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내가 나에게 말한다. "아가씨를 보고 있으면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 "두 분이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대학에서였지." 그녀가 말한다. "그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지만 당시에 벌써 우리를 가르쳤어.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 그이 한테서 배우지 않았다면 내 안에 뭐가 남았을까 하고 말이야. 그이는 늘 배운 것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어. 누군가 나에게서 그 모든 걸 꺼내버린다면 나는 빈 껍데기처럼 오그라들고 말 거야." 나에게서 찻잔을 받아든 그녀는 일어나서 방을 나간다. 나는 그녀의 발소리를 듣는다. 옆방의 어두운 물 속을 그녀가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외줄 타듯 가느다란 빛줄기 위로 조심스레 걸어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 P12

"그이에게 애인이 있을 것 같아?" 그의 아내가 나에게 묻는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갖다준 찻잔에 입술을 갖다댄다. 아가씨가 지닌 아름다움은 피부와 머리카락, 눈 색깔이 모두 밝다는 거야. 아가씨는 이 집 안에서 빛을 내는 구심점이야. 모든 게 끝나버렸지. 그 때 아가씨가 왔어. 밝은 구심점이 나타난 거야." 그녀는 나에게서 찻잔을 받아 접시에 놓는다. 그런 다음 허리를 굽혀 자신의 혀를 내 입 속에 밀어넣는다. 그녀는 나에게서 다시 입을 떼고 말한다. "안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둡구나. 하지만 바깥에서 보면 눈이 멀 정도로 밝아." "그 사실을 아저씨에게도 말할 건가요?" 내가 묻는다. "물론 안 하지." 그녀가 대답한다. "비밀은 지켜야 하니까." - P13

공항에서 물고기들에게 가는 도중 그녀는 버스 창 밖을 내다보며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 곳의 아름다운 풍경,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풍경에 감탄한 그녀는 친구의 공감을 얻으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잠깐 친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 평원은 그녀가 지금까지 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지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바위들만 이빨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있었다. 돌에 덮인 그 풍경은 지평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있었다. 검은 암석들은 분명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계획을 좌절시켰을 것이다. - P22

이 섬에는 나무들이 자라지 않는다. 나무가 자라기엔 너무 춥기 때문이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섬에는 바람을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늘 칼날 세운 바람이 불어댄다. 예전부터 그녀는 사람이 죽으면 바람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곳에 사는 동안 그녀는 늘 혼자는 아니다. 그녀가 산책할 때면 죽은 사람들이 그녀 곁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 P24

폴란드 여자는 열쇠를 꽂기 위해 입김으로 한참 동안 열쇠 구멍을 녹인다. 열쇠를 돌린 그녀는 손잡이를 틀고서 문을 민다. 문이 열리자 등 뒤에서 불어온 눈발이 집 안으로 들이친다. 문지방에 서 있는 그녀는 집 안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일층에 있는 방들 문이 나지막이 열렸다 닫히는 것뿐이다. 문들이 움직이는 것은 그녀가 몰고 온 바람 때문이다. 그것은 죽어 있는 움직임, 생명이 피해가는 그 무엇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안과 밖의 구분을 소홀히 할 때 생기는 움직임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턱뼈는 낚싯줄에 걸려 그런 식으로 열리고 닫히다가 종내는 떨어져 나간다. 냇물에 빠진 책은 그런 식으로 물결에 쓸려 펄럭거린다. 이 섬에서 수천 개씩 줄에 꿰여 있는 생선 머리들 사이로 바람이 불면 물고기 머리들이 달그락거리며 텅 빈 듯한 소리를 낸다. -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은 오후 시간, 나는 내 방에서 우리 가족의 느리고 꾸준한 종말의 과정을 반추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구름이, 정확히 우리집만한 크기와 모양의 구름이 우리에게 드리운 것 같았고, 우리 미래를 엮어낼 복잡한 요소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질 것 같았다. […] 삶은 계속되지만 달라졌다. 더 물러졌고, 더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없어진 듯하다.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한다. 그날 오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누나가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그 구렁텅이의 가장자리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 빠질 마음을 먹지는 않으나, 그것의 존재로 인해 늘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구렁. - P240

나는 누나에게 팔을 둘렀고, 내게 온몸을 맡긴 누나의 무게감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누나가 내게 안긴 것은 아주 오래된, 몇 년 만의 일인 것 같았다.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오자, 누나가 내 가슴께로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 P245

나는 눈을 감는다. 조금 후면 우리는, 매일 밤 그러하듯이, 우리의 조그만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이 들 것이다.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 P249

열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그런 것을 구분해낼 수 있을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어머니와 벤틀리 부인은 그저 어느 늦가을 오후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 자신도 확신은 할 수 없다. 나는 그때껏 어머니의 성생활에서 대해 과도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분명 없었다. 어머니와 다른 여자들의 관계를 놓고 의혹을 품어본 적도 분명 없었다. 그날 이전에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헌신적인 아내였고 다정한 어머니였다. 그건 내가 알았다. - P257

