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대가족을 원하지 않았다. 가끔 화가 나면 당신을 양동이에 넣어서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했다. 어렸을 때 당신은 슬레이니강으로 끌려가서 어머니가 당신을 양동이에 넣어 강둑에서 던지는 것을, 양동이가 잠시 둥둥 뜨다가 가라앉는 장면을 상상했다. 당신은 나이가 들면서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임을 알았고, 너무 끔찍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가끔 끔찍한 말을 했다. - P15

큰언니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좋은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교사가 되었다. 유진은 공부를 잘했지만 열네 살이 되자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농사일을 시켰다. 사진을 보면 장남과 장녀는 옷을 잘 차려입었다. 새틴 리본, 짧은 바지, 두 눈 속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태양. 자연의 흐름에 따라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는 대로 먹이고 입히고 기숙학교에 보냈다. 가끔 공휴일과 주말이 이어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선물과 낙관주의를 안고 오지만 낙관주의는 금방 시들었다. 언니와 오빠 들은 모든 것을, 여기서 살던 추억을 떠올리다가도 아버지의 그림자가 바닥을 가로지르면 뻣뻣하게 굳었다. 언니 오빠들은 집을 다시 떠나면 치유받는 것 같았고, 빨리 가고 싶어서 안달 이었다. - P16

이제 당신은 층계참에 서서 행복을, 좋은 날을, 즐거운 저녁을, 친절한 말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작별을 어렵게 만들 행복한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대신 키우던 세터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을 때가 기억난다. 어머니가 당신을 그의 방에 들여보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헛간에서 어머니가 반으로 자른 나무통 위로 몸을 숙이고 자루를 물속에 넣었고, 결국 낑낑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자루가 고요해졌다. 강아지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날,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P17

벚나무가 휘어진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양치기 개들이 당신을 쫓아온다. 당신은 꽃밭을 지나고 배나무를 지나 자동차로 걸어간다. 포드 코티나 승용차가 밤나무 그늘에 세워져 있다. 디젤 연료통 옆에서 야생 민트 향이 난다. 유진이 시동을 걸고 농담을 하면서 차를 몰기 시작한다. 당신은 핸드백, 비행기표, 여권을 다시 본다. 넌 거기 도착할 거야, 당신이 스스로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마중을 나올 거야. - P21

당신이 철조망 을 다시 칠 때 암망아지가 들판 가장자리를 따라 달려와서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히힝거린다. 붉은 기가 도는 밤색에 한쪽 발만 양말을 신은 것처럼 하얗다. 당신은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서 이 암망아지를 팔았지만 내일은 돼야 데려갈 것이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당신은 암망아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돌아서지만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의 시선이 자갈길을, 타이어 자국 사이의 초록색 풀을 지나 개신교 시절부터 남아 있던 화강암 기둥을 따라 올라갔다가 저 너머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러 나온 어머니에게 닿는다. 어머니는 겁쟁이처럼 살짝 손을 흔든다. 어머니가 자신을 남편과 같이 여기 남겨두고 떠나는 당신을 용서하는 날이 올까 궁금하다. - P22

이쪽은 조명이 더 환하다. 향수와 볶은 커피콩 향기, 비싼 것들의 냄새가 난다. 당신은 태닝 로션 병들을, 선반 가득 늘어선 검은 안경들을 알아본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지만 당신은 계속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티셔츠와 면세점을 지나 게이트로 향한다. 마침내 게이트에 도착하니 거의 아무도 없지만 당신은 여기가 맞다는 걸 안다. 당신은 또 다른 문을 찾다가 여자의 신체 일부를 알아본다. 문을 밀자 열린다. 당신은 환한 개수대와 거울을 지나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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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런 식으로 일을 분배했지만, 작업이 진척되자 점점 더 짜증스럽고 끔찍해졌다. 가끔은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해 며칠 동안이나 실험실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일을 마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하기도 했다. 참으로 더럽고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첫 실험을 하던 시절에는 일종의 광적인 열의가 내 눈을 가려 이 끔찍한 일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내 마음은 노동의 결과물에 철저히 못박혀 있었고, 내가 하는 일의 공포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이제 나는 차갑게 식은 피로 일에 임하고 있었고, 심장은 내 손이 하는 일에 구역질하는 일이 잦았다. - P222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영원히 이어 질 후세에 이런 저주를 퍼부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전에는 내가 창조한 존재의 궤변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 악마의 협박에 무너져 분별을 잃었다. 그러나 이제 처음으로 그 약속의 사악함이 내게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후대가 나를 종족의 역병과 같은 존재로 저주할 거라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다. 일신의 평안을 구하는 대가로 전 인류의 생존을 주저 없이 팔아버린 이기적인 인간으로. - P225

