 쾌감을 비애라느니 우스꽝스러움 이라느니 혹은 환희라느니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부터가 잘못되었어. 세상에 순수한 비애나 우스꽝스러움이나 혹은 환희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없거든." -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온통 갈색, 황갈색, 적갈색, 노란색이다. 공들여 배합한 색조 때문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인 이곳에서 쿠션의 생생한 오렌지빛이나 장정한 책들 사이로 얼룩덜룩한 책 몇 권이 밝은 점처럼 도드라질 것이다. 너울지며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 아래 장미꽃 화병이 놓여 있어도 거실은 조금 침울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 방은 저녁에 더 어울리는 공간일 것이다. 겨울이면, 젖힌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몇 줄기 빛을 통해 책장 구석이라든가 음반꽂이, 책상, 소파 테이블, 거울에 어린 희미한 모습들이 보일 것이다. 길이 잘 든 나무, 묵직한 느낌의 화려한 비단, 크리스털 조각, 부드러운 가죽, 모든 사물이 빛을 발하는, 사방이 어둠에 잠긴 이 방은 분명 평화의 항구이자 행복의 땅일 것이다. - P15

책으로 둘러싸인 벽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멋지고 단순하며 감미롭게 빛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삶이 언제까지나 조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삶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홀연히 모험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다. 어떤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원한이나 쓰라림, 질투를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소유와 욕망은 언제나 모든 지점에서 일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균형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고상하게 행복을 지키고, 그들이 나누는 삶의 매 순간 이를 발견할 줄 알 것이다. - P20

파리 전체가 그들에게는 영원한 유혹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취기 어린 상태로 그 유혹에 자신들을 내맡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빠져들고는 했다. 하지만 욕망의 끝은 냉혹하게 꽉 막혀 있었다. 커져만 가는 불가능한 꿈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 P23

이상하리만치 달콤하게 빠져드는 부푼 몽상과 달리 실제로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객관적 필요와 재정 상태의 절충을 꾀한 어떤 이성적 계획도 끼어 들지 못했다. 무한한 욕망만이 그들을 압도했다. - P26

그들은 안락한 가운데 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이며 감탄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 그들의 즐거움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치라 부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富)의 기호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를 사랑했다. - P28

그들이 좇는 길, 새롭게 눈뜬 가치, 전망, 욕망, 야망, 이 모든 것이 종종 어쩌지 못할 만큼 공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태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삶, 암울함 이상으로 알 수 없는 불안의 근원이었다. 무엇인가 입을 무한히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종종 혼잣말로 어쩌면 삶이 매력과 안락함, 미국식 코미디나 솔 바스의 영화 엔딩 크래딧처럼 환상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경이롭고 눈부신 장면들, 가령 스키 자국 두 줄이 선명히 남은 새하얀 눈밭이라든가 푸른 바다, 태양, 푸른 언덕이 펼쳐지고 벽난로에 불꽃이 일렁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거침없이 펼쳐진 고속도로, 값비싼 자가용, 호사스러운 집이 그들을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 P39

온종일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놀란 낯으로 지레 겁을 집어먹기도 했지만, 감히 그 같은 심경은 입에 담지도 못했다. 앞으로 자신들의 운명과 존재 이유, 행동을 결정지을 유치한 맹목적 추구 앞에서 이를 감히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욕망의 크기에 압도당해, 눈앞에 펼쳐진 부와 주어진 풍요로움에 질식해 갔다. - P39

그들은 테이블에 죽치고 앉았다. 자신에 대해, 세상, 온갖 것, 별 볼 일 없는 것, 취미, 야망에 대해 떠들어댔다. 어느 도시나 있기 마련인 편안한 바를 찾아 내서 새벽 1시까지 위스키와 브랜디, 진 토닉을 앞에 두고 저버린 사랑, 욕망, 여행, 거부와 열정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레퍼토리가 똑같은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워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 P42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갈망하는 것은 어떤 법칙에 가까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법칙이었고, 광고, 잡지, 진열장, 거리의 볼거리, 소위 문화 상품이라 불리는 총체가 이 법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가끔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었다. - P47

이들이 갖는 수치심과 오만함은 같은 성격이어서 같은 환멸, 같은 분노를 내포하고 있었다. 온종일 사방에서 슬로건, 포스터, 네온사인, 불 밝힌 진열장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신들이 늘 사다리의 아래에 있다고, 언제나 사다리의 너무 낮은 곳에 있다고 세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한술 더 떠, 가장 나쁜 몫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P47

그들의 어린 시절 기억은 엇비슷했다. 그들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이 닮아 있는 것처럼. 집안 배경 없이 더디게 일어서는 것이나 자신들이 선택한 미래가 비슷한 것처럼. - P48

그들은 한창때였다. 편안했다. 그들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거리를 둘 줄 알았다. 여유가 있었고, 아니 적어도 그러려고 했다. 그들은 유머가 있었다. 영리했다. - P48

그들은 자유에 탐닉했다. 세상 전체가 손안에 있는 듯했다. 그들이 느끼는 갈증의 리듬에 충실했고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열정은 끝이 없었다. 밤새도록 걷고, 달음질치고, 춤추며, 노래할 수도 있었다. - P51

