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린은 알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사람이 늙으면 명예나 이익에 무덤덤해지고 심지어 무심해진다고 했던가. 나이가 들면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P161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바깥이 온통 산이고, 산 뒤에 또 산이 있었다. 그 속의 인간은 먼지처럼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가만히 세어보니 리둥수이는 오십 년 넘게 누명을 쓴 채 살아왔다. 그의 자식과 손자도 영향을 받아 남들 밑에서 일하며 수많은 기회를 놓쳐야 했다. 그런데 지금, 위로 몇 마디와 ‘영웅‘이라는 인정만으로 모든 억울함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 P170
웃고 나서 생각해봐도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먼지는 먼지일 뿐이지. 잊어야 하는 일이든 잊지 말아야 하는 일이든 결국에는 모두 잊을 수밖에. - P171
언젠가 시아버지 루쯔차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풍성한 혼백을 가지고 태어났다가 살면서 차츰 잃어간다. 그러다 다 잃어버리면 혼이 사라지지. 옆에서는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라진 거다. 그 사람은 다시 몸을 돌려 조금씩 자기가 뿌려놓은 혼백을 줍기 시작하지. 도로 다 회수하면 득도할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집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다 회수하지 못하면, 잘은 모르지만 내세에 돼지나 개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 혼을 조금씩 모두 회수해야 해, 다음 생에는 좋은 삶을 살 거야, 더는 생고생하기 싫어, 하고 생각했다. - P197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흙을 메웠는지 몰랐다. 평소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재잘재잘, 바스락바스락 울리던 집안의 소리가 전부 사라졌다. 한때 미소 짓던, 슬퍼하던, 키득거리던, 찡그리던, 침울해 하던 얼굴이 전부 똑같이 변해버렸다. 이런 밤을 겪었는데 제가 살아 있는 것 같나요? 그녀는 속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 P201
딩쯔타오는 자기 집과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친정인 체런루의 문은 시댁의 문보다 컸고 일반적인 집처럼 두 짝이었으며 검은색에 문고리도 있었다. 왜 우리집 문은 루가 저택의 문과 달라요? 그녀의 물음에 아버지가 대답했다. 대대로 학자 집안이라 숨길 필요가 없어서란다. 거리낄 게 없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해도 돼. 사실 세상에서 제일 이목을 끌지 않는 사람은 모두와 똑같은 사람이란다. 그래야 제일 안전하고. 그런 기억을 떠올리다가 딩쯔타오는 냉소를 지었다. 어떤 식으로 몸을 낮췄든 전부 곱게 죽지 못했잖아요, 하고 생각했다. - P212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갔는데도 봄은 더디게 오고 있었다. 석양빛이 초봄의 한기에 얼어붙은 듯 열기를 내지 못해 그날 밤은 유난히 추웠다. - P222
그는 강기슭에서 점점 멀어지는 칭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볼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익숙한 감정은 아주 아득한 익숙함, 오래 전에 잊어버린 익숙함이었고 지금 불현듯 그의 가슴 위로 떠올랐다. 왜 이런 감정이 들까? - P225
류샤오안은 완저우에서 초등학교를 몇 년 다녔다. 그때만 해도 완현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게 많을 줄 알고 비행기에 오른 뒤 옛일을 떠올리며 잔뜩 흥분했다. 하지만 도착한 뒤 당황하고 말았다. 완전히 낯선 곳으로 변해 이곳에 살았던 느낌이 전혀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차를 몰고 아내와 한참이나 시내를 돌아다닌 후에야 옛 흔적이 남은 곳을 몇 군데 발견해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도착하기 전에 조금씩 쌓아올렸던 감정들은 생소함에 이미 산산조각난 뒤였다. - P226
그러던 어느 해 류샤오안과 베이징으로 출장 가 거리의 작은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칭린은 갑자기 흥이 올라 그때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류샤오안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인생에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왜 꼭 아버지처럼 출세하고 싶어 하거나 동생처럼 부자를 꿈꿔야 하지? 아내는 나와 인생관이 같아.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과 살면 정말 편하겠다고 생각했어. 오랜 시간을 통해 내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고. 아내가 돈을 좀 밝히지만, 절대 내 삶을 희생해가며 출세하거나 돈을 벌어오라고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 류샤오촨의 아내를 봐. 은행에 수억 위안을 저축해놓지 않으면 잘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잖아. 그런 다음 내 아내를 보라고. 걱정 없이 잘 먹고 마시고 놀면 그만이야. 어떤 인생이든 사실은 소소한 인생이고 누구나 소소한 일상을 제일 많이 살아. 다시 말해 소소한 인생은 소소한 일상과 어울려야만 가장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 P228