결국 나는 나 혼자 알고 있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모든 일이 다 지나갈 수도 있었다.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일일 수도 있었다. 누구나 약해지는 때가 있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혼란에 빠지는 때가 있는 법이야. - P260

나는 섬 집에 혼자 앉아 있을 아버지 생각을 했고, 어머니는 간혹 손을 뻗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아주곤 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걱정 마. 네게는 그런 일 일어나지 않아." - P264

나는 지금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만 해도 해가 환하고 산들바람이 불고 가을인데도 때아니게 따뜻하더니, 늦은 오후, 초대한 손님들—벤틀리 씨 부부와 올리앤더 씨 부부—이 우리집에 도착한 즈음에는, 살랑살랑 불던 산들바람이 차가워졌고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잿빛으로 변했다. 켈리 누나와 남자친구인 채드 윈터스는 뒤뜰에 있는 테니스 장비 보관실 뒤에서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돌려 피우던 마리화나의 타들어가던 빛을, 옅은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밝은 오렌지색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던 그 빛을 기억한다. - P266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고 잔디밭 너머로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개 위니는 서늘하고 어두운 그늘에 누워, 어머니가 던져준 뼈다귀들 가운데 하나를 씹으며, 살짝 몸을 떨고 있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로는 아무도 위니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녀석은 한창때의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녀석은 어디를 가든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개, 거실에 있는 아버지의자 옆에 앉아 있던 개, 매일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던 개였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위니 녀석 역시 변해버린 것 같기도 했다. 녀석은 더이상 아버지와 있을 때처럼 활기차 보이지 않았다. - P270

그렇지만 나는, 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후, 개수대가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 P2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그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비정상이라는 증거였다. 설사 그에게 불가능한 것을 해낼 수 있는—다섯 명을 한 번에 때려눕히는—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옆에 또다른 다섯 명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말이다. 그다음에도 또다른 다섯 명이 있고 그다음에도 또다른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 P178

레이철을 생각할 때면, 10미터 아래로 강을 두고 철로 다리를 건너던 그 경주에 대한 기억이 주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발을 디디는 곳을 보지 않았던, 아래 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 - P180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진행성 양쪽 귀 난청으로, 그 말은 태어날 때는 아무 이상이 없거나 한쪽 귀에만 문제가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양쪽 귀가 다 안 들리게 된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그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귀가 안 들리던 아이들, 자기들의 청력이 언젠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을 품어본 적 없는 아이들보다 가르치기가 더 힘겹다. 그러나 이런 모습, 자기들이 읽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나마 입 밖으로 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이 아이들을 견디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 P183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린과 조지아를 알고 지내기 전부터 그들을 지켜보곤 했다. […] 그녀는 내가 밖에 나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나 했는지, 그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내게 한없는 위안이 되었음을 알기나 했는지, 나는 가끔 그런 것들이 궁금하다. - P185

델핀이 전에 만나던 연인과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신경쓰이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윙크를 하며 말한다. "허니. 나는 질투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내게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상관하지 않아." 그리고 그녀가 눈을 굴리고 내 손을 토닥거리면서 이렇게 말 할 때 나는 그녀의 말을 믿는다. - P187

나는 가끔, 그녀가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린이 우리의 가상 연인 관계를 즐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 아버지와의 저녁식사 자리가 곤혹스럽게 연기를 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의무라도 되는 양 행동하지만, 나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의 며칠 동안만큼 그녀가 신나 있는 때를 알지 못한다. - P190

아이들과 관련된 뭔가가 린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아이들이 듣지 못한다는 사실과 관련된 뭔가가, 내 생각에는,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겁을 먹게 한다. 가끔씩 그녀는 낭송회에 와서 뒤쪽에 가만히 앉아 있지만, 한 번도 미소를 짓거나 박수를 치는 적이 없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만 있다가 행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언젠가 내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어떻게 마음을 다독이며, 매일 그런 슬픔 곁에서 지낼 수 있느냐고. "당신은 그것 때문에 우울해지지 않아?" 그녀가 언젠가 내게 물었다.
"아뇨." 나는 말했다. "오히려 반대예요. 그건 나를 행복하게 하지요."
그러자 그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그녀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195

이걸 읽을 계획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그것을 내민다. 시는 길고 거의 읽을 수 없지만, 나는 처음 몇 줄은 알아볼 수 있다.
나는 부재하는 사람 / 목소리 없는 입
알아보기 힘들지만 나는 나머지 내용도 마저 읽는 척하고, 그런 다음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인다.
아름답다, 나는 수화를 한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한다. - P204

괜찮니?
네. 왜요?
슬퍼 보여서, 나는 수화를 한다.
그가 멈칫하더니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렇군요." 그가 말한다. "선생님도 그래요." - P206