괴물은 내 얼굴에 떠오른 결의를 읽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노에 차서 이를 갈았다. "모든 인간이 제 가슴에 품을 반려자를 맞고, 모든 짐승이 제 짝을 찾는데, 나만 혼자여야 한단 말인가? 내게도 사랑의 감정이 있었는데, 돌아온 건 혐오와 경멸뿐이었다. 인간아! 증오해도 좋다. 하지만 조심하라! 네 시간들은 공포와 불행 속에 흘러갈 것이며, 머지않아 번개가 떨어져 네 행복을 영영 앗아갈 것이다. 나는 참담한 극한의 불행 속에서 뒹구는데, 네놈은 행복할 거라 생각하느냐? 다른 열정들은 다 짓밟힌다 해도 복수심만은 남는다. 복수, 앞으로는 복수가 빛이나 양식보다 내게 더 소중한 것이 되리라! 나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먼저 당신, 나의 독재자이자 고문관인 당신이 당신의 불행을 내려다보는 태양을 저주하도록 만들어주겠다. 조심하라. 나는 두려움이 없고, 그렇기에 강력하다. 뱀의 간교함으로 지켜볼 것이며, 뱀의 맹독으로 찌를 것이다. 인간아, 내게 입힌 이 상처를 끝내 후회하고야 말 것이다." - P228

우리 감정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우며, 이 참담한 불행의 극한에서도 끝내 놓지 못하는 목숨에 대한 애착이란 얼마나 기이한 것인가! - P233

어째서 나는 죽지 않았을까? 이 세상을 살아낸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참담하게 불행했던 내가, 어째서 망각과 휴식 속으로 꺼져 들어가지 않았을까? 죽음은 맹목적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유일한 희망인 꽃 같은 어린아이들을 무수히 낚아채 가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신부들과 젊은 연인들이 건강과 희망의 절정에 섰다가 바로 다음날 묘지의 벌레들과 부패의 먹잇감이 되고 마는가 말이다! 대체 나는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기에, 그 많은 충격들을 이렇게 다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매번 생고문 같은 고통이 새롭기만 했는데. - P239

내 비탄과 우울은 지독히도 끈질겼지만, 아버지는 절망하지 않았다. 간혹 가다가 내가 살인 누명을 썼던 굴욕을 떨쳐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자존심이란 얼마나 허망한지 모른다면서 날 일깨워주려 할 때도 있었다.
"아! 아버지." 나는 말했다. "정말 저를 모르시는군요. 저처럼 형편없는 존재가 감히 자존심을 내세운다면 인간에게, 인간의 감정과 정념에 굴욕일 것입니다. 유스틴, 불쌍하고 운도 없는 유스틴은 저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었지만, 똑같은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원인도 저란 말입니다. 제가 그애를 죽인 거예요. 윌리엄, 유스틴, 그리고 앙리, 다들 제 손에 죽은 거란 말입니다." - P251

기억은 광기를 수반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진짜로 광증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끔은 맹렬하게 화를 내며 분노에 불타기도 하고, 가끔은 시무룩하게 우울증에 빠져 있기도 했다. 말도 않고 보지도 않고 나를 덮치는 수없는 불행에 멍하니 넋을 잃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곤 했다. - P257

아! 불행한 사람이라면 체념도 좋겠지만, 죄인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과다한 슬픔에 허우적거리다보면 가끔 누릴 수 있는 감정의 사치는 회한의 고뇌에 쓰디쓴 독으로 변해버렸다. - P258

정해진 혼인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비겁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예감 때문이었는지 심장이 쿵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내 감정을 감추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와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 항상 나를 지켜보는 훨씬 섬세한 엘리자베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우리의 결혼을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과거의 불행이 새겨놓은 일말의 근심이 스며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확실하고 구체적인 행복처럼 여겨지는 게 곧 헛된 꿈이 되어 흩어져버릴까봐, 그리하여 깊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회한 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질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 P259