완저우는 당연히 류샤오안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바로 직전에 유럽에서 화려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소도시를 보고 왔기 때문에 심리적 격차가 너무 컸다. 특히 류샤오안의 아내는 툭하면 이렇게 낙후한 곳에 볼 게 뭐가 있느냐고 툴툴거렸다. 하도 툴툴거려 류진위안의 낯빛이 변하자 칭린이 여기에 놀러온 게 아니라 추억을 찾아온 것이라며 눈치 빠르게 나섰다. 추억은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럽 마을이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사실 후대인의 추억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 P229
고향 말을 하면서 고향 국수를 먹고 웃으니 무척 즐거웠다. 류진위안은 이게 바로 행복이며, 이런 행복은 전투할 때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오래전에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그는 평생을 정말 성공적으로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 P236
다이원이 대꾸했다. "제가 살기 싫다면요?" "넌 살기 싫어도 살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든, 돼지나 개처럼 살더라도 살아야 해. 이게 네 운명이야!" "저들에게 죽음으로 보여줄 거예요." "저들은 상관도 하지 않을 거다. 네가 죽어봐야 개가 죽은 듯 여길 거야. 너희 온 가족이 죽었는데 신경쓰는 사람이 있더냐?" - P250
그날의 일을 딩쯔타오는 전부 기억해냈다.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다. 자신의 심정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나더러 살라고 해서 난 정말로 살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게 죽는 것과 뭐가 다르죠? 내가 사는 게 후씨 가문, 루씨 가문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모두 사라졌는데, 내가 후씨 가문 사람인지 루씨 가문 사 람인지 누가 신경이나 써요? 다들 내 목숨을 지켜주려 했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몰라요. 이런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딩쯔타오는 이제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눈물이었다. - P257
이제 딩쯔타오는 열번째 층에 도착했다.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희망을 채우고 있는 것들 때문에 절망하고 말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고 인생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그런 일을 겪고도 왜 살아 있는지는 또 기억나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주저 없이 죽음을 선택한 건 죽음이야말로 제일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 P258
다행히 칭린은 생각이 깊었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어머니 삶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도착한 곳은 다른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일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며, 그 방식은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에 어머니의 숨결이 있는 한 안심할 수 있다는 거였다. - P265
세상 누구에게도 속물근성이 없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칭린은 생각했다. - P267
"엄마, 내년 설에는 절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꼭 건강을 되찾으셔야 해요. 매일 생선과 고기를 구워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저는 이미 오랫동안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을 못 먹었어요." 그렇게 말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칭린은 눈물을 닦지 않고 흘러내리게 두었다. 그해 섣달그믐의 저녁식사 때 가장 기억에 남은 맛은 바로 그 눈물의 맛이었다. - P272
우 노인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산속에서 지내면 아무도 모르게, 죽은 것처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하늘이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번 살아보자. - P273
그러자. 죽은 듯 살자. 이미 죽었는데 뭔들 참지 못할까. - P274
1948년 겨울 어쩌면 12월, 혹은 해가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 노인은 시간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다. 하늘을 보면 밥때를 알 수 있고 추위와 더위는 저절로 알게 된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 P275
