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갈색, 황갈색, 적갈색, 노란색이다. 공들여 배합한 색조 때문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인 이곳에서 쿠션의 생생한 오렌지빛이나 장정한 책들 사이로 얼룩덜룩한 책 몇 권이 밝은 점처럼 도드라질 것이다. 너울지며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 아래 장미꽃 화병이 놓여 있어도 거실은 조금 침울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 방은 저녁에 더 어울리는 공간일 것이다. 겨울이면, 젖힌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몇 줄기 빛을 통해 책장 구석이라든가 음반꽂이, 책상, 소파 테이블, 거울에 어린 희미한 모습들이 보일 것이다. 길이 잘 든 나무, 묵직한 느낌의 화려한 비단, 크리스털 조각, 부드러운 가죽, 모든 사물이 빛을 발하는, 사방이 어둠에 잠긴 이 방은 분명 평화의 항구이자 행복의 땅일 것이다. - P15

책으로 둘러싸인 벽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멋지고 단순하며 감미롭게 빛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삶이 언제까지나 조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삶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홀연히 모험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다. 어떤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원한이나 쓰라림, 질투를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소유와 욕망은 언제나 모든 지점에서 일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균형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고상하게 행복을 지키고, 그들이 나누는 삶의 매 순간 이를 발견할 줄 알 것이다. - P20

파리 전체가 그들에게는 영원한 유혹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취기 어린 상태로 그 유혹에 자신들을 내맡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빠져들고는 했다. 하지만 욕망의 끝은 냉혹하게 꽉 막혀 있었다. 커져만 가는 불가능한 꿈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 P23

이상하리만치 달콤하게 빠져드는 부푼 몽상과 달리 실제로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객관적 필요와 재정 상태의 절충을 꾀한 어떤 이성적 계획도 끼어 들지 못했다. 무한한 욕망만이 그들을 압도했다. - P26

그들은 안락한 가운데 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이며 감탄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 그들의 즐거움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치라 부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富)의 기호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를 사랑했다. - P28

그들이 좇는 길, 새롭게 눈뜬 가치, 전망, 욕망, 야망, 이 모든 것이 종종 어쩌지 못할 만큼 공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태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삶, 암울함 이상으로 알 수 없는 불안의 근원이었다. 무엇인가 입을 무한히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종종 혼잣말로 어쩌면 삶이 매력과 안락함, 미국식 코미디나 솔 바스의 영화 엔딩 크래딧처럼 환상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경이롭고 눈부신 장면들, 가령 스키 자국 두 줄이 선명히 남은 새하얀 눈밭이라든가 푸른 바다, 태양, 푸른 언덕이 펼쳐지고 벽난로에 불꽃이 일렁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거침없이 펼쳐진 고속도로, 값비싼 자가용, 호사스러운 집이 그들을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 P39

온종일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놀란 낯으로 지레 겁을 집어먹기도 했지만, 감히 그 같은 심경은 입에 담지도 못했다. 앞으로 자신들의 운명과 존재 이유, 행동을 결정지을 유치한 맹목적 추구 앞에서 이를 감히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욕망의 크기에 압도당해, 눈앞에 펼쳐진 부와 주어진 풍요로움에 질식해 갔다. - P39

그들은 테이블에 죽치고 앉았다. 자신에 대해, 세상, 온갖 것, 별 볼 일 없는 것, 취미, 야망에 대해 떠들어댔다. 어느 도시나 있기 마련인 편안한 바를 찾아 내서 새벽 1시까지 위스키와 브랜디, 진 토닉을 앞에 두고 저버린 사랑, 욕망, 여행, 거부와 열정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레퍼토리가 똑같은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워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 P42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갈망하는 것은 어떤 법칙에 가까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법칙이었고, 광고, 잡지, 진열장, 거리의 볼거리, 소위 문화 상품이라 불리는 총체가 이 법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가끔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었다. - P47

이들이 갖는 수치심과 오만함은 같은 성격이어서 같은 환멸, 같은 분노를 내포하고 있었다. 온종일 사방에서 슬로건, 포스터, 네온사인, 불 밝힌 진열장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신들이 늘 사다리의 아래에 있다고, 언제나 사다리의 너무 낮은 곳에 있다고 세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한술 더 떠, 가장 나쁜 몫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P47

그들의 어린 시절 기억은 엇비슷했다. 그들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이 닮아 있는 것처럼. 집안 배경 없이 더디게 일어서는 것이나 자신들이 선택한 미래가 비슷한 것처럼. - P48

그들은 한창때였다. 편안했다. 그들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거리를 둘 줄 알았다. 여유가 있었고, 아니 적어도 그러려고 했다. 그들은 유머가 있었다. 영리했다. - P48

그들은 자유에 탐닉했다. 세상 전체가 손안에 있는 듯했다. 그들이 느끼는 갈증의 리듬에 충실했고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열정은 끝이 없었다. 밤새도록 걷고, 달음질치고, 춤추며, 노래할 수도 있었다. - P51