인간의 정신에 급작스러운 격 변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다. 햇살이야 비칠 테고 구름이야 낮게 깔릴지 모르지만, 그 무엇도 하루 전날의 풍광을 되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악마는 내게서 장래의 행복에 대한 마지막 희망까지 앗아가버렸다. 그 어떤 생물도 나만큼 비참했을 리가 없다. 이토록 소름 끼치게 무서운 사건은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 P267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았다. 그들을 죽인 살인자 역시 살아 있었고,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나는 지쳐빠진 육신을 질질 끌고 가야만 한다. 풀밭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키스를 하며, 떨리는 입술로 외쳤다. "내가 무릎을 꿇은 신성한 대지에 걸고, 내 곁을 헤매는 혼령들에게 걸고, 지금 내가 느끼는 깊고 영원한 비탄에 걸고 맹세한다. 또한 그대, 오 밤이여, 그리고 그대를 지배하는 정령들에게 걸고, 이런 불행을 초래한 악마를 추적할 것을 맹세한다. 그 아니면 내가 치명적인 결투로 죽어갈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서 나는 목숨을 부지할 테다. 이 값비싼 복수를 결행하기 위해서, 영영 눈앞에서 추방해버리려 했던 태양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이 대지의 푸른풀을 또다시 밟을 테다. 죽은 자들의 영이여, 내가 그대들을 초혼한다. 방랑하는 복수의 집행자들이여, 나를 도와 안내해달라. 저주받은 지옥의 악마가 고뇌를 깊이 들이마시게 하라. 지금 나를 괴롭히는 절망을 그가 느끼게 하라." - P274

"클레르발을 죽인 후, 나는 슬픔에 무너지고 철저히 피폐해진 심장을 안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프랑켄슈타인이 불쌍했다. 공포심에 가까운 연민을 느꼈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내 존재와 그에 수반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한 장본인이 감히 행복을 꿈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게는 비참과 절망을 쌓고 또 쌓아 안겨준 주제에 영영 금지된 감정과 열정을 누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력한 질투와 쓰디쓴 분노가 나를 끔찍하게 허기진 복수심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내가 했던 협박을 기억해낸 나는 그대로 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 자신에게 치명적인 고문 행위를 자초하는 짓임을 알고 있었으나, 나 자신은 충동적 본능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와 같아 혐오스러워하 면서도 순순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죽었을 때! ······아니, 그때 나는 비참하지 않았다. 감정은 모두 훨훨 떨쳐버리고 고뇌는 모두 억누르고 흘러넘치는 절망을 만끽했다. 그후로 악은 나의 선이 되었다. 여기까지 몰리자, 이젠 자발적으로 선택했던 요소에 내 본성을 적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악마적 계획의 완수가 도저히 충족되지 않는 열망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끝이 났다. 저기 내 마지막 희생자가 있으니!" - P298

그러나 내 불행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어떤 공감도 내게는 있을 수 없으니까. 처음 공감을 구했을 때는 미덕에 대한 사랑에서, 내 온몸과 마음에서 흘러넘치던 행복과 사랑의 감정에서,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다. 그러나 이제, 그때의 미덕은 내게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되었고 행복과 애정은 쓰라리고 혐오스러운 절망으로 변해버렸으니, 이제 내가 무엇에 대한 공감을 구할까? 고통이 지속되더라도 혼자서 견뎌내는 데 나는 만족한다. 죽는다 해도, 혐오와 불명예가 기억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한때는 미덕과 명성과 기쁨의 꿈이 내 상상을 달래주었다. 한때는 이 외모를 용서하고 내가 풍기는 훌륭한 자질들을 사랑해줄 존재들과 만나고 싶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명예와 헌신이라는 고아한 생각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죄악으로 가장 미천한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했다. 어떤 범죄도, 어떤 악행도, 어떤 악의도, 어떤 불행도 내가 겪은 것에는 비할 수 없다. 내가 저지른 끔찍한 짓 들을 하나씩 돌이켜보면, 한때 숭고하고 투명한 미와 위풍당당한 선의 비전으로 사고가 충만했던 존재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이다.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다. 하지만 심지어 신과 인간의 원수에게조차 외로움을 함께할 친구와 동료가 있다. 나는 철저히 혼자다. - P300

전 인류가 내게 죄를 지었는데, 나만 유일한 범죄자라는 멍에를 써야 하는가? 어째서 당신은 자기 친구를 경멸하며 문간에서 몰아낸 펠릭스를 미워하지 않는가? 어째서 자기 아이를 구해준 은인을 죽이려 했던 시골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가? 아니, 이 사람들은 덕스럽고 흠 없는 존재들이겠지! 불행하고 버려진 내가 추물이니, 당연히 면박당하고 발길에 차이고 짓밟혀 마땅하겠지. 심지어 지금도 이런 불의를 생각하면 피가 끓어오른다. - P301

당신은 나를 미워하겠지. 그러나 그 증오는 나 스스로 느끼는 혐오감에는 차마 비길 수도 없다. 나는 그 일을 집행한 손을 본다. 그런 상상을 처음 품었던 심장을 생각한다. 그들이 내 눈길과 마주치고 그 행위가 내 생각을 온통 사로잡을 그 순간만을 갈망한다. - P301

