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맨 위에 이런 단어가 보인다.
나의 사랑하는—
애그니스는 불에 덴 듯 뒤로 물러서려다가, 다음 줄을 본다.
애그니스
더는 아무 말도 없다. 단 세 마디, 그리고 빈 공간.
그는 무어라 쓰려 했을까? 애그니스는 그가 기회가 있었다면 무슨 말을 썼을지 알아내려는 듯 종이의 빈자리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종이의 결, 햇살에 따뜻해진 나무탁자의 온기가 느껴진다. 자기 이름을 이루는 글자들을 엄지로 훑으며 그의 깃펜이 만든 미세한 자국을 느낀다. - P473

사방에서 몸과 팔꿈치와 팔이 밀쳐댄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문으로 들어온다. 일층에 있는 사람이 위쪽 발코니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하며 소리친다. 사람이 점점 밀집하고 이쪽저쪽으로 파도처럼 떠밀린다. 애그니스는 뒤쪽으로 또 앞쪽으로 밀리면서 버틴다.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게 요령인 듯싶다. 마치 강 위에 서 있는 것하고 비슷하다. 물살에 맞서지 말고 몸을 맡겨야 한다. - P481

이곳에 있고 또 연극이 시작되고 나니, 여행하는 동안 그리고 그의 방 안에 서 있는 동안 느꼈던, 마치 현실에서 분리된 것 같은 낯선 느낌이 검댕이 씻기듯 사라진다. 애그니스는 속으로 벼르며 분노를 도스른다. 해봐,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어떻게 했는지 보여봐. - P484

애그니스는 납득이 안 된다. 남편이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왜 그 이름이 자기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척, 그냥 단순한 글자의 조합인 척하는 건가? 어떻게 그 이름을 훔쳐 거기 담긴 것을 벗겨내고 뜯어내고 그 이름이 지녔던 삶을 저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펜을 들어 그 이름을 종이에 써서 아들과의 연관을 끊어 버릴 수 있는가? 말이 안 된다. 이 사실이 가슴을 찌르고, 뱃속을 도려내고, 애그니스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로부터, 그들이 공유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로부터 끊어내는 듯하다. 애그니스는 다리에서 보았던 불쌍한 머리, 이를 드러내고 목이 잘려 공포로 얼어붙은 얼굴을 떠올리며 자기가 그중 하나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떨리는 강물, 몸 없이 흔들리는 머리, 소리 없고 소용없는 후회를 느낀다. - P488

남편은 세상 모든 아버지가 하고 싶어 할 일을 했다. 아이의 고통을 자기가 지고, 아이와 자리를 바꾸고, 아이 대신 자신을 내주어 아이를 살리려 한 것이다. - P492

유령이 무대에서 나가려다가 애그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애그니스를 똑바로 보고, 시선을 맞추고, 마지막 대사를 한다.
나를 잊지 마.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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