1949년 정월 맞는지 모르겠다. 이미 새해가 밝았다고 짐작할 뿐이다. 사실 짐작할 필요도 없다. 어느 해면 어떻겠는가. 무의미한 시간의 지옥이란 이런 것이리라. - P276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며칠 동안, 이미 배운 사람이 산에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자기와 함께 산을 나가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고, 그건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거라고, 더는 전쟁이나 굶주림이 없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누구나 공부할 수 있고 누구나 직업을 가지며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울 거라고 말했다. - P282
생각하다보니 문득 자신은 이 과정을 고작 몇 시간에 겪었지만, 아버지는 몇 년 동안 겪었겠구나 싶었다. 시간이 길어지면 이해하기 힘든 일들도 단순해지고 자연스러워지지 않던가. 시간의 소화력이란 강력해서 아무리 강렬한 감정이라도 밋밋하게, 엄청난 결심도 무기력하게 바꿀 수 있음을 칭린은 잘 알고 있었다. - P283
가다가 마을에 묵을 때마다 주민들이 무척 반기며 비적의 악행을 고한다. 그들의 열정은 감동적이다. 우리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떠나기 전에 마당과 길을 깨끗이 청소한다. 예전에는 해방군이 이런 걸 전혀 몰랐다. 이제 나는 류 정치위원을 따라 산에서 나온 게 매우 옳은 선택이었음을 안다. 모든 과거는 지나갈 수 있다. 나는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이 삶은 내 과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내 과거를 영원히 묻어버릴 것이다. - P284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대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깊은 그리움과 기억이 담겨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 성함은 둥푸칭, 할머니는 전린이시구나. 지금까지 가문이라는 개념이 없던 칭린에게 갑자기 어떤 지역의 사람들, 유서 깊은 지역의 사람들과 친밀한 혈연관계가 생긴 듯했다. 그는 자신의 핏줄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거대한 체계와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피가 통하고 흐르기 시작했다. - P295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슬픔이 깊고 무겁게 담겨 있었다. 그녀의 기억상실도 어쩌면 강한 충격 때문일지 몰랐다. 그런 충격 때문에 그녀의 본능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그녀가 부럽다. - P298
그렇다면 아버지의 ‘혹시‘라는 말과 물음표는 무슨 의미일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부모님은 그토록 특별한 상황이 되었을까? 두 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너무도 깊이, 거의 아무도 알지 못하게 숨어 살았다. - P299
그는 부모님의 인생이 왜 그렇게 뒤틀렸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깊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게 꼭꼭 숨겼는지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생의 전반부를 자질구레한 일상 속에 숨겨버렸다. 이런 은폐는 그들이 외부인에 대해 얼마나 깊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지 암시하고 있었다. 세상이 뒤바뀌는 격변의 시대에 개인은 얼마나 고독하고 미약해지는 걸까? 시대의 한줄기 미풍이 어쩌면 그들 인생의 배를 완전히 전복 했을지도 몰랐다. - P300
나 한테는 이 가련한 여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같다. - P307
매일 쯔타오를 데리고 성당에 간다. 루르드 성모상 앞에 이르렀을 때 쯔타오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당시 사람들도 "누구세요?"라고 물었으며 그녀는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노라고 알려줬다. 쯔타오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서 성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바닥에 글자도 써줬다. 쯔타오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원죄가 없다는 뜻이라고 답한 뒤 이 세상에서는 나와 그녀 모두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리송한 눈치였지만 내 말을 가슴에 새겼다. 다음날에는 루르드 성모를 보고 속으로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게 옳다. 내게는 그녀의 평온이 필요하다. - P310
아들아, 또 한 가지 당부하는데, 혹시 흔적을 따라가다가 참혹한 일을 발견하면 중단하거나 포기하거라.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 무척 많으니 그런 일이 하나 더 있다고 해도 아무 상관 없단다. 과거를 잊는 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이다. 망각이 있어서 나와 네 어머니는 이렇게 오랫동안 편안히 살 수 있었다. 망각은 네 부담을 줄여주고 미래를 가볍게 맞이하도록 해줄 거다. 네가 평생 평온하게 살길 바란다. 네 아이 세대가 되면 과거의 모든 것은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 - P314