그들은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담배를 끊겠다든가 술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 또는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이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 잊지 못할 취기 어린 날의 기억에는 무엇인가 아련한 알 수 없는 흥분과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한잔하러 간 일이 근본적인 몰이해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분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듯한 단단한 모순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 P51

어떻게 보면, 그들은 요리하는 것은 거부하고 눈에 띄는 화려함만을 숭배했다. 그들은 시각적인 화려함과 풍성함을 좋아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기껏 형편없는 요리를 선보이는 것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거부하는 세계는 프라이팬과 냄비, 식칼, 중국 요리, 화덕의 세계였다. - P53

오랫동안 고대해 온 영화들,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이라 평이 나 있는 영화들, 마침내 이런 영화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상영 첫날 만원인 관객들 틈에서 만났다. 스크린에 불이 밝혀지고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컬러는 바랬고, 화면은 끊겼으며, 여주인공들은 보기 싫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그들은 나왔다. 슬펐다. 상상하던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 각자가 상상하던 완전한 영화가 아니었다. 영원히 싫증을 내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완벽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고 싶어하던 그 영화. 아니, 더 은밀히,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하던 그 영화가 아니었다. - P55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신호들을 더 잘 알아채고, 때로 조장할 줄도 아는 것 같았다. 귀와 손가락, 혀가 마치 매복 상태로 조만간 촉발될 이 달콤한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평온함과 영원함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는 어떤 긴장도 끼어들지 못했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모든 것이 감미롭게 천천히 흘러갔다. 강렬한 기쁨이 일시적이고 불안 정한 것들을 고양시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조화로운 상태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사소한 불협화음, 대수롭지 않은 주저의 순간들, 무례한 태도만으로도 그들의 행복은 무너져 내렸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일종의 계약, 그들이 대가를 지불했던 무엇, 불안정하고 딱한 무엇인가, 잠깐의 행복한 순간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더 위험하고 더 불확실해 보이는 일상과 삶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P59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러함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처지였다. 일과 자유의 대립 관계를 엄격히 따지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직장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 P62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 P63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아마 옳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타인의 불행을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불행을 확대해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들은 별 볼 일 없었다. 겨우 벌고, 프리랜서로 일하며 뜬구름 잡는 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세월이 그들 편인 것은 사실이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잘것없는 위안이었다. - P65

그들 사이에 돈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벽이었다. 매번 부딪히게 되는 일종의 범퍼 같았다. 가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궁색함, 옹졸함, 얄팍함이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기적이나 사상누각에 세운 어리석은 꿈 외에 다른 출구가 없어 보였다. 미래 없는 꽉 막힌 삶으로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 P67

사회의 서열 관계를 중오하기로 작정했다. 기적으로라도 해결책은 세상이나 역사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러 코스터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들의 삶이 가장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쉽게 넘겨 버렸다. - P69

변한 것이 있다면,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 모호한 것이었다. 그들의 남다른 삶의 방식, 몽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그랬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위태롭고 덧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불완전한 기쁨,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다림과 궁색함, 편협함이 자신들을 마모시켜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 P78

가끔은 모든 것이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될 일이었다. 삶이 그들을 달래줄 것이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변화도 없고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없이,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낮과 밤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거의 미미한 변화만 있을 뿐, 같은 주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행복이 계속될 것이다. 어떤 동요, 비극적인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도 흔들어놓지 못할 영원한 감미로움을 맛볼 것이다. - P78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 P79

그들은 떠났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만원인 지하철, 짧기만 한 저녁, 치통처럼 따라붙는 통증과 불확실성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들의 삶은 팽팽한 줄 위에서 끊임없이 춤춰야 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고, 미래는 꽉 막혀 있었다. 극심한 공허감, 기댈 곳도 없으면서 끝을 모르는 비참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들은 소진된 느낌이었다. 은둔하기 위해, 잊기 위해, 자신들을 달래기 위해 떠났다. - P106

이렇게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4주가 한 달을 만들었다. 달들은 대부분이 엇비슷했다. 낮이 짧아지는가 싶더니 점점 길어져 갔다. 겨울은 축축하고 추웠다. 그들의 인생이 흘러갔다. - P114

그들의 고독은 절대적이었다. - P115

그들은 이 세상을 박탈당했다. 세상에 몸담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 속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엄격한 규율이 그들을 배척하는 듯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대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영원히 낯선 사람, 이방인으로 남으리라. - P116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권태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실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만족도 얻지 못했지만, 이따금 혼란스럽고 모호하게나마 이곳에 서의 삶이 분수에 맞고, 심지어 역설적이게도 이런 삶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 P118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 P119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의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 P126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 P126