몇 년 전, 이 세계가 담은 심상들이 처음 내게 열렸을 때, 여름의 명랑한 온기를 느끼고 바스락거리는 잎사귀와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내게 이들이 전부였을 때는 죽기 싫어 흐느꼈을 텐데. 죽음은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위로다. 범죄에 더럽혀지고 쓰디쓴 회한에 갈기갈기 찢긴 내가 죽음이 아니라면 어디서 휴식을 찾겠는가?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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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두려움들을 꺾고, 몇 달 안에 받기로 마음먹은 심판에 대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가끔은 내 생각이 이성의 고삐를 풀어버리고 낙원의 벌판을 헤매며, 내 감정에 공감하고 우울할 때 기분을 돋워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감히 상상해보도록 내버려둘 때도 있었다. 그들의 천사 같은 얼굴들이 숨쉬며 위안의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모두 덧없는 꿈이었다. 내 설움을 달래주고 내 생각을 공유해줄 이브는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아담이 조물주에게 했던 청원이 기억났다. 그러나 내 조물주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나를 저버렸고, 억울한 심정으로 나는 그를 저주했다. - P175

저주받을, 저주받을 창조자! 어째서 나는 살았던 것인가? 어째서 바로 그 순간, 당신이 그렇게 방탕하게 붙인 존재의 불꽃을 꺼버리지 않았던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절망이 아직도 나를 사로잡지 않았던 것이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뿐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오두막집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다 파멸시키고 비명소리와 불행을 탐닉할 수도 있었다.
밤이 내리자 나는 은신처에서 나와 숲속을 헤맸다. 이제는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마저 사라져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으로 괴로움을 분출 했다. 마치 올가미를 부수고 나온 야생동물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수사슴처럼 민첩하게 숲속을 횡행했다. 오! 그날 밤은 얼마나 참담했던가! 차가운 별들이 조롱하듯 빛났고, 벌거벗은 나무들은 머리 위에서 가지를 흔들어댔다. 가끔 새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쥐죽은듯 고요한 사위를 뚫고 터져나오곤 했다. 나만 빼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악마의 수장처럼 내 안에 지옥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니,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내고 주위를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나서 주저앉아 그 폐허를 만끽하고 싶었다. - P182

나는 남은 시간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축사 속에서 멍하니 보냈다. 보호자들은 떠났고 나와 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처음으로 복수와 증오의 감정이 내 가슴을 채웠고, 나도 굳이 억누르려 애쓰지 않았다. 격류에 몸을 맡기고 상해와 죽음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친구들, 드 라세의 온화한 목소리, 아가타의 부드러운 눈빛과 아라비아 여인의 섬세한 미모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이 사라지고 솟구치는 눈물이 마음을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그러나 새삼 저들이 나를 저버리고 푸대접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분노가 다시 돌아 왔다, 격렬한 분노가. 차마 인간을 해칠 수 없어 사나운 분노를 무생물에 풀었다. - P185

감정도 없고 심장도 없는 조물주! 내게 지각과 정념을 주고, 인류의 경악과 경멸을 한몸에 받도록 나를 내쳐버리다니. 그러나 동정심과 보상을 요구할 사람도 당신뿐이었기에,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로부터 받고자 애썼던, 그러나 끝내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 P187

인간의 얼굴과 마주칠까 두려워 밤에만 여행했다. 사방에서 자연이 쇠락했고, 태양은 열기를 잃었다. 내 주위로 비와 눈이 내렸다. 힘차게 흐르던 강물은 얼어붙었다. 땅 표면은 딱딱하고 차갑고 헐벗어, 도무지 쉴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 대지여! 내 존재를 탄생시킨 근원에 얼마나 자주 저주를 퍼부었는지 모른다! 본성의 온유한 기질은 사라지고, 내면은 온통 울분과 원한으로 화했다. - P187

이것이 내가 베푼 자애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했는데, 보답으로 살과 뼈가 박살나는, 상처의 참담한 고통에 뒹굴어야 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내게 찾아왔던 친절과 온정의 감정은 사라지고 지옥의 분노와 앙다문 이빨만 남았다. 고통에 격앙된 나는 전 인류에 대한 영원한 증오와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상처의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맥박이 멈추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 P189

내가 견뎌야 하는 고초는 이제 찬란한 태양이나 부드러운 봄의 산들바람도 덜어줄 수 없었다. 기쁨은 모두 내 쓸쓸한 신세에 모욕을 가하는 조롱에 불과했고, 내 팔자에 환희를 만끽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한층 고통스럽게 실감시킬 뿐이었다. - P189