딩쯔타오는 아버지가 그들 땅을 사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아버지는 아무리 싸도 그들 땅은 사지 않겠다며 우리는 조상들 사이에 생긴 원한을 이어가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딩쯔타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가 틀렸어요. 아버지가 그들보다 더 잘사는 이상 원한은 저절로 이어져요. - P322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산꼭대기에 늘 눈이 얕게 깔린데다 음산하고 추웠다. 해가 비치는 날에도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쯔타오는 갑자기 고향이 생각났다. 고향의 겨울은 언제나 그랬다. 추위가 줄기차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지금도 찬바람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피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 P325
딩쯔타오의 눈에 빛이 보였다. 어렴풋한 그 광선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춤추는 검은 조각 같기도 하고 흩날리는 눈송이 같기도 했다. 딩쯔타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제 출구에 가까워졌나? 나가면 어떻게 될까? […] 밖으로 나간들 누구와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게 진심이 아니었다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 P334
그때 딩쯔타오는 극히 냉정한 상태가 되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어떻게 그토록 단순하게 생각했을까? 훨씬 잘 이별할 수 있었는데 그 어리석은 고육책 때문에 본인들 목숨도 구하지 못하고 오빠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잖아. 나도 목숨만 건졌을 뿐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이 증오하게 되었고. 내 손까지도 그 죄를 기억하고 있잖아. - P339
자신은 왜 아직도 살아 있을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왜 살아야 할까? 무슨 이유로 죽지 않았을까? 그런 것들을 그녀는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 이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또 누구를 더 알아야 할 까? 심지어 그들의 그런 죽음이 더 나은지, 자신의 이런 삶이 더 나은 지 딩쯔타오는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 P340
"다이원, 누가 귀찮게 굴면 네 아버지에게 루쯔차오의 사돈이라고 말하라고 해. 너도 길에서 누가 시비 걸면 루씨 가문 며느리라고 하고." 다이원이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게 소용 있을까요?" 시아버지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 근방 수백 리 안에서는 그래도 아직 우리 집안 말발이 선다. 현의 간부 중에 나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더냐?"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데요? 예전과 다르잖아요." "내가 그들에게 세워준 공이 얼마인데, 그걸 봐서라도 어느 정도는 체면을 세워줄 거다. 내 말대로 해라." 그때 딩쯔타오는 자기도 모르게 시아버지처럼 냉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루쯔차오의 체면을 세워준다고요? 본인 목숨까지 잃고도 무슨 체면을 논합니까? 그런 오만함과 우월감으로 온 가족이 아버님을 따라 죽었어요. 그런 자부심이 무슨 소용입니까? 한 푼 가치도 없는 것을! - P342
"드라마를 보는 것 같군. 자네 집에 이렇게 흥미로운 일이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기억을 잃은 뒤 잠재의식 제일 밑바닥에 남는 건 가장 사랑했던 곳일까, 아니면 가장 증오했던 곳일까?" […] 류샤오촨이 말했다. "나라면 제일 싫어했던 곳이 남을 것 같아. 상처를 심하게 받아서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류샤오안이 대꾸했다. "봐봐, 나는 너랑 완전히 반대라고. 나라면 제일 사랑했던 곳을 기억할 거야. 그래야 계속 살아갈 힘이 생길 테니까." - P352
칭린은 문득 놀랍고 기이한 일들이 우리 곁을 수시로 스쳐지나가는 데 우리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넘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무심히 넘긴 일들의 뒤편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 P357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에 한 대야씩 머리에 물을 끼얹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지나가자 강렬한 감정도 차츰 쓸려나갔다. 갈수록 칭린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은들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구나 어머니 연세가 이미 이렇게 많은데 과연 깨어나실 수 있을까? 정말로 친척을 찾는다고 해도 지금껏 남으로 살아왔으니, 그런 낯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또 아버지도 그 일들을 알 필요가 없다고 적어두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본인들이 떠올리기 싫다고 했던 과거를 내가 굳이 파고들어야 할까? 그냥 두 분 생각대로 하자. - P358
시간이란 정말 무서운 존재다. 그런데 현실은 그보다 더 독해서 감정이 끓어넘치던 사람을 담담하기 그지없는 실용주의자로 바꿔놓을 수 있다. 칭린도 그랬다. 그는 자기 일, 눈앞의 삶에 충실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돌아볼 게 아니라 미래를 봐야 하며, 시간을 거슬러갈 게 아니라 앞으로 따라가는 게 옳았다. […] 그렇게 생각한 칭린은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그 일을 아버지의 가방처럼 구석에 내려놓았다. - P359