그들은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담배를 끊겠다든가 술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 또는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이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 잊지 못할 취기 어린 날의 기억에는 무엇인가 아련한 알 수 없는 흥분과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한잔하러 간 일이 근본적인 몰이해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분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듯한 단단한 모순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 P51

어떻게 보면, 그들은 요리하는 것은 거부하고 눈에 띄는 화려함만을 숭배했다. 그들은 시각적인 화려함과 풍성함을 좋아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기껏 형편없는 요리를 선보이는 것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거부하는 세계는 프라이팬과 냄비, 식칼, 중국 요리, 화덕의 세계였다. - P53

오랫동안 고대해 온 영화들,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이라 평이 나 있는 영화들, 마침내 이런 영화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상영 첫날 만원인 관객들 틈에서 만났다. 스크린에 불이 밝혀지고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컬러는 바랬고, 화면은 끊겼으며, 여주인공들은 보기 싫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그들은 나왔다. 슬펐다. 상상하던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 각자가 상상하던 완전한 영화가 아니었다. 영원히 싫증을 내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완벽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고 싶어하던 그 영화. 아니, 더 은밀히,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하던 그 영화가 아니었다. - P55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신호들을 더 잘 알아채고, 때로 조장할 줄도 아는 것 같았다. 귀와 손가락, 혀가 마치 매복 상태로 조만간 촉발될 이 달콤한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평온함과 영원함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는 어떤 긴장도 끼어들지 못했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모든 것이 감미롭게 천천히 흘러갔다. 강렬한 기쁨이 일시적이고 불안 정한 것들을 고양시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조화로운 상태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사소한 불협화음, 대수롭지 않은 주저의 순간들, 무례한 태도만으로도 그들의 행복은 무너져 내렸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일종의 계약, 그들이 대가를 지불했던 무엇, 불안정하고 딱한 무엇인가, 잠깐의 행복한 순간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더 위험하고 더 불확실해 보이는 일상과 삶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P59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러함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처지였다. 일과 자유의 대립 관계를 엄격히 따지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직장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 P62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 P63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아마 옳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타인의 불행을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불행을 확대해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들은 별 볼 일 없었다. 겨우 벌고, 프리랜서로 일하며 뜬구름 잡는 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세월이 그들 편인 것은 사실이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잘것없는 위안이었다. - P65

그들 사이에 돈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벽이었다. 매번 부딪히게 되는 일종의 범퍼 같았다. 가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궁색함, 옹졸함, 얄팍함이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기적이나 사상누각에 세운 어리석은 꿈 외에 다른 출구가 없어 보였다. 미래 없는 꽉 막힌 삶으로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 P67

사회의 서열 관계를 중오하기로 작정했다. 기적으로라도 해결책은 세상이나 역사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러 코스터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들의 삶이 가장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쉽게 넘겨 버렸다. - P69

변한 것이 있다면,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 모호한 것이었다. 그들의 남다른 삶의 방식, 몽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그랬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위태롭고 덧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불완전한 기쁨,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다림과 궁색함, 편협함이 자신들을 마모시켜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 P78

가끔은 모든 것이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될 일이었다. 삶이 그들을 달래줄 것이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변화도 없고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없이,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낮과 밤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거의 미미한 변화만 있을 뿐, 같은 주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행복이 계속될 것이다. 어떤 동요, 비극적인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도 흔들어놓지 못할 영원한 감미로움을 맛볼 것이다. - P78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 P79

그들은 떠났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만원인 지하철, 짧기만 한 저녁, 치통처럼 따라붙는 통증과 불확실성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들의 삶은 팽팽한 줄 위에서 끊임없이 춤춰야 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고, 미래는 꽉 막혀 있었다. 극심한 공허감, 기댈 곳도 없으면서 끝을 모르는 비참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들은 소진된 느낌이었다. 은둔하기 위해, 잊기 위해, 자신들을 달래기 위해 떠났다. - P106

이렇게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4주가 한 달을 만들었다. 달들은 대부분이 엇비슷했다. 낮이 짧아지는가 싶더니 점점 길어져 갔다. 겨울은 축축하고 추웠다. 그들의 인생이 흘러갔다. - P114

그들의 고독은 절대적이었다. - P115

그들은 이 세상을 박탈당했다. 세상에 몸담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 속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엄격한 규율이 그들을 배척하는 듯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대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영원히 낯선 사람, 이방인으로 남으리라. - P116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권태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실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만족도 얻지 못했지만, 이따금 혼란스럽고 모호하게나마 이곳에 서의 삶이 분수에 맞고, 심지어 역설적이게도 이런 삶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 P118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 P119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의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 P126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 P126

"만일 우리가 돌아간다면···." 누군가 말을 꺼낼 것이다.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다른 한 명이 답할 것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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