박수를 치며 나는 외쳤다. ‘나 역시 절망 을 창출할 수 있다. 내 숙적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야. 이 죽음이 그에게 절망을 가져다줄 테고 천여 개의 다른 불행들이 그를 괴롭히고 파멸시킬 것이다.‘ - P191

며칠 동안 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현장을 계속 찾아갔다. 가끔은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또다른 때는 인간 세상과 번뇌를 영원히 떠나리라는 다짐 때문에 말이다. 마침내 나는 산맥 쪽으로 정처 없이 흘러가서 거대한 산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며 오로지 당신만이 만족 시켜줄 수 있는 불타는 정념으로 괴로워했다. 당신이 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때까지는 결코 당신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외롭고 불행하다. 사람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기형이고 추악한 존재라면 날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반려자는 나와 똑같은 종족이고 같은 결함을 가져야만 한다. 당신은 바로 이런 존재를 창조해 내야 한다. - P192

"거절하겠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어떤 고문을 해도 내 동의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네놈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자신의 눈에 저열한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다. 네놈과 같은 존재를 하나 더 창조한다면, 둘이 합심하여 악행을 저질러 세상을 참혹하게 만들 수도 있다. 꺼져라! 나는 이미 대답했다. 고문을 해도 좋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P194

인간의 감각은 우리의 공존을 가로막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그렇다고 비굴한 노예의 굴종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복수로 돌려줄 테다.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될 테다. 누구보다 나의 창조주인, 그렇기에 내 숙적인 당신에게 영영 꺼지지 않는 증오를 다짐하겠다. 조심하라. 내가 당신의 파멸을 초래할 테고, 이 복수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황폐해지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 - P194

오! 창조주여, 나를 행복하게 해다오! 딱 한 가지 은혜를 베풀어 당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다오! 나도 내가 다른 존재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을 보고 싶다!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다오! - P195

어떤 유대도 사랑도 가질 수 없다면, 내 몫은 오로지 증오와 악뿐이다.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면 내 범죄의 원인은 없어져버리고 나는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사물이 될 것이다. 내가 저지른 악행들은 억지로 견뎌야 했던 지긋지긋한 고독이 낳은 자식들이다. 그러니 동등한 존재와 함께 살게 된다면 미덕들도 당연히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때는 내가 지각 있는 존재의 애정을 느낄 것이고, 지금은 이렇게 소외되어 있지만 존재와 사건의 사슬과도 이어질 것이다. - P197

며칠을 나른한 권태 속에서 보내며 헤아릴 수 없는 장거리를 횡단한 후,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이틀 동안 클레르발을 기다렸다. 그가 왔다. 아, 우리 두 사람은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던가! 그는 새로운 풍광 하나하나에 생생하게 반응했다.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며 기뻐했고, 해가 뜰 때는 더욱 행복한 마음으로 새날을 시작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풍경의 색채와 하늘 모습을 내게 가리켜 보였다. "산다는 건 이런 거야." 그가 외쳤다. "지금 나는 존재를 만끽하고 있네! 하지만 내 친구 프랑켄슈타인, 자네는 어째서 의기소침하고 슬픔에 젖어 있나?" 사실을 말하자면, 난 음침한 생각에 빠져 저녁 별이 지는 것도, 라인강에 비치는 황금빛 일출도 보지 못했다. 친구여, 당신은 클레르발의 일기를 읽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내 생각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감정과 기쁨을 담은 눈으로 풍경을 관찰했으니까. 비참한 인간쓰레기인 나는 저주에 쫓겨 즐거움으로 통하는 문을 모조리 닫아버렸다. - P208

나는 이제 한 그루 말라죽은 나무다. 번개가 내 영혼을 이미 유린했다. 나는 살아남아서 남들이 보기에도 한심스럽고 스스로도 혐오스러운 망가진 인간성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어차피 이마저도 곧 스러져 없어질 테지만. - P217