나를 떠나고 몇 주 뒤 로런은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 그녀가 우리의 "대화 단절"이라고 칭한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 관계에서 잘못되었던 모든 것을 상세히 열거하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내가 자기에게 소원했고 내가 내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고 나를 비난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 말을 들으려는 노력을 한 적이 없고, 그저 나와 같이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으며, 우리는 사실상 말을 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내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으며, 그저 현재 상태에만 만족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내가 좀더 적극적이기를, 덜 수동적이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처럼 무언가를 원하기를, 우리를 위한 미래를 그리기를 원했다고 했다. - P206

가끔씩 나는 내가 린 같았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때 그녀는 복수나 보복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일상을 이어나갔고, 그러다, 수차례의 카운 슬링과 대화 끝에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깨져버렸던 거야, 그녀는 내게 말했다, 이미 깨져버린 걸 어떻게 도로 붙이겠어. 그러나 그녀에게 왜 화를 내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혼을 깨는 것은 두 사람이야, 허니. 나는 그 두 사람 중 하나였고." - P208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내게 허락하는 동안 그녀를 곁에 안고, 그곳에 린과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다만 멀리서 지켜본다. 호세의 입술을, 갑작스레 치몰리는 그의 이맛살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여 자신을 둘러 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 P215

어머니와 내가 지나고 있던, 침묵으로 가득찬 그와 같은 순간들이 그 집에서 보낸 나의 전 생애였다. 내게 줄곧 어머니는 근본적으로 슬픈 여인이었다. 어머니는 여러 면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남긴 부재를 채우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 년 동안 집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고, 나는 내가 숙제를 하는 동안 부엌에 함께 앉아 계시곤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 때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나는 어머니의 눈을 보며 어머니가 전적으로 슬프다는 것을 언제나 알 수 있었다. 내 유년의 대부분 동안 어머니의 눈은 그러했는데, 지금의 어머니의 눈이 또 그랬다—어머니의 눈은 자신의 삶에 기쁨보다는 실망이 훨씬 많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 P228

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누나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누나의 논리를 항상 이해하는 척해줄 수는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누나의 기분을, 그 변덕스러운 기질을, 누나의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분노를 이해하게는 됐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천천히 누나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가꾸기 힘든 씨앗, 우리 가족의 상담 치료사는 그걸 그렇게 불렀다. - P2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이철은 맨발로 그 다리의 널판들을 가로지르는 경주를 좋아했다. 널판은 60센티미터 정도 간격으로 고르게 놓여 있었다. 보름달이 뜰 때는 쉬웠다. 발을 디디는 곳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안 그런 밤에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그러면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발을 디뎌야 했다. 한마디로 믿음이었다. 믿음과 타이밍. 미끄러졌다 하면,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 하면, 발이 널판 사이로 미끄러져들어가 정강이뼈가 뚝 부러질지도 몰랐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만약 재수가 없어서 발이 쑥 빠져버리는 날에는, 10미터 아래 강물 속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어리고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는, 물론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거나 비틀거려 본 적 없었다.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렇지만 말했듯이, 정작 중요한 점은 믿음, 나무 널판이 내가 발을 디디는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그리고 널판은 항상 그랬다. - P166

우리는 레이철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향해 차를 몰고 갈 때 아이작 킹을 보았다. […]
우리는 언덕에, 보이지 않는 곳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멀리 있는데도 여전히 그가 두려웠다. 지금은 내가 그를 진짜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네댓 명의 아이들과 한꺼번에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는 날 밤이면, 나는 내가 그를 미워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 상황의 무익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가, 다른 아이들처럼 패배를 인정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가 미웠다. 나머지 우리들처럼—내 부모님이 그러는 것처럼, 태너가 그러는 것처럼, 내가 그러는 것처럼—자신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그가 미웠다. - P174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오래도록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계속 얘기를 했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우리가 함께 보낸 지난 밤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는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나중에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그 아이는 계속 딴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아이 입으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레이철이 그 밤을 그리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176

여름의 끝자락에 있는 모든 도시들이 그러하듯, 도시는 슬퍼 보였다. 레이철이 그 여름 그 안에서 보았던 모든 가능성은 사라지고, 이제 해마다 반복되는 음울한 면모를 변함없이 드러내는 듯, 도시는 벌써부터 춥고 공허해 보였다. - P177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그 아이가 그렇게 떠나버리는 것에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 역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갑자기 그 아이에게, 내가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 아이를 기억하겠다는 내 마음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 P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언젠가 이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헤더."
"무엇 때문에요?"
"이런 만남."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만남을 되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 - P108

무언가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강해져서 그것에 대항하려 애쓴다. - P117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 P126

잠시 후, 칼러 씨가 집에서 나오더니 내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그는 말했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 P154

그리고 비정상이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는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우리 역시 아직 아미시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들까지도. 그 아이들에게는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농장을 나올 수 있게 한 것이 오히려 더 안 좋지 않았을까 싶다—더이상 바라서는 안 되는 일말의 자유를 맛봄으로써 유혹은 더욱 강해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때문에 그 많은 아이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