민간 건축, 특히 부자들의 대저택은 건축적인 의미에서는 사실 새로운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배경, 예를 들어 기원과 변천, 결말에는 건축 자체보다 훨씬 가치 있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지난 오십여 년 동안 사회의 질적 변화 때문에 거의 모든 남방 장원이 주인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장원은 학교나 창고, 사무실이 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의 가족 구성원이 모두 사망한 장원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그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쇠락이 아니라 사회에 의한 파괴라 할 수 있었다. - P359
그런데 떠나기 전날 갑자기 류샤오안이 칭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칭린, 내가 연장자로서 자네보다 세상을 좀더 알잖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네. 만약 찾기 힘들면 그냥 포기해도 돼. 진상을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세상의 모든 일에 진상이 있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단순하고 편안하게 사는 게 언제나 인생의 진리라는 말이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칭린은 통화 내용을 가슴에 담았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창문 앞으로 걸어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 P361
세상에는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일들이 있잖아. 혹은 잊어야만 하는 일이나 사람도 있고." 룽중융은 한참 동안 대꾸하지 않다가 차가 충칭을 벗어나서야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래. 그런데 어떤 사람이나 일은 말이야, 잊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드시 기억하려는 사람도 있거든." - P362
룽중융이 차창 밖의 산을 보며 탄식했다. "비적이 많을 만하네. 나무와 풀, 흙과 물이 있으니까.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할 수 있잖아. 숨기 쉽고 달아나기도 어렵지 않고." "당시 비적들이 꽤 편했을 거란 말이야?" "분명 가난한 사람보다 살기 쉬웠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비적이 되겠어?" "일리가 있네. 무슨 일이든 개별적 사건이 현상이 될 때는 심오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니까. - P364
룽중융이 말했다. "봐봐! 충칭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입체감이 분명한 도시라 한층 한층 단계적으로 높일 수 있는데 굳이 산꼭대기에 고층 건물을 세웠지. 산간도시의 아름다운 입체감을 기어코 망가뜨렸잖아. 거리를 걸을 때 지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해. 안타깝다니까, 안타까워." 칭린이 웃음을 지었다. "하늘과 누가 높은지 겨루는 꼴이지." "대자연과 대결해 성취감을 만끽하자는 신조를 받들면서 조화를 우선시한다는 원칙을 버렸어. 정말 어리석지 않아?" - P365
우연일까? 칭린은 계속 우연 쪽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우연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우연이 겹치면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 P383
"[…]조카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둘째 도련님이 처가를 방문하려 했는데 마을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떠날 때 ‘영원히‘를 세 번 말했다는 거야.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 이곳을 영원히 고향으로 여기지 않겠다. 자손들에게 이곳을 영원히 모르게 하겠다. 이 얼마나 지독한 말이냐고." - P397
루싼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다들 귀신의 집을 보면 너무 처참하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말은 바로 해야지. 루씨 집안이 그렇게 된 건 결국 그들의 선택 아닌가? 왜 진뎬의 집안에 대해서는 처참하다고 말하지 않지? 루씨 집안에서 진뎬 집안의 땅을 빼앗지 않았으면 그 집이 망했을까? 설마 가난한 집은 망해도 별일 아니지만, 부자가 망하면 더 처참하다는 건가? 그러니까 이 일은 루씨 집안에서 왕씨 집안을 망가뜨린 바람에 보복당한 거라고 봐야 해. 이건 두 집안의 일이라고. 더군다나 그들은 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를 파멸시켰어. 하인들까지 놓아주지 않고. 진은 자신을 길러준 그들 부모의 묘비를 세웠으니, 원한도 갚고 은혜도 갚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이를 갈면서 고향을 원망하는 게 무슨 도리지? 더 예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느냐고? 아편을 팔아서 자기 배를 살찌웠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 장사로 집을 잃고 목숨을 잃었는데? 남들은 이를 갈며 화내지 않는데 그들은 왜 내려놓지 못하느냐고?"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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