시련이란 사람들의 조잡하기 짝이 없는 감수성마저 그토록 무디게 만드는 법이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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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아무리 애원해도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호의를 보일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당신의 선의와 연민을 갈구하는데도? 내 말을 믿어라, 프랑켄슈타인. 나는 선했고, 내 영혼은 사랑과 박애로 빛났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은가? 참담하게 고독하지 않은가? 내 조물주인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데 하물며 내게 아무것도 빚진 바 없는 당신의 동포들은 어떻겠는가? 나를 상대도 하지 않고 증오할 뿐이다. 사막 같은 산맥과 음침한 빙하들이 내 안식처다. 수많은 날들을 여기서 방황했다. 얼음 동굴도 나는 두렵지 않다. 그러니 여기가 인간들이 불평하지 않는 내 유일한 거주지다. 이 황량한 하늘을 나는 반가이 맞는다. 저 하늘은 당신의 동포들보다 내게 훨씬 더 친절했다. 무수한 인류가 내 존재를 안다면, 당신처럼 무장을 하고 나를 파멸시키려 들 것이다. 그러니 나를 혐오하는 그들을 어찌 내가 증 오하지 않겠는가? 원수들을 봐줄 생각은 없다. 내가 불행하니 그들도 내 불행을 함께 느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신은 내 불행을 보상해주고 악행에서 구해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내 죄는 점점 더 커져서, 당신과 당신 가족뿐 아니라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마저도 그 분노 속에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동정심을 갖고 날 경멸하지 말라.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저버리든 불쌍하게 여기든 하라. 그때 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내 말을 들어라. 죄지은 자라 해도, 아무리 잔인한 죄인이라 해도, 인간의 법은 선고를 내리기 전 변론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가. 내 말을 들어라, 프랑켄슈타인. 당신은 내게 살인죄를 씌우고, 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피조물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오, 인간의 영원한 정의를 찬양할지어다! 하지만 살려달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 말을 들어달라. 그다음에,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지가 있다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을 파괴하도록 하라." - P133

그들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이와 처녀는 따로 떨어져서 흐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이 불행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심히 흔들렸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불행하다면, 나처럼 불완전하고 고독한 존재가 비참하다는 게 조금은 덜 이상했다. 그러나 어째서 이 귀한 사람들이 불행한 걸까? 쾌적한 집(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이 있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있는데. 싸늘할 때 몸을 따뜻하게 덥혀줄 불도 있고, 배가 고플 때 먹을 맛있는 음식도 있는데. 훌륭한 옷을 입고 있고, 서로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날마다 애정과 친절로 가득한 표정을 서로 나누지 않는가. 그들의 눈물은 무슨 뜻일까? 정말로 고통을 표현하는 걸까? 처음에 나는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꾸준한 관심과 시간이 처음에 수수께끼처럼 보이던 모습들을 설명해주었다. - P147

점차 나는 훨씬 더 의미심장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또박또박 끊어지는 소리를 사용해 서로의 경험과 감정을 소통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끔 그들이 하는 말이 듣는 사람의 마음과 얼굴에 쾌감이나 고통, 미소나 슬픔을 떠오르게 할 때가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것은 진정 신과 같은 과학이었기에 나도 터득하고 싶다는 열망이 타올 랐다. 그러나 시도를 할 때마다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사람들의 발음 빨랐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명백한 연관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미스터리를 풀어낼 단서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을 쏟으며 달이 몇 번 공전할 때까지 축사에 머문 결과, 나는 이야기에 가장 친숙하게 등 장하는 물건들의 이름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 이 각각의 소리에 일치하는 관념들을 배우고 발음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이해하거나 적용하지는 못해도, 내가 분간할 줄 아는 단어들은 또 몇 개 더 있었다. ‘좋은, 사랑하는, 불행한 같은 말들이었다. 겨울은 이렇게 보냈다. - P148

처음에는 책을 읽어주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해 몹시 어리둥절했지만, 차츰 나는 그가 말을 할 때와 같은 소리를 아주 많이 낸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종이 위에 쓰여 있는 말 기호들을 그가 이해하는 거라 추측한 나는, 이 기호들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올랐다. 그러나 기호가 지칭하는 소리들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 과학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지만 아직 대화를 알아 들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노력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아무리 오두막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도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기 전까지는 그런 시도를 해서는 안 되었다. 언어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생김새의 기형을 사람들이 눈감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와 대조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의 기형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 P150

나는 오두막 사람들의 완벽한 외모에 찬탄했다. 그 우아함, 아름다움, 그리고 섬세한 얼굴. 하지만 투명한 물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겁에 질렸었던지! 처음에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서, 물에 비친 상이 진짜로 나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끔찍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자, 쓰라리게 아픈 좌절과 울분의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 이 참혹한 기형이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지 온전히 알지 못했다. - P151

봄철의 상쾌한 소나기와 온화한 따스함에 땅의 면모가 크게 변했다.이런 변화가 있기 전에는 동굴에 처박혀 있는 것 같던 사람들이 흩어져 나와 다양한 농경기술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들이 더 명랑한 곡조로 노래했고, 나무에 새싹이 트기 시작했다. 행복하고 행복한 땅!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량하고 습하고 건강하지 못했던 그곳이 이제는 신 들의 거주지로 부족함이 없었다. 자연의 매혹적인 풍경에 내 정신이 고양되었다. 과거는 기억에서 지워지고, 현재는 고요했으며, 미래는 희망의 밝은 햇살과 환희의 기대로 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 P153