"만일 우리가 돌아간다면···." 누군가 말을 꺼낼 것이다.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다른 한 명이 답할 것이다. - P1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 맨 위에 이런 단어가 보인다.
나의 사랑하는—
애그니스는 불에 덴 듯 뒤로 물러서려다가, 다음 줄을 본다.
애그니스
더는 아무 말도 없다. 단 세 마디, 그리고 빈 공간.
그는 무어라 쓰려 했을까? 애그니스는 그가 기회가 있었다면 무슨 말을 썼을지 알아내려는 듯 종이의 빈자리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종이의 결, 햇살에 따뜻해진 나무탁자의 온기가 느껴진다. 자기 이름을 이루는 글자들을 엄지로 훑으며 그의 깃펜이 만든 미세한 자국을 느낀다. - P473

사방에서 몸과 팔꿈치와 팔이 밀쳐댄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문으로 들어온다. 일층에 있는 사람이 위쪽 발코니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하며 소리친다. 사람이 점점 밀집하고 이쪽저쪽으로 파도처럼 떠밀린다. 애그니스는 뒤쪽으로 또 앞쪽으로 밀리면서 버틴다.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게 요령인 듯싶다. 마치 강 위에 서 있는 것하고 비슷하다. 물살에 맞서지 말고 몸을 맡겨야 한다. - P481

이곳에 있고 또 연극이 시작되고 나니, 여행하는 동안 그리고 그의 방 안에 서 있는 동안 느꼈던, 마치 현실에서 분리된 것 같은 낯선 느낌이 검댕이 씻기듯 사라진다. 애그니스는 속으로 벼르며 분노를 도스른다. 해봐,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어떻게 했는지 보여봐. - P484

애그니스는 납득이 안 된다. 남편이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왜 그 이름이 자기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척, 그냥 단순한 글자의 조합인 척하는 건가? 어떻게 그 이름을 훔쳐 거기 담긴 것을 벗겨내고 뜯어내고 그 이름이 지녔던 삶을 저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펜을 들어 그 이름을 종이에 써서 아들과의 연관을 끊어 버릴 수 있는가? 말이 안 된다. 이 사실이 가슴을 찌르고, 뱃속을 도려내고, 애그니스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로부터, 그들이 공유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로부터 끊어내는 듯하다. 애그니스는 다리에서 보았던 불쌍한 머리, 이를 드러내고 목이 잘려 공포로 얼어붙은 얼굴을 떠올리며 자기가 그중 하나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떨리는 강물, 몸 없이 흔들리는 머리, 소리 없고 소용없는 후회를 느낀다. - P488

남편은 세상 모든 아버지가 하고 싶어 할 일을 했다. 아이의 고통을 자기가 지고, 아이와 자리를 바꾸고, 아이 대신 자신을 내주어 아이를 살리려 한 것이다. - P492

유령이 무대에서 나가려다가 애그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애그니스를 똑바로 보고, 시선을 맞추고, 마지막 대사를 한다.
나를 잊지 마. - P4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몇 길 너머 부엉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날아올라 찬 밤바람에 몸을 맡긴다. 날개로 조용히 바람을 받으며 눈을 또렷이 뜬다. 부엉이의 눈으로 보면 이곳 타운은 줄줄이 늘어선 지붕과 그 사이에 도랑처럼 흐르는 거리로 이루어진 곳, 방향을 읽어야 하는 곳이다. 부엉이는 날아가며 무성한 나뭇잎을 덮어쓴 나무, 타도록 내버려둔 불에서 흘러나오는 한줄기 연기를 본다. 길을 건너가는 여우를 본다. 설치류, 아마도 쥐가 마당을 가로질러 구덩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선술집 문간에서 잠든 남자가 벼룩에 물린 정강이를 긁는 것을 본다. 어떤 집 뒷마당의 우리 안에 있는 토끼들을 본다. - P455

조운은 영원한 불만을 친구로 삼았으니까. 조운은 지금 어떻게 애그니스를 무너뜨리려는 것일까? 어떤 정보를 칼처럼 휘둘러 이 집. 이 방, 애그니스와 딸들이 그토록 막대하고 강력한 부재를 안고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애쓰는 이 공간을 베려고 하는 것일까? 조운이 무얼 알기에? - P461

애그니스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아들의 이름이 런던의 연극 전단에 있나? 뭔가 기이하고 희한한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 아이는 죽었다. 이 이름은 아들의 이름이고 아이는 죽은 지 사 년이 좀 못 되었다. 그 애는 아이였고 이제는 어른이 되었을 테지만 죽고 말았다. 그 애는 그애일 뿐, 연극이 아니고, 종이 한 장도 아니고, 입에 올리고 연기하고 전시할 무언가도 아니다. 그 애는 죽었다. 남편도 알고, 조운도 안다. 애그니스는 이해할 수가 없다. - P463

밤이 되자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삼끈을 엮어 만든 거칠거칠한 벌집 사이에 앉는다. 벌집 안에서 새벽 동튼 직후에 시작되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애그니스에게는 가장 유려하고 명료하고 완벽한 언어처럼 느껴진다. - P464

주디스는 물이 맺힌 유리창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엄지 하나 만으로 어찌나 쉽게 두 사람의 모습이 지워지는지. - P467

세 여자가 구름이 달을 둘러싸듯 그를 둘러싸고는 반대하고 질문하고 부탁하는 말들을 쏟아붓지만, 바살러뮤는 빠져나와 문 쪽으로 걸어간다. - P4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