이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이상한 감정이 밀어닥쳤다. 정말로 인간이란 그토록 강력하고 그토록 덕스럽고 훌륭한 동시에 그토록 사악하고 천박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떤 때는 온갖 사악한 원칙들을 이어받은 후계자에 불과해 보이다가, 또 어떤 때는 고귀하고 신성한 특질을 한 몸에 체현한 듯했다. 위대하고 덕망을 갖춘 사람이 된다는 건 분별력을 갖춘 존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 같았다. 기록에 드러난 무수한 사람들처럼 천박하고 사악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저열한 타락 같았다. 이런 상황에 빠지는 건 심지어 눈 먼 두더지나 무해한 벌레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친구를 살해하려 들 수 있는지, 심지어 법과 정부는 왜 존재하는 건지, 아주 오랫동안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악행과 유혈사태의 세세한 내용을 듣고 나니, 경이로운 마음은 사라지고 혐오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 P159

지식의 본질이란 얼마나 희한한 것인가! 일단 마음을 사로잡으면, 마치 바위에 이끼가 끼듯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끔은 생각과 감정을 모두 떨쳐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고통의 감각을 초월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은 내가 두려워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미덕과 선한 감정을 우러러보고, 오두막집 식구들의 다정한 태도와 쾌활한 성격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몰래 홈쳐보는 것 외에는 그들과 교류할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충족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아가타의 친절한 말, 매력적인 아라비아 여인의 생기 넘치는 미소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노인의 온화한 훈계와 사랑받는 펠릭스의 열띤 대화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비참하고 불행한 괴물! - P160

축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의 실험실에서 가져온 옷의 주머니에서 종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제 그 기호를 해독할 수 있었기에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건 나를 창조하기 전 넉 달 동안 당신이 기록한 일지였다. 당신은 이 서류에 작업의 진척 상황을 세밀히 기록해놓았다. 당신도 틀림없이 이 일지를 기억하겠지. 바로 여기 있다. 내 저주받은 기원에 대해 참조할 사항이 모조리 여기 적혀 있다. 내 탄생까지 이어지는 혐오스러운 정황들이 모두 세세하게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불쾌하고 역겨운 이 몸에 대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언어는 당신 자신의 공포를 생생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읽어가면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내가 생명을 얻은 그날을 증오한다!‘ 나는 괴로움에 울부짖었다. ‘저주받은 창조자! 어째서 자기마저 역겨워 등을 돌릴 흉악한 괴물을 빚어냈단 말인가? 신은 연민을 갖고 자신을 본떠 인간을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내 모습은 당신의 더러운 투영이고, 닮았기 때문에 더욱 끔찍스럽다. 사탄에게는 그를 숭배하고 격려해줄 동료 악마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독하고 미움을 받는다.‘ - P174

그사이 오두막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 부유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감정은 잔잔하고 평화로웠으나, 내 감정은 날마다 더욱 격해지기만 했다. 지식이 쌓일수록 내가 얼마나 비참한 추방자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물론 희망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속에 비치는 내 모습이나 달빛에 비치는 내 그림자를 볼 때면, 덧없는 허상이고 변덕스러운 그늘일 뿐인데도,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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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비탄과 공포가 다시 덮쳐왔다. 어스름이 지고 어두운 밤이 사위를 에워쌌다. 시커먼 산맥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내 기분은 더욱 침울해졌다. 온 사방이 광활하고 흐릿한 악의 소굴 같기만 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는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참담한 운명을 지닌 인간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 예언은 들어맞았다. 한 가지 정황이 틀렸을 뿐이다. 무수한 불행을 상상하고 두려워했지만 알고 보니 실제로 견뎌내야 할 운명은 백배 더 가혹했던 것이다. - P97

그녀의 무죄를 믿었다. 알고 있었다. 그 악마가, 내 동생을 죽인(그 사실은 단 1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놈이 심지어 소름 끼치는 놀이 삼아 이 죄 없는 이를 죽음과 치욕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내가 처한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대중의 의견이, 그리고 재판관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내 불행한 희생자를 단죄하고 있음을 깨닫고, 괴로움에 법정 밖으로 황급히 뛰쳐나갔다. 피고의 고통도 나보다는 덜했다. 그녀는 결백의 힘으로 견디고 있었지만, 회한의 날카로운 이빨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으며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 P110

나는 감방 한구석으로 물러나 나를 사로잡은 소름 끼치는 고뇌를 감추려 했다. 절망! 누가 감히 절망을 논하는가? 다음날 삶과 죽음의 섬뜩한 경계선을 넘을 불쌍한 희생자도 나만큼 깊고 쓰라린 고뇌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박박 갈면서 영혼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 P114

진짜 살인자인 나는 가슴에 살아 있는 불사영생의 벌레를 안고 있었다. 이 벌레는 희망도 위로도 허락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도 흐느꼈고, 또한 불행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결백한 불행이었고, 아름다운 달을 스쳐가는 구름처럼, 한동안 숨길 수 있을지언정 그 빛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고뇌와 절망이 내 심장의 핵까지 관통하고 말았다. 나는 마음속에 지옥을 품고 있었고, 그 무엇도 지옥 불을 끌 수 없었다. - P115

아버지는 성품과 습관이 눈에 띄게 달라진 나를 고통스럽게 지켜보시다가 엄청난 슬픔 앞에 무너지는 나의 어리석음을 분별 있게 타일렀다. "빅토르, 아비도 괴롭다는 생각을 넌 하지 않느냐? 누구도 내가 네 동생을 사랑한 만큼 자식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 말을 하는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슬픔을 과하게 드러낸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큰 불행을 느낄 터인데 그걸 막는 것도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느냐? 또한 너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지나친 슬픔은 발전도 즐거움도 가로막고 심지어 일상생활까지 방해해서,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버린단 말이다."
이 충고는 선의에서 우러나왔으나 내 경우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여타의 감정에 쓰디쓴 회한이 뒤섞이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 앞장서서 비탄을 감추고 식구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에게 절망스러운 얼굴로 답하고, 최대한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 P120

소나무들은 키가 크거나 풍성하 지는 않았지만 어둡고 진중하여 엄혹한 풍광을 두드러지게 했다. 저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광막한 안개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물에서 피어나 맞은편 산들을 두터운 화환처럼 휘감고 산봉우리들을 모두 짙은 구름에 숨기고 있는데, 어두운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서, 주위를 에워싼 풍광에 우수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그로 인해 훨씬 더 유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될 뿐인데. 우리의 욕망이 굶주림, 갈증, 그리고 성욕에 국한되었다면, 거의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한마디,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 - P129

우리는 쉰다. 꿈은 잠의 독을 푸는 힘을 지녔다.
우리는 일어난다. 방황하는 생각 하나에 하루가 오염된다.
우리는 느끼고, 사고하고, 추론한다. 웃거나 흐느낀다.
어리석은 괴로움을 껴안거나, 근심을 쫓아버린다.
똑같다.기쁨이든 슬픔이든, 내 떠나는 길은 여전히 자유로우니.
인간의 어제는 결코 내일과 같지 않으리니,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상뿐!

* 퍼시 비시 셸리의 「무상에 관하여」의 후반부에서 인용 - P129

나는 후미진 암벽에 머무르며, 이 기적과 같은 압도적인 풍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다, 아니 광막한 얼음의 강은 산 사이로 굽이치며 흘렀고, 꿈처럼 몽롱한 산봉우리들이 후미진 강가 구석구석을 굽어보며 드높이 떠 있었다. 얼음이 반짝거리는 산꼭대기 들이 구름 위에서 햇빛을 받아 빛났다. 슬픔에 가득찼던 내 심장은 이제 환희 비슷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다. "방황하는 정령들이여, 진정 비좁은 잠자리에서 쉬지 않고 이 세상을 헤매고 있다면, 내게 이 희미한 행복만은 허락해주시오. 아니면 차라리 삶이라는 기쁨에서 나를 데려가 길동무로 삼아주시오." - P130

"악마!" 나는 외쳤다. "감히 내게 다가오겠다는 말이냐? 이 팔이 그 흉측한 머리에 가할 맹렬한 복수의 일격이 두렵지도 않으냐? 어서 꺼져, 이 더러운 벌레! 아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내 발길에 짓밟혀 먼지가 되어버려! 아, 네 비참한 목숨을 끝내버리고 네놈이 그토록 사악하게 살해해버린 희생자들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 악마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흉물을 저주하지. 그러니 살아 있는 그 어떤 생물보다 비참한 나를 얼마나 증오하겠는가! 하지만 당신, 내 창조자인 당신이 나를 혐오하고 내치다니. 나는 네 피조물이고,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는 유대로 얽혀 있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내 조건에 동의한다면 나도 인간들과 당신을 평화롭게 내버려두겠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살아남은 당신 친구들의 피로 배부를 때까지 죽음의 밥통을 채울 것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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